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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배
작품등록일 :
2022.12.0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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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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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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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81. 우리는 모든것을 잃어버렸다.

DUMMY

착잡하다.

세상이 온통 검은색에 밝게 빛나는 점들이 찍혀있는 이 공간에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닌다.

아리나도 머리가 살짝 아파져 올 때마다 키에서 손을 떼고 자유롭게 움직이게 둔다.

함선 뒤쪽의 우주선에서 가끔 들려오는 메이크의 목소리에 답변만 해줄 뿐 특별히 할 말도 없다.

지구가 폭발하고 나서야 이 함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우주선에 있던 사람들도, 사라도, 레일리도, 메이크도 전부 우주에 대한 공포를 정확하게 인식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겪고 난 뒤에야 후회한다.

물론 라티안도, 피렌도, 아리나도..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절망감이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덕분에 최근에는 땅바닥만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아니.. 정면을 보고있어도 보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툭.

“ 아.. 피렌.. “

“ 아.. 아리나.. 고생했어.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쉬어. “

이 거대한 함선을 목적지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아리나를 다독인 피렌은 다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나아가려 한다.

그때 아리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 ..그.. 앨리스는..? “

피렌은 분명 말을 한 것 같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냥 고개만 좌우로 흔들 뿐이다.

아리나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가던 길을 나아간다.

피렌도 아리나와 마찬가지로.. 그냥 이 좁은 함선을 돌아다니며 뭐라도 한다.

아니.. 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일단 움직인다.

그러던 중에 춘향이 갇혀있는 방을 바라본다.

춘향도 여전히..

..


우주에 표류하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치 버려진 인형처럼 구석에 기대어 울고만 있었다.

저러다 또 의식을 잃고 폭주해서 방을 부수기 위해, 마나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기 위해 낫을 휘둘러 댈 것이다.

춘향의 상태를 확인한 피렌은 다른 방에 있는 라티안을 확인한다.

라티안은 온몸에 심한 부상을 입어 한동안 누워서 생활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보기는 하지만.. 다시 금방 드러눕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아픈가 보다.

“ 라티안. 괜찮아? “

“ 아.. 피렌.. 응. 금방 나을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

...

“ 지금도 움직일 순 있는데..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

앨리스가 있었다면 바로 나을 수 있었을 텐데..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감정을, 지금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할 말이 없다.

“ ...얼른.. 나아서.. 일하는 거 도와줄게. “

“ 그래.. 고맙다. “

피렌은 씁쓸한 웃음을 띠고 자리를 떠난다.

역시나.. 라티안과도 할 말이 길게 필요하지 않다.

옛날 같았으면 쓸데없는 이야기만 해도 한 달은 놀 수 있었을 텐데..

이젠 그 옛날의 일들도 지구처럼 우주로 흩어진 기분이 든다.

허무하다.

그렇게 살아왔던 세계가 단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다니..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걷던 피렌은 어느새 조타실 앞까지 도착했다.

“ 아.. 저기 오셨네..! “

오늘도.. 아니.. 날짜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보니 오늘도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또 새로운 사람이 라티안 일행을 찾아왔다.

하려는 말은 뻔하다.

‘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

“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물론.. 눈앞에서 피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답답해서 온 것이다.

“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안타깝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파멸의 마녀 같은 자신들을 이끌어줄 사람이 없어서,

돌아갈 곳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뻔한 대답이 들릴만한 질문을 하러 이곳까지 오고서는 뻔한 답을 듣고 돌아간다.

이렇게 보면.. 춘향은 굉장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거리낌 없고, 멋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사람이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일어나 행동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라티안도, 피렌도, 아리나도 전부 그런 춘향이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자라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나아가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

“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었네. “

피렌이 조타실로 들어서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우주선에서 신호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앨리스가 만들어내고 춘향이 스마트폰이라고 불렀던 이 네모난 화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우주선에 있는 메이크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드디어 받았구만.. 내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일세.

“ 아.. 네 메이크씨. 피렌입니다. 아리나는 휴식하러 갔어요. “

-허허 고생이 많군. 우주에 관한 질문일세. 혹시 지구 같은 다른 행성에는 착륙할 수 없는 건가?

아마 이 함선 내의 모든 사람과 뒤에 따라오는 우주선의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메이크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메이크는 어떻게든 우주의, 외계의 지식을 습득하고 나아가기 위해 이렇듯 심심하면 라티안 일행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 아..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그 행성에 사람이 존재하면 명백한 적대적 행위입니다. 만약 그 행성에서 훨씬 압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저희는 착륙하자마자 죽는 목숨이 되겠지요. “

-아아 그렇구만.. 확실히 그렇겠어.. 그러면....

그 뒤로도 피렌은 여섯 가지 질문에 다섯 가지 답변을 메이크에게 해 주었다..

하나는.. 피렌도 모르는 질문인지라 답을 하지 못 해주는 바람에 약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으음.. 고맙네. 나이가 들다 보니 배우는 데도 힘이 부치는구만. 허허. 또 궁금한 것이나 특이사항이 있다면 연락하겠네.

사실 지구의 나이로 따지고 들자면 피렌이 메이크보다 더 과거에 태어났으니 피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이것이 체내에 흐르는 마나량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앨리스가 가진 신비한 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메이크가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 아. 저기. 메이크씨 잠시만요. “

-음? 뭔가?

피렌은 자기도 모르게 메이크를 붙잡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최근 이런 질문을 주고받으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왠지 오늘따라 붙잡고 싶었다.

“ ...저도..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

-오. 뭐든 물어보시게! 내 아는 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성심성의껏 답하도록 하지!

메이크도 우주로 나오고 나서 모두의 분위기를 알고 있다.

이런 우울하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피렌이 메이크에게 질문한 것만으로도 목소리에서부터 기쁨이 느껴졌다.

마침.. 질문도 그런 내용이기는 했다.

“ ...메이크씨는..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일 수 있는 겁니까? “

-....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소리만 듣고 있는데도 피렌은 메이크의 눈빛이 우주에 오고 나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아직 생각할 수 있으니까. 아직 살아갈 수 있으니까... 아직 숨이 붙어있다면 최대한 발버둥 쳐봐야 하지 않겠나?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물론 메이크가 하는 말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피렌은 고개를 저었다.

“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

-..조급해하지 말게나. 처음부터 큰일을 할 필요는 없다네. 아주 작은 부분부터 천천히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큰 그림이 완성되어 있을걸세.

메이크의 모든 말 하나하나가 이해된다.

알 수는 있는데.. 할 수는 없는 느낌이다.

앨리스와 춘향.. 두 명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 ...감사합니다. “

-..힘내시게.




그렇게 피렌이 고민하는 나날이 지나가는 동안 라티안도 몸이 회복되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나.. 마나를 내놔...!!! 당장!!!!!!

방 안에서 춘향은 이성을 잃고 모든 걸 부수기 위해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휘두르고 있다.

“ ...여전하네. “

벌써 며칠째 이러고 있는 춘향을 보며 피렌이 안타까운 듯 말한다.

“ ..그래도.. 이 녀석이라도 제정신이었으면.. “

평소에 춘향을 칭찬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라티안은 자신이 말하고서는 놀라버렸다.

“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이야.. “

“ 그만큼 우리가 많이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뭐.. 이 녀석이 우리를 이끌고 움직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닌 건... 음..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해야지. “

-내놔!!! 부족해!! 부족하다고!! 마나!!!

춘향의 입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망령이 울부짖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 ...가자. “

오늘도 여전히 아리나는 이 함선을 몰고 아무것도 없는 우주 속에서 목적지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런 아리나에게 가기 전에 오늘은 특별한 일을 하나 넣어보자고 생각한 피렌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후미로 이동한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천천히..

메이크의 말이 아직 와닿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 않았던 피렌의 첫 발버둥이었다.

문을 열고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넓은 홀에 도착한다.

여전히 이 함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

심지어는... 한쪽에 목을 매달고 죽은 사람도 있다.

아무도.. 말릴 생각도, 치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생각보다 많이 심각하네.. “

라티안이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와 소리치려는 순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왜 죽게 내버려 뒀냐?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

그러면 답은 뻔하다.

뭘 할 수 있는데?

뭘 해야 하는데?

...

답은 안 나온다.

“ ...젠장... “

“ 라티안 어딜.. “

이곳에 온 지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라티안이 분해하며 되돌아간다.

“ ...피렌. 우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잖아. 그치..? “

라티안의 목소리가 매우 떨린다.

“ ..그렇지. “

“ ..이 상황이 무조건 잘못된 것도 맞지..? “

피렌의 머리로는 이 말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 이런..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을 바꿀만한 게 필요해.. “

말을 끝마친 라티안이 갑자기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 어... 어디가 라티안! “

라티안을 따라 달려나간 피렌은 라티안이 춘향의 방 앞에서 멈춰있는 것을 보았다.

춘향은..

입구에서 쓰러져 울고 있다.

이러다 또 망령들이 의식을 잡아먹고 난리 치고.. 반복이다.

라티안은 문을 열었다.

“ 야. 일어나. “

“ ... “

“ 얼른 일어나라고!!! “

라티안이 쓰러져있는 춘향을 발로 강하게 찼다.

당연히 막혀야 할 라티안의 발은 춘향을 정확히 강타하고 춘향의 몸은 반대쪽 벽에 처박힌 뒤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

피렌이 달려와 라티안의 어깨를 붙잡고 말린다.

“ 라티안. 진정해.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 거 알잖아. “

“ 피렌.. 그렇기 때문에 더 이러는 거야... 이렇게라도 달라져야 뭐라도 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길 거 아냐..!!! “

라티안은 그대로 피렌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춘향의 머리채를 들고 얼굴을 마주 본다.

...춘향이지만.. 그 춘향이지만.. 꽤 예뻤던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 있었다.

“ 니만 힘든 줄 아냐?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누가 괴롭든 말든 한결같이 신경 긁어대던 녀석은 어디 가고 이런 한심한 녀석이 있는 거냐!! “

“ ... “

공격을 해봐도, 소리를 질러봐도 춘향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축 늘어진 채로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있다.

“ ...젠장...! 그 잘난 낫이라도 만들어서 날 죽여 보라고!!! “

라티안은 그대로 춘향의 머리채를 붙잡고 밖으로 나간다.

“ 어어.. 라티안..! 잠깐..! 그..! “

“ 놔 피렌. 말리지 마. “

춘향을 억지로 끌고 가는 라티안의 뒤로 피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따라간다.

그렇게 라티안은 춘향을 끌고 가 갑판 위에 던져버린다.

“ 일어나. “

“ .... “

여전히 말이 없이 쓰러져있다.

마치 이미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 라티안 이러다 저 녀석 다시 의식을 잃어버리면.. “

“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원하던 바야. “

라티안은 일곱 개의 푸른 검을 뽑아낸다.

“ 예전부터 하지 못했던 복수를... 지금 하겠어. “


작가의말

집이 없는건 생각보다 막막하네..

뭐 좀 들고 나올걸..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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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201. 은하의 중심부 23.06.12 257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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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198. 일어날 시간이야 23.06.09 255 1 13쪽
204 197. 호출 23.06.08 258 1 13쪽
203 196. 죽지 않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23.06.07 255 1 13쪽
202 195. 신의 연극 23.06.06 256 1 13쪽
201 194. 최초의 신과 신의 대리인 23.06.05 254 1 12쪽
200 193. 헤브나 탈출 작전 23.06.04 254 1 15쪽
199 192. 레베른보다 더 위험한 23.06.03 260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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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189. 매달린 사람 23.05.31 25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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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187.5 먼저 떠난 별을 위한 기도 23.05.30 255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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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182. 끔찍하게도 네가 절실히 필요해 23.05.24 255 1 14쪽
» 181. 우리는 모든것을 잃어버렸다. 23.05.23 256 1 13쪽
186 180. 버리고 싶지 않은 것 23.05.22 257 1 16쪽
185 179. 끝나지 않은 전쟁 23.05.21 25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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