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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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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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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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가 다소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쉽다는 말 취소해야겠네.”


수화기 너머에서 모리스 메타보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 뭐라고?

“혼잣말이에요.”

- 프로젝트 자체는 나쁘지 않아.


<Collapse>의 초고는 최초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로 들어갔다.

안타깝지만,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는 95년까지 라인업이 확정된 상태다.

새로운 영화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 혹시 실화인가?

“한국의 아파트붕괴 사고와 캔자스시티 하얏트 리젠시 호텔 붕괴 사고를 믹스해봤어요.”

- 재난영화는 킬링타임용으로 비디오와 프리미엄 채널에서 나름 쏠쏠한 재미를 보긴 해. 블록버스터로 제작할 것이 아니라면 파라맥스도 나쁘지 않아.

“캐롤코는 어때요?”

- 트라이-스텔라 배급 라인업이 다 찼다니까.

“캐롤코를 하루 빨리 정상화시키려면 안정된 라인업을 갖춰야 하지 않아요?”

- ....음.


류지호는 미국에서 <Collapse>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크게 관심이 없다.

영화를 WaW 픽처스가 수입해서 한국에서 개봉한 후 이슈몰이는 하는 것이 중요할 뿐.


“<컷스로트 아일랜드>와 <쇼걸> 개발을 중단시켰잖아요. 당장 캐롤코가 돌리는 프로젝트가 없지 않나요?”

- <스타게이트>가 있지. 그 외도 오라이언이 준비하던 영화 몇 편을 넘겨받았어.

“몇 편이나요?”

- 95년까지 매년 3편 정도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네.

“예산규모는요?”

- 대체로 1천만 달러를 넘기진 않네.

“<Collapse>는 최소 3천만 달러는 필요할 텐데.....”

- 자네가 알아서 책임지겠지.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서 투자·제작 하지 않는 영화이니 제작비는 류지호더러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캐롤코 구조조정은 모두 끝났죠?”

- 피터가 무난하게 잘 처리했네.

“알겠어요. 캐롤코에서 제작하는 것으로 정리할 게요.”


그렇게 류지호의 <Collapse> 프로젝트가 캐롤코 픽처스로 넘어갔다.

몇 주가 흘렀다.

캐롤코 픽처스에서 무려 70페이지에 달하는 계약서를 류지호에게 보내왔다.


“무슨 계약서를 이렇게 꼼꼼하게 쓴데요?”


작가근로계약서를 훑어보고 있는 류지호를 향해 신효정 변호사가 대답했다.


“트라이-스텔라 오너가 이 정도가지고 놀라면 안 됩니다. 할리우드는 최소기본약관(MBA)도 400페이지 분량이 넘을 정도로 조합 회원의 권익보호를 위한 계약 기준이 상세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오버 아닌가.....?”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상상하는 모든 경우를 계약서에 넣습니다.”

“내가 유명 감독이나 스타급 배우도 아니고....”

“시나리오 작가 역시 WGA(미국작가조합)의 보호를 받고 있고, 조합의 의무사항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작가조합의 회원이 아닙니다만?”

“<Collapse>가 영화화 되면, 감독님은 일정부분 자격을 얻게 됩니다.”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 가입을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1편 이상 영화의 크레디트 같은 것에서부터 여러 유형별 점수를 3년 간 총 24점 획득해야 하고, 1,000 달러 정도 가입비를 납부해야 한다.

류지호가 다소 질린다는 투로 말했다.


“미국은 확실히 법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나라가 맞네요.”


괜히 소송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할리우드가 있는 LA지역이 유별나기도 하고.


“제일 좋은 것은 계약서를 다시 꺼내보지 않는 겁니다.”

“그렇긴 하죠. 계약서를 다시 검토한다는 것은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니까.”

“이런 계약서는 제작자뿐만 아니라 작가 입장에서도 좋습니다.

“작가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할 수 없게 하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런 일환으로 WGA측에선 신인작가들에게 고용제 계약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직접 영화 각본을 쓴 후 영화사에 접수하게 되고 그곳에서 채택이 되면 곧바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근로계약 대신 기획개발비용을 먼저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영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작가는 수익이 없다.

대신 영화화가 되면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와 달리 작가가 스튜디오에 고용이 되면, 영화가 엎어지더라도 이미 계약한 돈을 받기 때문에 위험부담을 고용주가 전부 부담한다.

다만 작가는 저작권이나 지분을 요구할 수 없다.

고용계약서에 서명한 작가가 쓴 글의 저작권은 고용주 혹은 스튜디오가 갖는 것이다.


“대주주라서 체면을 세워주려는지, 전면적 계약과 함께 기본임금 수준 이상을 제시 받았습니다.”


영화 각본을 쓴 작가는 WGA에서 규정한 최저 기본임금을 보장 받는다.

베테랑 작가들은 스튜디오 혹은 프로듀서와 전면적 계약을 체결한다.

유명작가나 여러 흥행작품을 집필한 작가는 작품 당 50만 달러부터 시작하고, 때에 따라서는 추가 보너스도 보장받는다.

반면에 신인작가나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작가는 단계적 계약을 체결한다.

1초고, 2초고, 퇴고, 윤색 등 단계별로 계약을 각기 따로 한다.

이때는 2주 정도의 평가기간을 거쳐 다음 단계에서 계속 고용할지 결정하고, 그 기간에 작가는 다른 작업을 맡을 수 없다.

시나리오 작가 세계도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는 것이 할리우드다.

할리우드에서는 항상 옆 사람과 얼마를 받는지 비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계약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직 할리우드에서 아무 것도 보여준 것이 없는 류지호에게 전면적 계약을 해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계약이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극히 드문 케이스를 제외하고 이런 계약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됩니다. 이 계약이 외부에 알려지면 좋은 소리 못 듣긴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계약서를 보내온 거죠? 내가 계약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웰스 사장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류지호로서는 계약금을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다.

10만 달러는 월급쟁이에게는 큰돈이다.

그런데 지금의 류지호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똑같다.

차라리 돈을 받지 않는 편이 좋다.

군인 신분 동안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꺼려지는 부분도 있고.


“임금 수준, 집필 기한, 평가 기한, 크레디트 결정, 이행 기준, 불가항력 그리고 미국 작가조합 규정의 우선효과 등에서 류 감독님의 편의를 봐주려는 겁니다. 그리고 보수 지급 방법도 고정급입니다. 즉 선불로 절반 받고 시나리오 완성 후 나머지를 모두 보장 받습니다. 이런 계약은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영화화되지 못했더라도 제작자가 반드시 지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휘유!


류지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다.


“신임 CEO란 양반이 작정하고 아부를 하는 건가?”


미국 작가조합에서는 최저 기본임금을 명시해 놓고 있다.

상한선 같은 것도 없다.

능력만 되면 스티븐 아들러 수준으로 계약금을 받아도 아무 상관없다.

대신 많이 버는 만큼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뜯기겠지만.

어쨌든 작가조합은 저예산, 고예산, 독립 영화로 나누어 최저임금을 규정해 놓았다.

그리고 단계별 계약 시에 각 단계별로 최저임금까지 규정해 놓았다.


“전체 계약금 규모를 보면 퀸트가 <트루 로맨스>를 트라이-스텔라에 판 그 금액 이상을 보장했네요?”

“저작권을 모두 넘기는 조건입니다.”


할리우드 각본 계약은 시스템화 되어 있다.

아이디어나 스토리만 계약하는 경우도 있고, 오리지널 트리트먼트만 계약하기도 한다.

트리트먼트와 시나리오 작업을 묶어 계약할 수도 있고, 시나리오 집필 계약만 할 수도 있다.

또 충무로에서 말하는 각색(개작) 따로 윤색을 또 따로 계약한다.

같은 작가가 작업을 해도 계약은 따로따로 한다.


“각본 항목에 1고와 퇴고를 따로 고용하는 건 좀 너무하다 싶기도 하네요.”


미니 스튜디오인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역시 1고 작가가 따로 있고, 퇴고하는 작가를 따로 고용하고 있다.


“계약 외에 추가 작업에 대해서도 보상합니다. 기본 4,000달러 정도 따로 지급합니다. 물론 계약서에 그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나는 군인신분이잖아요. 군 입대 전에 팔았다고 할 수도 없고. 군 복무 중에 경제활동을 하게 되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군법 상 문제가 없다고 해도, 사람들이 문제 삼을 수 있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 걸고넘어지면 분명히 문제가 될 수 있다.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까?”

“가령 군인으로써 임무를 소홀히 하고 돈 벌이에 몰두했다 같은 비난이죠.”

“늦어도 96년도 개봉이 될 가능성이 높겠죠?”

“95년 봄이 되겠네요.”

“상여금식 지급 방식도 있습니다. 통상 70% 이상은 고정급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상여금 형태로 지급하는 겁니다. 비율을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보장된 보수가 아니므로 영화화되는 경우와 같이 특정한 조건 하에서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또 저예산 영화에서 주로 활용하는 후불방식도 있습니다. 계약 당시에는 최소한의 금액만 받고, 나머지는 나중에 받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제작사가 투자액을 모두 공제했는지 여부 불문하고, 반드시 지급해야 합니다. 파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미지급 임금 형태 또는 수익분배 형태로 지불하게 됩니다.”

“충무로처럼 한 푼도 안 받아도 됩니까?”

“안 됩니다. 미국작가조합은 보장된 고정급 없이 성공보수제로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적발될 경우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작가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러니 할리우드 전문 변호사들이 돈을 많이 버나 봐요.”

“스타배우들의 계약 일을 봐주는 변호사들은 월가의 잘나가는 변호사 부럽지 않은 높은 보수를 챙깁니다.”


류지호가 계약서를 테이블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


“오너라고 막 퍼주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는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들어가면 결국 다 알려질 텐데 말이죠.”


계약서에는 크레디트 조항도 따로 존재했다.

미국 영화에서 작가 크레디트 결정에 대한 재량권이 제작자에게 없다.

미국 작가조합 크레디트 결정 원칙이 적용된다.

크레디트는 창작인의 자부심이나 작가적 능력 이외에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영향이 무척 크다.

무조건 1차 작가에게 우선권이 있다.

2고 이후 각색, 윤색, 퇴고 작가에 경우 촬영을 위한 최종고(슈팅스크립트)에 대한 기여도가 50% 이상이 되어야 그 작품에 대한 크레디트를 얻을 수 있다.

한국영화와 매우 다른 점이다.

한국은 조금만 시나리오에 침을 바르면 개나 소나 각본, 각색에 이름을 올린다.

미국의 경우 제작사는 영화에 참여한 모든 작가들에게 최종촬영대본과 예정 크레디트 통지서를 보내야하는 의무가 있다.

그때 크레디트에 대해 제작사에 이의를 제기하면, 미국작가조합이 이를 중재한다.

이 같은 크레디트 통지서는 작가만이 아니라 모든 스태프의 경우도 다 해당된다.


‘20년이 지나면 한국영화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크레디트가 투자자 이름이지. 돈을 벌기위해 투자만 한, 영화인도 아닌 배우도 스태프도 아닌 사람들의 이름을 관객들은 처음으로 봐야 하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영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공이나 투자 크레디트는 그 영화에 45% 이상 돈을 댄 단 한 명 혹은 회사가 가진다.

그것이 불문율이고 명예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는..... 자기 돈도 아닌 회삿돈을 운용한 이들에게 배급사 로고 다음으로 영화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선사한다.


‘WaW에서는 어림도 없게 만들어주지.’


다른 권력자들이 영화를 가지고 무슨 짓거리를 하든 상관없다.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 선배 영화인들이 하지 못했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모두 올바른 방향으로 바꿀 생각이다.

크레디트와 계약부터 그리고 크게는 시스템과 문화까지도.

영화인들 스스로가 공정한 룰 안에서 움직이고 서로를 존중을 할 때 관객들도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법이다.

영화로는 망가진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삶은 자본가에게 노예처럼 순종하는 것이 결코 떳떳하지도 예술도 아니니까.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페이지 부분 설명 부탁해요. 뭔 말인지 복잡하네요.”

“쉽게 요약하자면 이런 겁니다. 제작사가 한 번은 류 감독님한테 수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 납품일로부터 2주 안에 요구해야 합니다. 그 이후에 요구한다면 거부해도 됩니다.”

“그거 멋지네요.”


류지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제작사에서 각본이나 각색의 기한을 한정 없이 늘어뜨리면 작가만 죽어난다.

이렇듯 수정요구 기한을 정해놓으면 제작사가 작가를 무한정 착취할 수 없게 된다.


“이 부분은 당장 한국영화에 적용하기 빠듯하니까, 적당한 기간을 WaW도 고민해 봐야겠어요.”

“이런 조항은 제작사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글이 안 나오는 작가를 무한정 데리고 있는 것보다 그 비용으로 빨리 다른 작가를 고용하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는 인건비가 비싸다.

그렇기에 그 같은 조항이 있는 것이다.

한국은 공짜로 부려먹을 예비 시나리오 작가들이 널리고 널렸다.


“물론 앞 서 이야기한 크레디트 문제가 정리되어야 하겠지만요.”

“그렇습니다. 해당 스태프 협회가 중재자로서 준비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 부분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분야라.... 암튼 영향력이나 힘이 세지면, 차차 어떻게든 해 볼 여지가 생기겠죠.”

“마지막입니다. 작품을 직접 창작해 낸 크레디트 작가들에게 부여되는 권리입니다. 영화 배급 후 6개월 혹은 작가 고용이나 작품 구입 계약일로부터 3년까지 작가는 출판판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배급 후 2년 이내에 제작자가 연극으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면 그 권리 역시 작가에게 귀속됩니다. 만약 연극으로 제작될 경우 작가는 로열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화 속편에 대한 권리는 없지만, 만약 속편, 리메이크, TV시리즈로 제작되면 그 즉시 소정의 사례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보통 원작 보수의 50% 안쪽, 리메이크는 33% 안쪽 TV시리즈는 매회 로열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작사의 행위에 대해 류 감독님은 추가적인 용역을 제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류지호는 탄성을 터트렸다.


“죽여주네요.”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은 이렇게 하고 싶어도 못한다.

각 협회들의 권한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도 않고, 각 협회는 충무로 영화인들 모두의 동의를 얻어 설립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서 정리를 해주는 것도 없다.


‘아주 기본적인 표준계약서가 지금부터 20여년이 지나야 적용되는 걸 보면....’


각 영화 관련 협회는 전체 회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정부 보조금 나눠 먹기와 밥그릇 싸움만 하고 앉아있다.


‘각 협회 소속 스태프들을 계몽해 똘똘 뭉쳐서, 우월적 위치에 있는 자본에 요구할 것은 해야 하는데, 그들의 요구에 순종하고 있으니....’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 경험했던 일부 협회의 꼴사나운 행태를 떠올리며 내심 이를 갈았다.

신효정이 잔뜩 인상을 구기고 생각에 잠긴 류지호에게 말했다.


“할리우드의 이런 시스템을 당장 WaW에 적용하는 건 반대합니다.”

“알아요. 할리우드는 다양한 영화 관계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계약 기준 같은 것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마련되었죠. 트라이-스텔라뿐만 아니라 내가 소유한 영화부문·TV부문 모두 최소기본약관(MBA)에 서명 가입해 있어요. 심지어 빅6 메이저 스튜디오도 가입하고 있죠.”

“미국은 성문법이 아닌 불문법에 기초해 업계의 거래 계약서를 매우 상세히 기술해 놓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 빅6는 거래 관계에서 우월적 위치에 있음에도 최소한의 산업 생태계 유지를 위한 원칙은 지키는 편입니다. 반면에 한국은 저작권법이나 각종 법 적용이 가진 자의 중심으로 적용되고, 거래상 우월적 지위에 있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의식이나 윤리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영화법에서 표현의 자유를 빼고, 시장질서교란 등의 이유로 제약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할 수 있는 것도 법으로 정해 놓은 건 문제가 있어요. 차라리 할 수 없는 것만 명확히 해 놓으면, 좀 더 창의적인 사업을 찾아내서 해볼 수 있을 텐데.”


10여 년이 흐르면 포지티브(positive) 규제냐 네거티브(negative) 규제냐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포지티브 규제는 법률과 정책에서 허용되는 것들을 나열하고 이외의 것들은 모두 허용하지 않는 규제를 의미한다.

반면 네거티브 규제는 법률이나 정책으로 금지된 것이 아니면 모두 허용하는 규제다.

즉 포지티브 규제는 "이것만 되고 나머지는 안된다"인 반면 네거티브 규제는 "이것만 안 되고 나머지는 다 된다"는 방식의 규제다.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법적인 규제조항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재벌이나 있는 자들의 윤리의식을 생각해 보세요. 시장 및 사회에서 최소한 지켜야 하는 기본원칙을 자율적으로 지키는 대기업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류지호는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찔렸다.


“나도 뭐 그리 떳떳한 입장은 아니죠.”

“외화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큰 수익을 내고 있는데, 돈도 안 되는 방화에 투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극장업 진출도 방화를 배급할 스크린 확보를 위한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멀티플렉스 상영관 하나를 한국영화에 배정하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멀티플렉스는 영화가 정말 많이 필요해요. 아참! 표준계약서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죠?


류지호는 신효정의 법률사무소에 트라이-스텔라의 계약서를 참고해 스태프 표준계약서를 만들라고 요청을 해 둔 상황이다.

이 시기의 영화 계약서는 부동산 월세 계약서 수준이다.

그런데다가 권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의무만 잔뜩 있다.

당연히 조항도 몇 개 없다.


“감독님이 요청한 표준계약서, 그걸 적용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조항은 법적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WaW가 자체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위반했을 때 처벌을 받거나 공적인 부분에서 손해를 보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알아요. 그저 상징적인 거죠.”


신효정이 설명한 바와 같이 이전 삶에서 스태프와의 계약에 표준계약서를 적용했지만, 위반한다고 해서 처벌도 미미했다.

특별히 손해 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예를 들어 위반한 제작사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관의 지원제도나 국내 개최 주요 영화제 출품금지, 또한 공적기관 출자 투자조합에 투자를 못 받도록 하는 등의 조치가 있다면 모를까 실효성이 없었다.


“만약 그 계약서로 첫 계약을 하는 순간 한국제작자협회에서 WaW에....”


류지호가 신효정의 말을 끊고 말했다.


“태클이 들어오겠죠.”

“옳은 일을 하려한다는 걸 인정하고, 감독님의 그런 마인드를 존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앞서가지 말았으면 합니다. 감독님은 젊어요. 세상과 타협한다고 생각지 말고, 좀 더 길게 멀리 본다고 생각하시길.....”


류지호는 당장 실행에 옮길 생각이 없다.

표준계약서 카드를 꺼내는 타이밍은 IMF를 맞이해 오성, 대유, 경성, 금성, 선경 등 대기업이 영화산업에서 철수하고, 미래에 한국영화판을 좌지우지하는 세 개의 대기업이 막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가 될 것이다.

WaW 픽처스를 시작으로 토착 충무로 메이저가 앞 장 서서 이를 정착시킨다면, 대기업 역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영화 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표준계약서에 입각해서 하라.

류지호가 바꾸고 싶은 충무로 환경 중에 하나다.


“할리우드에 준메이저 영화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충무로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어쩌면 미국인들보다 충무로 사람들이 더 지저분할지도 모릅니다. 유림영화사가 어떤 치졸한 짓을 벌였는지 잊으셨습니까?”


신효정이 거론하지 않아도 류지호가 더 잘 알고 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한국에서 직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처럼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를 한국에 진출시키면 류지호는 훨씬 편한 길을 갈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할리우드 빅6가 수직계열화로 자국 내 영향력과 지배력을 공고히 하지만, 영화계 생태계가 무너질 정도로 모두 잡아먹지 않는다.

남에 나라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포식자들이다.

한국영화가 망하든 말든 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뿐.

시장을 확대해서 수익증대만 이루면 끝이다.

어쨌든.


“스크린플레이(Screenplay)크레디트는 J-HO Ryu로 하는 걸로 하고, 임금은 통상적인 신인작가가 받는 것으로 하고, 임금 지불 방식은 후불제로 해주세요. 선금으로 가장 최저 금액을 받는 걸로 하고. 시나리오 수정에 관한 사항은 감독이 정해지면 그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걸로 해줘요.”

“알겠습니다.”


한국에서 변호사가 계약을 대리하면 주접떤다고 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걸 변호사를 통해 조율한 후, 서명하는 것.

물론 변호사비를 부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계약과 관련된 대화를 마치고 신효정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왜 하필 재난영화입니까?”

“우암아파트상가 붕괴 뉴스를 보고 영감을 받았어요. 전에는 몰랐는데, 대연각 화재부터 와우아파트 붕괴까지 우리나라에서 대형사고가 몇 번 있었더라고요.


류지호는 준비된 대답을 내놓았다.


“건물을 튼튼하게 지을 것 같은 미국에서도 비슷한, 아니 건물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니까 비슷한 건 아니겠군요. 암튼 81년 즈음에 미국 캔자스시티 하얏트 리젠시 호텔에서도 내부의 구조물이 무너져 사람도 많이 죽고 다친 사례가 있더라고요. <타워링>나 <대지진> 같은 영화도 이번 시나리오를 쓰는데 영감을 줬고.”


하얏트 리젠시 호텔 고가 통로 붕괴 사고는 1981년 7월 17일에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이다.

이 붕괴사고로 인해서 114명이 숨지고, 2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미국 역사상 건물 붕괴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다.


“첫 영화로 꽤 힘든 도전을 선택했군요. 언제나처럼.....”

“쉽지는 않겠죠. 그래도 재미있을 거 같네요.”


류지호의 속내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마치 숲속으로 들어가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동화 속 이발사의 심정이랄까.

과거로 돌아와 주변 사람들의 삶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자부심도 느끼고, 보람도 느낀다.

한편으로 자신만 알고 있는 불행한 사건사고는 은근한 스트레스다.

LA폭동, 삼봉백화점 붕괴 같은 사건에 심력을 쏟았다.

스스로 하는 일종의 회귀후유증 행동치료 또는 심리학적 대처법 같은 것인 모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면, 어딘지 두고두고 자책감에 시달릴 것 같은.

어쩌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스트레스.


“세상에 거저먹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감독님은 잘 해 낼 겁니다.”

“노력해 봐야죠.”


며칠 후.

신효정이 변경된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류지호는 캐롤코 픽처스의 <Collapse> 각본 계약서에 서명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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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2) +6 22.07.07 6,100 174 24쪽
214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1) +3 22.07.06 6,302 171 22쪽
213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6 22.07.05 6,225 174 29쪽
212 제대를 명 받았습니다! +7 22.07.04 6,167 161 21쪽
211 위험한 아이들! (2) +6 22.07.02 6,033 172 23쪽
210 위험한 아이들! (1) +6 22.07.02 5,968 165 24쪽
209 게임의 법칙. (3) +5 22.07.01 6,055 175 28쪽
208 게임의 법칙. (2) +10 22.06.30 6,273 179 29쪽
207 게임의 법칙. (1) +12 22.06.29 6,216 172 26쪽
206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2) +8 22.06.28 6,089 167 25쪽
205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1) +9 22.06.27 6,133 167 23쪽
204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5) +5 22.06.25 6,066 180 29쪽
»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4) +5 22.06.25 5,788 152 24쪽
202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3) +17 22.06.24 6,003 179 27쪽
201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2) +8 22.06.24 5,872 156 21쪽
200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1) +7 22.06.23 6,175 170 22쪽
199 리더가 꼭 완벽할 필요는 없지.... +7 22.06.22 6,099 182 28쪽
198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3) +7 22.06.21 6,166 186 30쪽
197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2) +7 22.06.20 6,148 177 29쪽
196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1) +9 22.06.18 6,187 202 27쪽
195 내 친구 많이 컸네! +4 22.06.17 6,269 187 27쪽
194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2) +12 22.06.16 6,017 195 29쪽
193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1) +6 22.06.15 6,012 192 25쪽
192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3) +9 22.06.14 5,971 179 21쪽
191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2) +4 22.06.13 6,124 188 25쪽
190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1) +8 22.06.11 6,120 191 22쪽
189 Life Goes On. (6) +7 22.06.10 6,060 180 25쪽
188 Life Goes On. (5) +22 22.06.09 5,902 219 21쪽
187 Life Goes On. (4) +5 22.06.09 5,672 174 26쪽
186 Life Goes On. (3) +7 22.06.08 5,909 18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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