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연재수 :
962 회
조회수 :
4,122,113
추천수 :
126,883
글자수 :
10,687,409

작성
22.06.09 09:05
조회
5,903
추천
219
글자
21쪽

Life Goes On.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빈민가 동네를 분주하게 옮겨 다니던 카메라가 다시 한인 잡화점에 와 있다.

저 멀리 하늘로 석양이 물들고 있다.

카메라는 잠시 한여사의 마트를 보여준다.

다양한 인종들이 마트를 들락날락거린다.

해가 완전히 저문다.

마트의 불이 꺼지고, 한여사가 문을 열고 나와 가게 문을 잠근다.

카메라는 한여사를 따른다.

식료품점 한국인 부부가 저녁 재료를 사가는 할머니에게 푸념한다.


[할머니, 왜 흑인에게 잘 대해주세요? 그냥 돈 받고 물건을 파세요. 할머니 때문에 저희 부부만 욕을 먹잖아요.]


할머니는 부부에게 조근한 어조로 1977년 뉴욕 정전사태 때 일어난 날의 일화를 들려준다.


[다음날 아침 돌아와 본 가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어. 그리고 나와 큰애는 그 날 남편을 잃었어. 몇 년 동안 그 시커먼 총구멍이 꿈에 나타나 악몽에 시달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뉴욕이 무서워서 이곳 LA로 이사를 왔는데, 이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 한데 나는 남편을 잃고 깨달은 것이 있다네. 내가 먼저 저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절대 난 저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걸.]


간간이 저 멀리서 총성이 들리고, 어디선가 경찰 사이렌들이 시끄럽게 울려댄다.

매일 빈민가 어디에선가 강력사건이 벌어진다.

감독이 보여주지 않는 이 동네 이면에는 지옥 풍경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먼저 변해야 세상이 조금 변할까 말까한 것 같아. 가만히 앉아서 세상이 변하길 기대하면 평생 변한 세상을 못 보게 될 거야.....]


식료품 가게를 나선 한여사를 따르던 카메라가 저 만치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후레쉬를 잡아낸다.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뭐해?]


후레쉬는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한 여사는 젖어있는 후레쉬의 바지를 발견한다.

후레쉬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한여사는 하는 수 없이 한인타운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후레쉬를 데리고 간다.

후레쉬는 주머니에 넣어둔 초콜릿 바가 생각난다.

초콜릿 바를 꺼내 한여사에게 내민다.


[아니야. 이것은 네 것이야.]


한여사는 봉지를 벗겨 후레쉬에게 도로 돌려준다.

후레쉬가 초코릿 바를 한 입 깨문다.

달콤하다.

마약을 빼앗긴 걸 이모부에게 어떻게 변명할지.

그런 걱정이 한 순간에 날아갈 버릴 만큼.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 앞에 대치하고 있는 무리를 발견한다.

흑인 갱스터들과 한인 조폭들이다.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지만, 한여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후레쉬의 손을 잡고 유유히 그들 사이를 걸어 들어간다.

심지어 두 무리에게 잔소리까지 늘어놓는다.


[로우웰, 또 사고 치면 이번에는 감옥에 오래 있어야 하지?]

[......?]

[우찬이 인석아! 너희 부모님이 아까 낮에 세탁소에서 화상을 입었다던데 여기서 이러고 말썽부리면 돼?]

[......?]

[조이. 네 나이에 잠을 푹 자야 키가 쑥쑥 크는 법이야.]


두 무리는 어이가 없다.


[할망구, 가던 길이 나 가. 자꾸 열 받게 하지 말고.]


한 여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기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은 불법 체류자 일 텐데, 사고 치면 추방당하는 거 몰라?]


평소 안면이 있는 청년들 한명 한명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하하하.

관객들의 폭소가 터진다.

다소 생뚱맞은 상황이고, 에피소드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런 일로 신경 쓰게 하지 마.]

[애들하고 노인은 절대 안 죽일 거야.]

[이 밤중에 노인네를 어떻게 구분해, 이 병신아!]

[난 달라. 난 애들은 안 죽여.]


숫제 지들끼리 옥신각신 하기 시작한다.

긴장감이 일순간에 풀려버린다.


[다음에 마주치면 둘 중 하나는 죽는 거야.]

[누가 할 소리! 꺼져! 새끼들아!]


결국 두 무리가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한여사가 후레쉬를 데리고 한인타운의 한 아담하고 깨끗한 주택으로 들어간다.

후레쉬의 옷을 벗겨 목욕을 시키고, 밥까지 차려준다.

한 여사가 손자가 입던 옷을 후레쉬에게 입힌다.


[여기는 미국이 아닌 거 같아요.]

[한국인들이 많이 살아서?]

[그건 아닌데....]

[여기도 네가 사는 동네와 똑같은 미국이란다.]

[근데 왜 우리 동네와 다르죠?]


한여사가 거주하는 동네는 빈민가와 몇 블록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도로와 주택들이 깨끗했다.

후레쉬에게 이 동네는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제이크는 왕이에요. 아파트의 지배자에요.]

[누구도 주민을 지배할 수 없단다.]

[그는 흑인 형제의 보호자라고 항상 자랑스럽게 떠드는데요?]

[누구도 우리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어. 스스로 보호해야 하는 거란다.]


거실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보며 후레쉬가 묻는다.


[예수님이 우릴 보호해 줄까요?]

[예수님은 너무 멀리에 게시지....]

[저도 총 쏘는 방법을 배워야 할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하니?]

[죽지 않으려면 스스로 지켜야 하니까요.]

[총이란 물건은 남을 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렴.]


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레쉬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한여사가 길을 나선다.

옷에 온통 피를 묻힌 새미가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새미. 이게 다..... 다쳤으면 병원엘 가야지.....!]

[내 피 아냐. 수선피우지 마. 할멈.]


일행이 늘어 세 사람 된 한여사 무리가 한인마트가 자리한 거리에 도착한다.

지금까지 다소 난잡할 정도로 시점이 이동하고 정신없이 진행되었던 영화가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라이트를 위해 한 템포 쉬고 가는 타이밍이다.

물론 관객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끼이익!


세 사람 앞을 자동차 한 대가 달려와 막아선다.

마약에 취한 제이크가 차에서 내려 후레쉬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손찌검을 한다.


짝짝!


한여사와 새미가 나서려 하자, 제이크가 바지춤에서 권총을 뽑아 겨눈다.


[끼어들지 마!]


후레쉬를 구타하는 제이크를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그때 순찰차가 나타난다.

경찰이 말려보지만, 제이크는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다.

결국 제이크가 경찰과의 몸싸움 끝에 죽음을 당한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상황.

주변으로 몰려든 주민들이 야유와 욕설을 퍼붓는다.

주민들이 흥분한다.

경찰들이 폭행으로 사망한 제이크를 서둘러 순찰차에 태운다.

거리를 빠져나가려던 순찰차를 성난 군중들이 막아선다.


탕!


순찰차를 몰고 가는 경찰이 허공을 향해 권총을 쏘며 해산을 명령한다.

군중들은 총을 쏜 것에 더욱 분노한다.

순찰차가 군중을 뚫고 간신히 거리를 벗어난다.


[경찰서로 쳐들어가자!]

[개 같은 경찰 놈들!]

[역겨운 백인 놈들!]

[멕시칸 놈들!]

[한국인 놈들도 엿 같아!]

[저기 한국인 가게가 있다!]


누군가의 선동으로 군중들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히스패닉 가게와 이탈리아인 가게에서 주인들이 총을 꺼내 저항한다.

하지만 성난 군중의 기세에 물러설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가게가 약탈당하고, 부서지는 모습을 망연자실 지켜보기만 할 뿐.

스테디캠이 그런 혼돈의 아수라장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술주정뱅이 아마드가 실성한 사람처럼 폭동 가운데서 고래고래 악을 쓴다.


[다 죽여 버려. 이 빌어먹을 동네를 모두 불태워버리란 말이야!]


한국인 조폭들이 한 여사의 마트를 약탈한다.

동포의 가게를 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폭동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서둘러 거리를 떠난다.

힘을 합쳐 가게를 지키려는 히스패닉이나 이탈리아인과 다른 행태다.

한여사와 후레쉬, 새미가 잡화점으로 돌아온다.

가게 안은 이미 누군가 털어갔다.

금전출납기를 털어간 것 외에 물건은 가져가지 않은 모양이다.


“......!"


한인학생회 유학생들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일부 학생은 류지호를 찾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왜 동포를 저런 식으로 영화에서 묘사하느냐고 당장 따질 태세다.


‘한국인 할머니가 주인공인가?’


시위대를 따라가는 스테디캠이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인근에서 몰려온 경찰들이 이 거리의 양끝 도로를 순찰차로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마치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벌인다면 당장 발포할 것만 같다.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


[다 죽여 버려! 이 빌어먹을 겁쟁이 자식들아, 이리 돌아와! 여기 백인 경찰 놈들이 있잖아!]


술에 취한 아마드가 바락바락 소리친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악에 바쳐 경찰들에게 욕설을 뱉어내는 아마드의 늙고 비루한 모습은 안타깝고 처절해 보인다.

정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누가 주인공인지도 모를 정도로 시점도 정신없이 바뀐다.


우당탕!


폭도들은 한정된 거리에서 약탈과 난동을 부린다.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는 경찰관들.

흑인 경찰관이 상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달싹거린다.

상관이 선수 친다.


[우린 저 난장판에 끼어들지 않는다. 저건 저들의 일일 뿐이야.]

[사상자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공권력이 개입해 사람이 죽으면 사회불안을 초래하지만, 저들이 죽고 다치면 연례행사가 되지. 흑인들은 쉽게 분노하지만, 분이 삭으면 빨리 체념해. 우린 저들이 이 거리를 빠져나가 부자 동네로 이동하지 못하게 저지선만 지킨다.]


저지선을 책임지는 경찰 간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 약탈과 폭력에 피해를 입는 주민들, 그 모두를 향해 공권력은 철저하게 방관한다.

몇몇 관객들이 류지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장면 전에 보여줬던 모든 것들은 일종의 속임수라는 것을.

경찰의 저 태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소 난잡해 보일 정도로 현란한 테크닉을 부린 것이다.

인종문제가 당사자들의 미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

음흉한 감독은 영화 속 등장인물 모두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 같지만, 진짜 비판하고 있는 것은 경찰로 상징되는 미국사회다.


킥킥.


태런티노가 소리 죽여 웃었다.

류지호가 미친 놈 같았기 때문이다.

저 한 장면을 위해서 수십 만 달러를 들여 온갖 난장판을 영화에서 다 쳤다.


“Do the right things(옳은 일을 하라).”


태런티노의 입에서 스팍스 리 감독이 1989에 내놓은 영화 제목이 흘러나왔다.

그가 보기에 류지호는 스팍스 리 감독의 영화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진짜 아웃사이더가 바라보는 진짜 미국의 일부다.


[저기도 한국인 할망구가 하는 가게야!]


거리를 종횡무진 하던 카메라가 한여사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잡화점 앞에는 새미를 포함한 흑인 청년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한여사와 후레쉬가 그들 뒤에서 불안한 눈으로 폭동을 지켜보고 있다.

간혹 시위대 일부가 잡화점으로 다가오면 새미와 청년들이 놈들을 쫒아버렸다.


[너희들 설마 저 한국인 할망구를 편들겠다는 거야?]

[그랜드 맘은 우리의 이웃이다. 더 다가오면 가만 안 둬.]

[야! 여기 말고도 복수할 곳은 많아!]


식료품점 한인 부부가 잡화점으로 허둥대며 달려왔다.


[우리 가게도 보호해줘. 부탁이야.]


흑인 청년들은 묵묵부답.


[나도 너희들 이웃이야! 돈, 돈을 줄게!]


이어 히스패닉 주민과 이탈리아인 주민도 새미에게 다가와 보호를 부탁한다.


[개소리 하지 마! 너희 가게는 스스로 지켜!]

[왜? 도대체 왜? 나의 가게는 안 되고, 저 할머니의 가게는 되는 건데?]

[그랜드 맘은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지. 심지어 술주정뱅이 아마드 영감까지도. 친절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할망구지만. 함께 나눌 줄 알고, 우리를 걱정해 줬다.”=]


한국인 남편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아내는 계속해서 한여사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새미, 이대로 가만히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야? 저들을 말리지 않을 거야?]

[못 말려... 할멈. 저 사람들 제대로 폭발했어.]


가게 앞을 막아선 흑인 청년들 사이에서 작고 힘없는 한여사가 안타까운 눈으로 폭동을 벌이는 주민들을 바라본다.

카메라가 잡화점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화면 사이즈가 미디움에서 풀 샷으로 점점 확장된다.

그리고 스텝프린팅 기법이 펼쳐진다.

잡화점 앞을 막아선 새미와 흑인 청년들.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한국인 할머니와 흑인 소년.

바닥에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는 한국인 부부.

총을 들고 있는 멕시칸과 이탈리안 상점주인들.

그들이 모여 있는 잡화점 앞을 폭도들이 쉼 없이 지나쳐 가고, 되돌아가고....

한여사와 일행들은 매우 느린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고, 그들의 앞을 화면 왼쪽 오른쪽을 가리지 않고 들어왔다 사라지는 폭도들의 모습은 툭툭 끊기며 늘어져 보인다.

비현실적이다.


[이런 미친 놈....]


쿠엔 태런티노의 입에서 기어코 욕설이 터져 나왔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에서 뜬금없이 스텝프린팅 기법이라니.

관객들은 눈이 어지럽고 귀가 어지럽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 위로 TV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로드니 지지직... 판결은.... 배심원.... 무죄를.... 이에 분노한 한인타운 남부지역에서 흑인주민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경찰은 베벌리힐스로 향하는 도로와 서쪽 지역을 모두 봉쇄했습니다. 한인타운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안전하며, 폭도들은 한인타운의 상점을 약탈하고 흑인이 아닌 다른 모든 인종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평소 한국인과 마찰이 잦았던 사우스 센트럴의 주민들은.....]


화면이 페이드 아웃(F.O)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류지호는 그가 기억하는 LA폭동의 원인과 진행 상황을 TV뉴스 소리라는 장치로 교묘하게 편집해 삽입했다.

화면이 밝아지며 처참한 거리 풍경이 화면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더 이상 화려한 카메라 워크는 없다.

그저 폭동이 할퀴고 간 거리를 관조하듯 보여줄 뿐.


펄럭.


한여사의 마트에 놓여있는 외상 공책이 나풀거린다.

가게 안에서 한 여사와 후레쉬가 걸어 나온다.

이 거리에 안전한 곳은 한인 마트와 밤새 총기로 무장하고 스스로 가게를 지켰던 히스패닉 가게뿐이다.

한여사는 엉망이 된 도로를 치우기 시작한다.

후레쉬가 돕는다.

망연자실 주저앉아있던 한국인 부부도 합류한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새미와 흑인 청년들도 가세한다.

히스패닉도, 이탈리아인도 그 대열에 합류한다.

연대(連帶)의 모습이다.

그때 순찰차가 거리로 들어선다.

순찰차가 서행하며 거리를 정리하는 주민들을 경찰은 선글라스를 쓴 눈으로 훑는다.

마치 빈민가 주민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후레쉬....]

[네.]

[저들의 그림자를 보렴.]


거리를 정리하는 다양한 인종의 주민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의 피부색을 볼 수 없단다. 그리고 흑인이건, 백인이건, 히스패닉이건, 아시아인이건 그들의 그림자는 모두 검은색이지?]

[할머니, 천사의 도시는 겨울이 와도 다른 곳처럼 춥지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사계절 춥고 쓸쓸한 것 같아요.]

[너와 친구들이 이 도시를 천사의 도시로 만들어보렴.]


후레쉬가 화면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마치 관객을 바라보는 것 같은 후레쉬 얼굴.

그 얼굴 위로 ‘California Dreaming’이 흘러나온다.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노래가 계속되었다.


짝짝짝.


모든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일종의 예의니까.

49분.

단편영화라고 하기에는 긴 러닝타임이다.

영화가 끝이 나자, 비로소 관객들은 이해가 갔다.

왜 영화 내내 시점을 이동하며 정신이 없었는지.

경찰 장면부터 이어진 스텝프린팅 장면, 또 이후로 이어진 에필로그에서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24시간을 롱테이크 싱글쇼트로 압축을 시켜버리다니.”

“마치 내 인생도 저렇게 짧고 허무한 것 같아.”

“지독하게 냉소적이네.”

“이방인이 보는 이 도시의 적나라한 치부로군.”

“마지막에 꼬마가 날 보고 비난하는 것 같아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어.”

“전반적으로 굉장히 현란했어.”

“난잡한 느낌이 안 들어.”


학생들의 감상평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류지호는 생각했다.


‘꿈보다 해몽인가?’


교수들은 테크닉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스타일이 난잡한 것 같은데, 그것대로 정제되지 않은 맛이 있군요.”

“롱테이크의 싱글쇼트는 좋은 시도였다고 봅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요.”

“거기에 스텝프린팅을 넣어버리니 리얼리즘과 비현실의 경계가 뒤섞여 버렸습니다.”

“난 스테디캠 커트가 연결되는 편집 포인트를 세 개밖에 못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쇼트들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어두운 부분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어두운 부분에서 끊어서 촬영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류지호는 카메라가 퀵 팬(PAN)할 때도 몇 번 끊어서 촬영했다.

카메라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화면이 왜곡되는 부분에서 편집으로 이어붙인 것이다.

이런 수법은 여러 곳에서 응용되었다.

아마드가 걸어와 잡화점으로 들어갈 때 그가 손을 뻗어 잡화점 출입구 손잡이로 손을 가져간다.

이때 인물을 잡고 있던 카메라가 아마드가 뻗는 손보다 먼저 움직여 잡화점 출입구 손잡이로 향한다.

실제로는 여기서 촬영을 한 번 끊는다.

그리고 아마드의 손이 들어오는 카메라 패닝을 찍어 편집에서 붙이면 관객에게 착시를 줘서 그냥 한 번에 촬영한 것처럼 착각을 줄 수 있다.

이 밖에도 후레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카메라 렌즈로 하레이션이 들어오는 부분에서 끊어갔다가 다시 하레이션에서부터 롱테이크를 이어붙이면 앞 뒤 커트가 처음부터 한 커트로 찍힌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부딪치며 카메라를 막았다가 떨어지는 건 아주 기초적인 눈속임이다.


‘엉망이다. 솔직히! 시점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했어.’


류지호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16mm의 거친 질감이 스테디캠 무빙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인물을 잡아먹는 느낌을 받았다.

쿠엔 태런티노가 득달같이 달려와 질문을 퍼부었다.


“아까 화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는 그 기법은 어떻게 찍었어?”


류지호는 촬영 과정과 후반작업에서 어떤 방식으로 스텝프린팅을 응용했는지 설명했다.


“죽여주네. 마치 그들이 고립된 섬 같았어. 그리고 현실 속에 비현실. 반어법이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런 식으로 영화 전체를 싱글쇼트로 찍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데... 편집이지?”

“응.”

“몇 번이나.....?”

“감독이라면 대체로 끊어서 간 부분을 모두 골라낼 수 있지.”


쿠엔 태런티노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몇 개 찾아내지 못했다.


“몇 장면은 끊어가지 않았는데, 촬영하면서 얻어 걸린 것도 있어.”

“어디서 끊어 간 거야?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부분에서 편집했다는 건 알겠는데, 무려 7분짜리 롱테이크는 한 번 봐서 모르겠어.”

“미안하지만, 그 롱테이트도 세 번 나눠서 찍었어.”


쿠엔 태런티노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괜찮은 시도였네. 퀸트가 못 알아차릴 정도면.”

“영화 한 편을 싱글쇼트로 찍는 시도는 참신해. 아니 파격적이야. 누구나 한번쯤 생각은 해봤지만, 쉽게 해볼 수 있는 짓이 아니지. 알프레드 히치콕, 러셀 드 팔마도 하지 못한 시도야.”


극찬이다.

이미(?) 미래에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버드맨>으로 알렉산더 멘더스가 <1917>로 훨씬 뛰어난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버드맨>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된다.


“히치콕이나 드 팔마에 빗대는 건 너무 나갔어.”

“장르를 규정하기 힘들어. 풍자성이 매우 강한 블랙코미디 장르인 것 같으면서도 실제 그 수위가 깊지는 않아. 그런데 어떤 의미로는 할리우드가 도달할 수 있는 풍자의 극단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풍자 하는 걸 보고 그 배짱에 놀랐어.”


쿠엔 태런티노가 쉬지 않고, 한 호흡에 말을 쏟아냈다.

그만큼 영화의 스타일에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류지호가 웃으며 얼렁뚱땅 받아 넘겼다.


“미국사회를 잘 모르니까 까댈 수 있는 거지, 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영사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 한 편 더 남았습니다!”


극장 불이 다시 꺼졌다.

원래도 예정이 되어 있던 상영이었지만, 쿠엔 태런티노 같은 불청객들은 얼떨결에 <Help Me, Please>를 보게 됐다.


“좀비다!”

“와우!”

“좀비가 지금 뛴 거야?”

“좀비가 저렇게 빠르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거야?”

“이번에 헨드헬드냐!”

“지호 저 자식과 작업하는 건 예술활동이 아니라 노동이야 노동이라고!”

“다음 영화에서는 하늘에서 뛰어내리자고 하는 거 아냐?”


<Help Me, Please>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오오!”

“미쳤어!”


마치 국제영화제에 온 것처럼 영화 상영 내개 객석이 들썩들썩했다.

류지호가 내심 투덜거렸다.


‘역시 영화는 장르영화야. 괜히 머리 시끄러운 영화 백날 찍어봐야 소용없다니까.’


작가의말

연결편이기에 자를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연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5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2) +6 22.07.07 6,100 174 24쪽
214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1) +3 22.07.06 6,302 171 22쪽
213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6 22.07.05 6,225 174 29쪽
212 제대를 명 받았습니다! +7 22.07.04 6,167 161 21쪽
211 위험한 아이들! (2) +6 22.07.02 6,033 172 23쪽
210 위험한 아이들! (1) +6 22.07.02 5,968 165 24쪽
209 게임의 법칙. (3) +5 22.07.01 6,055 175 28쪽
208 게임의 법칙. (2) +10 22.06.30 6,273 179 29쪽
207 게임의 법칙. (1) +12 22.06.29 6,216 172 26쪽
206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2) +8 22.06.28 6,091 167 25쪽
205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1) +9 22.06.27 6,134 167 23쪽
204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5) +5 22.06.25 6,066 180 29쪽
203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4) +5 22.06.25 5,788 152 24쪽
202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3) +17 22.06.24 6,005 179 27쪽
201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2) +8 22.06.24 5,874 156 21쪽
200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1) +7 22.06.23 6,176 170 22쪽
199 리더가 꼭 완벽할 필요는 없지.... +7 22.06.22 6,100 182 28쪽
198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3) +7 22.06.21 6,166 186 30쪽
197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2) +7 22.06.20 6,149 177 29쪽
196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1) +9 22.06.18 6,188 202 27쪽
195 내 친구 많이 컸네! +4 22.06.17 6,270 187 27쪽
194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2) +12 22.06.16 6,017 195 29쪽
193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1) +6 22.06.15 6,014 192 25쪽
192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3) +9 22.06.14 5,971 179 21쪽
191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2) +4 22.06.13 6,124 188 25쪽
190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1) +8 22.06.11 6,120 191 22쪽
189 Life Goes On. (6) +7 22.06.10 6,062 180 25쪽
» Life Goes On. (5) +22 22.06.09 5,904 219 21쪽
187 Life Goes On. (4) +5 22.06.09 5,673 174 26쪽
186 Life Goes On. (3) +7 22.06.08 5,910 186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