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벽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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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okkoma
작품등록일 :
2023.11.21 15:32
최근연재일 :
2024.01.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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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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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외전1-196(완). 신병(神病)- 여래아(黎崍阿) (4)

DUMMY

어느새 정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무릎을 끓고 흰 사슴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절을 올리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 몸이 저절로 그리 움직여졌다.


- 그대의 할머니가 애절하게 부탁하여... 내 그대의 딸을 살려주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바위에 이마를 찧을 정도로 강하게 내리찍는 정숙의 이마가 서서히 빨갛게 변해갔다.


- 내 기어이 인과율(因果律)을 어겼으니 그대 역시 한 가지 약조해다오!


-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 이대로 너의 딸을 뭍으로 보내라! 그리고 평생 연(緣)을 끊고 살아야 한다. 내 억지로 목신 그슨대에게서 너의 딸을 살려두었으니, 이제부터 네 딸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고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야한다. 다시는 딸의 얼굴을 볼 생각하지 말거라. 딸은 지금 이 순간부터 죽은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야한다. 할 수 있겠느냐?


그 당시 정숙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십년이라는 세월 가까이 신(神)을 모시고 살면서 정숙은 어린 시절 자신을 따라와 욕지도에까지 흘러들어온 귀신의 정체를 훗날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슨대’ 중에서도 악독한 목신이었다.


흔히 제주도 민속에서 그슨대는 제주도에서 비가 올 때 쓰는, ‘주젱이’라는 지푸라기로 지은 우비를 입은 귀신을 말했다.


그들은 살아 생전 지은 죄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얼굴을 보일 자격이 없다고 해서 평상시에도 늘 주젱이를 쓰고 다녀야했다. 그래서 그들은 상반신부터 엉덩이까지가 보이지 않았다.


주젱이를 뒤집어 쓴 그 모습을 멀리서 본다면 세모 삼각형 모양의 사람이 뒤뚱뒤뚱 걸어가는 듯이 보였다.


일곱 살 어린 정숙이 사십년 전 제주도 밭에서 본 삼각형 모양의 귀신은 바로 그 그슨대였다.


그슨대 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원망과 시기, 질투가 끝없이 가득한 악신(惡神)이 바로 목신이었다.


목신은 이유없이 사람을 원망하며 죽이기에 한(恨)을 풀어 천도시킬 수 없었다.


한번 자신이 죽이겠다고 정한 목표는 몇 년이 걸리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고야 마는 악신(惡神) 중에서도 악신이었다. 그래서 사십여년 전 정숙의 친할머니는 정숙을 뭍으로 쫓기듯 도망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로 정숙의 할머니는 정숙의 냄새가 밴 옷가지나 물건들로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며 뭍으로 떠난 정숙을 그슨대로부터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오랜 세월이 흐르고, 더 이상 자신을 지켜줄 할머니가 사라지자 정숙의 냄새를 맡고야 만 그슨대는 바보 똥환의 몸을 타고 욕지도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할머니의 영혼이, 그리고 집밖에서는 삽살개 삼월이가 정숙과 연희의 옆에 찰거머리처럼 딱 붙어 지키고 있었으니 목신 그슨대가 쉽사리 정숙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재호를 꼬득여 정숙과 연희를 죽이려던 악신 그슨대를 제주도의 수호신 백록선자가 따라와 여래아로 보내버렸던 것이다.


- 저 악신은 죽은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래야 합니까?


- 저 목신 그슨대는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한(恨)과 슬픔이 바다보다도 깊거늘 어찌 그리 쉬이 사라지겠느냐. 다만... 내 한동안 여래아에 보내 가두어두었을 뿐... 언제고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니... 네 딸 역시 뭍으로 보내야 한다. 네 할미가 너에게 그랬듯이 너와 연을 끊고 살아야한다. 네 할미도 너를 이 곳으로 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살다 죽질 않았느냐.


- 제가 그렇게 해야 연희가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죽은 자식이라 여기고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고 살겠습니다. 제 할머니가 제게 그리 했듯이 제 딸에게도 제가 똑같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 살겠습니다!


흰 사슴이 보이지 않는 재호는 바위에 쾅쾅 이마를 부딪혀가며 절을 하는 정숙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흰 사슴은 정숙에게 다가오는 재호를 흘끗 쳐다보고는 급히 한가지 말을 덧붙였다.


어느새 흰 사슴은 하얀 빛을 가득 내뿜더니 종적을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온 재호의 부축으로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정숙의 눈에 저 멀리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항의 입구가 보였다.


이른 새벽 어업을 나갔다가 귀항하는 배들이 내뿜어내는 밝은 불빛이 별빛처럼 반짝여 동항은 반짝이는 구슬을 담고 있는 커다란 복주머니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연희의 엄마 정숙을 향해 재호가 그녀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흑.... 어머니! 흑....연희.... 죽었을까요? 얼른 가봐야겠습니다!”


맑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서둘러 자리를 일어나 뛰어가려는 재호를 향해 정숙이 말했다.


“살아있다. 연희 살았대!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진짜죠? 진짜에요? 그걸 어무니가 어떻게 아셔요?”


“할머니가... 내 할머니가 그러시네. 살아있대. 걱정말래! 그러니 숨 좀 골라! 너 지금이라도 당장 숨넘어가겠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연신 물어대는 재호는 미소지으며 확신에 차 반짝이는 정숙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재호는 제주댁 아주머니의 눈에서 느껴지는 확신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운이 다 빠져버려 기진맥진한 재호가 숨을 고르며 정숙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어무니! 근데... 저... 지금 이 상황에 좀 죄송한데..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말해봐라.”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묻는 재호를 향해 정숙 역시 가뿐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다.


정숙은 재호의 어깨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연희가 오늘 여기 천왕산에 올라오기 전에 저한테 귓속말로 속삭였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요. 제주도 말인 거 같은데... ‘호꼼이라도 고치만 있고 싶언, 소랑햄수다’라고 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들 같은 재호의 구릿빛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숙은 재호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 연희한테 직접 물어봐라. 재호야... 이 아줌마가 할 말이 있는데.... 재호야... 연희랑 같이 둘이 서울로 가서 살아! 아무도 눈치 보지 말구, 신경 쓰지 말고 뭍에 가서 편하게 살아! 연희... 이제부터 너가 평생 지켜줄 수 있지?”


제주댁 정숙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던 재호의 눈에서 굵은 눈물들이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재호가 펑펑 울어대자 제주댁 정숙이 다정하게 재호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 정숙의 두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할머니가 정숙에게 들려주었듯이, 정숙 역시 자신의 어린 딸 연희에게 늘 해주던 말이 있었다.


“저기 한락산 만큼, 또 바당만큼 소랑햄쪄(저기 한라산만큼 또 바다만큼 사랑한다.)”


불현듯 그 말이 생각나는 정숙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재호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거렸다.


그렇게 재호와 정숙은 그대로 천왕산 호랑이바위에서 내려와 연희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절뚝거리며 맨발로 힘겹게 걸어가는 정숙을 재호가 거의 엎다시피 하면서 한참을 내달려 연희의 집 안에 들어서자 마당 한가운데 있는 평상에 앉아 멍하니 호랑이 바위 쪽을 바라보고 있는 연희가 보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파보이고 핼쑥했지만 연희의 의식만큼은 또렷해보였다.


“어멍!(엄마!), 재호야! 삼월이가 저기서 ‘왈왈’짖으면서 인사해! 자기 간다고... 이제 못 본다고.... 마지막이라고 잘 있으라고 인사해! 어떡해! 삼월이 멀리 가나봐!”


연희가 힘겹게 말하며 마지막에는 거의 흐느껴 울며 말하고 있었다.


재호가 정숙을 등에서 조심스럽게 살며시 내려놓고 미친 듯이 연희를 향해 달려갔다.


재호는 연희를 와락 끌어안고 같이 소리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정숙은 그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연희를 향해 걸어가 딸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연희야, 이 못난 애미가 미안하다. 나한테 태어나서 너가 고생이 많았지? 돌잡이 할 때 너가 명주실을 잡았는데.... 새로 실을 사서 놓을 걸... 내가 한푼이라도 아낀다고 돈이 없다는 핑계로 집에서 쓰다 말았던 헌 명주실을 놓아서... 애미가 못난 탓에 너를 죽일 뻔 했어. 이 모든 게 엄마 잘못이야. 이제... 재호랑 서울가서 편히 살아. 엄마는 이제 너가 재호가 좋대도 엄마는 괜찮아. 진짜 정말 괜찮아. 아빠도 이해해주실 거야. 엄마가 많이 사랑한다. 엄마가 너한테 해줄 것이 이 말 밖에 없다....”


재호의 가슴에 안겨 연희는 생각했다.


때로는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힘이 없을 때, ‘될 것 같다’ 혹은 ‘괜찮다’하고 무심한 듯 툭 내뱉는 누군가가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 힘으로 인생이 어찌어찌 굴러가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일 때, 가장 힘이 세다는 것도 말이다.


엄마 정숙의 말 한마디에 연희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재호와 함께 바다를 가로질러 서울로 헤엄쳐 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불끈 솟았다.


연희와 재호가 서로 끌어안고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는 동안, 정숙은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굳은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흔히 해녀들은 바다에서의 물질을 하는 것이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한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만큼 물질은 목숨을 내놓고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일이었다.


정숙은 앞으로 신(神)을 모시고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은 물질과 다를 것이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정숙은 아까 천왕산 호랑이 바위에서 흰 사슴을 한 존재가 말한 것을 다시한번 떠올리고 있었다.


흰 사슴의 말은 지금이라도 당장 정숙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 삼척으로 가 해신당(海神堂)을 찾아라! 그리고 용왕신을 모시도록 해라! 할 수 있겠느냐? 훗날 대신의 그릇을 도와 큰일을 해내야한다. 화마의 그릇을 돕기 위해 너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겠느냐?


흰 사슴을 분명 맑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목숨은 이미 사십년도 전에 제주도에서 끊겼어야만 했다. 그것을 붙여놓은 것은 할머니와 흰사슴이었다.


그러니 이제 제주댁 정숙에게 있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열심히 저마다 인생의 그물을 짜고 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그물이 엉키고 설켜 구멍이 나고, 찢어지듯이 많은 이들이 원치 않는 악령(惡靈)과 악신(惡神)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정숙은 자신 역시 귀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이들을 구해야하는 그물의 한 일부분이라면 기꺼이 인생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자신과 딸 연희를 그토록 괴롭힌 그슨대처럼 수많은 악귀(惡鬼)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딸 연희를 구하면서 정숙은 일말의 두려움이나 걱정이 모두 사라졌다.


정숙이 특별한 엄마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엄마는 위대하다. 그것은 신(神)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엄마를 신(神) 대신 두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숙은 매일같이 간절히 딸 연희와 재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저 멀리 멀어져가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호오이-’ 길게 내쉬는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귓가에 맺히는 듯 했다.


그것은 마치 ‘지금껏 후회 없이, 보람되게 살았다’는 듯이 가슴 속에 가득 엉킨 한(恨)을 있는 힘껏 세상 밖으로 내뿜어내는 소리인 것만 같았다.


반백살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정숙은 겨우 욕지도가 왜 욕지도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알려고 하는 만큼 보일 것이다’라는 한자어를 가진 욕지도의 어원(語原)처럼 정숙은 알려고 하는 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인생은 필연보다 운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화가 나기도 때론 너무나도 슬픈 것이지만 무언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것 하나만 있다면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 있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존재는 할머니와 딸 연희였다.


욕지도는 봄이면 뒷산에 참꽃이 흐드러지게 펴 그 엄청난 꽃향기에 취할 정도였다. 또 여름이면 해안에 포말이 흩어지는 파도소리가 시원하다 못해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정숙의 딸 연희는 재호와 함께 그렇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서울로 갔다.


분명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삶은 매몰차고 박정(薄情)할 것이다. 고단한 삶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하지만 정숙은 둘이 함께라면 거친 파도 같은 험난한 인생도 쉬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생은 거친 조업(操業)의 바닷길이 아니라 저 멀리 여행지로 떠나는 신나고 설레는 봄날같은 여행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한 웃음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파도소리 너머로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뱃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요란한 뱃고동 소리가 다시한번 바다 위에 연이어 울려 퍼졌다.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는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여객선 갑판 위에서 정숙은 깊은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자신의 딸 연희와 재호는 그 사건 이후 일주일 가량 지난 뒤, 서울에 있는 재호의 사촌 집으로 보냈다. 둘은 아마도 서울에서 새로 학교를 다니며 일자리를 구할 것이다.


길길이 날뛰는 군산댁을 재호의 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막아섰다. 그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재호와 연희를 바라보며 말없이 아들 재호의 어깨를 세게 한번 움켜쥐고는 친구 병철을 바라볼 때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병철 아저씨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환하게 웃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호 역시 말없이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일 뿐이었다.


한편 바보 똥환은 호랑이바위에서 아침이 되어서야 멀끔해진 모습으로 일어나 또다시 바보 모지리가 되어 욕지도 마을을 여기저기 쏘다녔다.


그에게서 다시는 신내림이 찾아온 것과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욕지도 마을 사람들 역시 하나둘씩 바보 똥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은 없어졌다.


딸 연희와 재호를 서울로 보낸 다음 날, 정숙은 집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하고는 그 날 새벽 첫배로 욕지도를 빠져 나왔다.


욕지도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정숙이 욕지도를 그렇게 급히 빠져나갈 줄 몰랐다.


그녀는 그렇게 욕지도를 떠나 삼척으로 향했다. 자신과 딸 연희를 살려준 흰 사슴 백록선자와의 약조를 지켜야만 했다.


정숙은 앞으로 인생을 어찌 살지 해신당에 가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은 두렵고 불안한 그녀였지만 한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가진 게 많아도 뽐내지 않는, 줄게 많아도 우쭐대지 않는 바다처럼 용왕신(龍王神)을 모시고 살면서 많은 이들의 넋을 달래고 위로하며 사람들을 돕겠다고 말이다.


정숙은 그날로 여인으로서의 삶을,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을 모두 바다에 내던졌다.


그녀는 삼척으로 가 용왕신을 모시는 ‘일월선녀’가 되었다.


제주댁이라는 호칭도, 연희 엄마라는 직업과도 같던 부름도, 정숙이라는 여인으로서의 이름도 모두 버렸다.


그녀에게 있어 앞으로의 삶은 '일월선녀' 하나로 족했다.


남빛으로 펄럭이는 푸른 바다 위로 무심한 갈매기들이 줄이어 날고 있었고, 짠기 가득한 바닷바람에 정숙의 두 눈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바다 위에 산산히 흩어져 공중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바다는 그렇게 처연하고 슬프고 출렁이고 있었다.





<외전1. 신병- 일월선녀의 이야기>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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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우리들의 벽사일기를 끝마치며 24.01.31 15 2 7쪽
221 외전3-221(완). 등교(登校)- 엄마와 딸 사이 (2) 24.01.31 13 1 11쪽
220 외전3-220. 등교(登校)- 엄마와 딸 사이 (1) 24.01.31 12 1 11쪽
219 외전3-219. 등교(登校)- 아버지의 은장도 (2) 24.01.30 12 1 11쪽
218 외전3-218. 등교(登校)- 아버지의 은장도 (1) 24.01.30 11 1 12쪽
217 외전3-217. 등교(登校)- 현대문방구 아줌마 (2) 24.01.29 10 1 12쪽
216 외전3-216. 등교(登校)- 현대문방구 아줌마 (1) 24.01.29 12 1 12쪽
215 외전3-215. 등교(登校)- 친구라는 존재 (2) 24.01.28 10 1 12쪽
214 외전3-214. 등교(登校)- 친구라는 존재 (1) 24.01.28 15 1 12쪽
213 외전3-213. 등교(登校)- 학교괴담 13개의 계단 (2) 24.01.27 13 1 12쪽
212 외전3-212. 등교(登校)- 학교괴담 13개의 계단 (1) 24.01.27 10 1 11쪽
211 외전3-211. 등교(登校)- 무당의 딸 (2) 24.01.26 13 1 11쪽
210 외전3-210. 등교(登校)- 무당의 딸 (1) 24.01.26 11 1 11쪽
209 외전2-209(완). 출가(出家)- 출가(出家) (3) 24.01.25 14 1 14쪽
208 외전2-208. 출가(出家)- 출가(出家) (2) 24.01.25 10 1 12쪽
207 외전2-207. 출가(出家)- 출가(出家) (1) 24.01.24 13 1 12쪽
206 외전2-206. 출가(出家)- 천불천탑(千佛千塔) (3) 24.01.24 15 1 11쪽
205 외전2-205. 출가(出家)- 천불천탑(千佛千塔) (2) 24.01.23 15 1 12쪽
204 외전2-204. 출가(出家)- 천불천탑(千佛千塔) (1) 24.01.23 10 1 12쪽
203 외전2-203. 출가(出家)- 춘향이 놀이 (2) 24.01.22 14 1 11쪽
202 외전2-202. 출가(出家)- 춘향이 놀이 (1) 24.01.22 15 1 11쪽
201 외전2-201. 출가(出家)- 민주화 운동 (2) 24.01.21 14 1 12쪽
200 외전2-200. 출가(出家)- 민주화 운동 (1) 24.01.21 15 1 12쪽
199 외전2-199. 출가(出家)- 안반데기 꼭대기 마을 (3) 24.01.20 17 1 11쪽
198 외전2-198. 출가(出家)- 안반데기 꼭대기 마을 (2) 24.01.20 19 1 12쪽
197 외전2-197. 출가(出家)- 안반데기 꼭대기 마을 (1) 24.01.19 17 1 11쪽
» 외전1-196(완). 신병(神病)- 여래아(黎崍阿) (4) 24.01.19 18 1 17쪽
195 외전1-195. 신병(神病)- 여래아(黎崍阿) (3) 24.01.18 20 1 12쪽
194 외전1-194. 신병(神病)- 여래아(黎崍阿) (2) 24.01.18 1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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