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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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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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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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Love Of a Lifetime.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일생일대의 프러포즈를 망친 주범으로 지목된 패트릭 틸먼이 레오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났습니까?”

“네~”

“언제부터 알아차리셨습니까?”

“여배우가 Jay에게 나쁜 놈이라고 할 때부터?”


여배우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실제 류지호가 몇 년 전 겪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기도 했고.


“러셀과 패트릭은 그녀가 다가오기 전부터 먼저 움직였어야 했어요.”

“맞습니다.”


경호 매뉴얼 상에서 류지호의 10미터 안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저지해야 한다.“


“조금 더 지켜볼 걸 그랬어요. 재밌었을 것 같은데....”

“다음번에는 오늘처럼 허술하진 않을 겁니다.”

“내가 볼 땐 러셀과 패트릭은 연기에 재능이 없어요.”


여자들은 어떻게 된 게 프러포즈 할 때가 되면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평소와 다른 낌새를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천생 배우가 아니라면.

그 만큼 예상하지 못한 프러포즈란 쉽지 않다.


“쳇. 프러포즈 기다리다가 늙어 죽겠네...”


레오나가 투덜거리며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


이야기가 길어지는지 류지호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레스토랑 종업원들은 평상시로 돌아간 모습이다.

그런데....


팟!


갑자기 레스토랑이 전등이 모두 꺼지며 깜깜해졌다.


“.....패트릭?”


그녀의 말에 대답해야할 패트릭 틸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장난치지 말아.....?”


덜컥 겁이 나려는 찰라... 레스토랑 벽면에 화면이 떠올랐다.


“......?”


화면 속 류지호는 어떤 녹음실 부스 안에 들어가 있다.

헤드폰을 낀 채 마이크 앞에서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난데없이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But I'll be loving you, that's what I want to do.....]


쉬운 노래가 아니다.

마이키 잭슨의 노래이니 당연했다.


[아, 못하겠어요. 이 곡은 너무 어려워요. 다른 노래로 바꿔줘요.]


화면 어딘가에서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투덜거리면 안 도와줄 거야.]

[쉬운 러브송 없어요?]

[그게 어려워?]


화면이 페이드 아웃되면서 실내가 다시 깜깜해졌다.

어둠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류지호의 목소리다.


[지금이 말해도 좋을 적당한 때인 것 같아~ 우리는 하루하루 시간을 함께 보냈어. 소원을 함께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했지.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어 가진다면 꿈이 이루어질 걸 알아. 내 곁에 있을 거라는 걸 난 의심하지 않아. 넌 내게 유일한 짝이니까.]


화면 속에서는 마이키 잭슨의 노래를 부르더니, 화면 없이 목소리만 녹음된 노래는 철지난 락발라드 곡이다.

분명히 구애하는 것 같은 뉘앙스다.


“......!”


엇박자 프러포즈라고 해야 할지.

1부를 망치고, 곧바로 2부가 시작된 것인지.


팟.


다시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레오나 파커의 어린 시절 모습이 사진과 조악한 비디오 화면이 편집된 뮤직비디오가 흘렀다.

레오나의 탄생부터 7살까지의 모습을 특별한 편집 기교 없이 류지호의 목소리로 녹음한 노래와 함께 담백하게 표현했다.

일곱 살 때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송도유원지에서 신효정 변호사가 찍어준 사진들.

UCLA 입학식에서 류지호에게 찰싹 붙어있는 어린 레오나.

두 사람이 함께 테마파크에 놀려갔던 사진.

무주 스키장, 캘리포니아 어느 해변, 무주 락 페스티벌, 할리우드 파티....

류지호와 함께 한 시간들이 시간 순서대로 편집된 영상이 상영됐다.


[I finally found the love of a lifetime A love to last my whole life through.]

(마침내 평생의 사랑을 찾았어. 내 삶 동안 지속될 마지막 사랑을.)


고음 파트라 아슬아슬하게 들릴 법도 하건만.

뛰어난 보컬 코치 마이키 잭슨과 제법 쓸 만한 프로듀서 류순호 마지막으로 오토튠이라는 마법의 삼박자로 인해 무난한 프러포즈송이 탄생했다.


부스럭부스럭.


어둠속에서 작은 소음들이 들려왔지만, 레오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온통 영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4분이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영상이다.

그러나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과거를 여행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류지호를 그리워했던 것 같았다.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흔한 데이트조차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영상에는 뇌가 저장하지 못한 수많은 추억들이 엄연히 존재했다.

당시에는 지나가듯 전화로 전했던 말들이 지나고 보니 사랑의 밀어였던 것도 같고.

매일 얼굴을 봐야하고,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함께 하고, 때마다 함께 여행을 하고.

그런 것만이 연애가 아니라고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밤새 통화를 하다 잠들기도 하고, 시험기간에 모닝콜을 해주고, 시험을 망쳐서 기분이 우울했을 때 누구보다 큰 위로가 되었던, 아픈 곳은 없는지 또 향수병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누구보다 걱정하고 염려했던, 비록 너무 바빠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지만 잊지 않고 꽃을 보내주고, 지금 보여주는 것 같은 영상 편지를 보내줬던.

그런 추억들이 한 올 한 올 전부 떠올랐다가 이내 마음 어딘가에 다시 저장되었다.

전보다 더 또렷하게.


[Still we both know that the road is long We know that we will be together because our love is strong.]

(우린 함께 가야할 길이 멀다는 걸 알아. 우리가 함께 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은 강하니까.)


빌보드 성적은 높지 않았지만, 아시아권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노래다.

바로 ‘Love of a Lifetime'이란 락발라드다.

동생 류순호가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도록 가요 스타일로 편곡해주었다.

엉성한 류지호의 노래를 보완해주기 위해 마이키 잭슨이 보컬 코치를 자청했다.

코러스와 고음파트에 마이키 잭슨 특유의 미성을 보태주었다.

뮤직비디오가 모두 끝났지만 레오나는 좀처럼 추억 속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팟.


스폿 조명이 옆 테이블이 있던 자리를 비췄다.

그곳에는 흰색 천이 쳐져 있는 간이 탈의실이 놓여있었다.

뮤직비디오가 상영될 때 누군가 옮겨놓은 것 같았다.


“....!”


레오나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흰 천을 들췄다.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놓여있다.

언젠가 베벌리힐스의 숍을 둘러보다가 자신이 예쁘다고 했던 드레스다.

레오나가 간이 탈의실처럼 보이는 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흰 천이 커튼처럼 내려앉으며 공간을 분리시켰다.

이어 여성 두 명이 레오나를 변신시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두 명의 여성은 대꾸 없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제 할 일만 했다.


두근두근.


레오나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이중의 함정을 파놓은 프러포즈 작전인 모양이다.

레오나는 몰랐지만, 류지호는 여러 차례 프러포즈를 준비해 두었다.

J&L Bell Ranch에 준비를 해두었지만 파커형제로 인해 계획을 철회한 바 있다.

네버랜드 랜치에 방문했을 때 마이키 잭슨이 두 사람을 위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주기로 했었다.

갑작스럽게 두 자녀가 방문하면서 취소되었다.

대신 결혼식 축가를 불러주기로 했다.

한국 대통령 방미기간 뉴욕으로 함께 가서 타임스퀘어에서 스펙터클한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다.

하필 레오나의 컨디션이 최악이라서 함께 뉴욕으로 가지 못해 없던 일이 됐다.

그 외에도 몇 번 더 있었지만, 번번이 타이밍이 어긋났다.

레오나가 눈치를 챌 때도 있고 예상하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계속해서 실망하고 토라지고 하는 레오나의 모습이 귀엽긴 한데, 너무 괴롭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사실 오늘이 아니면 올해는 영영 기회가 없기도 했고.

다음 주에 뉴욕으로 돌아가 예일대 로스쿨을 준비해야 하는 레오나 파커다.

류지호 또한 <REMO> 최종편 프리프로덕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고.


“드레스가 어떻게 제 몸에 이렇게 잘 맞죠?”

“미스터 류가 졸업 파티 드레스를 저희에게 보내줬어요.”

“아!”


류지호로부터 졸업 파티 드레스를 선물 받았다.

가장 최근에 입은 드레스이니 그걸 토대로 제작된 이번 드레스가 자신에게 꼭 들어맞을 수밖에.

되도 않는 깜짝쇼를 눈치 채면서 올해는 프러포즈가 물 건너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차 공격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더니 이제야 진짜 프러포즈를 하려는 모양이다.

섭섭하고 답답한 기분이 탄산음료를 마신 것처럼 뻥 뚫렸다.


“그냥 소박하게 반지만 끼워줘도 되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번갯불에 콩 볶았다.

말 그대로다.

할리우드 의상과 분장 전문가인 두 여성은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레오나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완벽하게 변신시켜놓았다.

물론 영화 속의 레이스가 달린 고전 드레스가 아니라, 현대적이며 심플한 디자인의 드레스와 헤어스타일 그리고 화장법으로 공주로 변신했다.


쫙.


변신을 도왔던 두 여성이 간이탈의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레오나의 앞에는 여전히 어둠이 펼쳐져 있다.


후우.


레오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떨리는 심정으로 간이탈의실에서 한 발 내려섰다.

레드카펫과 촛불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뮤직비디오가 상영되었던 벽에 화면이 떠있을 뿐.


[HI, Leona.]


화면 속에서 마이키 잭슨이 손을 흔들어 인사해왔다.

마이키 잭슨이 두 사람의 청혼 이벤트를 축하하는 말을 몇 마디 했다.

레오나는 류지호를 찾기라도 하듯 연신 어둠속을 둘러보았다.

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마이키 잭슨이 영상 속에서 ‘Loving you'라는 감미로운 사랑노래를 불러주었다.


[Hello, midnight lover, you're the one I adore. And I'll thinking of you, 'til the stars are no more. If it's cloudy or blue, I'll stay here with you. We'll make a wish, and then we'll kiss, a love forever true.]


팟.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스폿 조명이 떨어졌다.

그 곳에서 근사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류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저벅.


레오나가 류지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근두근.


어둠속에서 길을 잃을 필요가 없다.

저 밝은 곳에 자신의 짝이 있으니까.

그녀가 류지호에게 가까워질수록 레스토랑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장미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분홍, 주황, 하얀, 흑장미 수백송이가 레스토랑을 온통 수놓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던 꽃 장식들이다.

장미꽃의 꽃말은 색깔에 따라 다르지만, 대표적인 빨간 장미는 '열렬한 사랑'을 뜻하며 프러포즈를 할 때 주로 선물한다.

분홍 장미는 '맹세, 행복한 사랑'. 주황 장미는 '수줍음, 첫사랑의 고백'.

하얀 장미는 '존경, 순결, 순진, 매력'. 흑 장미는 ‘당신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질투를 담은 노란 장미와 얻을 수 없는 것이란 꽃말의 파란 장미는 이번 이벤트에 단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프러포즈 이벤트에서는 등장해선 안 되니까.

안개꽃은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다.

맑은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변치 않고 행복한 사랑을 가꾸자는 사랑의 맹세를 표현하기 좋다.

장미꽃 장식만으로 수천 달러를 썼다.

류지호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레오나에게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첫눈에 반했다는 의미가 담겼다.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여자에게 주며 유혹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7살 어린 레오나에게 반할 리가 없었던 류지호는 첫 송이에 대한 멘트는 건너뛰고 곧바로 네 송이에 대해 말했다.


“죽을 때까지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 맹세해.”


마지막으로 50송이의 장미꽃다발을 건넸다.

영원한 사랑은 100송이다.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거야. 백 송이는 지금 주지 않을래. 남은 50송이는 결혼 한 후에 채워 줄게. 매년 오늘을 기념해서 한 송이씩 선물 할게.”


매년 한 송이씩 50년이다.

백년해로하잔 말이다.

부부가 되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한 평생을 사이좋고 즐겁게 늙어가자.

물론 레오나는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말 자체를 모른다.

류지호가 무릎을 꿇고 앉아 프러포즈 링을 꺼내 보이며 물었다.


“결혼해 줄래?”


무슨 말이 필요할까.

레오나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류지호가 다이아몬드 프러포즈 링을 끼워주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끼고 있게 될 링이다.

미국에서 결혼한 여성은 화려한 다이아몬드 프러포즈 반지와 단순한 링 형태의 결혼반지 두 개를 평생 손가락에 빼지 않는다.

모든 여성이 그런 건 아니지만, 전통이 그랬다.


“자세히 보면.... 그냥 평범한 축에 속하는 얼굴이야. 그렇다고 막 사랑한다 좋아한다 표현하는 남자도 아니고. 근데 난 왜 Jay가 좋지? 진짜 운명인가?”


‘나 사랑에 빠진 놈이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류지호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순간 레오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콩닥콩닥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바로 저 모습이다.

저 미소와 눈빛.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짝사랑에 빠진 십대 소녀를 미치게 만든.

할아버지 윌리엄 파커를 닮은 바다 같고 맑은 눈.

운명은 핑계일지 모른다.

어쩌면 저 눈이 너무 좋아서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일지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든든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줄 것 같고, 맹목적으로 믿어줄 것 같은.

자신에게는 한없이 진실할 것만 같은 그런 눈이다.


“사랑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아. 나 역시 네가 내 곁에 있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곤 하니까. 그거 알아?”

“뭘?”


레오나는 가슴이 점점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심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세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류지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윽고.


“네가 날 사랑해주는 것 이상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지워지고 류지호 만이 남게 되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오나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레오나가 류지호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내가 더 사랑해.”


류지호는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걸까?

이전 삶에서 결혼했던 그 친구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벅찬 감정이다.

류지호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레오나의 길고 부드러운 금발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금빛 물결이 아주 부드럽게, 아무런 저항감 없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너무도 기분 좋은 감각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기분 좋은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품게 안겨 행복해 하고 있다는 것.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띠리리링!


마이키 잭슨의 ‘Loving you'가 어느새 끝났다.

연이어 미니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되었다.

여성 성악가가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 제 4곡 ‘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불렀다.

레오나는 류지호의 품에 안겨 가곡을 감상했다.

레스토랑은 이미 모든 전등이 들어와 있었다.

실내에는 커플과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뿐.

종업원들과 경호원들도 자취를 감췄다.

계속해서 두 사람만을 위해 미니 콘서트가 열렸다.


“순호 오빠?”


뜬금없이 류순호가 클래식 기타를 들고 등장했다.


“축하해!”

“고마워.”


그는 아코디언 연주자와 함께 미니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펼치기 시작했다.

형의 프러포즈를 위해 오랜만에 연주솜씨를 발휘해보는 류순호다.

곡은 ‘리베르탱고(Libertango)’다.


“Shall We Dance?"


류지호가 내민 손을 레오나가 잡았다.

테이블이 치워지고 만들어진 공간으로 두 사람이 걸어갔다.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

<여인의 향기>의 유명한 장면을 기대했지만.

류지호의 탱고는 어설펐다.

레오나에게는 그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웠지만.


“프러포즈라는 게 오글거리고 쓸데없는 행위라고 생각했어. 막상 탱고를 배우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보니까 나쁘지 않더라.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에, 한 번 뿐인 반려자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는 거니까.”

“탱고는 언제 배웠어?”

“틈틈이. 내가 태권도를 오래 했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나?”

“무술 하는 사람들이 춤도 잘 춰.”

“근데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


하하하.


“기다리다 늙어 죽는 줄 알았어.”

“기다린 건 나지.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피이! 난 7살부터 오늘을 기다렸는걸.”

“오줌싸개가 조숙한 척 하기는.”

“7살에는 오줌 안 쌌거든!”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데. 그걸 인연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아마 너와 난 아주 굵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운명이라는 걸까?”

“글쎄. 저 위에 계신 분의 뜻을 일개 인간인 내가 어찌 알겠어.”

“나와 Jay 사이에 연결된 끈이 아주 밝은 색이면 좋겠다.”

"그 끈을 더 굵고 튼튼하게 만들어가자. 살면서.“

“이왕이면 총천연색으로?”

“그래 무지개 색으로 수놓지 뭐.”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랑이 오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매일 헤어질 때마다 한 번 더 키스하고 싶다고 느꼈어도, 다음 날 미운 마음이 들어 키스는커녕 얼른 헤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자유공원 앞 도로에 때마침 있었던 걸지도.’


❉ ❉ ❉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약혼과 결혼이 남았다.

약혼반지는 다이아몬드나 여자의 탄생석으로 만드는 것이 관습이다.

지금과 같은 의미로서 처음 결혼반지가 쓰인 것은 기원전 2,800년경 이집트에서라고 한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고리는 영원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뜻에서 반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파커가문처럼 나름 전통 있는 집안은 전통예절을 어느 정도 따졌다.

전통적으로 남자가 자기 부모에게 약혼을 알리면 남자 쪽 부모가 여자 쪽 부모를 정식 방문하는 것이 예의였다.

오늘날에는 남자의 부모가 먼저 여자의 부모에게 전화나 편지로 연락해 차나 식사를 함께 하자고 초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약혼식은 신부의 부모가, 결혼식은 양가가 함께 베푼다.

약혼식의 형식은 신부나 그의 어머니가 좋을 대로 정하는 것이 보통인데, 흔히 칵테일파티나 만찬회 형식으로 한다.

레오나 파커의 졸업식에 양가 가족이 모두 모였다.

산호세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자리를 가진 두 가족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어머니, 드셔보세요. 꽤 먹을 만 해요.”


류지호가 여전히 나이프 질이 서툰 어머니의 스테이크를 썰어서 덜어줬다.


“너도 어서 먹어. 사업하랴 영화 찍으랴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굴이 핼쑥해진 것 봐.”


심영숙은 걱정이 가득했다.


“잘 먹고 다녀요. 살이 좀 쪘는걸요.”


류순호 대신 막내 류아라가 부모님과 제임스 부부의 말을 중간에 통역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가 나왔을 때 류지호가 양가 부모님을 향해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 부모님들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양가 부모님들의 시선이 류지호에게 모였다가 다시 레오나에게 향했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레오나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레오나에게 청혼했어요. 레오나도 받아들였고요.”


양가 부모님과 동생들은 매우 담담했다.

류민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한 거지?”


청혼을 했으니 더는 무를 수가 없다.

잘 못 될 일은 없겠지만.


“예.”

“그럼 됐다.”

“어머니는요?”

“왜 반대라도 할까 봐. 엄마는 무조건 찬성이지.”


잔뜩 굳어져 있던 레오나의 얼굴 근육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류지호가 제임스 부부에게 시선을 돌렸다.

캐서린이 호기심이 물든 눈으로 물었다.


“프러포즈는 안 찍어놨어?”


레오나가 펄쩍 뛰었다.


“엄마, 그걸 왜 찍어!”

“궁금하잖니. 제임스가 얼마나 멋대가리 없는 프러포즈를 했는지 아니?”

“그 얘기는 나중에 해.”


류아라 역시 심영숙에게 속삭였다.


“아빠는 프러포즈 했어?”

“우리 때는 그런 게 어디 있었겠어. 결혼식 하기도 벅찬 시절에.”


류아라가 심영숙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할게요. 어머니.”

“너도 그새 큰애 닮아가니? 그냥 엄마라고 하렴. 그리고 지금처럼만 해주면 바랄 게 없어. 엄마는.”

“예. 마미.”


캐서린이 류지호에게 물었다.


“결혼식은?”

“먼저 약혼식부터 해야겠죠.”

“영화 촬영이 끝나면 해야겠지?”

“예.”

“그러면 내년 봄에 하는 것으로 하자. 결혼식은 가을에 치르면 좋고.”


류아라가 부모님께 캐서린의 말을 전달했다.

심영숙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을 열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을 하고 있었다.

막상 현실로 닥치자 기쁨, 슬픔, 아쉬움 등이 마구 뒤섞였다.

장남이라고 해준 것도 없는 아이들이다.

복잡한 감정이 쉽사리 진정되질 않는 심영숙이다.

류민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잘됐구나. 잘됐어...”


제임스가 맞장구쳤다.


“이렇게 좋은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않겠어요?”

"좋지요."


차를 치워버리고, 샴페인과 와인을 주문했다.

이후로 축하주를 마시느라 식사자리가 왁자지껄해졌다.

양가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다.

파커가문의 큰 어른 윌리엄에게 허락을 구할 일만 남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예정되어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절차가 그렇다.

일반적으로 미국에는 한국처럼 양가친척이 모여서 하는 약혼식이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하고 여자가 받아들이면 약혼이 성사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혼을 하고 결혼식까지 6개월~1년 정도는 결혼준비 기간이다.

결혼준비는 대부분 신부의 몫이다.

류지호와 레오나 커플의 경우는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두 번의 혼례를 치루기에 두 나라의 방식으로 모두 따르기로 했다.

한국 최고의 웨딩업체를 소유하고 있는 류지호가 고민할 건 아니다.


작가의말

이번 주도 비예보가 있습니다. 평온한 한 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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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 REMO : ....or Maybe Dead! (10) +4 23.08.03 2,726 107 26쪽
574 REMO : ....or Maybe Dead! (9) +3 23.08.03 2,503 97 24쪽
573 REMO : ....or Maybe Dead! (8) +7 23.08.02 2,654 111 26쪽
572 REMO : ....or Maybe Dead! (7) +3 23.08.02 2,630 99 24쪽
571 REMO : ....or Maybe Dead! (6) +3 23.08.01 2,655 109 22쪽
570 REMO : ....or Maybe Dead! (5) +5 23.08.01 2,558 97 23쪽
569 REMO : ....or Maybe Dead! (4) +6 23.07.31 2,734 108 24쪽
568 REMO : ....or Maybe Dead! (3) +7 23.07.31 2,670 98 23쪽
567 REMO : ....or Maybe Dead! (2) +3 23.07.29 2,897 111 26쪽
566 REMO : ....or Maybe Dead! (1) +4 23.07.28 2,960 106 24쪽
565 낄 데 안 낄 데 분별을 못하고 있어! +6 23.07.27 2,938 114 26쪽
564 영화감독은 우연을 창조하는 사람! +3 23.07.26 2,927 112 25쪽
563 형이 갖고 싶었던 건 아니고? +6 23.07.25 2,955 123 29쪽
» Love Of a Lifetime. (4) +4 23.07.24 2,836 118 23쪽
561 Love Of a Lifetime. (3) +3 23.07.24 2,683 93 24쪽
560 Love Of a Lifetime. (2) +8 23.07.22 2,980 116 26쪽
559 Love Of a Lifetime. (1) +2 23.07.21 2,951 113 24쪽
558 어련히 알아서 할까..... +6 23.07.20 2,953 118 29쪽
557 두고두고 가문의 영광이겠지..... +9 23.07.19 2,897 122 25쪽
556 MJJ Music Records. (4) +4 23.07.18 2,849 110 24쪽
555 MJJ Music Records. (3) +2 23.07.17 2,832 114 21쪽
554 MJJ Music Records. (2) +5 23.07.15 2,934 125 22쪽
553 MJJ Music Records. (1) +5 23.07.14 2,990 103 22쪽
552 내 것이 없으면 언제고 한계가 닥치게 되어 있어. (2) +3 23.07.13 2,989 113 23쪽
551 내 것이 없으면 언제고 한계가 닥치게 되어 있어. (1) +5 23.07.12 2,977 112 23쪽
550 나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건데..... +4 23.07.11 3,010 118 27쪽
549 내 이럴 줄 알았다! (2) +8 23.07.10 3,014 118 27쪽
548 내 이럴 줄 알았다! (1) +4 23.07.08 3,023 112 25쪽
547 앞으로 할 일이 참 많아..... +4 23.07.07 3,029 112 25쪽
546 반지 링은 얇아도 다이아몬드 알은 굵어야.... +7 23.07.06 3,039 10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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