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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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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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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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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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97)

DUMMY

18장 - 전야


맑은 오후 햇살이 창가로 쏟아졌다. 이사벨 데 아라고른 황녀는 티스푼으로 홍차를 여러 번 휘저었다. 홍차를 맛있게 마시려면 적당한 온도가 중요한데, 소녀시절부터 이 값비싼 기호품을 마신 그녀는 홍차의 맛이 잘 우러나는 최적의 온도를 잘 알았다. 그것은 홍차를 저을 때 사용하는 숟가락이 얼마나 따뜻하게 달아올랐는지 만져보면 알 수 있었다.

아스틴 황궁의 살롱에서 황녀는 임페라도 퍼플이라고 하는 색의 보라빛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린 모습으로 귀부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아스티아노에 상주하는 공작과 백작, 자작, 후작들의 부인들이었다. 최신 유행에 민감한 그녀들이었기에 레이스와 공단, 비단으로 치장한 그녀들의 드레스는 무척 화려했고, 얼굴에는 진한 분을 칠하고 있었다. 부채를 든 이도 있었고, 작고 귀여운 핸드백을 든 이도 있었다. 몸에서는 온갖 고급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들의 차림새가 너무도 화려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절제된 장식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옷차림이 더 수수해보였다.

황녀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귀를 기울였다.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황녀는 줄곳 거짓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며 중요한 부분에서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녀들은 한 시간 째 최신 유행하는 옷차림과 스포츠, 사내들과의 카드 게임, 남편의 사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황녀가 귀부인과의 사교모임을 윤허한 이례로 그녀들은 이런 대화가 거리낌이 없었다. 이 자리는 애당초 격식에서 탈피하고자 만들어진 자리였다. 다소 무례해보일 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이사벨조차도 여론을 듣고자 그런 대화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주로 대화에서 경청을 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이 모임에서 걱정되는 일도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왼켠에 앉아 있는 금발머리 황녀 때문이었다.

하얀 색과 분홍색의 페티코트를 입은 디에네 아라고른은 이 자리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걱정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있었고, 워낙에 풀이 죽은 탓에 공들여 금발머리에 한 한 리본 장식이며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진주귀걸이와 목걸이조차 퇴색한 느낌이었다.

이사벨은 디에네의 모습이 영 신경이 쓰였다. 귀부인들에게 두 황녀의 사이가 온건함을 알리고자 그녀를 참석시켰는데, 디에네가 이렇게 불편해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강제로 황궁에 끌려온 이후로 줄곳 우울해하더니만 이런 대외적인 자리에서마저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디에네...'

이것은 그녀의 위신이 달린 문제였다. 답답해진 이사벨이 디에네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려는데 이야기의 주제는 어느덧 즉위식 문제까지 가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발렌시아의 백작부인이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이주일 후에 있을 이사벨 마마의 즉위식은 어디에서 열리나요?"

대법관을 남편으로 둔 귀부인이 대답했다.

"황위계승법에 따르면 제국 황제의 즉위식은 대대로 톨레도의 산 마르티나 대성당에서 열리게 되어 있어요."

"황위계승법이라구요?"

"제국이 세워졌을 때 선대 폐하께서 정한 법전에 포함된 내용이에요."

"굳이 그런 것을 법으로 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이의 말에 따르면 황위계승 순위를 정하는 일이야말로 제국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민감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이 다른 귀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다른 귀부인이 물었다.

"그 황위계승법, 순위는 어떤 식으로 정해지나요?"

"적자우선원칙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이사벨 마마 다음으로 디에네 마마가 2위가 되는 거지요."

"디에네 마마께서 2위였다니."

"처음 알았네요."

귀부인들의 시선이 디에네 데 아라고른 황녀에게 쏠렸다. 이사벨이 주위를 환기해보려고 작게 기침을 했다. 허나 디에네는 그것을 더 이상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는 자그맣게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미안합니다.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하고서는 자리를 떴다.

이사벨은 말없이 디에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마음은 상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자칫 그녀를 뒤 따라가다가는 분위기를 깨트리고 말 것이다. 또한 저 귀부인들에게 이상한 소문을 불러일으킬지 누가 알겠는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황녀가 웃으며 립서비스로 말했다.

"짐의 아우가 오늘은 심신이 괴로워지는 날인 모양이구나. 양해하거라. 그대들도 여인이니, 여인이 응당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날의 그 심정을 잘 알 것이다."

그 말에, 큰 실례를 저질렀나 싶어 조용히 있던 귀부인들이 다시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다른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이사벨 데 아라고른은 더 이상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가 파할 때까지 디에네를 생각했고, 덩달아 어려운 임무를 맡도록 보낸 후 며칠 째 연락이 없는 사냥꾼을 떠올렸다.


모임을 끝마치고 집무실의 의자에 앉은 이사벨 황녀는 지금껏 디에네를 가만히 놔두었지만, 갈수록 이제는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녀는 이사벨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처소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정원을 산책할 생각도, 저녁 식사에 참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성당에서 끌어낸 언니에 대한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했다.

이사벨은 마음 같아서는 아우에게 손이라도 쓰고 싶었다. 허나 무작정 나서다가는 일의 꼬락서니가 보기 흉해질 우려가 있었다.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성전기사단에 대핸 소문으로 백성들의 반응이 민감한 때였다. 불온서적을 통해 번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소문은 이사벨 데 아라고른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내용으로, 추기경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제1황녀 대신 적통이 아닌 제2황녀가 황위에 오르도록 성전기사단의 유령들이 저주를 내릴 거란 내용이었다.

이사벨은 골치가 아팠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그녀와 함께 톨레도로 가서 즉위식을 치러야 한다. 그 자리에서 대중들에게 성전기사단 소문 따위는 허상에 불과하며 아라고른 황가의 후계자들의 굳건함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황녀가 그 문제로 머리에 이마를 짚을 즈음이었다. 시종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더 이상의 일정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 잠시 쉬고 싶었기 때문에 이사벨은 더 이상 아무도 만나보고 싶지 않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시종이 이렇게 덧붙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만 마마. 음지에서 전해진 급한 전갈이 당도했습니다."

그 말에 황녀가 다시 물었다.

"누구의 것이냐."

"사냥꾼이 보낸 것입니다."

시종이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문밖에서 작게 말했다. 벌써 며칠째 로보 카사도르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이사벨은 눈을 크게 떴다.

'벨린 데 란테!'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전갈을 가지고 오라고 명했다. 시종이 들어와서는 절을 하고 편지를 한 장 내밀었다. 촛농을 녹인 봉인에 겉봉투에는 낯이 익은 필체로 '황녀 마마께' 하고 쓰여 있었다.

벨린 데 란테가 쓴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사벨은 집무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른 후 편지를 개봉했다. 혹시나 싶어 여러번 읽어봤지만 내용은 아주 짧고 간단했다.


금일 자정에, 마마의 소꿉놀이 장소에서 뵙겠습니다.


벨린 데 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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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잘들 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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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베나레스의 총사(100) +44 08.06.08 4,573 12 9쪽
101 베나레스의 총사(99) +34 08.06.01 4,787 11 10쪽
100 베나레스의 총사(98) +32 08.05.24 4,579 14 10쪽
» 베나레스의 총사(97) +30 08.05.18 4,399 13 8쪽
98 베나레스의 총사(96) +22 08.05.17 4,223 14 7쪽
97 베나레스의 총사(95) +29 08.05.12 4,219 14 8쪽
96 베나레스의 총사(94) +16 08.05.11 4,188 16 7쪽
95 베나레스의 총사(93) +34 08.05.04 4,423 1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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