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료는 물체에 색을 부여한다 - 범인의 색은 무엇인가
*****
주치호 선임은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백훈도 그를 따랐다.
그 때,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변진희와 눈이 마주쳤다.
“어...? 회의 끝났어요?”
주치호 선임은 그녀를 무시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훌쩍 거리며 백훈을 보았다.
“네, 끝났습니다"
“아... 뭐 이렇게 빨리...? 어떻게 됐어요? 아니다. 자세한건 지선임님한테 듣는게 맞겠죠... 후...”
“변주임님. 그런데, 오늘 저희 팀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신게 변주임님입니까?”
“어... 그렇죠? 6시 반에 회사에 오는 사람은 없으니...”
“그럼, 주선임님은 몇시에 오셨습니까?”
“음... 잘 기억은 안나는데 7시 조금 넘어서였던 것 같아요"
“변주임님은 자리에 계속 계셨습니까?”
“중간에 커피 내리러 로비 왔다갔다 하긴 했죠. 그런데 그건 왜요?”
변진희 주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주치호 선임이 배합지에 손을 댄걸까.
그렇다면 그 배합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아닙니다”
“백훈씨 설마...”
변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몰래 배합지를 빼내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죠?”
아니다.
“아뇨, 그런거 아닙니다. 그럼 저는 실험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도어락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몰래 배합지를 꺼내기만 하지 도어락까지 깨끗이 닦아 놓지는 않을 것이다.
지문까지 모두 지우고 싶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내 능력을 알아챈 건...?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지금 내 능력을 아는 사람은 지아름 뿐이니.
일단 주치호 선임을 주시 하는 것이 좋겠다.
백훈은 방향을 돌려 실험실로 향했다.
폴리우레탄 실험 후드의 바로 뒷편에 있는 주치호 선임의 자리.
그 앞에 선 주치호는 종이 한 장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아마도 새로 진행할 실험의 배합일 것이다.
실험 후드에는 빈 반응기 하나가 놓여 있다.
벌써 모든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인 건가.
그렇다면, 아스코르브산까지 준비가 된건가?
“주선임님, 보고가 늦었습니다. 어제 지시하신 실험실 원료 정리는 모두 끝냈습니다"
“......그래"
“이제 어떤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보고 계신 배합을 주시면 제가 합성을 진행하겠습니다"
“소장님까지 주시하고 계신 연구를 고작 신입인 너한테 맡길 수는 없지. 이건 내 주도로 진행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주치호 선임의 시선이 백훈에게로 옮겨갔다.
코웃음을 치는 주치호.
“쌩신입 주제에 공부도 없이 실험에 참여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 내가 다른 지시를 하기 전까지 넌 논문 정리부터 해. 내가 네 메일로 논문 3개를 보내 놨다. 너는 그 논문 3개를 내일까지 요약, 정리 해와. 만족스러운 수준이어야 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
주치호 선임의 지시에 백훈은 하는 수 없이 사무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메일함을 열었다.
주치호의 말 대로 논문 3개가 첨부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 에멀젼 실험과는 관련없는 논문들이다.
남은 기한은 한 달. 한시가 급할 텐데.
도대체 주치호 선임은 무슨 생각인 거지?
*****
시간은 어느덧 오후 12시를 가리켰다.
몇 방울의 빗물이 창문을 때리더니 곧이어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평년보다 조금 이른 장마가 시작됐다.
6월 초부터 장마가 시작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바깥은 하루종일 우중충 하다.
날씨 만큼이나 우중충한 기운을 뿜어내는 이는 수용성 수지팀에서 한 둘이 아니었다.
“변주임, 이거"
지아름이 옆 자리에 앉은 변진희에게 배합지를 내밀었다.
“소장님 지시대로, 비이온성 유화제를 전부 제거했어요. 이대로 재현 실험을 해보죠"
“어? 이건 116번 실험이랑 같은 배합인데요?”
“알아요. 그래서 재현을 해보는 거예요. 지난 실험에서 혹여나 원료가 제대로 정량되지 않았다거나, 입자의 분산을 방해하는 뭔가가 생겼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었는 지 파악해 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때 합성했던 수지도 남아 있는게 없으니 일단 오늘은 이걸 합성해요"
“네, 알겠습니다"
변진희는 책상 위에 놓인 티슈 하나를 뽑아 코를 킁- 풀었다.
아직까지 훌쩍임을 멈추지 않는 그녀.
“그리고...”
“네?”
“그만좀 울어요. 그까짓거 없어진게 뭐 대수예요? 실험이야 또 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만... 저 때문에 선임님이 혼나셨잖아요...”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써요. 변주임이 그동안 꼼꼼하게 관리해온 걸 내가 옆에서 봤는데. 배합지에 발이 달린 거라고 생각해요 난"
“......네?”
“변주임은 신경 끄고 합성이나 잘 하라는 말이예요"
“네, 선임님...”
변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안경을 끼고 실험실로 걸어갔다.
그녀의 어깨가 축 쳐져 있다.
그 때, 지아름의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차백훈이다.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차백훈 사원) 지선임님, 배합지가 사라진 건과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지아름 선임) 뭔가요?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차백훈 사원)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서요.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차백훈 사원) 그게 뭐냐면...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지아름 선임) 백훈씨, 메신저에서 말하지 마요.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차백훈 사원) 네?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지아름 선임) 5층 회의실에서 봐요. 거긴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5층이 신소재 연구 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인원이 별로 없어서.
수용성 수지 연구팀 - 차백훈 사원) 네, 알겠습니다.
백훈과 지아름은 5층 회의실로 향했다.
“백훈씨,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되도록 메신저에서는 하지 말아요"
“이유가 뭔가요?”
“보안팀에서 수시로 메신저 대화 내용을 감시 하거든요"
“......그건 프라이버시 침해 아닙니까?”
“우리한테 프라이버시 같은건 없어요. 회사에 있는 이상 우리는 회사 꺼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지아름이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백훈도 그녀를 따라 옆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의심스러운게 뭐예요?”
백훈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주치호 선임에 대한 의심까지.
“음... 제가 생각하기에도 변주임의 실수는 아닌 것 같았어요. 변주임이 보기에는 마음이 약하고 허둥대는 것 같아 보여도 본인 일은 제대로 하는 사람이니까"
“제가 주치호 선임 주변에서 계속 감시해 볼게요"
“괜찮아요. 백훈씨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어요"
“아닙니다. 제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푸하하하! 백훈씨도 주선임 엄청 싫은가 보다. 그쵸?”
주치호 선임이 싫은건 맞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할 수는 없다.
“맞습니다”
“좋아요.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면 알려줘요”
“네"
지아름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훈씨”
“네?”
“화이팅!”
그녀는 또 한 번 백훈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지난번 파일럿에서 그녀가 화이팅을 외쳤을 땐 멍하니 보기만 했던 그였다.
그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답을 찾지 못했었다.
이번엔 뭐라도 해보는게 좋으려나.
나도 그녀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다.
백훈은 지아름을 따라 팔을 번쩍 든 뒤, 힘을 꽉 쥐었다.
전완근을 타고 튀어나온 초록빛의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화, 화...”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지아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엥?”
“화, 화...! 화장실이! 급해서...”
“......?”
“먼저 가보겠습니다...!”
백훈은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화장실이라니.
자신에게 센스가 없다고 했던 주치호의 말이 틀린게 하나 없었다.
그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닦았다.
손에 물분자와 염소 이온, 나트륨 이온이 흥건하다.
손을 닦은 휴지를 버리려던 그 때, 쓰레기통 안에 든 물질이 눈에 띄었다.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휴지와는 재질이 다른 티슈.
아마도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티슈인 듯 하다.
티슈의 끝 부분에는 아주 소량의 이산화 티탄이 묻어 있었다.
이산화 티탄은 안료로 사용된다.
즉, 흰색 빛을 띄도록 만드는 물질이다.
티슈 역시 흰색이라 일반 사람의 눈으로는 안료가 묻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묻어 있는 물질은...
어디서 많이 본 구성인데?
백훈은 쭈구려 앉아 쓰레기통 안으로 손을 넣었다.
깊숙이 자리잡은 휴지.
그는 휴지를 꺼내 들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지?
“하아아암-”
그 때,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백훈은 고개를 돌려 정체를 확인했다.
“백훈? 너 거기서 뭐하냐?”
“김주임님...?”
김한성 주임이다.
“뭐야, 쭈구려서 뭐해? 뭐 찾아? 손에 그건 뭐야"
“아, 아닙니다"
백훈은 근무복 주머니에 휴지를 쑤셔 넣었다.
“근데 네가 5층까지는 어쩐 일이냐?”
“아 그게...”
“너도 비밀을 알아 버렸구나. 크큭...”
“그게 무슨...?”
“여기, 5층 화장실. 하필 회의실 뒤쪽이라 눈에 띄지도 않아서 사람이 거의 안오거든. 청소하는 어머님들도 여긴 잘 안치우셔, 쓰레기가 잘 안차갖고. 아, 여기 내 비밀 장손데"
“비밀 장소라는게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의미긴! 짱박히기 좋다는 거지. 가끔 여기서 주식도 한 번 보고, 코인도 한 번 확인하고!”
“김예린씨한테 가는건 이제 안하십니까?”
“안하긴. 예린씨 자리에 없을 때 일로 오는거지. 요새 부쩍 자리에 없는 때가 많아. 아, 나 안그래도 예린씨랑 금요일에 저녁 먹기로 했다. 단 둘이!”
“예?”
“뭘 그렇게 놀라냐?”
“아, 아닙니다"
김한성은 기지개를 쭉 피며 말했다.
“예린씨랑 잘 되면 내가 너도 잘 챙겨줄게, 인마"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긴! 예린씨 정도면 주변에 예쁜 친구들도 많을 테니 기대하라고! 하하핫!”
“......네. 그럼 전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뭐야, 더 안쉬고? 벌써가?”
“할 일이 많아서요"
“주선임이 또 짬처리를 잔뜩 시켰고만?”
짬처리는 김주임이 더 했다.
백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다시 사무실 자리로 돌아온 백훈은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냈다.
이산화티탄 옆으로 보이는 글리세린, 알파-하이드록시산, 시어버터의 구성 성분인 트라이글리세라이드, 유비퀴논 성분.
분명하다.
이는 배합 보관함의 도어락에 묻어 있던 지아름의 핸드크림 성분이다.
“백후이! 니 일로 쫌 와본나"
육원탁 팀장이 백훈을 불렀다.
“1층 내리가가 우편물 하나 가 온나. 내 앞으로 온 거 하나 있데이"
“예,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티슈를 주머니에 넣고 1층으로 향했다.
백훈의 머릿속은 온통 이산화 티탄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안료인 이산화 티탄.
안료를 사용하는 팀이라면, 연구팀은 아니다.
그렇다면 안료를 사용하는 팀은...
“어? 백훈 오빠!”
그가 1층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파란색 스머프복을 입고 있는 여자.
모자까지 덮어 쓰고 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는 스머프를 멀뚱멀뚱 쳐다 보았다.
누구지?
“인사 안해요?”
백훈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여자는 팔을 들고 흔들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인 익숙한 물질.
이산화 티탄?
- 작가의말
안료는 색상을 물체에 부여하는 물질로서 사용 되는 화학물질이다. 안료는 주로 페인트, 잉크, 플라스틱, 섬유 등의 다양한 산업에서 색상을 만들거나 변경하기 위해 사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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