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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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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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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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파티는 비즈니스의 연장선.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컬버시티의 풍경에 시선을 두고 있던 류지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도착했습니다.”


경호팀을 책임지고 있는 티노 곤잘레스다.

여름 방학을 한국에서 보낸 류지호가 LA로 복귀했다.

말릭이 열어준 차문 밖으로 류지호가 빠져나왔다.

LA의 9월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매우 온화한 날씨다.

이 시기에 비는 거의 내리지 않는 편이다.

어쩌다 한 번씩 비가 오는 날은 제법 쌀쌀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따르릉.

드르륵.


사방에서 울리는 전화벨과 팩스 토해내는 소리.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복도를 지나치는 직원들의 표정도 밝았다.

2년 전,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영화사 자체도 화사해진 것 같았다.


“....Jay?”


스크립트를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있는 여자 친구 낸시가 류지호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잘 지냈어?”

“보다시피. 언제 돌아왔어?”

“오늘 아침에.”


싱긋.

환한 미소를 짓는 낸시를 류지호가 가볍게 안아줬다.


“여긴 어떻게... 아!”


낸시는 이곳에 어떤 용무로 왔냐고 물으려다 류지호를 흘겨봤다.


“메타보이 사장을 만나러 왔어.”

“흥!”


낸시가 토라진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난 일부러 속이거나 거짓말 한 적 없어.”

“알아. 먼저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키스 안 해 줄 거야?”


류지호가 낸시의 얼굴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사내 연애는 별론데?”

“난 트라이-스텔라 직원이 아니야. 이 회사를 소유한 투자회사 대주주이지.”


쪽.

두 달 만에 류지호는 여자 친구의 달콤한 입술을 훔칠 수 있었다.


“몇 시에 끝나?”

“5시.”

“퇴근하고 함께 저녁 먹을까?”

“좋아.”


류지호가 돌아서서 사장실로 향했다.

낸시가 얼른 그의 곁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Jay....”

“응?”

"기사가 탑 꼭대기에 갇힌 공주를 구하면 그 뒤엔 어떻게 돼?"


영화 <귀여운 여인>의 대사다.


"그 뒤엔 공주가 기사를 구하지.“

“긴 비행에 피곤하지?”

“조금.”

“그거 알아?”


류지호는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다음에 할 말을.


“내 엉덩이에서 발가락까지의 다리 길이가 110cm라는 거? 그러니까 두 다리 합쳐서 220cm로 오늘 내가 지호를 치료 해줄게.. 물론 3,000 달러 안 받아. Jay는 공짜야.”


낸시가 <귀여운 여인>에서 비비안 워드(피오나 로버츠 역)가 했던 대사를 그대로 따라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딘지 웃기기도 했다.


하하하.


류지호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복도를 오가는 몇몇 직원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탁!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류지호의 엉덩이를 낸시가 손바닥으로 쳤다.


“아따 봐~”


스크립트를 한 아름을 가슴에 품고 기획개발실로 걸어가는 낸시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류지호가 몸을 돌려 CEO 집무실로 향했다.


“......!”


낸시가 고개를 둘려 사장실로 들어가는 류지호를 바라봤다.

자신의 남자친구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꽤나 놀랐다.

어릴 적부터 사업을 해 자수성가한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열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 규모의 영화사를 소유할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마음이 심란했었다.

마치 자신이 영화 <귀여운 여인>의 여주인공이 된 줄 착각도 했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 든 생각은 자신의 남자친구는 에드워드 루이스(릭 기어 역)처럼 비정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가며 정신과 치료를 받는 남자가 아니다.

밝고 에너지 넘치는 청년이다.

자신은 결코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창녀도 아니고.


픽.


낸시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신데렐라 스토리라니.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지해 인생을 살 만큼 못나지 않았다.


“어휴, 트라이-스텔라 오너라니.... 매사 십대처럼 행동하지 않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남자친구의 조숙하고 어른스러운 이유가 납득이 되는 낸시다.


❉ ❉ ❉


벌떡!


모리스 메타보이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마자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와락.


다짜고짜 류지호를 안는 것으로 격한 환영인사를 했다.


“왜 이래요?”

“어서 와!”

“너무 격하게 환영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 자네는 행운을 부르는 사나이야.”


웃음이 끊이질 않는 모리스 메타보이를 보며 류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영화선택 권리를 써서 제작/배급한 <바톤 핑크>의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

8월 23일 제한상영에 들어가 첫 주 26만 달러의 박스오피스를 거두는 것에 그쳤다.

900만 달러의 예산을 쓴 것치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스코어다.

<늑대와 춤을> 같은 대박은 물 건너 간 상황.


“<바톤 핑크>는 유감이에요. 하지만 칸 영화제 수상작이잖아요.”


모리스 메타보이가 <바톤 핑크>의 흥행실패를 고소해 하는 줄 알았다.


“모든 영화가 다 흥행에 성공할 순 없는 법이지.”

“......?”

“상은 항상 좋은 거야. 우리가 썩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칭찬을 하는 거니까.”

“뭔데요? 무슨 상? 지금 시상식 시즌이 아니잖아요?”

“베니스가 있지.”


계속해서 뜻 모를 이야기를 하는 모리스 메타보이다.


“길리엄이 이번에 은사자상을 받았네. 베니스영화제에서.”

“무슨 영화가....?”

“<The Fisher King>!”


끄덕.

밴스 길리엄(Vance Gilliam) 감독이 연출하고, 레옹 브리지스와 맥클로린 윌리엄스가 출연한 <The Fisher King>이 지난 9월 3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 제 48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장상을 수상했다.


“맥 윌리엄스!”

“맞아. 그는 여전히 굉장한 코미디언이지.”


류지호는 메타보이 CEO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뚱뚱한 가슴, 과장된 제스처, 사람 좋은 미소를 지닌 털북숭이 사내.

이상하게도 그는 코믹한 역할에서는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진지한 역할에서는 수염을 잔뜩 기르고 연기한다.

맥(클로린) 윌리엄스는 박애주의자이자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면서도 미국 군대를 위한 위문 활동도 꾸준히 하는 사람이다.

류지호의 기억 속에서는 코카인과 알코올 중독을 이겨 내기 위해 힘겹게 싸운 일로도 유명했다.

텔레비전 방송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맥과 <굿 윌 헌팅>을 함께 하면 좋겠는데....’


류지호가 기억하는 맥클로닌 윌리엄스는 다작 배우다.

조연, 주연 가리지 않고 많은 영화를 찍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불의의 사고가 없다면 이번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죠셉과 맥이 스크립트를 하나를 가지고 왔어.”

“죠셉 콜럼버스 감독이요?”


죠셉 콜럼버스 감독은 <나 홀로 집에>의 흥행 대성공으로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가 보여준 메이저 스튜디오 못지않은 광고와 배급력에 감동했다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닐 정도다.


“무슨 영화인데요? 혹시 <나 홀로 집에> 속편에 맥 윌리엄스가 출연하겠대요?”

“아니야. 맥이 주인공인 가족코미디 영화야.”

“맥이 주인공인 코미디?”

“맥이 내 앞에서 영화에서 그가 할 대사를 직접 보여주더군.”

“뭔데요?”

“나를 여자로 만들어 줘!”


모리스 메타보이가 익살스럽게 맥 윌리엄스의 흉내를 냈다.

전혀 똑같지 않았다.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혹시 양육권을 아내에게 빼앗긴 아빠가 할머니 가정부로 분장하는 내용인가요?”

“맞네. 자네도 읽어 봤나?”

“허.....”


류지호는 어이가 없기도 했고, 황당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영화가 알아서 제 발로 찾아왔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아내에게 세 자녀의 양육권을 빼앗긴 아빠는 주 1회 전처의 집 방문만 허락받는다.

토요일만 기다리며 사는 아빠는 어느 날 전처가 가정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고, 분장 전문가인 동생에게 여자로 변신시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 나타난 은발의 가정부 할머니 미세스 다웃파이어(Mrs. Doubtfire).

폭소 터지는 실수와 해프닝을 연발하는 영화다.


“휴즈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해요?”

“블루 울프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와 함께 왔던데?”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트라이-스텔라의 입장은 뭐예요?”

“......”


모리스 메타보이가 뜸을 들였다.

이내 류지호를 놀려주려던 생각을 접고 입을 열었다.


“개발비를 바로 지급했네. 저작권을 확보했지.”

“잘 하셨어요.”

“자네 봄학기 개강일이 언제지?”

“마지막 주요.”

“그렇다면 다음 주에 시간이 되겠군.”

“무슨 일 있어요?”

“<The Fisher King>의 북미프리미어가 다음 주에 LA MovieMark 극장에서 있을 예정이야. 그날 파티에 맥 윌리엄스도 참석할 예정이지.”


프리미어가 끝나고 열리는 파티에서 맥 윌리엄스를 소개시켜주겠다는 소리다.


‘어차피 내년에 군대 가면 언론이나 파파라치의 시야에서 잠시 멀어지겠지.’


지금까지 류지호는 공식적으로 할리우드에 모습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황이다.

마냥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도 없고.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슬슬 공식적인 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존재가 드러나는 것보다 공식적으로 데뷔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올해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라인업이 굉장하다.

<터미네이터Ⅱ>에 이어 10월에 <아담스 패밀리>, 11월에 <벅시>, 12월에 <후크>(배급만)까지 개봉하면 온 할리우드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다.

류지호는 손대는 영화마다 모두 대박을 쳤다.

영화 선택권리를 쓴 영화마다 co-producer(공동 프로듀서)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숨길 수도 없지만, 숨겨서도 안 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


‘올해 트라이-스텔라가 준메이저의 톱으로 올라가면 미래가.....’


트라이-스텔라 픽처스가 올해 보여준 흥행력은 극장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렇다면 극장들도 트라이-스텔라 픽처스가 배급하는 영화를 홀대 할 리가 없다.


“참석할게요. 공식적으로.”

“좋았어. 할리우드 데뷔가 되겠군.”

“대신 인터뷰 안 해요. 파티에서 사람들과 안면만 익힐 겁니다.”

“그래야지. 자칫하면 학교를 못 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류지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파파라치는 악명이 높았다.

한국에서 온 스무 살의 유학생 사업가.

뉴욕 사교계에서 행운의 꼬마라고 불렸던 소년.

파커와 그레이엄 가문이 영화업계에 심어놓은 얼굴마담.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를 소유한 투자회사의 실질적인 오너.

류지호를 다룰 만한 기사 떡밥은 이것들 외에도 무수히 많았다.

언론과 파파라치만 문제가 아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배우지망생과 독립프로듀서들.

그들이 수시로 류지호에게 들러붙는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절대 류지호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부담 갖지 말게.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야. 누구도 바로 일에 적응하고 해낼 수 있는 인재를 원하지, 밑바닥에서부터 가르치는 걸 원치 않아. 그런 면에서 자네는 영화감독이든 비즈니스든 바로 해낼 수 있는 인재라고 할 수 있지.”

“귀찮아 질 것 같아서 그렇죠.”

“모든 비즈니스는 인맥이야. 몇 시간 투자해서 30년 인맥을 만들 수도 있다네.”

“사람과 인연을 쌓는 게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죠셉 콜럼버스처럼 빚을 지어놓는 게 중요해. 이번 경우처럼 메이저로 가져갈 영화를 우리에게 가져오지 않던가?”


인맥 혹은 인적 네트워크.

무조건 남는 장사다.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고 그가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아줌으로써 빚을 지워 놓으면, 그들이 작은 부탁 한 가지씩을 들어줄 수 있다.


‘미국은 이런 면에서 참 좋아.’


한국인은 빚을 지면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준다.

물론 미국인도 사람인 이상 빚을 지면 갚는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이나 의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저히 기브 엔 테이크 룰을 따른다.

제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받았으니 준다.

마음의 빚을 남기지 않으려 하기에 끝맺음이 아주 깔끔하다.


‘또 모르지. 단 한 명이라도 평생 갚을 빚을 졌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류지호가 바라는 것이 그 점이다.

미국인이라고 모두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진 않을 테니까.


✻ ✻ ✻


류지호는 5시 정각에 퇴근한 낸시를 픽업해서 베벌리힐스로 향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낸시가 파스타를 돌돌 말며 류지호에게 물었다.


“경영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 거야?”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내가 나설 일은 없지.”

“스티븐 아들러는 감독도 하고 제작도 하고 프로덕션도 경영하는데?”

“E.T 엔터테인먼트도 전문 경영인이 따로 있어. 그는 영화 기획을 하는 거지 기업을 경영하진 않아. 물론 지분을 가진 주주로서 권리는 행사하겠지만.”

“올해 트라이-스텔라는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어.”

“그런가 보더라.”

“자기 회사면서 마치 상관없는 것처럼 말하네?”

“인턴은 할 만 했어?”

“매일 이 방 저 방 서류 나르는 거랑, 복사기 돌리는 것 밖에 안 했는걸.”

“인턴이 다 그렇지 뭐.”

“내 인턴은 네가 추천한 거야?”

“내가 추천 안 해도 낸시는 뽑혔을 거라더라.”

“정말?”

“지난 학기에 몇 작품을 경험했는지 벌써 잊었어?”


낸시는 류지호가 찍은 단편영화에 모두 참여했다.

비록 단편영화이긴 했지만, 영화제작 전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게다가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우~ 그때는 정말 Jay를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다소 무식하게 밀어붙이긴 했어.”

“Jay?”

“응?”

“너희 나라 남자들은 모두가 군대에 가야 돼?”

“모두가 가야하지만, 사정에 따라 못 가거나 안 가는 청년도 있어.”

“안 갈 수도 있다고?”

“기본적으로 군생활을 하려면 신체 건강한 남자여야 하니까.”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30개월.”

“2년하고 반년이나 더.....”

“그렇지.”


카투사 시험을 보기 전까지도 류지호는 군대에 대해 스트레스가 꽤나 컸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치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그 후?”

“군대를 제대하면?”

“학교로 돌아오겠지.”

“그 이후에는?”

“졸업을 하고...”


애인이 있는 상황에서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들이 갖는 딜레마다.

3년을 기다려 달라.

혹은 너를 놔주겠다.

그도 아니면 약혼을 하든, 결혼식을 해버리든.

낸시의 표정만 보면 고우찬의 여자 친구 김민아와 많이 달랐다.

김민아는 남자 친구의 군대 이야기에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낸시는 그러지 않았다.

쿨 했다.

그런 태도 때문에 류지호는 편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영화도 찍고 사업도 하겠지. 어쩌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지도....”

“그렇구나.”

“2년 6개월... 생각보다 금방 갈 거야.”


과연 그럴까?

그 기간 류지호와 낸시의 시간의 속도는 분명 다를 것이다.

실제 물리적인 시간이 그럴 리가 없다.

심리적인 시간이 다르게 흐를 것이다.


“그럴까?”

“당연하지.”


낸시는 많은 걸 물었고, 또 말했다.

주로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만 마시는 게 좋지 않아?”


낸시는 어느새 혼자 와인 반병을 비웠다.

와인이 도수가 약하다고는 하지만, 반병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충분히 취하고도 남을 양이다.


“호호, 그럴까?”

“일어나자. 늦었다.”

“응!”


낸시는 벌떡 일어나 류지호에게 팔짱을 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적막한 거리가 낸시의 정신을 조금 깨우는 것 같다.


“베벌리힐스는 자주 안 와봤는데. 여기도 밤 되면 적막하구나.”


류지호의 어깨에 낸시의 머리가 살며시 기대어왔다.

향기로운 샴푸의 냄새가 류지호의 코를 간질였다.


“나 오늘 Jay의 아파트에서 잘래.”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말이다.


“그러자.”


류지호는 직접 차를 몰아 웨스트우드에 위치한 아파트로 향했다.

어차피 기숙사나 아파트나 잠만 자는 곳이다.

그럼에도 좀 더 쾌적한 곳에서 지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다음 학기부터 류지호는 기숙사 대신 아파트에서 지낼 예정이다.


“혹시 경호원들은....?”

“오늘은 아무도 안와.”

“흐응...!”


낸시가 묘한 콧소리를 냈다.

이성을 끊기에 충분한 소리다.

류지호가 낸시를 거칠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덮쳤다.

둘은 어둡고 넓은 거실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서로를 탐닉했다.

그렇게 두 달 만에 두 사람은 밤새 한 몸이 되었다.


“......”


류지호는 긴 비행의 여독과 시차적응 때문에 깊은 잠에 빠졌다.

낸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공연장에서 류지호라는 남자를 보는 순간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다.

사랑에 빠질 때 5초의 시간도 필요 없었다.

지난 1년 간 두 사람은 친구, 동료 때론 연인이었다.

속으로 류지호에게 속삭여 본다.


‘Stay.....‘


낸시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할 대답을 알 것도 같다.


‘I can't.....’


자신의 남자친구는 책임감도 강하고, 눈앞에 닥친 곤란함을 외면하는 성격이 아니다.

비록 기꺼운 마음으로 입대하는 군대가 아니라고 해도.


‘홀로 남겨질 나는....?’


현실로 돌아가는 데 별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테지만, 미래를 바꾸는 데는 큰 결심이 필요한 법이다.

서로를 의지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는데 5초가 채 걸리지 않는 것처럼, 이별하는데도 5초가 걸리지 않는다.

사랑과 이별의 순간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찾아온다.

그리고 이별을 감당해야 할 시간은 그것에 수만 배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세상모르고 잠속에 빠진 류지호를 낸시가 향해 입을 달싹거렸다.


‘기사가 탑 꼭대기에 갇힌 공주를 구하면 그 뒤엔 어떻게 되지?’


류지호에게서 고른 숨소리만 들려올 뿐.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 ❉ ✻


류지호는 오랜만에 정장을 차려입었다.

오늘 할리우드 업계 공식 데뷔가 있을 예정이라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가 투자·제작·배급하는 영화 <피셔킹>의 프리미어가 열리는 날이다.

류지호는 본 행사와 뒤풀이 파티 모두 참석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업계 관계자들과 안면을 익힐 생각이다.

언론도 피하지 않기로 했다.


“가시죠. 보스.”


도널드 제이콥이 오늘 일정마다 수행하기로 했다.

노스 할리우드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도널드가 간단한 브리핑을 했다.

주로 오늘 프리미어에 참석하는 VIP의 인적사항이다.


“LA시장이 참석할지도 모른다고요?”

“초청장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참석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정치인들이 할리우드 영화 프리미어에 자주 얼굴을 비추던가요?”

“LA는 영화의 도시니까요. 모리스 메타보이 CEO는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입니다. 물론 많은 영화인들이 민주당을 지지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맥클로린 윌리엄스도 민주당 지지자죠?”

“그렇습니다.”


류지호는 팔짱을 끼고 잠시 머리를 굴려봤다.


‘시장에게 한인타운에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후우.


류지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LA시장과 친분이 없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의 실질적인 오너임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류지호는 외국인이다.

영주권자라면 모를까 그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할 수도 없다.

류지호가 현 시장이나 경찰 고위관계자를 후원하려면 현재로서는 불법 자금을 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일정 부분 정치권에 줄을 대놓을 필요가 있긴 하다.

지금 당장 고민할 일은 아니다.


“캘리포니아의 유력 정치인들을 정리한 자료가 있습니까?”

“어느 정도까지 원하는지 모르지만, 중요 인사들에 대한 파일은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토머스 브래들리 시장이 다음 선거에도 나올까요?”

“특별한 실수만 없다면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실수라.....?”

“참고로 현 시장 역시 UCLA 출신입니다. 로스쿨은 사우스웨스턴을 나왔지만 말입니다.”


토머스 브래들리 현 시장의 조부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였다.

텍사스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과 함께 LA로 이주한 뒤 UCLA를 졸업, 21년 간 LA 경찰로 일했다.

1973년 처음으로 LA 시장에 당선된 후로 무려 20년 간 LA시장에 연임됐다.


“소수인종 특히 한국계에게 우호적인 정관계 인사들을 추려보세요. 그리고 한국계 이민자들의 정당 지지성향도 알아봐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영화인들이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다고 해서 모두가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레온 부룩하이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공화당을 지지자다.

많은 유대계 영화인들 역시 공화당을 지지했다.

영화인들은 대놓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를 떳떳하게 드러낸다.

불이익?

없다.

아니 적어도 노골적으로 불이익을 줄 수 없다.

류지호가 경험한 미국인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다.

헌데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참지 않는다.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정의로워서?

아니다.

그들이 당한 부당한 일을 자신이 똑같이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나서는 거다.


“그리고 아칸소 주지사 빌 블라이드에 대한 자료도 부탁해요.”

“그는 주지사 임기를 채우겠다고 이미 공약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고 해도 솔직히 승산은 희박합니다. 지난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부쉬의 인기가 상당합니다.”

“알아요. 여론도 부쉬가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죠.”

“그런데 왜....?”

“그를 후원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나는 미국 시민이 아니잖아요. 다만 정권이 민주당으로 바뀌게 되면 많은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이 변할 거예요. Garam Invest의 투자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겠죠.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참고로 조지 부쉬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다 발생시킨 불경기로 인기가 급추락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빌 블라이드(William Blythe Ⅲ)가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역사에 남을 선거 캠페인을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아직 류지호는 미국 기득권 이너서클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들어갈 수도 없다.


‘앞일은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미리 계획을 세워두는 것은 가능했다.


작가의말

한 주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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