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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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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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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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카투사는 매년 2,000명 정도가 입대한다.

매달 160명 이상이 논산훈련소에 입소한다.

생일 순서대로 입대를 한다.

2월생인 류지호는 두 번째 기수로 입영통지서가 나왔다.

카투사는 일종의 자원입대다.

입대 연기는 가족의 장례나 질병 등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본과 도널드 두 사람은 류지호의 입대에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류지호가 영주권을 취득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시민권 취득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는 상황.

그걸 마다하고 현역입대 하는 것이 다소 아쉬웠다.


“군대에 갔다 온 뒤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때 군대문제가 걸리면 골치 아파지기도 하고.”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썩 좋은 판단이라고 지지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중 가봐야 지금의 선택이 묘수였는지, 악수였는지 알 수 있겠지요.”


본인들도 군인 출신이면서 류지호의 입대를 반대하는 모습이다.


“내 조국은 군대문제에 민감합니다. 만약 내가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유명인이 된다면 군 면탈 문제는 한국에서 더욱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국가가 강제로 청년들을 군대에 보내는 건 인권침해 아닙니까?”


경호원 말릭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데본 테럴이 한반도가 휴전 중임을 경호원들에게 설명했다.


“보스의 조국은 여전히 전쟁 중인 나라라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야.”


말릭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한국군에 입대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가족분들을 미국으로 모셔 와야 하지 않습니까?”


류지호가 놀란 말릭을 안심시켰다.


“한반도가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지만, 당장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걱정은 고맙지만, 이미 입영통지서가 나온 이상 되돌릴 수 없네요.”


류지호가 시민권을 따려고 시도하는 순간 한국의 톱스타들과 두고두고 비교가 될 것이다.

몇 년 후 톱스타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세 명의 남자 연예인들이 과감히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하게 된다.

그들 가운데에는 미국 시민권 포기까지 각오하고 군대에 입대해 귀감이 되는 배우도 포함되는데, 그는 병역회피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모 가수와 수십 년 간 비교가 되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심지어 선천성 심근경색을 앓고 있어 면제 판정을 받게 되는 유명 래퍼는 장군이던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입대, 현역 출신으로 만기 재대까지 하게 된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들에게 군대문제는 딜레마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중의 호감을 끌어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재벌 2,3세들도 마찬가지다.

재벌가의 자녀가 군대회피를 한 것이 기업경영에 지장을 초래하진 않는다.

다만 기업 호감도에 있어서 손해 보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류지호가 현역병으로 만기제대를 하게 된다면 향후 수십 년 동안 다른 재벌 2·3세와 비교가 될 터.

시쳇말로 수백만 예비역들에게 ‘까방권’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보스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이가 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무와 권리, 명예를 따지는 것은 우리 나이에도 쉽지 않은 신념인데 말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칭찬으로 들을게요.”


30개월은 사회에서 있을 때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반면에 군대에서는 30년처럼 느껴지는 기간이다.

그나마 외출·외박을 자주할 수 있는 카투사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맹수가 사냥감을 사냥하기 위해 숨죽이듯, 잠시 웅크리고 기다린다고 생각하렵니다. 창창한 내 미래를 위해서요.”


이미 한 차례 군대를 갔다 와본 류지호다.

아무리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약점을 제거하기 위해서라지만 재입대 결심이 쉬울 리 없다.

군 제대를 한 남자가 꼭 한 번 꾼다는 악몽이 재입대의 꿈이다.

다시 그 짓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과거로 돌아와 기억에서 희미해진 것도 많다.

군대 기억만큼은 영혼에 새겨진 모양인지 대부분 기억에 남아 있다.

희한하게도.


‘남자들에게 군 생활은 트라우마이지 싶기도 하고....’


물론 좋은 기억도 많았다.

그럼에도 좋지 않은 기억이 좋은 기억 모두 덮어버릴 정도로 지독했다.


“롤렉스 시계나 국방부 시계나 똑같이 시간은 가는 거니까.”


어차피 한 번 들어가면 때가 될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곳.

눈 딱 감고 버티면 나머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게다가 카투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류지호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창밖의 하늘을 쳐다봤다.

아침부터 햇빛 한 점 없이 우중충하더니, 지금은 먹구름까지 꾸물꾸물 몰려들어 짙은 회색으로 덧칠하고 있다.

LA는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이 아니다.

헌데 오늘은 오랜만에 비가 내릴 것 같다.

류지호가 운전하는 세단이 벨에어의 고급주택가로 들어섰다.

오늘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다.


“......”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낸시가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다.

그녀는 머리가 복잡한 상태다.

자신의 남자친구는 UCLA에 다니는 대학생이자, 투자회사 오너이면서 현역 할리우드 프로듀서다.

학교라는 틀을 벗어나게 되는 날 최고의 주가를 올릴 수 있는 유능한 남자다.

사실 현재도 거의 모든 것을 가진 남자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고, 누구 못지않은 근사한 외모와 소탈한 성격으로 많은 친구들이 따랐다.

자신과 친구들이 어릴 때부터 꿈꾸어왔던 스타의 삶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다가와 있는 사람이다.

낸시 카트와이트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 해.’


낸시가 류지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류지호는 좋은 남자다.

아니 완벽한 남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낸시는 류지호의 여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한 여성으로서 살고 싶다는 것.

류지호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그의 삶의 일부가 되는 순간 자신은 그를 내조하는 여성의 삶을 살게 될까 두려웠다.

물론 자신만의 망상일 수 있다.

자신의 남자친구는 아시아 남자치곤 꽤나 사고방식이 열려있으니까.

분명 자신의 삶과 생활을 존중해 줄 터.

그렇지만, 그녀는 겁이 난다.

신데렐라의 삶은 동화 속에서나 아름답다.

현실에서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동화에서처럼 신데렐라가 왕비가 될 순 없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언제든지 왕자에게서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할리우드에서 남자들에게 버려지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쉽게 눈 맞고, 쉽게 이별하는 인스턴트 사랑.

낸시는 파티 내내 어딘지 정신이 딴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아냐, 아무것도.”


낸시가 말을 얼버무리며 빈 와인 잔을 만지작거렸다.


“한 잔 더 할래?”

“......”


잠시 머뭇거린 낸시가 잔을 들어 올렸다.

쪼르륵.


류지호가 그녀의 복잡한 심사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무거운 가슴처럼 잔에 조금씩 채워지는 와인의 빛깔이 넘칠 듯 찰랑거렸다.


“미안해.”

“......”


무엇이 미안한지, 자신에게 왜 미안하다고 하는지.

와인 잔을 내려다보던 낸시가 고개를 들어 류지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낸시.... 너와 상의하지 않은 건....”

“괜찮아. 난 아무렇지 않아.”

“잠시 동안이야.”

“......”


잠시 동안이라는 말.

그건 결코 잠시가 아니다.

두 사람이 앞으로 헤어져야 할 시간은 3년일 될지 십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강산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무려 십년.

어쩌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대중에게 많은 것이 노출되는 연예계의 삶이란 아주 사소한 꼬투리 하나만 잡혀도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다.


“너와 만나는 시간은 너무나 행복해서 눈 깜빡할 새 없이 지난 것 같아. 한국에서 보낼 시간이 길어 보일지 모르나 항상 나와 보냈던 시간을 생각하다 보면 금방 지나갈 게 분명해.”


류지호로서는 처음 해보는 말은 아니다.

과거로 오기 전에는 ‘고무신‘ 같은 구수한 표현을 섞여서 했었고, 이번에는 고상한 표현이 담긴 영어로 말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


“지호....”


낸시의 목이 멨다.

류지호가 살포시 낸시를 안아줬다.

지난 일 년 간 낸시와 설익은 연애를 하면서 오랫동안 가져 보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다.

알게 모르게 그녀의 존재를 자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

낸시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류지호는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그와 꽤 오랜 시간을 헤어져 있어야 한다.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은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없다.

꿈속에서까지 류지호와 헤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정도다.

낸시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

장거리연애를 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그녀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갈수록 자신의 삶과 멀어지는 류지호의 삶이다.


“꼭 건장하게 돌아와야 해.”

“너도 다시 보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야한다.”


낸시는 류지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이 두 사람의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서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류지호는 점점 바빠지고 있다.

그녀를 직접 만나는 시간보다 전화 통화를 하는 날이 많아졌다.

비퍼로 연락처를 남겨도 몇 시간이 지난 뒤에나 연락이 되는 날도 있다.

류지호가 바쁜 날은 종일 연락이 두절되는 건 당연지사처럼 여겨졌다.

앞으로 그런 날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번쩍!

우르릉, 꽈앙!


하늘에서 뇌전이 터지고 뒤를 이어 천둥소리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쏴아.


세상의 시끄러운 모든 소음들이 떨어지는 소낙비에 의해 사라지면서 잠겨 들었다.

류지호와 낸시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창문 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잘 놀았다! 다들 메리크리스마스!"


끝나지 않는 파티는 없다.

벨에어 호화주택에서 열렸던 파티가 끝이 나고, 뿔뿔이 흩어졌다.

시간이 흘러 기어코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다.


추적추적.


밤새 내리던 비가 오전까지 이어졌다.

LA 공항 국제선 터미널.

그 곳에서 연인이 이별을 하고 있다.


스윽.


가야 할 시간이다.

류지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낸시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울음을 참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류지호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을 느꼈다.


와락.


류지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면서 낸시를 껴안았다.

겨우 참고 있었던 낸시는 순간 울컥했다.

그리고......


“지호....”


그저 평소처럼 부른 이름이다.

그 한마디에 잡고 있던 감정의 끈이 풀린 듯했다.


주륵.


낸시의 눈가에서 봇물이 터지듯 흐르는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류지호의 가슴팍이 낸시의 눈물로 젖었다.


“몸조심해야 해. 위험한 일에는 나서지 말고."

“편지 자주할게. 통화도 자주 하자.”


토닥토닥.

류지호는 가볍게 낸시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안녕.”

“잘 다녀올게.”


낸시는 입술에 힘을 주며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류지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한마디라도 말을 한다면 감정이 북받쳐 다시금 울음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멜로영화에서 이런 장면에서는 비가 내린다.

공항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흔한 클리셰다.

사랑은 캘리포니아 날씨처럼 눈부시게 맑고 청명한 날씨에 해야 한다.

이별은 왠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우중충한 안개라도 끼는 날 해야 한다.

그런 것이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별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을 상대에게 보이는 것이 고역일 터.

비라도 온다면 뿌옇게 흐린 날씨를 핑계 삼아 그렁그렁한 눈가를 숨기기 쉬울 것이다.

반면에 속 시원한 표정을 짓는 이별 통보자는 우산 따위로 표정을 숨길 수도 있다.


‘난 널 기다려줄 수 없다‘


라거나....


’좋은 남자가 대쉬하면 만나도 돼‘


라는 말 따위 남길 필요가 없다.

사실 헤어질 때가 되면 알게 된다.

우리는 항상 헤어질 수 있는 사이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안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둘이 너무 다른 세상 속에서 발을 맞춰가는 것은 힘들다.

낸시는 UCLA를 졸업하고 나면 LA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쉬이 올 거리도 아니고.

좁은 땅덩어리인 한국에서조차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수많은 연인들이 헤어지는 사례가 차고도 넘치는데, 장거리 연애는 말할 것도 없다.

거리가 멀어지면 사람의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헤어지게 되면 조금씩 연락이 뜸해지다가 끝내 헤어지게 될 것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장거리 연애가 성공할 확률은 무척 낮다는 사실.

사랑이란 단어가 심장에 새겨지게 되면 이별한 후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의 몇 배의 고통으로 돌려받게 된다.

그 고통은 극복하는 것도 잊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무뎌지고,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 ❉ ❉


맨해튼의 펜실베니아역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위치의 한 초고층 빌딩.

86년에 완공된 57층의 이 빌딩은 그레이엄 가문 소유다.

이 빌딩의 최상층에는 그레이엄 가문의 가주 집무실이 마련되어 있다.

류지호가 대니얼, 윌리엄 두 노인과 마주앉아 차담을 나눴다.

윌리엄 파커가 입을 뗐다.


“네 투자회사 애널리스트들이 좋은 눈들을 하고 있구나.”


류지호는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능력만 놓고 보면 G&P의 어느 누구 못지않을 거라고 자신해요.”


류지호의 군입대로 인해서 웨스트우드 GARAM Ventures의 역할이 애매해졌다.

비서 업무 기능을 일시 정지시키고 벤처 투자팀을 본격적으로 꾸리기로 했다.

뉴욕에서 Associate(대리급) 한 명과 Analyst 세 명을 채용했는데, 꽤나 괜찮은 이들을 뽑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 원석들을 어찌 얻었느냐?”

“운이 좋았어요.”


윌리엄은 부끄러움에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류지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목이 있다.

인복도 있다.

재능까지 충만하다.

윌리엄은 류지호가 올바르게 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흡족했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없는 법. 하지만 사내라면 응당 그만한 배포는 있어야지.”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제법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가치를 인정받기 바랄 뿐이에요.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재능이 빛날수록 시기와 질투는 강해지고, 파탄이 일어날 수 있단다.”

“매사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물론 나서야 할 때는 나서서 일을 처리하고 있고요. 모두의 의견이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제 판단을 믿고 밀어붙여야 할 때도 있더라고요.”


윌리엄은 흐뭇한 마음을 숨긴 채 류지호를 바라봤다.

기업이나 사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강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류지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면 윌리엄이 나서서 분명히 집어줬을 것이다.

절대로 그리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니얼 회장이 류지호의 앞에 서류를 툭 던지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넌 다른 녀석들과는 달라. 주절주절 말만 길게 늘어놓는 녀석들과 달리 결과로 확실하게 보여줘서 참 좋아.”


서류파일은 지난 1년간의 Garam Invest의 영화투자 실적 보고서다.

G&P IB 부자펀드의 일부를 받아 투자한 영화들의 실적이 실로 눈부셨다.


“너는 파커가문 뿐만 아니라 그레이엄 가문에게도 은인이다. 그건 부인할 수 없지.”

“......”

“몇 년 간 나의 시험을 잘 치렀다.”


당연한 거다.

이 세상에 완벽한 선의란 없다.


“성공을 열망하지만 절제할 줄 알고, 비천한 신세지만 선택받은 자들을 질투하지 않고, 어리지만 중년의 침착함을 가지고 있고, 이십대에 걸맞은 패기가 있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배신 할 것 같지 않다는 것. 파커나 그레이엄과 철저하게 주고받으려고 하더군.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을 철저히 억누르고.”


대니얼이 잠깐 말을 골랐다.


“숫자놀음, 또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배우면 된다. 하지만 한 인간의 정체성은 배우는 것으로 갖춰지지 않지. 넌 어리지만 너만의 정체성이 있어.”


류지호는 마음속의 부담 때문인지, 대니얼과 대화를 할 때는 항상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의도로 묻는 걸까, 혹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혹시, 혹시....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그 만큼 대니얼은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다.


“맨해튼에는 모든 게 있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들, 세계 최고의 발레, 오페라, 필하모닉, 뮤지컬이 있다. 공원이 지척이고, 전 세계의 모든 음식들을 즐길 수 있고, 술 마실 곳들도 지천이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숍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상점들도 들어서 있다. 게다가 거의 24시간 운영되는 지하철로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맨해튼에는 정말 모든 게 다 있다. 너는 앞으로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다. 특별히 더 고급스러운 걸 즐길 수도 있다. 부자니까 당연한 것이다.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도리어 눈치는 평범한 사람이 볼 테니까. 자연스러우면 된다. 그게 진정으로 가진 자의 삶이다. 소유하는 자고, 다스리는 자며, 지배하는 자의 삶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을 우습게보지 못하지.”


류지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길게 사설을 늘어놓는 이유를 얼추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물어보지. 꼬마야, 네 재능을 내게 팔아라. 아니 소꿉장난은 이제 그만 두고. 내게 와라.”

“죄송한데요. 할아버지. 저는 두 분 가문이 가는 길과 달라요. 저만의 꿈을 꾸며 그걸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겠습니다.”

“난 네가 꿈이니 이상이니 따위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너 같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놈이 그런 부질없는 것에 헛힘 쓸 거라곤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난 그저 욕심이 나는 거다. 욕심이 나니까 나이 성별 국적 따위 관심 없는 거다. 나 대니얼 그레이엄이 네 놈이 욕심이 나는 거다. 다른 건 필요 없어.”


대니얼의 눈은 욕심으로 빛나고 있다.

그럼에도 투명하고 맑았다.

순수한 갈망이다.

순간 류지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았다

여태까지 자신을 이렇게 욕심내는 사람이 있었나 싶었으니까.


“제가 할아버지께 뭘 해드려야 합니까? 저는 드릴 게 없어요.”

“영혼 빼고 전부.”

“....예?”

“넌 내게 온 재능을 바쳐 일하면서 온전한 영혼과 함께 부와 권력을 가져라. 덤으로 당장 군대를 가지 않도록 해주마.”


류지호는 내심 투덜거렸다.


‘무슨 악마와 거래하는 복수를 꿈꾸는 악당이냐?’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서부터 진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대니얼의 제안은 독이 든 사과라는 것.


“싫어요. 그냥 지금처럼 살겠습니다.”


윌리엄이 고소해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지호는 네 놈 인재 수집품에 들어갈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고 했잖아.”


놀리는 윌리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니얼이 류지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메이저라고 불리는 곳이 영화산업에서나 최고지 글로벌 기업들과 비교하면 보잘 것이 없어. 네 야망이 겨우 그 정도냐?”

“트라이-스텔라를 빅6를 모두 합친 것만큼의 규모로 키우죠 뭐.”


하하하.


윌리엄이 다시 한 번 대소를 터트렸다.


“어느 세월에? 나와 윌리엄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찌 할 테냐?”

“오래 사세요. 시간이 좀 걸릴 듯 하니까. 오래오래 사셔서 제가 그렇게 만드는 걸 지켜보시면 되잖아요. 꼭 이요.”

“이 놈이 입만 살아서는....”

“이제 저도 고급영어도 좀 한다고요.“


류지호는 언제 대니얼에게 주눅이 들었냐는 듯이 서슴없이 농담을 입에 담았다.


“할아버지, 저는 한 우물만 팔 겁니다. 댐을 만들어 물을 가둘 능력도 재주도 없어요. 그냥 마르지 않는 우물을 파서 잘 유지하며 살겠습니다. 탐욕이란 독에 오염되지 않은 맑고 맛있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요.“

“인석아! 넌 윌리엄이 하는 말은 잘도 순종하면서 왜 내 얘기는 바락바락 따지고 드는데?”

“윌리엄 할아버지는 제 인생에 간섭도 재단도 하지 않으시지만, 대니얼 할아버지는 제 인생을 멋대로 재단하시려고 하잖아요. 저 이제 어린애 아닙니다.”

“이제 겨우 법적으로 술 마실 나이가 된 주제에, 네가 인생을 알아?”

“인생이 뭐 별 건 가요?”

“윌리엄 지팡이 좀 줘봐.”

“뭐 하게?”

“이 녀석 머리통을 한 대 후려쳐야 시원할 것 같아서.”

“아이쿠! 얻어맞지 않으려면 빨리 도망쳐야겠네요. 이따 저녁 식사 때 뵐게요.”


우당탕탕!


류지호가 슬랩스틱을 선보이며, 두 노인에게서 도망쳤다.

그 뒤로 대니얼의 욕설이 쏟아졌다.

이미 집무실을 빠져나간 류지호는 그 욕을 듣지 못했다.


달그락.


대니얼 회장이 류지호가 떠난 자리를 보며 찻잔을 들었다.

그의 눈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무심했다.


꿀꺽!


“아쉽게 됐네?”


윌리엄의 놀리는 말투에 대니얼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이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딱히.”


작가의말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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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2) +6 22.07.07 6,100 174 24쪽
214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1) +3 22.07.06 6,302 171 22쪽
213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6 22.07.05 6,225 174 29쪽
212 제대를 명 받았습니다! +7 22.07.04 6,167 161 21쪽
211 위험한 아이들! (2) +6 22.07.02 6,033 172 23쪽
210 위험한 아이들! (1) +6 22.07.02 5,968 165 24쪽
209 게임의 법칙. (3) +5 22.07.01 6,055 175 28쪽
208 게임의 법칙. (2) +10 22.06.30 6,274 179 29쪽
207 게임의 법칙. (1) +12 22.06.29 6,216 172 26쪽
206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2) +8 22.06.28 6,091 167 25쪽
205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1) +9 22.06.27 6,135 167 23쪽
204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5) +5 22.06.25 6,067 180 29쪽
203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4) +5 22.06.25 5,788 152 24쪽
202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3) +17 22.06.24 6,005 179 27쪽
201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2) +8 22.06.24 5,874 156 21쪽
200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1) +7 22.06.23 6,177 170 22쪽
199 리더가 꼭 완벽할 필요는 없지.... +7 22.06.22 6,100 182 28쪽
198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3) +7 22.06.21 6,168 186 30쪽
197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2) +7 22.06.20 6,149 177 29쪽
196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1) +9 22.06.18 6,188 202 27쪽
195 내 친구 많이 컸네! +4 22.06.17 6,271 187 27쪽
194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2) +12 22.06.16 6,018 195 29쪽
193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1) +6 22.06.15 6,014 192 25쪽
192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3) +9 22.06.14 5,972 179 21쪽
191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2) +4 22.06.13 6,125 188 25쪽
»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1) +8 22.06.11 6,121 191 22쪽
189 Life Goes On. (6) +7 22.06.10 6,062 180 25쪽
188 Life Goes On. (5) +22 22.06.09 5,904 219 21쪽
187 Life Goes On. (4) +5 22.06.09 5,673 174 26쪽
186 Life Goes On. (3) +7 22.06.08 5,910 18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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