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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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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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Goes On.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이전 삶에서는 사람들이 자신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짜증나고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몹씬을 찍어보니, 할리우드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각양각색의 엑스트라들 가운데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간간이 섞여 있다.

류지호는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일일이 디렉션을 줬다.


하하하.


류지호는 실실 웃음이 나왔다.

할리우드가 시스템이 굉장히 잘 되어있긴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이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에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건성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고,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신이 났다.

조감독들이 가장 힘들지만 또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이 이런 몹씬(군중 장면)을 준비하고 촬영을 무사히 마칠 때다.

스태프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감독 역시 이런 장면을 원하는 대로 촬영하고 나면 그 성취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이 정도는 거저먹는 거지.’


전쟁 씬이나 광장 씬, 시장 씬은 이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훨씬 복잡하고 고단하고 힘들다.


턱.


류지호가 접이식 사다리 위에 올라섰다.

모든 시선이 사다리 위에 올라선 류지호에게 모여들었다.

류지호가 천천히 메가폰을 입에 댔다.


-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리허설을 해보겠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리허설을 진행했다.

류지호의 노련미 넘치는 촬영진행으로 인해 말 안 들을 것 같은 이들도 고분고분 잘 따라왔다.


- 카메라도 신경 쓰지 말고, 옆 사람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넘어져도! 옆 사람과 부딪쳐도! 절대 개의치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로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마냥 리허설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우왕좌왕 대던 현장이 정리가 되자, 본격적으로 촬영에 돌입했다.


- 그럼 진짜 촬영 들어갑니다! 리허설 한 대로만 하세요! 내가 지시한 것 외에 새로운 건 뭐가 되었든 하지 마세요! 그럼 스탠바이!


촬영현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촬영에 참여한 이들은 마치 육상트랙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정적을 뚫고 류지호의 우렁찬 콜이 터져 나왔다.


- 레디이이이!


촬영장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액션!


경찰들이 무자비한 폭행으로 사망한 후레쉬의 이모부 시체를 순찰차에 태운다.

거리를 빠져나가려던 순찰차를 성난 군중들이 막아선다.


탕!


순찰차를 몰고 가는 경찰이 허공을 향해 권총을 쏘며 해산을 명령한다.

군중들은 총을 쏜 것에 더욱 분노한다.

순찰차가 군중을 뚫고 간신히 거리를 벗어난다.


[경찰서로 쳐들어가자!]

[개 같은 경찰 놈들!]

[역겨운 백인 놈들!]

[멕시칸 놈들!]

[한국인 놈들도 엿 같아!]

[저기 한국인 가게가 있다!]


누군가의 선동으로 군중들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물러서! 쏜다!]


히스패닉 가게와 이탈리아인 가게는 주인들이 총을 들고 저항한다.

하지만 성난 군중의 기세에 물러설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가게가 약탈당하고 부서지는 모습을 망연자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허탈한 상황.

스테디캠이 그런 혼돈의 아수라장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배우들까지 포함해 60명이 넘는 출연자들이다.

폭동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류지호와 UCLA 영화과 학생들이 카메라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의 빈 공간을 분주하게 이동하며 채웠다.

이 촬영을 위해 거의 모든 UCLA TV·영화전공생들이 힘을 보탰다.


“이건 도대체!”

“뭐가?”

“죽여준다고!”


TV·영화과 학생들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촬영에 임했다.

반면에 류지호는 언제 목청껏 소리를 쳤냐는 듯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로이!”

“왜?”

“괜찮을까? 지금 이 노출?”


로이가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음. 고감도 필름 중에 가장 최근에 나온 거라 나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처럼 무지막지한 조명을 동원하지 못했다.

류지호는 노출이 부족해 어둡게 나오지 않을까 불안했다.


‘낮 장면으로 갈 걸 그랬나?’


류지호는 고개를 흔들어 부질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밤 촬영을 하다보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새벽이 찾아온다.

되돌릴 수 없다면 현재에 충실해야만 한다.

그리고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내야 한다.


[저기도 한국인 할망구가 하는 가게야!]


거리를 종횡무진 하던 스테디캠이 한 여사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잡화점 앞에는 새미를 포함한 흑인 청년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한 여사와 후레쉬가 그들 뒤에서 불안한 눈으로 폭동을 지켜보고 있다.

간혹 시위대 일부가 잡화점으로 다가오면 새미와 청년들이 놈들을 쫒아버렸다.


[너희들 설마 저 한국인을 편들겠다는 거야?]

[그랜드 맘은 우리의 이웃이다. 더 다가오면 가만 안 둬.]

[야! 여기 말고도 복수할 곳은 많아!]


식료품점 한인 부부가 잡화점으로 허둥대며 달려왔다.


[우리 가게도 보호해줘. 부탁이야.]


흑인 청년들은 묵묵부답.


[나도 너희들 이웃이야! 돈, 돈을 줄게!]

[개소리 하지 마! 너희 가게는 스스로 지켜!]

[왜? 도대체 왜? 나의 가게는 안 되고, 할머니의 가게는 되는 건데?]

[할멈은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지. 심지어 술주정뱅이 아마드 영감까지도. 친절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할망구지만. 함께 나눌 줄 알고, 우리를 걱정해 줬다. 그러니는 너희들은 어떻게 했지? 이웃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한국인 남편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아내는 계속해서 한여사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새미, 이대로 가만히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냐? 저들을 말리지 않을 거야?]

[못 말려... 할멈. 저 사람들 제대로 폭발했어.]


가게 앞을 막아선 흑인 청년들 사이에서 작고 힘없는 한여사가 안타까운 눈으로 폭동을 벌이는 주민들을 바라본다.

스테디캠이 잡화점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당연히 화면 사이즈가 미디움(M.S)에서 풀 샷(F.S)으로 점점 확장된다.

잡화점 앞을 막아선 새미와 청년들.

그들의 보호를 받는 한여사와 후레쉬.

잡화점 앞을 폭도들이 쉼 없이 지나쳐 가고, 되돌아가고....

마치 <중경삼림>에서 순찰 중이던 토니 렁(Tony Leung)이 차를 마시는 모습 앞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걸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스텝프린팅‘ 할 예정이다.

한여사와 일행들은 매우 느린 슬로우 모션으로 보일 테고, 그들의 앞을 화면 왼쪽 오른쪽을 가리지 않고 들어왔다 사라지는 폭도들의 모습은 툭툭 끊기며 늘어져 보일 터.

웡자웨이 감독의 핸드헬드.

류지호의 스테디캠.

똑같이 스텝프린팅 기법을 사용하지만 화면의 느낌이 꽤나 다를 터.


‘거친 느낌은 덜하겠지만.....’


웡자웨이가 색감의 과도한 노출 그리고 현학적이고 문학적인 대사들로 영화를 채웠다면, 류지호는 사실감과 일상어로 영화의 대사를 채웠다.

웡자웨이는 다소 뜬금없고 관객을 당황사키는 설정들을 영화에 심는다면, 류지호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웡자웨이는 홍콩반환을 앞둔 불안하며 혼돈의 홍콩을 담기 위해 극단적인 핸드헬드로 피사체마저 불분명하게 촬영한다면, 류지호는 인물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빈민가를 함께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웡자웨이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눈이 어지럽고 귀가 어지럽고 정신이 어지럽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관객은 그 혼란과 불안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감독의 의도와 기법이 적절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류지호의 <Life Goes On> 정반대다.

비루하고 불편한 일상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중경삼림>은 한국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게 된다.

극단적인 영화의 스타일은 한국관객에게 상관이 없다.

영화의 내용이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였고, 감성적인 대사를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등장해 펼치는데다, 음악까지 기분을 좋게 만든다.

이 당시 한국의 영화관객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만약 류지호가 이번에 찍은 영화를 한국의 관객에게 보여준다면 작가영화라거나 B급 영화 취급 받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국계 배우가 나오니까 초반에 반짝 영화를 봐주려나?”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이번 영화는 장르영화처럼 재미와 흥미를 유발할 요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스텝프린팅’은 일반적으로 웡자웨이 감독의 전매특허처럼 알려졌지만, 사실 그 전에도 많이 사용됐었다.

다만 웡자웨이 감독이 적극적으로 인물과 공간, 시간을 표현하는 영화 기법으로 응용하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고 보는 게 옳다.

당연히 류지호도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엘리펀트 맨>이 흑백으로 스텝프린팅을 선보였지.’


류지호가 기억하는 ‘스텝프린팅‘을 이용한 영화가 <엘리펀트 맨>이다.

흑백으로 촬영한 이 영화에서 코끼리에게 공격 받은 장면을 데이브 린치(Dave K. Lynch)감독은 ‘스텝프린팅’을 이용해 보여줬다.

‘스텝프린팅‘ 기법을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장면에서 이용한 것이다.

웡자웨이 감독의 미학의 핵심은 시간 그리고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90년대 연출한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보통 어떤 과거를 기억해낼 때 그 과거의 순간들을 연속적인 모습으로 재생시키지 못한 채 불연속적인 순간들의 지속으로 기억해낸다.

이것이 바로 ‘스탭프린팅’ 미학의 핵심이다.

마치 끊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지속되는 기억의 재현 방법.

웡자웨이 감독이 ‘스텝프린팅’을 자신의 영화에서 구현한 이유다.

반면에 류지호는 조금 의도가 복잡했다.

한 여사라는 할머니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런데 실제 LA폭동 당시 류지호가 만든 상황과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수많은 점포들이 약탈당하고 불탈 때 안전했던 우범지역의 한인 마트.

마트 사장인 한인 노부부는 평소 주변 흑인 청년들에게 신망이 높아 폭도들이 온 동네에서 난리를 칠 때 청년들이 자원해서 노부부 가게를 보호해 줬다.

또 LA폭동으로 인해 한인들이 흑인사회에 관심을 기울이며 노력을 하기 시작하면서 1996년 뉴욕에서 벌어진 대규모 흑인 시위 때는 일부 흑인 단체 사람들이 한인 상점 앞에 파견되어 시위대의 돌발행동에서 한인 상점을 보호하기도 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들.

류지호의 시간과 기억은 웡자웨이 감독이 지향하는 것과 달랐다.

회귀자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

그 뒤죽박죽인 시간들 속에 과거인 듯 미래인 듯 경계가 애매한 기억들.

그것을 영화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이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지 모르는 현실의 사건.

그걸 비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것.

류지호로서는 <Life Goes On>의 엔딩 시퀀스에서 ‘스텝프린팅’ 만한 표현 기법이 없어보였다.


- 커어어엇!


류지호의 외침이 메가폰을 타고 온 거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류지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이 내려앉기 전까지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마지막 커트를 촬영해야 했다.


“레디! 액션!”


시위대를 따라가는 스테디캠이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경찰들이 이 거리의 양끝 도로를 순찰차로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벌인다면 당장 발포할 것만 같다.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


[다 죽여 버려! 이 빌어먹을 겁쟁이 자식들아, 이리 돌아와! 여기 백인 경찰 놈들이 있잖아!]


술에 취한 아마드가 바락바락 소리친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악에 바쳐 경찰들에게 욕설을 뱉어내는 아마드의 늙고 비루한 모습은 안타깝고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와아아아!


폭도들은 한정된 거리에서 약탈과 난동을 부린다.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는 경찰관들.

흑인 경찰관이 상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달싹거린다.

상관이 선수 친다.


[우린 저 난장판에 끼어들지 않는다. 저건 저들의 일일 뿐이야.]

[사상자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공권력이 개입해 사람이 죽으면 사회불안을 초래하지만, 저들끼리 죽고 다치면 연례행사가 되지.]


지난 몇 번의 흑인폭동에서 경찰들의 무자비한 폭력진압은 두고두고 비판 받고 있다.

언젠가부터 공권력은 진압에서 방관으로 혹은 폭동이 진정될 타이밍에 개입하는 것으로 바뀌는 느낌을 주고 있다.

LA 폭동에서는 더 비열한 짓거리를 했지만, 현재는 류지호만 알고 있는 사실일 뿐.

저지선을 책임지는 경찰 간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흑인들은 쉽게 노하지만, 분이 삭으면 빨리 체념하지.]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 약탈과 폭력에 피해를 입는 주민들, 그 모두를 향해 공권력은 철저하게 방관한다.


“커엇!”


류지호의 오케이 사인으로 모든 촬영이 끝을 맺었다.

이내 거리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후우.


모두가 숨 가빴던 촬영을 뒤로 몸과 마음을 수습했다.

UCLA 영화과 학생들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대규모 군중장면의 흥분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류지호가 영화에서 보여주게 될 것 모두는 사실 이 한 장면을 위한 것이다.

미쳐 날 뛰는 폭도들을 왜 진압하지 않는가.

죄 없고 힘없는 시민들을 왜 보호하려 하지 않는가.

저들 모두가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일 진데, 우리는 그들의 삶을 왜 배려하지 않는가.

만약 이 영화가 LA폭동 전에 상영될 수 있다면.

이 문제제기를 통해 누군가 높으신 양반들이 각성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전 삶처럼 폭동을 방치하지 않기 바랐다.

그럴 리가 없음을 류지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웃의 삶에 관심이 두지 않기 때문이다.


Do the right things(옳은 일을 하라).

Do the things right(바르게 일을 하라).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이 두 문장.

전자는 올바른 일을 선택해 그 일이 가져올 결과까지 고려해 일을 해 나아가는 것.

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 나아가는 것.

얼핏 같은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다른 말이다.

류지호는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낸 어떤 존재가 사명을 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침묵해야 할까.

세상과 사회를 위해 뭔가 작은 것이라도 해야 하지는 않을까.

류지호는 사회운동가도 계몽가도 아니다.

그럴 생각이 없다.

다만 직업이 영화감독이다.

성공한 영화는 사회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독재자들의 선동도구가 되었던 적도 있고, 사람들의 힘들고 고단한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고, 트렌드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변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류지호의 영화가 그런 것을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 단 한사람이도 감명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내 영화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


영화감독이란 직업을 가진 사람은 출세의 욕망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선사하고 때론 위로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 ❉ ❉


지글지글.


불판에서 불고기가 구워졌다.

류지호의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와 배우들이 쫑파티를 벌였다.

파티를 위해 한인타운의 불고기집을 통째로 빌렸다.

류지호는 고생한 친구들과 배우들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Jay, 다음에는 좀 더 근사한 역할로 불러줘.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배우란 말이야.”


타이론 터너가 류지호에게 호기롭게 말했다.

그는 실제 사우스 센트럴 LA 출신이다.

고등학교 때 만난 여자 친구와 사이에서 난 딸이 한 명 있다.

타이론 터너는 키가 작은 편이다.

전형적인 아프리카계처럼 입술이 두툼하고, 머리카락이 몹시 곱실거렸다.

흰 치아를 한껏 드러내고 웃을 때면 꽤나 순박해보였다.

다만 욱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촬영 중에 류지호와 몇 번 충돌했다.

주먹다짐을 벌일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꽤 분위기가 흉흉해지기도 했다.

둘 모두 뒤끝이 있는 성격은 아니다.

영화촬영이 끝날 즈음에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넌 좋은 배우가 될 거야. 내가 장담해.”

“날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어봐. 난 춤도 잘 춰. 갱스터도 소화할 수 있어.”

“하하. 지금은 널 위한 영화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 이미 영화 한편에 출연이 결정되었다면서? 왜 조바심을 내는 거야?”

“난 돈을 벌어야 돼. 많은 일감이 필요하다고.”

“아내와 딸 때문에?”

“그것도 그렇지만. 난 성공해서 베벌리힐스에 집을 구해 살고 싶어. 고등학교 동창 몇 놈은 동네를 벗어나 오렌지카운티로 이사를 갔어. 그 놈들은 다시는 동네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나와 내 딸도 그러길 바라. 딸을 내가 자란 동네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아. 누구라도 그럴 거야.”


빈민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곳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쉽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같이 자라난 막역지우도 사회적으로 조금만 성공하면 대학가고 직장 잡으면 미련 없이 빈민가를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집안에서 자라난 형제자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남아있는 이들은 억하심정이 끓어오른다.

그런데 자신들이 매일 이용하는 동네 가게 주인들을 보면 할아버지 대에는 유태인, 아버지 대에는 이탈리아 사람, 자신들 대에는 한국인으로 계속 인종이 바뀌어 왔다.

상점을 운영하던 이들도 한번 떠나면 이후로 빈민가에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다.

억하심정이 두 배로 끓어오른다.

빈민가 주민들이 다른 인종에게 걸핏하면 트집을 잡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게다가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배운 수법이 있다.

특히 한국인 가게 주인들을 가장 쉽게 화나게 하는 방법은 바로 어눌한 영어를 조롱하는 것.

가끔 ‘네 나라로 돌아가 버려‘라는 양념까지 섞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인들은 물건을 훔치고, 강도행각을 벌여도 경찰에 신고도 잘하지 않는다.

보복이 두려우니까.

빈민가 흑인들 입장에서는 만만한 것이고.

계속해서 한국인 상점을 트집 잡고 절도를 벌인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너같이 지독하게 영화 찍는 놈은 처음이야.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잘 다루지?”

“너희들이 착해서 그래.”

“푸하하하!”


타이론 터너를 비롯해 흑인 배우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내 할머니가 5살 이후로 한 번도 해주지 않던 말을 Jay가 했어.”

“넌 5살이야? 난 3살.”


녀석들은 류지호에 말에 지들끼리 수다를 쏟아냈다.


“흑인 지역에서 사는 건 가끔 재미가 있었어.”

“킥킥.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절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못된 짓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

“네가 한 일은 나쁜 짓 축에도 끼지 못할 걸.”

“죽는 거 걱정 안하고 살았냐고?”

“겁났지. 그래서 이렇게 그 동네를 빠져나와 배우가 되었잖아.”


한인타운에서 불고기와 각종 한국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에 젊은 배우와 스태프들끼리 클럽으로 장소를 옮겼다.

류지호와 낸시는 30분가량 놀다가 클럽을 빠져나갔다.


“가는 거야?”


타이론 터너와 몇몇 배우들이 따라 나왔다.


“피곤해서 다리가 풀릴 지경이야.”

“하하. 엄살은....”


류지호가 흑인식 인사법으로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할리우드에서 만나자.”

“난 이미 할리우드 배우야. 애송아.”

“겨우 단역 출연하는 주제에?”

“다음에도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 Jay.”

“시시하게 놀고 있으면 나중에 날 만날 수 없을 거다.”

“쳇! 잘난 척은.”

“성공한 사람은 신께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야. 스스로 노력한 사람이지.”


작은 키의 타이론 터너가 류지호를 올려다보며 농담을 던졌다.


“알아. 내가 성공해서 저 위에서 널 내려다 봐 주지. 그때 실컷 놀려줄게.”

"하하. 즐기다 돌아가. 착하게 굴고.“


류지호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기 전, 한인타운을 돌아봤다.

술기운에 류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핸드헬드 카메라의 흔들리는 화면 같다.

한인 이민 1세대들은 억척스럽게 지난 시간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왔다.

오래전 미국으로 넘어온 세대는 내 몸 부서지는 것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 크는 것 보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앞으로 수년 간 교포 사회는 시련을 맞게 된다.

그 시련기 동안 살아남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것에서 더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한민족이 미국 스스로 풀지 못했던 숙제인 인종갈등을 극복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노력해야만 한다.

이 땅에서 한인 후손들이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부우웅!


류지호와 낸시를 태운 차량이 베벌리힐스를 지나쳤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며 류지호는 흑인 빈민들의 삶을 조금, 아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솔직히 그들의 삶을 공감하기 무척 어려웠다.

자신이 어릴 적 달동네에서 성장했음에도 그랬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공감이 되어야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화가 치밀기도 했다.

누군가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과 동정을 보낼 순 있다.

그런데 구원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

흑인 빈민가 사람들은 남 탓만 한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


절레절레.


류지호가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눈동자가 조금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스테디캠처럼 부드럽고 흔들리지 않는 시야로 돌아왔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이고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이다.

류지호는 IBT 창업자 헨리 게이츠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받아들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불공평한 세상을 바라보며 류지호는 입맛이 매우 썼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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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6.08 09:50
    No. 1

    잘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요리선생
    작성일
    22.06.08 10:29
    No. 2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의 뜻은 '충칭의 빌딩숲' 정도가 될 것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랑과 소소히 사는 사람 이야기이다.
    영어명은 'Chungking Express'로 충칭맨션과
    주인공이 가던 미드나이트익스프레스라는 식당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왕감독은 영화제목을 4자성어로 붙이기를 선호 했다는데
    열혈남아, 이비정전, 동사서독, 춘광사설, 화양연화, 일대종사...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恋する惑星(사랑하는 행성)'라는 제목으로 상영하였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막걸리먹자
    작성일
    22.06.08 13:43
    No. 3

    착하고 굴고------>착하게 굴고 인듯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4 트뤼포
    작성일
    22.06.11 13:04
    No. 4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루시오엘
    작성일
    22.06.08 16:35
    No. 5

    잘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07.06 13:33
    No. 6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3 雲祖
    작성일
    23.05.29 02:33
    No. 7

    지난번 글이 더 재밌었다. 어줍잖게 실명 바꿔서 리메이크라 명명한 그냥 성의없는 긁.. 그대로 갔다쓴건 오타도 없네.
    삼류지만 회귀한 감독으로서의 고뇌(회귀전 유명 감독의 연출방법이 벽이라 느낀다)가 있어 자기만의 연출 창작으로 행하고프다 했는데, 진행은 회귀전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것저것 시도(학생으로 포장) 하는 것이 결과네.
    몰입도 높이려면 만든 인물이나 기업명은 실명 사용하는게 좋겠습니다.
    아쉬워서 한글 씀.

    찬성: 0 | 반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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