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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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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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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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군복무 중임에도 류지호는 꽤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년 넘게 <Collapse>에 매달렸고, WaW 픽처스의 극장사업 진출을 지휘했다.

그러는 동안 무더운 여름을 잘 넘기고, 곱게 물들었던 단풍까지 지고 슬슬 겨울을 대비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외박을 나온 류지호가 모처럼 여의도 이사회의장 집무실을 찾았다.


“일요일은 좀 쉬어. 동방위야.”


류지호가 한소리 하자, 즉각 되받아치는 황재정이다.


“사돈 남 말하시네. 미군방위 주제에!”

“방위가 위수지역 막 벗어나도 되는 거냐?”

“그런 지는 인천을 밥 먹듯이 내려가면서.”

“난 카투사거든.”

“벼슬이냐? 현역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안 미안해. 난 이미 한번 X뺑이 친 전적이 있어서. 국방부를 위해 할 만큼 했어 난.”

“뭔 개소리야?”


류지호는 대답 없이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커피?”

“땡큐.”


류지호가 커피를 손수 내려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아라 사춘기 안 끝났냐?”

“응.”

“순호하고 다르지?”

“사내 녀석하곤 아무래도 다르지.”

“이거 볼래?”


류지호가 황재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온GP신탁투자에서 올라 온 보고서야.”


류지호가 서류를 슬쩍 들춰봤다.


“이야, 오늘 따라 아메리카노가 왜 이리 달달~ 허냐?”


커피가 단 것이 아니다.

빼곡하게 적혀 있는 보고서의 숫자들이 달달했다.

가온GP투자신탁의 CEO 노아 시거를 비롯해 주요 임직원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 값을 했다.

그들뿐만 아니다.

한국에서 뽑은 직원들의 학벌, 경력도 어디하나 빠질 것 없는 인재들이다.

직원들이 월가의 투자시스템 적응에 애를 먹을 줄 알았다.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 애널리스트들은 월가의 투자시스템을 배우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당시만 해도 한국의 금융투자 분야는 주먹구구식인 면이 많았다.

특히 80년대 대량으로 만들어진 소위 개미투자자들이 문제다.

개미투자자들은 투자가 아닌 투기를 했다.

큰손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쪽박을 차면서도 주변에 주식 대박을 맞은 몇 사례를 보며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빚까지 내서 주식시장에 돈을 넣고 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망조‘가 들렸다고도 했다.


“주식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우량주에 장기투자 하는 것도 아니고.”


황재정이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그런 바보들이 있으니까 가온GP가 돈을 버는 거거든!”


맞는 말이다.

주식시장에서 모두가 따는 일은 없다.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투기가 아닌 투자임에도.


“그런데다가 외국인 주식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잖아. 전문지식이 없는 개인투자자들은 절대 이익을 볼 수가 없어.”

“대기업 우량주식을 사서 10년짜리 정기예금이라고 생각하고 묻어두면 될 텐데.....”

“말도 마. 8월에 아주 난리가 났었다.”


올해 8월 12일부터 대통령이 공약한 ‘금융실명제’가 전면 실시되었다.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할 수 있다는 이 조치로 증시에 있는 부정한 돈이 빠져나갈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른바 ‘10월 위기설’이 금융가에 퍼졌던 것.


“12일부터 보름 정도인가.... 종합주가지수가 8.9%나 빠졌어. 그 때문에 가온GP는 노났지만.”


종합주가지수가 65포인트 하락한 그 기간에 가온GP투자신탁은 알짜배기 주식들을 상당히 많이 매입할 수 있었다.

'10월 위기설'은 금방 진정됐다.

외국인과 기관이 매수에 나서자 보름 만에 주가가 원래대로 회복됐다.

공포심으로 투매한 개인투자자들은 그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금융실명제 전면 실시 초반에 가명 혹은 차명 계좌의 비율은 시가총액의 2%인 6~7조원 규모에 불과했다.

참고로 금융실명제 실시 후 대략 1년이 흐른 1994년 11월 종합주가지수가 1145포인트까지 오르게 된다.

어딘가에 은밀히 잠자고 있던 지하자금 일부와 외국자본의 증시 유입 때문이다.


“블랙먼데이를 놓친 건 두고두고 아깝다. 그때 우리가 지금의 100분의 1의 돈만 있었어도 지금 쯤 대유 부럽지 않았을 텐데.”

“그때 너희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술·담배하고 날라리짓 하고 있을 때였거든.”

“누가?”

“너님이!”


황재정이 슬그머니 류지호의 시선을 피했다.


“항구를 떠난 배, 못 탔다고 아쉬워 할 필요 없어. 다음 배편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또 그 분이라도 오셨냐?”

“그 분은 개뿔. 돈이 돈을 버는 것은 맞아. 근데 정보가 없으면 돈을 제대로 못 굴려."

"정보? 찌라시 말하는 거야?“

“진짜 정보! 뉴욕의 G&P 조사부는 거의 안기부 수준이더라.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전 세계 모든 정보가 다 들어오는 것 같아.”

“일개 기업 부서가 정보기관 수준이란 말이야?”

“정부기관만 하겠냐마는. 다만 경제 분야 정보를 해석하고 가공하는 능력은 장난 아닌 것 같아.”

“갈 길이 머네.”

“우리가 세계적인 금융사들이나 기업들과 경쟁할 것도 아니고. 지레 겁먹지 말자.”

“내가 볼 때는 언젠가 그렇게 될 것 같은데?”

“몰라. 난 영화만 생각할래.”

“회장이라는 놈이 할 말이냐? 딸린 식구가 몇 인데?”

“에드워드 버펫도 투자만 하지 경영에 간섭 안 해. 내가 미국에서 리틀 버펫이라고 불리는 몸이시다.”

“지랄한다~”


류지호가 등을 소파 깊숙이 기대며 짐짓 거만하게 말했다.


“황 실장, 감히 의장님한테 개기지 말고. 겸손하게 핵심만 추려서 설명 해봐라.”

“네네.”


황재정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금융실명제로 혼란스러운 기간 동안 과감히 주식을 매수해서 오늘 시점에서 상당한 수익을 봤어. 그리고 증권거래법 200조라고 있는데, 일반인의 주식 대량소유를 제한하는 법이야. 경영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건데, 폐지될 거란 소문이 여름부터 퍼지기 시작했어. 이 제도가 폐지되면 적대적 M&A가 쉬워져. 그 기준이 기업의 청산가치가 되기 때문에 눈치 빠른 투자자들이 자산주 사냥에 나섰지.”

“자산주라.....”

“예를 들어 만수제강이란 회사가 있어. 우리 투자팀이 계산한 BPS(주당순자산가치)가 4만 7천원인데, 실제 주가는 3만원인 거야. 그걸 매입했더니 3만원에 출발한 주가가 23일 연속 상한가를 치고 지난달에 12만원을 찍었어.”

“휘유! 거 참 살벌하구만.”

“그게 끝이 아니야. 선창기업, 방림, 경남실업, 충남방직 같은 자산주 종목들도 상승 대열에 동참했지. 같은 기간 선창기업은 1만 6천원에서 출발해 37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해서 두 달 만에 8만원을 찍었어.”


참고로 만수제강, 선창기업 등은 모두 부산에 있다.

부산지역 회계사 모임에서 자산주 종목이 발굴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불던 자산주 바람은 부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방림의 경우는 구로동 본사 부지가 아파트로 재개발된다는 소문만으로도 주가가 뛰더라.”

“누군가 돈을 땄다면 누군가는 잃었겠지?”

“개인투자자들은 자산주 개념이 없어서, 구경만 하다 상승 막바지에 추종 매수해서 손해만 잔뜩 봤나봐.”


류지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식도 공부하면 돈을 벌 수 있긴 한가.....?”


자신에게 묻는 말이 아니기에 황재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또한 우량 계열사 주식을 보유한 지주회사도 관심의 대상이었어. 오성화재, 뉴월드백화점, 백설제당은 6개월 만에 평균 3배 상승했지. 이 외에도 SBS 지분 30%를 보유한 대용건설과 데이콤 주식을 보유한 극동시멘트도 지주회사로 분류되어서 주가가 상승했어. 대용건설은 정부의 케이블TV업체 선정과 지방 민영방송국 허용으로 인해 1만8천원이던 주가가 단번에 8만7천원으로 급등했지. 그 외에도 삼영전자, 고려주철관, 한국통운, 혜연 등의 주식도 매입했어. 태성산업 투자도 기대감이 크대. 주당순자산이 6만 2천원인데 주가는 1만 6천원에서 매입했거든. 이건 당장 폭발적으로 주가가 뛰지는 않고 있는데, 외국인 투자자와 일반투자자들이 달려들면 금방 5만원을 찍을 거라더라.”

“암튼 잘하고 있다는 거잖아?”

“민병길 고문님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어.”

“연말에 보너스 팍팍 풀어야겠네.”


천리포수목원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던 민병길을 류지호가 설득했다.

가온GP투자신탁의 고문으로 어렵게 모실 수 있었다.

민병길은 외국인에게 국내 주식시장을 개방하기 전부터 국내 여러 증권회사 고문으로 근무하며 투자 상담을 했던 인물이다.

철저하게 기업의 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종목에만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저 PER(주가수익률) 종목과 함께, 자산가치주 또는 자산주라 불리는 저 PBR(주가순자산비율) 종목들에 주로 관심이 많았다.

한국 실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민병길과 월가에서 검증된 노아 시거가 힘을 모으면서 꽤 괜찮은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투자 성향은 어때?”

“고문님은 보수적인 투자 성향을 보이시는데, 노아 시거 대표는 굉장히 공격적이야. 다루는 자금의 규모가 작아서 손해가 발생하면 다른 종목에서 단숨에 복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더라.”

“미국에서 몇 천억씩 딜을 하던 양반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


황재정이 벌떡 일어서서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꼬집어 줄까? 아님 뒤통수라도 한 방.”

“왜?”

“안 믿겨 질까봐.”

“장난 하냐?”


류지호가 보유하고 있는 우량주들만 팔아도 강남의 초고층빌딩을 몇 채 올릴 정도다.

G&P와 합작으로 설립한 가온GP투자신탁회사는 1년도 안 돼서 자산과 운용자본 모두 몇 배로 불어났다.

자수성가 수준이 아니라 ‘개천에서 용이 나서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격이다.

그럼에도 류지호가 매우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황재정은 그 모습이 듬직하면서도 한편으로 무서울 때가 있었다.


“자식이.... 빈 말이라도 한 번 쳐보라고 해보지.”

“어허, 존엄하신 의장님 옥체에 손을 대? 비서실장 나부랭이가 어디서 감히!”

“얄미운 놈.”

“빨리 제임스 파커나 매튜 그레이엄처럼 유능해 져라. 그래서 네가 나 대신 이런 보고 좀 들어라. 엉아는 영화만 하게.”

“내가 홀랑 말아먹으면?”

“말아먹지 말고, 비벼 먹어. 아! 비빔밥 먹을래?”

“고등학교 때는 애늙은이 같더니 어째 나이가 들면서 반대로 철이 없어지는 것 같냐?”


류지호가 수염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점잖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허허.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네.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일일이 보지 않아도 훤하며, 몸소 행하지 않아도 이루는 법이라네.”

“닥쳐! 어디서 되도 않는 놈이 함부로 노자 말씀을 갖다 붙여.”


벌떡.


류지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왜?”

“비빔밥이나 먹으러 가자. 갑자기 매운 게 땡겨.”

"비빔밥이 매운 음식이었냐?"

"고추장 많이 비비면 맵겠지."


황재정은 진심으로 류지호의 뒤통수를 후려칠까 고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가 외투를 챙기며 중얼거렸다.


“아라야, 큰오빠가 너희들 먹여 살리려고 이렇게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오바 한다.”

“까칠한 놈.”

“실없는 놈.”


류지호와 황재정이 투덕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본래 군생활을 하면 시간이 더럽게 안 가야 정상이다.

그런데 류지호의 군생활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버라이어티한 일들에 관여를 하다 보니 시간이 잘 가는 모양이다.

지루함에 몸서리치고, 힘들어 하고, 안달복달하면 시간이 참 안 간다.

그런데 일분일초가 아깝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다.

외출·외박은 어느 샌가 시들해졌다.

중요한 가족모임이나 회사 중요 업무 외에는 자제했다.

류지호는 AFKN 근무에 집중하면서 틈틈이 미국에서 공수되는 일간지와 각종 잡지를 읽었다.

인문학 및 예술서적을 읽고, 복학 후를 대비해서 선행학습을 했다.

미군 병사들과 함께 운동도 열심히 했다.

미군 병사들에게 기초적인 태권도 품세를 가르치기도 하고, 함께 짐(gym)에서 근육을 키우기도 했다.

어디나 소위 골통이 있게 마련이다.

백인우월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류지호에게 골통 짓을 하는 흑인병사들 중 LA에 가족이 살고 있는 일부를 선별해서 그 형제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무지하면 편견이 생기고 두려움에 빠져. 그로 인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이 생기는 거야. 너희 형제들이 빈민가에서 세상 탓만 한다면 절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할 거다.”


류지호가 LA에 설립한 장학재단을 통해 형제가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을 알게 된 골통 흑인병사 몇 명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미군 병사 가족에게만 장학금을 주는 것은 아니다.

류지호는 카투사 중에서도 똘똘하고 성격도 좋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은 후임들을 골라서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고, 제대 후 장학금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투사 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중앙선발고사가 만만하지 않았다.

시험이 어려운 만큼 카투사에 뽑힌 이들의 학벌이 좋았다.

때문에 서울 상위권 대학 출신 합격률이 높았다.

류지호 입장에서는 카투사들이 한국 사업의 신입사원 후보들이나 다름없었다.

학벌 좋고, 영어 되고, 성격도 서글서글한 청년인재를 군생활 동안 본인이 실제 겪어보면서 추려낼 수 있는 기회라고 할까.

미국 유수의 대학 학부를 마치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카투사에 입대한 몇몇 후임들의 경우는 Garam Invest가 석·박사과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나중에 류지호의 미국 회사에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들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 받고 국제적으로 활동하게 된다면, 류지호에게도 유용한 인맥이 되어줄 테니까.


“오늘 외박 안 나가?”

“너무 자주 나가서 집에서 그만 나오랍니다.”


후임의 대답에 류지호가 킥킥거렸다.


“외박 나갈 수 있는 애들 좀 모아봐.”

“뭐 하시려구요?”

“오랜만에 다 같이 나가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게.”

“전부 다요?”

“PT통과 못한 애들은 어차피 못 나가잖아. 가능한 애들만.”


그렇게 해서 용산 제1통신여단에서 근무하는 카투사 중에서도 류지호와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이들이 함께 외박을 나왔다.

카투사는 제대할 때까지 마냥 편할 것 같지만, 보직에 따라서 고생하는 이들도 많다.

용산 게리슨이 겉으로 보면 참 아름답고 화려해 보인다.

근데 미군들이 쓰는 하루 기름양이 장난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일제강점기부터 일본군 진영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미군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규모가 더욱 거대해졌다.

지하에 얼마나 많은 송유파이프가 지나가고 있는지 미군도 모른단다.

일본군부터 미군까지 80년 넘게 사용하면서 어떤 수준까지 토양과 지하가 오염되어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일본군이든 미군이든 용산은 자기네 땅도 아니다.

한국 측에서 아무런 법적 규제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각종 오염물질을 아무렇게나 취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일인데.... 누구 하나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네.’


10여 년이 훌쩍 흐른 후에 그와 관련해 영화가 한 편 만들어지긴 한다.

바로 <괴물>이다.

어떤 정신 나간 여류평론가가 그 영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최초로 기록될 합법적인 반미 오락영화의 탄생!


반미영화든 뭐가 됐든.

미군 부대 오염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영화이긴 했다.

류지호가 알기로 SOFA 규정에 미군이 사용하던 부지를 반환할 때 정화를 해주고 돌려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럼에도 존 트럼프 같은 괴상한 대통령 시기에 용산기지가 반환된다면 그런 조항은 가볍게 무시하고 한국에 돌려줄 것 같았다.

한국에서 알아서 정화작업을 하긴 하겠지만, 조금 걱정이 들기도 했다.


‘오염도 오염이고, 미세먼지도 장난 아닌데,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서울에서만 살겠다고 기를 쓰는지....’


어쨌든 대부분의 카투사들은 정말 열심히 일한다.

아무리 영어 잘해도 미군보다는 잘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빨리 업무를 배우려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카투사들은 각 섹션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지가 강하다.

은근히 미군병사들과 경쟁의식이 있다고 할까.

그래서 악착같이 한다.

5시 퇴근이지만, 칼퇴근하는 카투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학벌이 우수한 카투사가 미국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심지어 무식한 미군 병사와 업무 경쟁에서 지면 그처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으니까.

개인적인 존재감과 사회적 존재감이 충돌한다고 할까.

미군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뭐든 기를 쓰고 하려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


“얘들이 나보다 영어는 잘하지만 일은 못해요. 아니 일로 걔들한테 지기 싫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양놈 좋은 일 시키는 거잖아요.“


카투사 후임들이 류지호에게 털어놓은 말들이다.

경쟁심과 자괴감이 동시에 드는 그 모순된 마음들.

부대 밖에 나갔을 때 겪는 시선도 부담스럽다.

아직까지 카투사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다.

군대 생활 편하게 한다는 부러움.

미군 방위라는 질투 섞인 비아냥거림.

용돈이 넉넉한 카투사들은 주말에 집에도 자주 가고, 사회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전투병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류지호와 함께 생활하는 카투사들은 일과 뒤에 대부분 공부를 하는 편이다.

어쨌든 류지호는 용산기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몇 명의 똘똘한 인재들에게 시쳇말로 침을 발라 놨다.

그들이 사회에 나가 제 몫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모두가 다 출세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설마 점찍은 이들 중에 단 한 명도 못 건질까.

돈으로 못 얻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과의 의리다.

단 한명의 후임이라도 얻게 된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다.

과거로 돌아오면서 한국의 학교 후배가 거의 없게 된 류지호다.

카투사 후임들이 후배나 마찬가지다.

나이와 상관없이.

군복무를 함께 한 것에서 오는 동질감으로 의리가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집안이 좋든 좋지 않던 후임들을 잘 챙겨주었다.


“밤늦게 돌아다니다 공연히 사고에 휘말리지 말고.”

“잠시만요.”


김석훈 이병이 가방에서 두툼한 원서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요새 읽으실 책이 없다고 하셔서....”


경제학으로 미국에서 최고로 치는 대학이 예일이다.

김석훈은 그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다 입대했다.

류지호보다 두 살 형이다.

다만 두 사람 사이의 계급은 하늘과 땅차이다.


“.....음.”


김석훈이 건넨 책은 1944년 첫 출판된 ‘게임 이론과 경제적 행동(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이었다.

이 책은 게임 이론에 관한 최초의 책이자 최초로 경제학에 게임 이론을 응용한 책이다.

게임 이론의 역사에 큰 획을 그으며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는 출발점인 책이다.


“요새 게임이론과 관련한 책을 읽으시는 것을 봤습니다. 국내 사이비교수가 번역한 책을 읽으시는 것 같아서.”


연희대 경제학과 교수가 사이비일 것 같지 않지만, 예일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석훈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

류지호는 게임이론에 대해 지식이 없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우연히 일기장을 뒤적거리다가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적혀 있기에 주인공 수학자를 알아보다가 게임이론에 슬쩍 손을 대게 된 것.


“게임 이론은 응용 수학의 한 분야지만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생물학, 군사학, 컴퓨터과학 등 여러 종류의 학문에서 심도 깊게 연구되는 대표적인 주제입니다.”

“나는 제대 후에 영화전공을 할 거야.”


깊이 공부할 생각이 없다.

그저 호기심이 조금 있을 뿐이다.


“압니다. 그래도 한 번 읽어보십시오. 미시경제학이나 국제관계론을 공부하는데 기초토대가 되어줄 것입니다. 또 ‘정의’’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하시는 것 같던데,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개념을 이해하시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석훈이 게임이론에 대해 과외라도 할 듯 싶어 류지호가 얼른 말을 잘랐다.


“알겠어. 읽어는 볼 게. 고마워.”

“휴일 잘 보내시고 부대에서 뵙겠습니다.”


류지호는 ‘게임 이론과 경제적 행동‘를 챙겨 인천 집으로 내려갔다.

일요일 내내 책을 읽었다.

솔직히 재미도 없고 굳이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좀 더 대중적이고 쉽게 게임이론을 풀어쓴 책을 다시 구해서 읽기로 했다.


✻ ✻ ✻


부우웅.


류지호를 태운 포텐샤 승용차가 강남 대로변에 들어섰다.

그가 주로 이용하는 벤츠는 현재 WaW 픽처스가 제작하는 영화에서 촬영용 소품차로 사용되고 있다.

제일생명사거리.

미래 한교생명타워가 들어서게 될 건너편 부지에 고층건물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바로 WaW 픽처스의 첫 번째 복합상영관 건물이다.


‘내가 강남에 빌딩을 다 올리다니....’


류지호가 감상에 젖어 제법 뼈대가 잡혀가기 시작하는 건물을 쳐다보고 있는데, 공사관계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류지호의 아버지뻘 되는 현장소장이 허리를 넙죽 숙이며 인사했다.

WaW 픽처스의 오피스·상가 복합건물 공사는 한국 건설업계의 큰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경일건설이 수주를 땄다.

업계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대유건설이 한교타워를 짓게 되면서 제일생명사거리의 랜드 마크 빌딩 타이틀을 누가 갖게 되느냐가 세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교타워는 여러 차례 설계변경 끝에 1998년에 가서야 착공하게 되지만.

건물설계는 물론 극장설계까지 1992년 대한민국 건축 대상을 수상하고, <예술의 전당> 설계를 담당했던 건축가가 맡았다.

한국 현대건축의 두 거장인 김중업과 김수근을 모두 사사한 유일한 제자로 26세에 여의도를 설계한 '한강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만들었던 건축가다.

현재 국내 최고 건축가이자 도시설계자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 건축가의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화두 역시 ‘원‘이라서 건축 전반에 직선보다 곡선이 많았다.


“지나치게 미적인 측면만 강조해서 건물 내구성과 기능적인 면을 희생시켜선 절대 안 됩니다.”

“사람이 예뻐 보이려면 예쁜 짓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물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예뻐도 기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미적 감각만 추구하면 자칫 조잡해질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영화감독인 류지호도 항상 영상에서 고민하는 점이다.


“듣기로는 간혹 설계도면 그대로 짓지 않기도 한다는데, 건물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됩니다.”

“설계를 흔들 수 없죠. 건물은 튼튼하게 지어질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저 우리는 군더더기를 조금 없애거나 포인트를 주면서 건축가가 생각한 것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겁니다.”

“건설업계 철칙이 어음결제란 걸 나도 잘 압니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현금결제를 하는 이유를 귀사 사장님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류지호는 협력업체나 자재공급업체에도 똑같이 현금결제를 해주라고 일렀다.

건축 감리도 매우 깐깐하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돈이 남아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모를 부실시공을 염려해서다.


“특별히 볼 것도 없는데 현장사무실로 가셔서 차라도....”

“마시고 왔습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하세요.”


건물주가 안 가고 있는데 현장소장이 어떻게 제 할 일을 할 수가 있을까마는.


‘4천만 달러 넘게 들어가는.... 가끔 달러와 원이 헛갈린다니까......’


부지 및 기존 건물 매입비용과 총공사비를 합해 한화로 360억 원이 들어갈 예정이다.

10개 스크린이 들어갈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설에만 따로 32억 원이 잡혀 있다.

영사·음향시스템은 Skywalker Films의 THX에 견적주문서를 요청한 상태다.

공사비의 40%는 은행대출이다.

나머지는 WaW 픽처스가 책임지기로 했다.

만약 자금이 모자라면 류지호가 주식 등을 팔아 증자에 나설 계획이다.

류지호가 멀티플렉스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국내에서 라이벌 기업은 백설그룹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현재 백설그룹의 시가총액은 대략 1조 5천억 원 내외.

가온은 그에 비교할 만한 기업이 아니다.

헌데 미국의 사업과 비교하면 오성그룹의 비호를 받지 않는 백설그룹과 맞상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공기단축 하겠다고 서두르지 말고,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건물 지어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류지호는 공사현장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건물을 돌아봤다.


‘언젠가 사옥도 생기겠지?’


단순히 건물주의 로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가로서 멋진 자기 빌딩을 갖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있다.

자기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오너들의 꿈이다.

기업도 개인처럼 주거의 안정성은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는 것보다 사옥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낫다.

이른바 ‘사옥 효과’라는 것도 있다.

일단 직원들의 사기 진작에 효과적이고, 심리적 안정과 자부심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리는 랜드 마크 빌딩이 되면 광고효과 또한 만만치 않다.

초고층 사옥은 성공한 사업가의 상징이기도 하고.


‘파커와 그레이엄이 뉴욕 맨해튼에 초고층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류지호는 첫 번 째 복합상영관이 들어가는 빌딩이 실용성과 작품성을 아우르는 건물로 탄생되길 기대했다.

계획대로 차질 없이 공사가 진행된다면, 삼봉백화점 사고 전에 멀티플렉스를 개관할 수 있을 터.

개관작품에는 재난영화 <Collapse>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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