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불로소득 망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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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산夏山
작품등록일 :
2022.03.30 21:52
최근연재일 :
2022.04.3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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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30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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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2화 최소 3억 이상 전셋집

DUMMY

내 나이 올해로 서른 다섯.

며칠 전, 3년 간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여자 친구의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 결정적이었다.


"최소 3억 이상 전셋집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내 딸 가져갈 생각은 하지도 말게."


6살 연하의 여자 친구는 엉엉 울기만 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만큼, 연애 하면서 돈 한 번 쓰지 못하게 했고, 진지하게 결혼할 마음으로 몸도 마음도 아껴주었다.

1박 여행도 같이 한 번 못 가봤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사랑인지 몰랐다.


작은 광고 대행사의 대리 직급.

세금, 보험 떼고 월급 실수령액 290만원.

취업 후 나름 성실하게 저축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모아 놓은 돈은 예금, 적금, 주식에 넣은 돈 다 빼서 합쳐도 7천만 원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나름 목돈이었지만 최근 서울 집값을 보면, 터무니 없는 금액이긴 했다.


가끔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사고 싶은 옷과 신발도 사긴 했다.

그래도 사치스럽게 산 적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딱 필요한 것들만 소비했다. 중고로 국산차 한 대 산 것이 유일하게 큰 돈을 쓴 거였다.


평균적으로 나가는 고정비가 있다.

월세와 관리비로 50. 가스, 전기, 통신비, 생활비 등을 포함한 카드 값은 100만원 안팎.

매달 안쓰고 90만원 씩 모아도, 1억을 모으려면 111개월이 걸린다. 빨라도 9년이다.


3억 이상급 집을 얻으려면, 풀로 대출을 땡기더라도 일단 최소 9천만원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결혼이 집 얻으면 끝이던가?

준비 과정에서 들어갈 돈들도 무시 못하고, 딱 3억짜리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3억 1천, 3억 2천만 되도 내 입장에서는 1~2천만원이 땅 파서 나올 돈이 아닌 것이다.


한 집에 살고 있는 홀어머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 받을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인 경제 사정상 3억 짜리 집은 무리였다.

한다면 어떻게든 할 수야 있겠지만, 이후에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드라마틱하게 삶을 바꾸려면, 다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원망스럽진 않았다.

건강하게 사회생활할 수 있을만큼 뒷바라지 해주셨고,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한 번 들어보지 않게 알뜰히 자식을 챙겨주셨다.


여자 친구는 생각보다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도저히 엄마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여자 친구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요즘처럼 남녀 평등의 세상에서, 왜 집은 남자가 꼭 해가야 하는 것일까?

이런 부담스러운 문화가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혼자서 아무리 투정을 부려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이번 달도 먹고 살아 남기 위해 기계처럼 일했다.

알람 시계가 울리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버스를 타고, 늘상 있는 야근을 마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드는 패턴.


어쨌든 오늘은 25일.

통장에는 2,912,000원이라는 정확한 액수의 월급이 입금됐다.


참 마약 같은 것이, 290만원이라는 액수가 계좌에 찍힌 걸 보면 기분이 좋긴 하다.

한 달 동안 주기적으로 그만두고 싶은 마음,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쑥날쑥 하다가도 월급날만큼은 만족스러운 기분이 든다. 그래도 따박따박 한 번도 누락된 적은 없으니까.


나만 그런 마음은 아닐 것이다. 회사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지, 늘 월급날은 회식으로 이어졌다.


"강대리, 요즘 왜이리 우울해 보여?"

"차장님, 저 여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뭐야? 언제는 결혼할 거라더니?!"


쌓였던 원망과 억울함을 토해내듯 술을 진탕 마셔버렸다.

누구에게 부끄러운 마음도 들지 않았고,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들어버렸다.

다행히 마음씨 착한 차장님이 내 주정을 다 들어주었다.


"강대리, 나도 그랬어. 어떻게 세상은 20년 전이랑 바뀐 게 하나도 없냐! 씨부럴!"

"앞으로 20년 뒤에도 안 바뀌겠죠?"

"씨부럴! 안 되겠다. 노래방 가자!! 불행을 다 쏟아내버리자!"


노래방에 가자마자 나는 소파에 누워 골아 떨어졌고, 손차장만 신나서 노래를 연이어 불렀던 기억이 어슴프레 난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택시에 우겨넣었고, 집 앞에서 전봇대를 붙잡고 토를 했고, 놀란 엄마가 뛰어나와 나를 부축해서 방에 뉘였던 것 같다.

중간중간 필름이 끊겨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다. 엄마를 부둥켜 안고 잠깐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


다음날 아침, 두통과 속쓰림이 온 몸을 지배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엄마가 가져다 주신 꿀물을 원샷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으으... 신음하다가 자다가 다시 신음하다가... 어제의 나를 원망하며, 죽다 살아났다.


좀 살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니, 오후 2시였다.

토요일 오전은 이렇게 날아갔구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차장님에게 온 부재중 통화가 세 통.

그리고 친구들 단톡방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주말이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게 당연한 일정이었는데, 이젠 아무 약속이 없다.

친구들은 같이 게임을 할 시간을 잡고 있었다.


김택수 : 오키 그럼 점심 먹고 2시에 고고


게임이나 해볼까. 무료한 주말보다는 재밌을 것이고, 흙수저 같은 현실보다는 게임 세상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 : 나도 오후에 합류할게ㅎㅎ


부엌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온 음료를 꺼내 꿀떡꿀떡 들이키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아우 맞다, 로또 사야 되는데..."


우울하고, 정신없이 보내다보니 이번 주에 로또 사는 걸 깜박했다.

건너건너 들은 바로는, 로또에 당첨되신 분이 하신 말이 있다.


로또는 한 주라도 거르면, 쌓였던 운이 달아나 버린다.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나 같은 서민은 로또 1등의 꿈을 꾸며 살아간다.

확률이 희박할지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희망이랄까.

매주 5천원씩 꼬박꼬박 희망을 걸고 있다.


복권 판매점으로 가는 길에 차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차장님,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강대리. 잘 들어간거지? 걱정했잖어. 암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주말도 잘 보내고!"

"네, 차장님.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십쇼!"


간혹가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다.

업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이 지내는 회사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앞가림하기 바쁘거나, 남을 착취하거나 괴롭히기 바쁘다.

결론은 인간적으로 얽혀서 좋을 것이 없다.


늘 가는 로또 판매점에 도착했다. 토요일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별 기념으로 오늘은 만 원을 한 번 질러봐?'


한 달 전 5등 당첨 이후로, 4연속 꽝인 상황.

오늘은 평소처럼 자동으로 하지 말고, 수동으로 도전해 봐야겠다.

아무리 인생이 잘 안풀려도, 자동으로 가지말고 능동적으로 가보자!


그렇게 나는 만 원 어치를 수동으로 지른 뒤 기대감을 품고 판매점을 나섰다.


생각보해 보면, 나는 참 낙관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아버지가 안 계셔도, 집이 가난해도, 공부든 운동이든 특출나게 잘 하는 거 하나 없었지만.

학교 앞 컵떡볶이 하나에 행복했고, 지금껏 친하게 지내는 불알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로또가 꽝이어도, 내 인생이 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마음 먹고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나이를 먹고, 이제 청년이 아닌 중년이 되어가는 중이라 그런지 마음이 공허하다.


누구는 비트코인으로 20억을 벌었다고 하고, 누구는 주식으로 몇 천을 벌었다던데....

결혼도 실패한 마당에 모아 놓은 돈을 투자에 올인해 봐야 하는 걸까?

그런 박탈감과 열패감 같은 것들이 내 몸을 점점 잠식해 가고 있었다.


입구에 멈춰 서서 씁쓸한 생각으로 잠시 멍을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누구지?


순간 놀라서 몸을 피한 뒤 고개를 돌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했다.


응?


8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이 지팡이에 몸을 힘겹게 의지한 채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뭐 도와드릴까요?"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데, 먹을 것 좀 사줘. 며칠 째 밥을 못 먹었어."


노인은 정말 배가 고파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더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노인을 부축하여 바로 옆 콩나물 국밥집으로 들어가서 두 그릇을 시켰다.

그렇게 마주 본 채 서로 말없이 국밥을 씹어 삼켰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체하시겠어요!"

"학생, 고마워."

"저 학생 아니에요. 제가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월급 받고 일하는 직장인이에요."

"학생이 돈을 벌어?"

"아니. 네네. 천천히 다 드시고 힘 내세요."

"응! 학생도 잘 먹고 공부 열심히 혀."


그렇게 우린 콩나물국을 시원하게 완탕한 뒤 헤어졌다.

노인의 걸음걸이가 아까보다는 좀 더 기운이 있어 보였다.


이상하게 오랫동안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늙는다는 것은 뭘까?

노인이 뒤돌아 뭐라뭐라 얘기를 하는 것도 같았는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선행을 베풀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오늘은 왠지 주체적으로 로또 번호도 골랐고, 착한 일도 했으니 당첨 확률도 높아지지 않았을까?

착한 일 하자마자 보상을 바라다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저기요!"


응? 또 뭐지? 나 부르는 거 맞나?


고개를 돌려 보니, 내 첫사랑과 닮은 여자가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어어..어어....


믿기지 않을 만큼, 스무살 때 좋아했던 여자와 너무 닮은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니 오히려 더 예뼜다. 작은 얼굴에 하얀 피부, 오밀조밀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아름다운 이목구비까지. 게다가 볼륨감 있는 몸매의 소유자라니.


스무살 때는 말도 못 걸어본 여자였는데, 그보다 더 예쁜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아직 대화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러면서도 내 시선은 계속해서 그 여자의 이곳 저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매력이 넘쳐서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저기요?!"

"네? 저요?'


여자가 한 번 더 나를 부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니, 도대체 이런 여자가 왜 나한테 말을 건거지?

설마 이 여자도 배가 고파서? 절대 그럴리가 없을 것이다.


"혹시 방금 전에 노인 분께 식사 대접해 주신 분이죠?"

"네? 네. 그런데요?"

"맞으시구나. 저랑 잠깐 커피 한 잔 괜찮으세요?"


뭐지.

정말 뭐지?

선량한 나의 모습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하는 걸까?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신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인 것일까?


"왜 대답이 없으세요? 바쁘신가요?"

"아니요. 안 바빠요. 전혀요!"

"그럼 제가 커피 살게요. 여기 앞에 프랜차이즈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나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여자를 따라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


"저는 사람의 운명을 점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우연히 길을 가다가, 그쪽 분이 노인 분께 식사를 대접하시고 나온 뒤 운명이 바뀌는 기운을 느꼈어요."


여자는 목소리까지 너무 예뻤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미인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운명이 한 번 바뀐 결과로 봐도 무방하긴 했다.


하지만 그럼 그렇지.

역시나 사이비 종교 비슷한 거 같다.

내 운명이 바뀐 걸 왜 본인이 알아보고 신경쓰는가?


"죄송한데, 제가 종교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제 운명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한데, 다른 분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얘기 조금만 더 들어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걸요?"

"아... 얘기를 조금 더 하신다고요?"

"본인의 팔자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 해 보신 적 없으신가요?"

"그런 생각이야 하고 살지만. 조상님 묘자리가 잘못됐다는 얘기 같은 건 아니죠?"

"저 그런 사이비 종교 같은 거 아닙니다."


여자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자신의 말을 못 믿고 계속 딴 얘기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예쁜 여자가 기분 나빠하자, 순간 위축됐다.


고민이 되었다.

황금 같은 주말, 집에 가서 친구들과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는데.

일단 30분 정도만 더 얘기를 들어볼까나.

어디로 끌려간 것도 아니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니 뭐 별일이야 생기지 않겠지.


"그러면 제 운명이 어떻다는 건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여자가 나에게 뭘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렇게 예쁜 여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새로운 경험인 건 분명했다.

여자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봐두면, 오늘 밤 꿈에도 나올 것 같았다.


"오늘 로또 사셨죠?"


도대체 이 여자는 나를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우연히 지나가다가 노인과 국밥집에 들어가는 건 볼 수 있지만, 로또 판매점 앞에서 멍때린 것만 해도 5분은 될 것이다. 시력이 한 3.0 정도 되서 저 멀리서부터 나를 보면서 다가온 것일까?

갈수록 의심이 커졌다.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면 꽃뱀 같은 건가?


"로또를 사긴 했는데.. 뭐, 매일 사는 건 아니고 가끔 생각나면?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뭐야, 왜 내가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하고 있는거지?

이렇게나 여자와 대화를 할 줄 모르는 놈이었었나. 모태 솔로는 아닌데...

정황상 이상한 건 저 여자인데, 내가 왜 당당하지 못한 거지.


"사람들은 흔히 인생 역전을 하기 위해 로또를 사죠. 하지만 알다시피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에요. 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도 두 배가 높은 수치죠."

"네, 저는 4등도 못해봤어요."

"그렇게 벼락을 두 번 맞는다치고, 1등에 당첨되도 서울에서 괜찮은 아파트 한 채 사면 끝이에요."

"그러게요. 더이상 인생역전이라고 보기도 힘드네요."


얌전히 여자의 말을 계속해서 듣게 된다.

예쁜 여자가 말도 조리있게 잘한다.

더 얘기하고 싶다. 30분이 아니라 3시간 아니 그 이상이라도.


그때, 진동벨이 울렸다. 흠칫 놀라는 내 모습이 민망했다.

여자가 나보고 가져오라는 눈짓을 했다.

뭐야. 나한테 이성적으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는 모양이군.

그래도 돈은 여자가 냈으니까 서빙은 내가 하는 게 맞겠다.


커피는 맛있었다.

맨날 회사에서 인스턴트 커피만 타 먹다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아메리카노를 먹어보는 구나.

여자는 커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만약 로또 1등 당첨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당첨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엄청 부자가 되겠죠?"

"건희씨, 부자가 되고 싶으세요?"

"당연하죠. 가난하게 사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뭐야. 근데 이 여자, 방금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우리가 아는 사이였었나?

지금 나만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건가?


"잠깐 이것 좀 보시겠어요?"


A4 용지에 한자와 숫자, 한글들이 마구 뒤섞여 쓰여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펜으로 짚어준 가장 가운데 큰 세 글자는 강. 건. 희.

정확한 내 이름이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건희 씨 사주에서 30대 후반부터 재기통문 팔자가 생겨요."

"그게 뭐죠?"

"역학에서 재물운이 좋은 팔자를 말해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거부사주죠."

"음... 그렇군요."

"물려 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 계통이나 연예인을 할 기량도 없으시잖아요?"


부적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명리학을 하는 여자였나보다.

슬슬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야 할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갑자기 재물이 쏟아져 들어올 팔자가 될까요?"

"로또 아니면 도박이겠죠, 뭐."

"사람의 인생이 변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세요?"

"다시 태어나야죠, 뭐."


성의없게 응답을 해보았지만, 여자는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만약 이 여자의 직업이 점쟁이거나 무당이더라도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사귈 수 있을까?

경험 삼아 사귀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던 찰나, 여자가 테이블을 쾅하고 쳤다.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거나. 그래야 인생이 바뀌는 거에요, 건희씨."

"안 하던 걸 하거나... 하던 걸 하지 말거나..?"

"네. 오늘 그렇게 하셨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뭘 하셨죠?

"어... 오늘 숙취에 시달리다가... 로또를 샀죠. 아! 근데 원래 자동으로 하던 걸 수동으로 했어요!"

"맞아요. 또 뭘 하셨죠?"

"그리고 배고픈 노인 분께 밥을 사드렸어요."

"자주 그러시나요?"

"아니요, 이런 적은 처음이죠."

"네 처음이셨죠. 또 뭘 하셨죠?"

"그 다음에는... 지금 그쪽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요?"


여자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 별것도 아닌 상황 같으면서도 뭔가 좀 그럴 듯 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사기를 당하는 걸까.


"대단한 선택이나 행동이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에요. 사소한 것으로 삶이 바뀌기도 합니다."

"음... 오늘이 좀 특별한 날이긴 하네요."

"그 특별함으로 건희 씨가 선택 받으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여자가 악수를 권했다.

뭐지. 초면에 손까지 잡아도 되는 건가.

여자의 손은 희고 고왔다. 감히 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참다 못한 여자가 망설이고 있는 내 손을 덥썩 붙잡아 흔들었다.

부드럽고 매끈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뭘 축하하는 거죠?"

"오늘 저녁에 바로 알게 되실 거에요. 그 다음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알게 되실 거구요."

"아... 네."

"그럼 저는 이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건희 씨."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이대로 간다고?


정말 그냥 내 운명이 바뀌었고, 그것을 축하해 주기 위해 커피까지 사줬단 말인가?

사실은 진짜 나한테 반해서 작업을 걸었던 거 아니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번호 교환하고, 마음이 있으면 만나보자고 말해줘야 할 텐데!


"저기!"


뒤돌아서 나가려는 여자를 급히 불러 세웠다.

여자는 미소를 한 번 지어보이더니 그대로 그냥 나가 버렸다.


왜 그냥 가지? 얼른 따라 나가야 하는 건가?

인생의 운명적 만남을 이리도 허무하게 놓치고 있는 거 아닐까?

용기를 내야 한다, 강건희!

두 주먹에 불끈 힘을 주는 순간, 온 몸에 긴장이 쪼여졌다가 갑자기 힘이 풀리면서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


"학생! ... 학생!!"


누군가 내 뺨을 찰싹 찰싹 때리며 깨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커피숍 사장님이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네? 저 학생 아닌데요..."

"학생이든 어른이든!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아직도 숙취가 남아있는 건가? 머리가 띵하다.

조금씩 기억이 돌아왔다.


맞아. 첫사랑을 닮은 예쁜 여자를 따라 이 커피숍에 들어왔지.

그리고 운명에 관하여 얘기를 나누다가 악수를 하고 떠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너무 긴장해서 몸이 놀란 건가?


".....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어이구. 젊은 사람이 이렇게 허약해서야. 병원이라도 가봐요, 어서!"


커피숍을 나서려는 데, 뒤에서 사장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도 안 시키고 멀뚱히 혼자 앉아 있더라니만. 사람 놀래게 쓰러지고 지랄이야."


저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진짜 술이 덜 깬 건가. 아님 정신이 어떻게 돌아버린 건가.

핸드폰을 보니 어머니에게 온 부재중 통화가 10통이 넘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커피숍을 나와 길거리를 둘러보았다.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


집에 오자, 어머니가 난리를 치셨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말도 없이 나가서 전화도 안 받고!! 걱정 했잖아!"

"죄송해요. 커피숍에 잠깐 친구를 만나서 얘기하느랴...."

"그래도 전화는 받아야지!"

"무음으로 해놔서...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화를 쉽게 삭이질 못하셨고, 나는 어머니를 피해 얼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일단 지친 몸을 얼른 침대에 눕혔다.


그 여자 도대체 누군거지?

이별의 아픔으로 정신이 돌아버린 남자가 첫사랑을 떠올리며 잠시 헛된 꿈을 꾼건가?

진짜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하는 건 아닌지, 진심 걱정이 되었다.


이상한 건, 입 안에는 아직도 쌉싸름하게 아메리카노의 맛이 남아있었다.

여자와 악수를 하며 느꼈던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여자가 했던 말들도 다 기억이 났다.


'오늘 저녁이면 운명이 바뀐 결과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었지. 설마 진짜 로또가 당첨되려나?'


.

.


그 순간 시계를 확인하니 정확히 저녁 8시 45분이었다.

이제 여섯 개의 숫자가 나오면 모든 게 명확해질 것이다.


두 MC가 등장하여 진행을 시작했다.


이상하게 지난 회차의 당첨 금액을 읊어주는 여자 MC의 얼굴이 오늘 만났던 여자와 닮아 보였다.

꿈을 꿔도 제대로 꿈을 꾸고 있구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오늘의 금손'이라며 응급의료센터의 수간호사 김민정 씨가 나와서 추첨 버튼을 눌렀다.

번호가 쓰여진 볼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왕성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첫 번째 볼이 나왔다.


37번.


마음 먹고 만원어치나 샀는데, 딱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30번, 15번, 7번, 43번, 38번. 보너스 번호 17번.


쿵쾅 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의심했다.

보너스 번호까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6개 번호가 모두 한 줄에서 일치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1등 당첨이었다.


적어도 삼십 번 정도는 재차 확인을 했던 것 같다.

내 눈이 잘못 된 거 아닐까?

그제서야 QR 코드로 확인하는 법이 떠올랐다.

핸드폰으로 로또 종이를 촬영하고 링크를 누르자,

1등 당첨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당첨 금액을 확인해 보았다.

제 1003회 로또 총 판매액 1,035억 원.

1등 총 당첨금 254억 원. 14명이 당첨돼 1인당 18억 1천만 원을 받을 예정.


"이... 이거 실화야?"


그때부터 였다.

내 운명이 바뀐 시발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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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불로소득 망나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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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웹소설 첫 연재작입니다. +2 22.04.18 584 0 -
29 제30화 일등석에서 먹는 라면맛 +1 22.04.30 353 8 12쪽
28 제29화 어쩔 수 없는 인간사 +4 22.04.29 423 6 12쪽
27 제28화 우리가! 남이가! +2 22.04.28 411 6 11쪽
26 제27화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4 22.04.27 526 7 12쪽
25 제26화 자유이용권 22.04.26 608 7 12쪽
24 제25화 적성에 맞는 일 +2 22.04.25 745 7 13쪽
23 제24화 인생은 성공한 사람에겐 놀이터 22.04.23 1,212 10 13쪽
22 제23화 쓰리썸 +3 22.04.22 970 11 12쪽
21 제22화 욕망에 눈 뜬 자들 22.04.21 750 10 11쪽
20 제21화 뜨거운 밤 +2 22.04.21 805 13 12쪽
19 제20화 연애 사업 22.04.20 776 11 12쪽
18 제19화 음지의 세계 22.04.19 765 11 12쪽
17 제18화 스폰 놀이 22.04.18 834 12 11쪽
16 제17화 노는 물이 달라짐 22.04.16 831 11 13쪽
15 제16화 얀커르 벤처스 +1 22.04.15 888 17 14쪽
14 제15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인간 22.04.14 926 15 12쪽
13 제14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22.04.13 954 14 12쪽
12 제13화 캐릭터 설정 +3 22.04.12 1,039 17 13쪽
11 제12화 나는 죽어도 이 기회 못 놓친다 +1 22.04.11 1,074 15 13쪽
10 제11화 우정 콘서트 +1 22.04.09 1,152 17 12쪽
9 제10화 너 돈 많아? +1 22.04.08 1,228 19 13쪽
8 제9화 건강검진과 아파트 쇼핑 +1 22.04.07 1,281 18 12쪽
7 제8화 대한민국 30대 평균 +1 22.04.06 1,354 18 13쪽
6 제7화 로또 당첨 번호에는 주인이 없다 +1 22.04.05 1,458 18 12쪽
5 제6화 같은 꿈을 두 번 꿀 수는 없는 법 +2 22.04.04 1,522 23 13쪽
4 제5화 인생 공부, 사람 공부 +3 22.04.02 1,623 22 13쪽
3 제4화 자격지심 +2 22.04.01 1,751 24 13쪽
2 제3화 오늘부로 이 회사 그만둡니다 +4 22.03.31 1,903 2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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