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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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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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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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아라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큰오빠, 근데 오늘 산 옷들 집에 가져가면 엄마가 못 입게 할 건데.”

“아빠랑 오빠랑 다닐 때 입어.”

“핏. 그럼 일 년에 한 두 번 밖에 못 입잖아.”

“엄마아빠가 왜 아라한테 노출이 심한 옷을 못 입게 할까?”

“......?”

“엄마는 아라가 짧은 치마를 입으면 미스코리아보다 훨씬 예쁜 걸 잘 아셔. 그런데 혹시라도 그것 때문에 엄마아빠가 없는데서 나쁜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시는 거야.”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뭐.”

“오빠나 부모님은 아라가 짧은 치마를 입으면 예뻐 보이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 그래도 가족은 그런 거야. 혹시나 나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거지.”

“근데 작은 오빠는 막 지랄... 앗! 미안.... 엄마나 작은 오빠도 큰오빠처럼 말해주면 좋은데, 왜 꼭 말을 그렇게 듣기 싫게 해?”

“지금 오빠가 하는 말들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이야.”

“큰오빠한테 아빠가?”

“응. 오빠도 네 나이 때 말썽 좀 부렸거든.”

“진짜?”

“응. 학교 땡땡이 치고, 롤러스케이트 타러 다니고 그랬어.”

“고릴라 오빠가 꼬셨지?”

“큭. 둘이 죽이 잘 맞았지.”


쇼핑을 마친 류지호는 류아라를 데리고 신포동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내내 류지호는 여동생이 털어놓는 고민들을 들어줬다.

하루 동안 쇼핑을 했다고 해서 사춘기에 어떤 큰 영향을 끼치겠냐마는.


‘이 시기의 아이들은 꼭 강아지 같지.’


잘해주면 졸졸 따라다니다가도 한 번 야단치면 저 구석에 가서 주인 신발을 물어뜯는 강아지.

어른이나 아이나 충고나 조언을 잔소리로 받아들이면 무조건 거부하고 싶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시기 아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일 것이다.

류지호가 큰 사업을 하며 사람을 다루는 법에 대해 깨달은 것 한 가지가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 스스로가 의미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고, 마음을 활짝 열고 소통하도록 만들어주면 그가 훨씬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동생이라고 해서 다를까.

낯선 여동생의 모습도 새로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려주고 보듬어 주면서 해결책을 함께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류지호 역시 처음 뉴욕의 사교파티에 참석했을 때 많은 혼란을 겪은 경험이 있다.

여동생과는 정신의 성숙도에서 큰 차이가 있고 류지호가 사춘기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경험하는 낯선 세계이자 절고 주눅 들게 하는 환경들에 곤란함을 꽤 겪었다.

파커 가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류지호가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쨌든 사춘기 소년소녀는 타인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 기대 어린 시선이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린 사춘기 소년소녀가 처음 알게 되고 가장 의식되는 타인의 시선은 바로 부모를 포함한 가족들.

그래서 가족에게 인내가 필요한 걸지도.


“아라는 나중에 패션디자이너가 되어도 되겠는걸. 센스가 있어.”

“칫. 오빠가 여자 옷을 알아?”

“큰오빠가 영화감독이야, 인마.”

“영화감독은 다 아나 뭐....”

“배우에게 입힐 의상디자이너가 가져오는 옷을 결정하는 게 감독입니다. 아가씨.”

“몰라. 그 딴 건. 나중에 고등학교 가서 생각할래.”


픽.


류지호는 신포고 방송제에서 공다연처럼 탤런트가 되겠다고 여동생이 말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류지호는 동생들에게 뭔가 되라고, 꿈을 가지라고 강요할 생각이 없다.

그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울 뿐.


‘그나저나 아라를 그 놈에게 시집보내야 하나?’


이전 삶의 매제는 착하고 성실했다.

나쁜 신랑감은 아니었다.

인연이라면 다시 한 번 연결될 것이고.


“오빠앙~”

“에휴! 인천백화점도 가자고?”

“응.”

“그래, 가자 가.”

“레츠 고!”


저녁식사를 마친 류지호는 류아라에게 이끌려 인천백화점까지 들렀다.

류지호는 여동생의 사춘기는 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강한 의심이 드는 오후였다.


❉ ❉ ❉


여동생과 데이트인지 쇼핑 짐꾼 노릇을 한 것인지 모를 하루를 보낸 류지호는 모처럼 집에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가온 웨딩에서 도움요청이 들어왔다.

재벌가 웨딩촬영을 도와달라는 요청이다.

연락을 류지호가 곧바로 종로 예식장으로 향했다.

카투사는 외출·외박을 나올 때 사복을 입는다.

스포츠모자를 푹 눌러쓰고 돌아다니면, 군인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가온 웨딩 스튜디오는 여전히 업계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올 봄에 동숭, 명성, 반, 원, 반포 등 웨딩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스튜디오들이 속속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웨딩앨범은 40~50만원, 비디오 촬영까지 하게 되면 100만원.

올해 개업한 스튜디오들은 가온 웨딩 스튜디오의 가격을 그대로 따랐다.

그들과 가온 웨딩 스튜디오의 상품 중에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300만 원짜리 상품이다.

류지호가 오늘 촬영을 나가는 상품이 바로 300만 원 대다.

군생활 대부분을 ENG 카메라 촬영으로 보내고 있는 류지호다.

웨딩촬영의 노하우는 윤종원 팀장 못지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설렁설렁 예식홀을 걸어 다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찍을 것은 다 찍고 있다.

윤종원이 류지호에게 농담을 건넸다.


“영화감독한테 이런 걸 시켜서 괜히 죄짓는 기분입니다.”

“가끔 안 불러주나 했어요. 오랜만에 찍으니까 재밌네요.”

“이것도 직업이 되면 은근히 스트레스 받습니다.”


웨딩 촬영은 잘 찍어도 그만 못 찍으면 못 찍은 대로 그만이다.

아무리 공들여 찍어봐야 편집해서 붙여놓으면 거기서 거기다.

똑같은 예식홀에서 신랑·신부만 바뀌는 촬영이니 요령만 생기면 솔직히 재미는 없다.


“다음 예식도 우리가 찍어요?”

“제가 안 찍고 어시 봤던 애들이 찍을 겁니다.”

“윤 팀장은?”

“목화예식장으로 넘어가서 한탕 더 뛰어야 합니다.”

“그럼 같이 넘어가요.”


류지호는 다음 예식을 촬영할 기사들에게 담뱃값조로 얼마를 찔러주고는 예식장을 나섰다.


“실례합니다.”


누군가가 류지호에게 말을 건넸다.


‘응?’


문득 익숙한 느낌이 류지호의 머리를 간질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설마’


류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맑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여성을 살폈다.


“혹시....”


깔끔한 투피스 여성 정장,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이십대 여성이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고등학교 때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사춘기의 추억이었고, 짝사랑했던 연상의 누나.

그녀의 향기, 모습, 행동, 하나하나가 낡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첫사랑이랄 수 있는 추자영.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거의 차이가 없네.’


실제 중학교 시절 어울린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살면서 한 번은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류지호는 뜻밖의 재회로 인해 잊고 있던 과거를 잠시 떠올릴 수 있었다.


“자영이 누나 맞지? 추자영.”

“지호 맞았구나? 라이브 롤라장의 그 꼬맹이.”

“꼬맹이라니! 누나랑 나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거든. 이거 왜 이래.”

“어머. 진짜..... 오랜만이다, 야.”

“그러게.”

“결혼식 비디오 찍니?”

“오랜만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고생이 많구나.”

“그렇게 힘들진 않아. 누나, 정장 잘 어울리네. 결혼식 하객으로 온 거야?”

“응.”


첫사랑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런데 뭔가 드라마틱한 감정이 마구 솟구치거나 하진 않았다.


‘수많은 감정이 한데 뒤섞여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뭐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잡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동요하고 있지 않다는 뜻.


“지호야, 나중에 다시 보자. 누나가 지금 예식시간에 좀 늦어서 가봐야 해서....”


류지호가 추자영의 시선이 가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추자영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그래. 담에 또 봐.”

“서울에서 생활하니?”

“용산.”

“용산 어디?”

“카투사 복무 중이야.”

“군인이구나? 이 누나가 나중에 맛있는 거 싸들고 면회 갈게.”

“하하하. 그러든지.”


류지호가 웃으며 그만 가보라는 듯 손짓하는 남자를 가리켰다.


“지호야 다음에 보자. 꼭!”

“응.”


류지호는 멀어지는 추자영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이전 삶에서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소식조차 모르고 살았다.


“인생 자체가 달라지니까 이런 일도 다 벌어지는 구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에요. 가요.”


류지호가 하드케이스를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윤종원이 얼른 따라 붙으며 물었다.


“배웁니까?”

“아니요. 어릴 때 알던 누나요.”

“얼굴도 예쁘고 비율이 좋네요. 스타일도 꽤 괜찮고.“

“그렇게 보이죠? 대기업에라도 입사했나 봐요.”


이 당시 대졸 초봉은 60만 원 정도다.

4개월이 지나면 80만원에 4대 보험이 기본이다.

고졸 여직원은 초봉이 40만원 정도다.

아무리 결혼식장 하객으로 참석했다 치더라도 그녀의 옷차림은 품위가 있어 보였다.


‘부잣집 딸이었나?’


추자영은 여전히 예뻤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나이를 먹으면서 물이 올랐다고 할까.

반갑기도 하고, 상황이 재밌기도 하고.

다만 찝찝한 뒷맛이 남았다.

손짓으로 부르던 남자를 바라볼 때 추자영의 표정이 뭔가 묘했다는 점.

류지호를 대할 때와 달리 풋풋한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시로 둘러싸인 장미처럼 표정이 차갑고 도도하게 변했다.


“어쨌든 잘 살고 있나 보네.”


그녀의 대한 기억은 깔끔하게 추억이란 앨범 속에 보관될 것이다.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봤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첫사랑이라고 별 것 없다.


‘왜 두근거리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과거로 돌아오면서 감정회로가 망가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신소연에 대해서도 그렇고.

입대 초기에는 낸시가 그렇게 보고 싶고 그리웠다.

일 년이 훌쩍 지나고부터는 조금 무뎌진 것 같았다.

보고 싶기는 한데, 뼈에 사무치게 그립거나 하지는 않는.

감정이 식은 것인지.


‘평생의 반려라고 생각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 ✻ ✻


사춘기 막내로 인해 불편한 것을 빼곤 모든 것이 좋았다.

추자영을 만나고 몇 주가 흐른 주말.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梧珍庵).

해방 직후에는 영화계 대부 임화수가 살던 한옥이었다.

당시에는 충무로의 이름난 영화배우들이 이 집을 자주 들락거렸다.

또한 임화수가 이끌던 자유청년단이나 대한감찰대에서 활동하던 ‘어깨’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1953년에 요정으로 문을 연 이후로 현재까지도 정치인·기업인 등 유명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실세인 박성철 제2부수상이 만나 7·4 공동성명을 논의한 곳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에는 일본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기생 관광’으로 외화벌이를 한다고 국내외 언론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어쨌든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으로 꼽히는 오진암 대문 앞에 한국에서 단 한 대만 운행되고 있는 벤츠 승용차가 멈췄다.

최영민 과장이 열어준 차문 너머에서 정장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류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군입대 이후 실로 오랜만에 격식을 갖춘 모습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의 안내를 받아 류지호가 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동우수출공사의 왕 회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안녕하셨어요. 회장님.”


류지호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왕회장의 맞은편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류지호를 맞이했다.


“어!”


전혀 뜻밖의 조금은 묘한 장소.

예상치 못한 사람과의 재회다.


“여기는 WaW의 류지호 회장, 이쪽은 대유영상사업단 김자영 실장.”

“회장님이 소개시켜주지 않아도 우린 이미 아는 사이에요.”


추자영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류지호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누나 성이 김이었어?”

“당연하지.”

“추씨는 뭐야?”

“가명.”

“......?”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류지호 회장님.”

“무슨 회장님이야. 그냥 편하게 말 해.”

“그래도... 될까.....?”

“회장님, 여기 실장하고 저는 어릴 적 친구에요. 편하게 말 놔도 되죠?”

“소꿉친구였던 모양이구만.”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잡자고 잠시 후 - 문이 열렸다.


드르륵.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왕 회장이 능숙하게 요리를 주문했다.

한복 여성이 방에서 나가고 담소가 이어졌다.


“여기 류회장 잘 생겼지?”

“그러네요. 어릴 때는 말라서 조금 그랬는데, 헌앙하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어요.”

“헌양은.... 솔직히 미남은 아니지, 그냥 남자답게 생겼다고 합의보자고.”

“하하하. 못생겼다는 말은 듣기 싫은 모양이구만.”


왕회장의 말에 추자영이 아니 김자영이 ‘호호호’ 따라 웃었다.


“추 실장이 아니라 김 실장이라고 불러야겠네?”

“응.”

“대유영상사업단에 있다고?”

“응.”

“누나 나이에 벌써 실장이야?”

“그렇게 됐어.”

“이야. 능력 있네? 젊은 나이에.”

“너만 하겠어?”

“왕 회장님하고 친분이 있는 거 보니. 대유가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들어올 모양이네?”

“이미 들어왔거든.”

“우일영상? 비디오 사업이잖아. 비디오 업계와 영화판은 달라.”

“삐딱하다?”

“삐딱한 게 아니라, 영화인들은 비디오 업자들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아.”

“영화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선민의식이 있나봐.”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과 프라이드가 있긴 해.”

“웃기는 게 비디오 판권 팔 때는 엄청 아쉬운 소리하다가 막상 영화에 투자하려고 하면 또 튕긴다? 원래 영화판이 그런 거야?”

“여기 왕 회장님께 여쭤봐.”

“내가 WaW의 회장님을 만난다고 해서 좀 알아봤거든.”

“그래봐야 대유만큼 할까.....”

“영화판에 들어오려는 기업들은 다 널 주목하고 있어. 직배사의 한국 사장들이 은근히 네 눈치를 보더라.”

“그 양반들 참... 거시기 하네.”


왕 회장이 불쑥 물었다.


“검손 떨기는... 류 감독 자네가 트라이-스텔라에서 제작한 영화들이 다 성공했다며?”


하하.

류지호가 무안한 웃음을 흘렸다.

왕 회장이 처음 웨스트우드를 방문했을 때 류지호가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를 소유한 사실을 숨겼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다는 아니에요. <바톤 핑크>하고 <저수지의 개들>은 본전치기 겨우 했네요.”

“하여간 어린 나이에 대단하구만.”

“회장님도 한창 때 한국영화판을 주름 잡으셨잖아요.”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까칠하신 것이 많이 섭섭하신가보네요?”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섭섭하긴 해.”


류지호가 극장사업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다.


“내년에 프린트 벌 수 제한 풀리면, WaW는 일 년에 10편까지 배급할 계획입니다.”

“방화 포함한 숫자인가?”

“외화만이요. 한국영화는 매년 2~3편 정도 제작할 예정이고, 다른 영화사 작품까지 포함하면....”

“대단하군.”


왕 회장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막상 류지호가 확인해 주자 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박 사장하고 WaW 식구들이 열심히 한 덕분이죠.”

“내가 무슨 자격으로 WaW가 극장사업을 하는 것에 왈가왈부하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안 그러셨잖아요.”

“동우극장을 리모델링해서 멀티플렉스로 바꿀까 고민 중이야. 자네도 들어올 생각 없나? 처음부터 극장을 만드는 것보다 안전하고 돈도 아낄 수 있고.”

“대유에서 투자를 받으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극장운영을 위탁하려고요?”

“대유뿐이겠나? 오성에, 선경에, 경일에 대기업 영상사업부에서 이리저리 찔러보고 있다네.”


쩝.


류지호가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다.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내가 딴 놈 말은 귓등으로 듣는 편인데, 자네하고 박건호 말은 귀를 씻고 듣는 편이야. 허심탄회하게 말해봐.”

“논에 메기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가 더 잘 자라듯, 벅찬 상대와 싸울 때 되레 강해지는 유전자를 가진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스크린쿼터나 영화진흥기금에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관객들은 수십 년 동안 웰메이드 할리우드 영화를 보아왔어요. 평론가 뺨치는 관객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우리 관객들에게 국산품 애용하라면 코웃음 치는 건 당연한 겁니다. 헌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좋은 영화 발전의 토양이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 수준높고 까탈스러운 관객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얼마나 영화계가 노력해야 할까요.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만큼 시장개방 때마다 반발이 극심한 나라도 드물다.

막상 개방한 후에 결과는 조금 웃긴다.

시장 개방된 한국의 토종 업체가 망한 사례도 별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할인점 Sam‘s Mart가 울고 갔고, 매크도널즈와 커피전문점 세이렌도 1등을 못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할리우드 영화?

10년 정도 흐르면 한국영화에 점유율에서 밀리게 된다.

승자는 언제는 한국의 대기업들이지만.

김자영이 살짝 기분 나쁘다는 투로 물었다.


“대기업이 적이란 말이야?”

“누나, 솔직히 말해서... 한국 영화 시장규모가 이제 겨우 1,000억 조금 넘어. 대기업이 이런 작은 시장까지 먹으려고 숟가락 얹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대기업이 가진 자본력과 선진적인 경영 마인드가 충무로의 전근대적이고 주먹구구식의 구시대적인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어.”

“선진적인 경영 마인드? <킬링 오브 썸머>를 우일영상에서 출시할 때 어떻게 했더라?”

“어떻게 했는데?”


후우.


류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류지호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130분 러닝타임 영화를 비디오 두 개로 출시했어. 겨우 10분이야. 공테이프 용량이 120분이 한계라는 이유로 나눠서 출시했지. 공테이프 생산능력이 있는 대기업이 그런 짓을 버젓이 벌이면서 선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라면 좀 부끄러울 것 같아.”

“공테이프는 원래 120분 아니야?”

“그건 영화가 두 시간 내외로 제작될 때 편의에 의해서 메이커가 정한 거고, 시간을 늘리려 들면 얼마든지 늘일 수 있다고. 영화가 완결구조를 가진 하나의 예술작품인 걸 다 떠나서 그런 행위는 소비자를 우롱하는 짓이잖아.”

“큰 사업을 해서 그런가? 너 많이 변했다?”

“그럴 리가.”

“굉장히 시니컬해.”


류지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조로 말했다.


“누나는 앞으로 내 경쟁상대가 될 거잖아. 친절한 것도 이상하지.”

“호호호. 난 WaW 회장 이름이 류지호라기에 동명이인인 줄 알았어.”

“운이 좋았어.”

“사회생활 해보니까 운만으로 되는 게 아니더라.”

“글쎄. 내가 보기엔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운 좋은 사람한테는 안 되던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한 사람만 대봐.”


류지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눈앞에 있잖아. 더럽게 운 좋은 놈.”


호호호.


김자영이 웃었다.

진심으로 우스운 것인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런지 모르지만.


“영화판 선배로서 충고할 거 없어?”

“만만하게 보고 들어오지 말라는 것 정도?”

“절대 그런 생각 안 해.”

“중요한 것은 함께 해야 된다는 거야. 학벌 좋고 대기업 직원이라고 영화인들 개무시하다간 큰 코 다칠 거야. 더 중요한 것은 영화 몇 편 해봤다고 다 배웠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거야. 여기 회장님이 영화를 70편 넘게 제작하셨는데도 여전히 감독들에게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셔. 대유영상사업단이 망하더라도, 그런 점을 명심하면 누나 개인은 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드르륵.


문이 열리고,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 거대한 상이 들어왔다.


“가야금 연주 준비시킬까요?”

“오늘은 여기 젊은 친구들과 식사하면서 담소나 나누고 가겠네.”

“알겠습니다.”


기생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방을 나갔다.

넓은 방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한 상 거하게 차려진 음식 앞에서 류지호와 김자영은 왕 회장이 수저를 들기를 기다렸다.


“자, 들지.”

“잘 먹겠습니다.”

“류 감독은 요정이 처음이지?”

“말만 들었지 처음 경험해 보네요. 회장님은 자주 오세요?”

“GH 오락집단유한공사 회장이 한국방문 할 때 가끔 와. 홍콩 배우들도 예전에 몇 번 데리고 왔고.”


류지호는 식사 내내 동우극장 투자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가타부타 답을 내주지 않았다.

WaW 픽처스의 경영진이 결정할 문제라고 떠넘겼다.


“늙은이는 이만 빠지겠네.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들 나눠.”


요정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왕 회장이 먼저 떠났다.

류지호와 김자영은 인사동의 한 찻집으로 이동했다.


“여자친구 있어?”

“응. 누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맞선만 줄기차게 보고 있다.”

“아직 한창인데 시집을 보낸다고?”

“아빠는 일하는 걸 적극 찬성하시는데, 엄마가 문제야. 좋은 값 받을 수 있을 때 얼른 시집가래.”

“누나가 재벌집 딸이었다니.... 그 롤라장 죽순이가....”

“사돈 남 말 하네. 죽돌이는 너였지.”

“나도 금방 끊었어.”

“할아버지가 재벌이지 우리 아빠는 재벌은 아냐.”

“그럼 아버님이 대유자동차에 근무하실 때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거네?”

“인천에서 내가 칠공주라고 소문났었다며?”

“그랬다더라. 나도 우찬이가 알려줘서 알았어.”

“곰처럼 덩치 큰 애? 걘 뭐해?”

“태권도학과 다녀”.

“국가대표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럭저럭 대회에서 메달도 따고 그래.”

“카투사 근무한다고?”

“응.”

“꼬맹이 때는 커서 뭐가 되려고 만날 롤라장이나 오나 했더니. 공부 좀 했나봐?”

“말도 마. 죽은 힘을 다 해 공부했어.”

“대학은?”

“UCLA.”

“이야! 대견하네? 우리 지호.”

“누나하고 나하고 두 살 차이야. 사회 나오면 맞먹는 나이거든.”

“맞먹긴. 내가 너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야 할 판인데. 안 그래요 회장님?”

“닭살 돋아. 그냥 하던 대로 해.”

“차 마시려니 심심하다.”

“생맥 마실래?”

“진작 그랬어야지.”


류지호는 김자영과 가볍게 생맥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뒀어야 했나?’


감정의 기복이 심한 10대 중반에 겪은 사랑의 추억은 나이가 들어서도 뭔가 아련하고 그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런데 류지호의 첫사랑은 짝사랑이어서 그럴까.

수십 년(과거로 회귀했으니)만에 만난 첫사랑임에도 뭔가 복잡한 감정보다는 신기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의 풋풋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지는 못하는 모양일까.

아니면 과거로 돌아온 후유증일까.

대신에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된 걸지도.

예를 들어 차분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관계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능력을.

사실 첫사랑이 여전히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추억이란 이름의 기억과 감정을 혼동해선 안 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현실과 타협하고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게 되는 것을 보면, 첫사랑은 판타지로 남아있는 환상일 뿐일지도.

어릴 때 쓴 일기장을 함부로 꺼내 읽어서 추억을 망가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처럼, 첫사랑 역시 어른이 되어서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나가 대유전자 사장 딸이면 드라마틱한 재회이긴 하네.”


류지호는 새삼 느끼게 된다.

드러난 것보다 감춰졌거나 가려져 있는 진실이 참 많다고.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 몰랐던 걸 알아가는 재미를 느꼈다.

한편으로 쉽게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안도했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이전 삶의 인연들을 수도 없이 만날 터.

게다가 아직 만나지 못한 이전 삶의 인연들은 모두 리셋 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때마다 감회에 젖고 감상에 빠진다면 올바른 행실을 할 수 없을 테니까.


작가의말

장마랍니다. 피해없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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