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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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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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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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O : ....or Maybe Dead!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프로덕션 디자이너(production designer)는 영화 분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연극을 비롯한 공연, 광고, 방송, 게임 등의 분야에서 아트 디렉터(art director)로서 시각적 기획, 디자인, 설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구체적 창작 작업을 책임진다.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영화감독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REMO>에 참여하고 있는 마이크 리바는 현시대 할리우드 최고 프로덕션 디자이너 중에 한 명이다.

감독인 류지호 수준의 계약을 체결할 정도다.

스튜디오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파트인 영화미술은 감독의 영화적 콘셉트와 의도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해, 화면에 담길 영화 속 세상, 즉 공간을 창조한다.

촬영감독이 카메라로, 조명감독이 조명으로 서사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미술감독은 공간 창조를 통해 서사에 기여한다.

영화적인 공간을 창조해낸다고 해서, 고증에 입각해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80년대 제작된 오리지널 <REMO>에서 한국인 치운이 사는 집은 무척 어중간했다.

기본적으로 주택을 영상에 담는다면, 그 등장인물의 집인 것처럼 디자인하고 제작해야 한다.

일반 주택과 마찬가지로 세트 역시 벽지와 바닥재 작업이 이루어져야하고, 가구와 소품 등도 채워져야 한다.

단순히 모델하우스 데커레이션처럼 공간을 꾸며놓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성별, 나이, 성격, 가치관 그리고 삶과 생활이 묻어 나와야 한다.

창고 건물을 개조한 생활공간이라고 하더라고 캐릭터의 성향이 묻어 나와야 하는데, 오리지널 <REMO>의 미술팀은 철저히 기능적인 면만 추구하다보니 공간 자체가 입체적이지 못했다.

작은 소품, 벽지, 바닥 타일 문양만으로도 관객들의 몰입감이 높아지기도 하고 때론 깨질 수 있다.

유능한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은 창문의 방향, 출입문의 위치,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철저히 계산한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화의 무드를 만들어서 감독의 연출과 주제전달을 도와준다.

컬러, 텍스처, 콘트라스트, 볼륨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요소까지 포함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서사도 전달할 수 있다.

가령 담배를 피우다 1시간 전에 나간 사람의 흔적 같은 것을 만들어 놓는다거나 미묘하게 흐트러진 디테일이라거나 식은 커피 같은 것들로.

로케이션 촬영도 마찬가지다.

일단 로케이션 헌팅 과정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의견이 무조건 반영된다.

반드시 감독과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합의한 내용대로 길거리가 꾸며져야 한다.

눈이 쌓여있어야 한다면 눈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놓아야 하고, 과거 시간을 표현해야 한다면 그 시절 거리처럼 주변 간판, 정류장 표지, 벽보, 공중전화 등 모든 걸 고증에 맞춰 설치되어야 한다.

종종 영화미술이 배우를 앞서는 나쁜 경우가 있다.

시각적인 부분만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배우의 정서나 드라마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감독의 충분한 소통은 필수다.

영화 전체적인 시각적 특성은 물론, 각각의 공간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의도와 콘셉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추가 의견을 내면서 실체화시키기 위해서서 대화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축축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공간을 원합니다.”


‘그게 도대체 뭔데요‘라고 물어보는 것은 학생이나 하는 짓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시나리오를 충분히 분석하고 있다면 감독에게 레퍼런스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축축함’과 ‘우울함’이 구체화 될 수 있도록 충분히 의견을 나눠야 한다.

공간의 구조, 분위기, 컬러, 소품 등 ‘축축’, ‘우울’한 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촬영감독과 빛에 대해서도 협의해야 한다.

등장인물이 살고 있는 집, 그들이 늘 걷는 거리 등은 그 자체로도 서사를 전달한다.

인물이 처한 현실이 공간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크 리바와 인연을 맺고 있는 류지호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인물에 집중하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아. 그 사람이 되어 생각해보는 동시에 객관적으로도 바라봐야 하지.”


마이크 리바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전에 캐릭터 먼저 분석하는 타입이다.

<The Killing Road>를 작업하기 위해 연쇄살인범인 밴 사이퍼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관점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감독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 만약에 이번 영화가 순수한 작가영화적 성격이 짙었다면 나는 자네와 함께 한 감정에 치우쳐 몰입하고 파고들어 표현하려고 했겠지.”


실제 마이크 리바는 <The Killing Road>를 준비하며 정신과 상담을 받아봐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정도로 밴 사이퍼와 주요 인물들에게 깊이 몰입했었다.

그렇기에 몇몇 장면에서 소름끼치도록 디테일한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 디테일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꽤나 충격적인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

평론가들과 마니아들이 괜히 <The Killing Road>를 류지호 최고의 영화로 손꼽는 것이 아니다.


“자네와 다시 <REMO>를 작업하게 되면서 나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했어.”

“익숙한 상업영화니까요.”

“난 그런 분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네. 다만 그 간극을 조절하는 일이 꽤나 재미가 있거든. 이번에는 새로운 문화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가치관을 가진 등장인물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대신에 철부지 같던 레모 윌리엄스가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아.”


마이크 리바가 ‘Be the Reds!'와 ’오 필승 코리아!‘ 티셔츠를 꺼내놓았다.

영화 속에서 치운에게 이 티셔츠를 입혀보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류지호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이 문구들이 한국인들에게 뭘 의미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작년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어. 대강은 추측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이해한다고는 못하겠지. 다만 작년 한인사회가 보여준 놀라운 퍼포먼스와 지난 LA폭동 당시에 한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상기하면서 치운이란 인물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아시아계 캐릭터가 영화에서 입체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인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부합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부각시키는 것은 자칫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한국의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의 goblin 심벌을 의미심장하게 넣어도 재밌을 것 같고.”

“goblin 아닙니다. 그냥 Dokkaebi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왜 고블린이라고 지칭하면 안 되는지 설명하다보면 별 이야기가 다 나올 것 같아 류지호는 그 정도에서 멈췄다.

대신 붉은악마 티셔츠를 치운에게 입히는 것이 유머가 될 수 있는지 고민했다.


“티셔츠는 좀 더 고민해 볼게요. 꼭 치운이 아니더라도 다른 인물에게 입힐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준비 해두고 있으니까. 자네가 승인만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네.”

“알겠어요.”

 

할리우드에서 감독으로 일하면서 좋은 점이 메인 스태프들이 제 할 말을 다 하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할리우드 톱클래스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이크 리바조차도 감독의 권한을 넘보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감독을 돕기 위해 많은 선택지를 준비한다.

영화미술에만 제한되지 않고 영화 전반에서 폭넓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

류지호는 할리우드 영화감독이란 직업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메이저리그 감독을 합쳐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감독이 유능할수록 전문가들을 더 잘 이용할 수 있다.

어쨌든 영화는 공동작업의 즐거움이 있다.

감독이 원하는 모든 걸 해결해주는 것 때문이 아니다.

영감을 주고 감독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대가와 작업을 하다보면 저절로 디테일해질 수밖에 없다.

감독이 디테일하면 스태프 전체가 그에 맞춰진다.

헤드 스태프가 디테일하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부분까지 채워지며 저절로 서사가 풍부해 진다.

대가의 경지에 든 헤드 스태프가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울 때가 있다.

감독 입장에서 훈계라 생각하거나 잔소리라고 생각하면 기분만 상한다.

소통의 과정이라고 여기면 배우는 게 정말 많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고 하는 걸지도?’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다니라’라는 말이 있다.

좋은 감독이 되려면 계속 찍고 경험하는 방법밖에 왕도가 없다.

의견이 다르면 설득을 하고, 설득이 안 되면 부탁을 하면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무작정 강요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명령이다.

지금까지 충무로는 소통보다는 지위와 권위를 통해 명령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WaW 픽처스가 소통의 풍조로 바꾸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경력보다는 지위가 지위보다는 나이가 더 대접받고 있다.

<복수의 꽃>을 시작으로 한국영화계에 프로덕션 디자인 개념을 적극 도입했지만, 아직도 몇몇 특출한 감독들의 영화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유행처럼 아트 디렉터란 이름으로 세트 디자인을 하는 부서 하나를 독립시킨 것에 불과했다.

영화는 120분 내내 무언가를 봐야하는 시각 체험이다.

영화 속 공간과 시간은 서사 못지않게 중요하다.

영화적 순서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촬영 과정에서, 영화 속 공간의 톤을 유지하는 것도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주요 업무다.

연출, 촬영, 조명, 미술, 연기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할리우드에서는 자기의 일 외에 그 어느 것도 함부로 손대서는 안되는 게 불문율이다.

유일한 예외가 감독이다.

감독은 카메라를 만질 수 있고, 소품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출연자의 연기 디렉션을 위해서 몸에 손댈 수 있다.

그래서 일까.

누군가에는 소통 따위 다 개소리다.

갑질과 완장질은 유사한 악덕행위이지만, 엄연하게는 다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 대하여 부당한 행위를 할 때 흔히 ‘갑질’이라 정의한다.

반면에 어떤 집단에서 권력 과시적인 행동으로 집단이나 개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 때 ‘완장질’이라고 한다.

그 둘을 동시에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인간들이 영화감독이다.

할리우드에서는 적당히 스튜디오에 아부하면서 영화현장에서 마음껏 폭군놀이 하는 감독이 상당히 많다.

영화 한 편 흥행에 성공해서 헛바람이 가득 찬 감독들이 주로 그렇다.


❉ ❉ ❉


<REMO : The Destroyer>의 배경은 보스니아 내전이었다.

악당은 ‘발칸의 도살자‘라고 불린 라트코 믈라디치와 라도반 카라지치를 암시하는 캐릭터였다.

그들을 뒤에서 지원한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을 영화 속에서 암시했다.

후속편에서는 가장 최근 벌어진 코소보 전쟁을 담았다.

코소보 알바니아계 급진세력이 아닌 해방군에 포함 된 이탈리아, 알바니아 마피아가 포함된 코소보 산적조직이 악당이었다.

실제 코소보 해방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산적조직은 인신매매와 마약거래를 일삼는 악명 높은 도적집단으로 미국무부로부터 국제범죄조직으로 분류되어 있다.

후속편에서는 레모 윌리엄스와 콘 맥클리가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을 그렸다.

스파이액션 장르에 가까웠던 후속편에서는 산적의 잔당 일부가 코소보 해방군에 참여하는 걸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이면을 고발했다.

최종편은 보스니아 내전부터 코소보 전쟁을 거치며 거대한 악의에 잡아먹힌 흑마법사가 빌런(villain)으로 등장한다.

판타지세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흑마법사는 서방세계 금융의 중심 뉴욕을 공격한다.

흑마법사는 류지호가 연출했던 <REMO : The Destroyer>에 잠시 등장한 바 있다.

시리즈 첫 편에서 치운과 레모는 인종학살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처한 보스니아의 한 마을을 구원했다.

그때 마을의 유일한 교사가 바로 최종편의 악당이 되었다.

겁 많고 샌님이었던 교사는 전쟁을 겪으며 힘없는 자의 설움에 휩싸인다.

복수심에 불탄 교사는 흑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래된 사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다.

교사가 들어간 사원은 1편에서 치운이 언데드 괴물을 처리한 바로 그 고대 사원이다.

이런 내용이 후속편에도 언급됐다.

쿠키영상에서 불길한 모습으로 재등장하는 것으로 충분히 암시했다.

영화의 부제 <.....or Maybe Dead>에는 Destroyed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렇다고 1,2편을 봐야 최종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편 도입부에서 흑마법사의 기원을 압축한 영상을 보여줄 예정이다.

1편과 2편은 각각 독립된 전쟁 비극을 다뤘다.

그런데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악당의 관점은 고대 기록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시골 교사가 어떻게 세상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는가를 다룬다.

결국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가며 괴물이 된 순박한 남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똘똘 뭉쳐 미국을 시작으로 세상을 파괴할 마음을 먹는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영웅 레모 윌리엄스에 의해 실패하게 되지만.

<REMO> 시리즈 전편에 걸쳐 가장 강력한 빌런이 흑마법사다.

그 배역에 하틀리 도프 주니어(Hartley Dorff Jr)를 캐스팅했다.

미국 배우치고는 작은 신장 173Cm이다.

본래는 <블레이드>에서 디컨 프로스트를 연기해야 했지만, 작은 신장 때문에 류지호가 배역을 교체함으로써 필모그래피가 꼬일 뻔했다.

다행히 TV영화에서 맹활약하며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아역배우부터 두각을 드러낸 바 있는 하틀리 도프 주니어의 연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찌감치 흑마법사 역할로 낙점을 해서 <REMO : The Destroyer>의 쿠키영상부터 등장시켰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최종편의 메인 빌런으로 상당히 복잡한 광기를 드러내야 했다.


뻐끔뻐끔.


산타모니카의 한 노천카페 테이블에서 진한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지독한 애연가인 하틀리 도프 주니어가 말로보 담배를 연신 피워댔다.

깊은 갈색 눈동자, 시원한 이마와 얼굴을 덮고 있는 거뭇거뭇한 수염.

류지호에게 1992년 <파워 오브 원>에서 소년 권투선수 역할로 기억되는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어느새 30대 초반의 나이가 되어 있다.


달그락.


류지호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 쉬어?”

“내가 다작을 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오로지 일만 하는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

“글쎄. 벌써 20편 넘게 작업하지 않았던가?”

“TV·영화 포함해.... 지금까지 30편? 그 정도 한 것 같네.”

“놀랍네.”


류지호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배우와 감독의 작업량이 같은 순 없겠지만, 나름 다작을 한다고 생각했던 류지호를 겸손하게 만드는 필모그래피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쉬지 않고 찍었으니까. 나는 돈 쓰는 걸 좋아하거든. 말하자면 이런 식이지. 일이 필요해? 좋아, 한 편 더 찍자. 그렇게 30편이 된 거야.”


어린 시절의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여리여리 한 이미지였다.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남성미가 진하게 배어나오는 야성적인 얼굴의 청년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줄곧 강도, 폭력배 두목, 살인범, 트랜스젠더, 포르노 스타 같은 거친 역할을 맡아왔다.

그런데 그의 연기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의외의 역할들이다.

스물한 살에 요절한 비틀스 초기 멤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백 비트>의 스튜어트가 그의 숨은 낭만성을 한껏 발휘하게 해준 배역이었다면,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에서 상냥한 트랜스젠더 캐릭터는 가장 하틀리 도프 주니어답지 않으면서 그의 연기 스펙트럼을 가장 멋지게 확장한 역할이었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월드 스타는 아니다.

쉬지 않고 영화와 TV시리즈를 종횡무진하고 있어 낯이 꽤 익은 배우다.

연기예술을 불태우는 배우라기보다 직업인으로서의 배우에 가깝다.


“디렉터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난 스타가 되고 말겠다는 그런 야심 같은 건 없어. 그저 생업으로서 배우라는 직업을 성실히 수행할 뿐.”

“실망 안 해. 그런 자세가 프로의식이라고 생각하니까.”


메소드 연기네 까부는 이들보다 프로페셔널 한 직업배우가 훨씬 났다.


“Jay, 난 말이야. 하루하루 열심히 배우로서의 직업을 수행하고 남은 시간은 충분히 즐기고 있어. 매년 생일에는 생 트로페로 휴가를 떠나지. 만약 내게서 엄청난 연습 끝에 배역과 일체가 되어서 그 캐릭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연기 분야 귀재를 기대했다면 실망하게 될 거야.”

“그런 기대 안 해. 다 고려하고 널 내 영화에 데려온 거야.”


참고로 프랑스 생 트로페(Saint Tropez)는 부호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하틀리 도프 주니어는 여느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들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런 마인드가 짧은 기간 수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일지 몰랐다.

다작배우라고 해서 연기를 기계적으로 한다면 오산이다.


“내가 캐릭터 연구를 소홀히 한다거나, 배역을 소화하는데 있어서 성실하지 않다는 건 아냐. 난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거든.”

“알아.”

“하긴, 내가 Jay가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면, 지난 첫 시리즈 이후 날 불러주지 않았겠지.”

“<블레이드>의 디컨 프로스트를 기대했다고 들었는데, 불발되어서 섭섭하진 않았어?”

“별로. 난 그리 까다롭게 영화를 고르는 편은 아니야. 내키는 대로 하는 편이지. 그 영화 대신 다른 영화를 했으니까 불만은 없어.”

“긍정적이네?”

“내 라이프스타일을 즐길 뿐. 사람들이 내게 돈을 밝힌다고 하는데, 난 그걸 부정하지 않아. 베니스 해변에서 살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그냥 성실히 일하고 그 후에는 에라 모르겠다 즐겁게 돈을 쓰는 거지. 다작이건 뭐건.... 그게 다야.”


어떤 면에서는 참 솔직한 성격이다.

가리지 않고 영화에 출연해 그걸 통해 번 돈으로 하루하루를 즐긴다.

그렇다고 마약을 한다거나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이 있지도 않고.

평범한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여자 좋아하고, 고급스러운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애연가에 사진촬영을 즐기는 30대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다.

스틸 사진 촬영이 취미였는데 클래식 스틸카메라 수집가이기도 했다.


“너도 필름 카메라를 수집한다며?”

“언제 내 집으로 와. 희귀 모델은 친구에게 선물해서 몇 개 남지 않았지만 꽤 흥미를 끄는 모델도 있을 거야.”

“좋지.”


류지호의 벨에어 주택에는 수많은 종류의 스틸카메라와 영화 카메라가 있다.

아날로그 스틸카메라들은 김준우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짬짬이 구입했는데, 김준우가 이미 소장하는 모델도 많아서 되팔지 않고 보관하는 카메라도 꽤 많았다.

영화용 필름 카메라는 한국에서 영화박물관이나 기념관이 건립된다면 기부할 생각으로 구입하고 있다.

여주에 있는 WaW종합촬영소에 전시할 생각도 있다.


“최근에 <The Americans>를 다시 들춰보고 있어.”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의 <The Americans>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진집 중에 하나다.


“나도 자주 꺼내 보는 사진집이야. 내가 억만장자라는 이유로 위선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사회적 규칙을 만든 이들에 지독한 불신이 있거든. 나는 로버트 프랭크의 그런 시선에 공감해.”


스위스 출생인 로버트 프랭크는 1959년 미국을 횡단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때 기록한 사진 83장이 담긴 사진집 <The Americans>는 사진사를 새롭게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미국 사진예술은 선명하고 밝으며 고전적인 양식이 일반적이었다.

반면에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노출이 엉망이어서 진흙탕 같았고 술 취한 듯 삐딱하고 흔들리는 프레임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유색인종, 성소수자, 그들에게 오만하게 구는 백인들과 그들이 자행하는 차별의 흔적을 고스란히 프레임 안에 담아냈다.


“독립영화계에서도 활동했었지.”

“맞아.”

“개인적은 삶은 그리 좋지 못했어....”


두 사람은 금새 사진에 관한 이야기에 푹 빠졌다.


❉ ❉ ❉


8월 초순 경 LA국제공항(LAX/Los Angeles International Airport)에 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사 Pacific Aero가 90년대 중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Next-Generation 737 비즈니스 제트기 한대가 도착했다.

Pacific Aero Company는 자사의 737 클래식이 A320 패밀리에게 점유율을 빼앗기게 되고 미국 항공사들이 경쟁사 항공기를 구입하면서 737 클래식을 더욱 효율적이게 개량할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1991년 기존 737을 개량해 Next-Generation 737을 개발하게 된다.

이번에 LAX의 개인전용 터미널에 도착한 737-700 기종은 프라이빗 제트기로 개조한 기체다.

소유자는 한국인 류지호다.

한국 국토교통부가 부여한 편명은 KU7280이다.

항공제조업체 Pacific Aero가 류지호에게 부여한 고객부호는 HG다.

HG는 Hollywood Giant 즉 할리우드의 거인을 의미하는 약자다.

따라서 제조사에 등록된 모델명은 737-7HG다.

이 모델명은 나중에 류지호가 비즈니스 제트기를 매각해도 바뀌지 않는다.

본래 737-700은 승객 120~130여명을 태울 수 있는 기종이다.

기본가격은 7,500만 달러(한화 850억 원)다.

세계적인 부호 몇 명이 내부를 개조해 12~20개의 좌석과 거실, 주방, 욕실 등을 갖춘 전용기로 만들어 타고 있다.

그 대열에 류지호가 합류하게 됐다.

처음에는 JHO나 가온그룹 법인 명의로 구입하려고 했다.

미 연방항공청 등록규정에는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닌 경우 신탁회사 명의로 항공기를 등록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고, 법인 명의로 구입하면 비업무용으로 이용할 때마다 사용료 문제 등 번거로운 점이 많았다.

한국의 경우에도 법률적으로 편법을 써야 하고 사적인 사용 같은 꼬투리가 잡혀 잡음을 불러올 수 있기에 개인 구입으로 했다.

어차피 류지호가 오성그룹 총수보다 부자인 것을 모르는 한국 국민은 없다.

딱히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 목장 구입건 때와 마찬가지로 언론이 ‘초호화 전용기 구설수‘를 부추겼다.

미국에서는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는 꽤나 시끌시끌했다.


[대통령은 전세기 타는데 개인전용기 타는 청년재벌....]

[류지호 호화전용기 구입 논란··· 인테리어 비용만 400억...]

[류지호, 800억 원짜리 초호화 제트기 구입!]

[가온그룹 총수 전용기 도입, 노동자와 서민 배려하는 마음 가졌으면.....]

[류지호, '850억' 초호화 전용기··· 인테리어만 400억대...]

[류지호 전용기 통해 한국과 미국 더 자주 오간다.]

[전용기로 세계와 논스톱 '소통' 류지호....]

[류지호 개인전용기 '초호화 논란', 살펴보니....]

[영화감독 류지호 전용기, ‘글로벌 미디어업계 거물 전용기는 바로 이런 것’]


류지호의 비즈니스 제트기 구입을 놓고 글로벌 경영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의견과 함께 카드대란으로 신용불량자의 수가 300만 명이 넘고 카드대금을 갚지 못해서 자살률과 범죄율도 증가하고, 경기는 급속도로 침체를 보이고 있는 시점에 굳이 호화전용기를 구매해야 하느냐로 갈렸다.

가온그룹 측에서는 “글로벌 경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업무용 전용기이고 실제 계약은 수년 전에 했지만 수차례 안전진단을 마무리하고 최근에야 들여온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실제 전용기는 번거로운 공항통관 절차를 줄여주고, 정기편 직항노선이 없는 곳까지 운항이 가능해 업무에 유익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오성그룹 회장이 휴가나 사적으로 그룹 전용기를 사용한 일이 자주 언론에 보도되면서 류지호의 전용기 구입이 도매금으로 비판을 받았다.


“억울하면 출세해....”


부조리한 사회일수록 흙수저들의 분노는 커진다.

또한 맹목적인 성공에 대한 집착도 커지게 되어 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부조리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갑질을 하라는 충고가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충고일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아직은 유행할 시기가 아니다.


┖ 국어사전 찾아봐 부러운 것과 질투는 다른 말이야.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이미 진 거야. 부러우면 대상을 닮고 싶다는 거고 젊다는 증거지. 안 부러우면 그게 지는 거야. 너처럼 시기하는 사람은 루저인 거고.


누군가 달아놓은 악플에 류아라가 남긴 대댓글이다.


작가의말

다음주 <레모> 제작과정 에피소드는 연참을 할 예정입니다.

평온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68 이자금
    작성일
    23.07.29 09:28
    No. 1

    정당하게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버는 부에 대한 소비는 비난하지 않죠
    개인의 재산을 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는 재벌과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불법과 정당하지 않은 범죄 비리로
    재산을 모으고 이를 사용하니 비난을 당하는거죠

    그리고 재벌 언론 정치인의 선전선동에 동조한 자들이 이들을 비호하고
    이들이 비난하는 자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죠

    이들이 바로 지금의 양당을 지지하는 자들이죠
    지지하지는 않지만 이들에 동조하여 정당하게 자수성가한 이들을 비난하는 자들
    이들이 문제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정당하게 자수성가한 사람의 소비를 비난하지 않죠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3.07.29 11:55
    No. 2

    잘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3.07.29 15:44
    No. 3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성공을 할수 없는나라
    3대가 부자 여야 진짜 부자 라는 말이 나오는게
    한국 현실 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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