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 처리반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새글

푸우우우른
작품등록일 :
2024.06.10 18:50
최근연재일 :
2024.09.19 00:0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311
추천수 :
4
글자수 :
281,647

작성
24.06.13 22:00
조회
31
추천
0
글자
12쪽

후안

DUMMY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칼은 속을 들여다보려는 대장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바라보며 물었다. 혜가 마넬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칼과 아이를 삼촌과 조카의 관계로 설명했을 뿐 방사능 처리반에 대한 언질은 없었다. 칼은 언제 어디서부터 그녀에게 정체를 들켰는지 의문스러웠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의 눈빛을 가진 그녀를 보고 칼은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칼의 생각대로 대장은 칼의 정체를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마넬리는 칼을 만나기 이전 이미 방사능 처리반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방사능 처리반이 가지고 있던 눈빛, 그 무엇도 담을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메마르고 공허한 눈빛. 방사능에 찌들어 섞어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간성을 상실하며 감정, 감성을 매몰차게 버린다고 하여도 흉내 낼 수 없는 허무함을 담은 그 눈빛을 대장은 마주하며 말했다.

-자네를 공격한 건 정말 미안해. 자네가 방사능 처리반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자네가 우리 마을에 위협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마넬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얄궂은 표정으로 작게 말한다.

-게다가 한번 싸워보고 싶기도 했고.

마넬리는 말이 끝나자마자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남은 차를 모조리 마셔버린다.

사실 마넬리는 칼이 정말로 위협적인 존재였다면 사명을 다해 칼을 막아설 계획이었다. 수색대가 없는 지금 마을을 지킬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기에 칼을 죽이지 못한다면 마을 밖으로 유도하여 내쫓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마넬리는 칼이 마을에 해를 가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생존자를 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귀환시키던 평범한 방사능 처리반과 달랐다. 감정이 없는 그들이 어떻게 아이와 함께 지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혜를 지하 도시로 보낸 것이 아니라 마을로 무사히 데리고 오다니 확연히 다른 방사능 처리반과 다른 반응이다.

-언제부터 제 정체를 아셨습니까?

-음···. 처음부터

-어떤 이유로···.

-에이 자네 얼굴을 봐 그렇게 험악하게 생겼으니 당연히 알 만도 하지. 하하하.

마넬리는 빈 잔을 들고 일어서며 한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말했다. 마넬리는 칼에게 자세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칼은 빈 잔을 들고 찬장으로 향하지 마 젤리를 쓱 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내려둔 자기 배낭을 한번 쳐다보았다.

마넬리는 컵을 찬장 밑 작은 탁자에 올려두고 다른 손마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탁자에 엉덩이를 기대고 앉아 말을 이었다.

-혜에게 들었을 진 몰라도 마을 사람들은 지하도시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 정확히는 그때 그 검은색 제복을 입은 자들이지만···. 그 사건 이후로 지하도시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도 그 존재를 자각하게 되었지.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방사능 처리반의 존재까지는 몰라 그러기에 막상 자네가 ‘저는 방사능 처리반이에요.’라고 소리치고 다녀도 뭐라 할 사람은 없어. 단지 ‘우리는 지하도시에서 왔어요’라고 덧붙이면 큰일 난다는 것이지.

말이 끝나 마넬리는 잠시 침묵을 유지한 채 입을 꾹 닫더니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빼내 팔짱을 끼고 말한다.

-그래서 말이야. 정확한 내막을 알려줄 수 있겠나? 왜 사람들을 지하 도시로 보내는지.

-매뉴얼, 매뉴얼대로 했을 뿐입니다.

칼은 자신이 처음 지상으로 쫓겨났을 때 보급받았던 매뉴얼 북에 관해 설명했다. 거기에 적힌 대로 우리는 생존자를 귀환시킬 뿐 해를 가할 목적은 없었다고. 칼은 허름하게 색이 바랜 매뉴얼 북을 배낭 겉에 달린 주머니에서 오랜만에 꺼내었다. 색이 바래 뿌옇게 변한 책은 처음 지상에 혼자 남겨진 그에게 있어 지하 도시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서 버릴 수 없었다.

-역시 이유가 있었구먼.

마넬리는 칼의 말이 진위를 따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사실을 알면 좋겠지만···. 사실을 알아도 오히려 역정을 내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뭐 지금 여기서 나 말고 자네의 정체를 알아챌 인물은 없을 테니 조용히만 있으면 괜찮을 거야.

마넬리의 말 이후 잠시 정적이 흐르고 칼이 입을 연다.

-저, 사실 아이를 여기에 두고 갈 생각입니다.

-응, 데리고 다니지 않고?

-네.

-아이의 의견은 물어봤나?

-아니요. 아이가 말하지 못합니다. 저 아이에겐 세상을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마넬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칼에게 물었다.

-자네가 하면 되잖나? 아니면···. 지하도시로 보내거나.

-안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은 너무 위험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 없어요. 그리고···.

-그리고?

-아이가 지하도시를 거부합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요.

마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칼이 자세히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마넬리는 은근슬쩍 아이를 지하도시에 보내면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칼의 태도를 보아 그는 지하도시에 아이를 보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이제 그녀는 매뉴얼대로 생존자를 귀환시켰을 뿐 방사능 처리반이 다른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 알겠네. 단 마을을 지내며 아이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나. 그러나 우리도 무턱대고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그 점은 유의해 줘.

칼은 마넬리의 말을 이해했다. 혜가 말한 대로 마을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추운 겨울, 미리 수확해 둔 작물로 겨우 견디는 이 상황에 아이를 등 떠밀 듯 맡기는 무책임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천막 안으로 누가 들어왔다.

-대장! 파토스입니다. 혜가 아주 귀여운 녀석들을 데리고 왔다면서요.

-파토스!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하나?

천막으로 들어선 사람은 마넬리가 혜에게 부탁해 호출했던 파토스다. 그는 통이 넓은 허름한 바지에 낡은 셔츠를 입고 이마에 다홍색 두건을 두르고 있다. 그의 악성 곱슬머리는 다홍색 두건 위로 여기저기 뻗쳐 있다.

파토스는 대장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 위에서 꾸물거리는 늑대 새끼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왔다. 새끼들의 귀여움에 감격을 한 파토스는 테이블 옆에 쪼그려 앉아 새끼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한 놈이 사람 손가락이 겨우 한 개 정도 들어갈 법한 작은 입으로 힘껏 하품을 하니 주변의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 식 하품을 했다. 파토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녀석들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가 아닌 사람 머리통이 들어갈 만한 주둥이를 벌린 녀석들을 보게 되면 그 마음도 없어질 것이다. 칼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녀석들 키울 거죠?

파토스는 이제는 광기가 서린 듯한 안광이 비치는 눈을 마넬리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할 수 있겠나?

-당연하죠.

파토스는 허락을 받기도 전에 이미 새끼들을 품에 안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죠.

파토스는 몸을 움츠리고 배시시 웃었다. 대장은 콧방귀를 뀌며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파토스는 얼른 나가버렸다.

-녀석들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반반이지. 말을 잘 따른다면 다행이고 아니면 뭐···. 옷감으로 써야지. 자자, 그것보다 우리는 중요한 일이 남아있지.

대장은 두꺼운 털옷 같은 외투를 집어 들며 말했다.


-저기가 우리 밭이고 저기가 양봉하는 곳이지.

마넬리는 칼을 데리고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명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장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다.

-그래, 토마스 어제 일은 잘 마무리했나?

-칸나, 후 안도 열심히 하는데 너무 나무라지는 마.

-혁아. 엄마는 감기가 나으셨니?

-좋아. 스미스, 그대로 진행해!

단순한 안부 인사를 포함하여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대장은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한 사람을 지나칠 때마다 적어도 3~4분의 시간이 걸렸다.

-봤지. 비록 100명 남짓···. 아니 이제 그것보다 적지만···. 마을에서 하는 일을 많아. 농사. 요리, 치료 등 예전 핵전쟁 시대 이전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말이야. 아이를 맡아주는 대신 자네에게 부탁할 것은 이 마을을 도와줘. 아이가 적응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말이야.

마넬리는 길을 가는 도중 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며 말했다.

-우선 첫 번째. 저기를 봐.

마넬리는 사람들이 모여 분주하게 나무판자와 막대기, 천을 옮기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배를 만들어 띄운다고 하더군. 물론 어느 나라의 풍습인지 그리고 이 방법이 옳은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기에 그런 걸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딨나? 말로 전해 들은 것이 지금껏 이어져 왔을 뿐이지.

판자를 대충 엮어 천을 묶은 막대기를 세운다. 그들의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천에 목탄을 이용하여 떠나는 이의 이름을 적거나 하고 싶은 말들을 적는다. 흰 천에 가득 채운 글자들은 곳곳이 흐릿하게 번져있다.

-꽉 조여야지! 판자들이 헐거워지잖아! 꽉 묶으라고 했지!

막대기에 천을 묶던 사람이 판자를 끈으로 엮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무란다. 허술하게 연결되어 판자 사이에 틈새가 벌어진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봤지, 자네가 힘 좀 써주게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마넬리는 천을 묶고 있던 사람을 향했다.

-여~ 후안, 이미 준비하고 있는 걸 보니. 소식을 들었나 보군.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말하려던 참이었어.

고집이 세 보이는 수염이 풍성히 자란 중년의 남성은 마넬리의 말에도 듣는지 마는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묵묵히 막대에 천을 묶을 뿐이다.

그러나 마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저기 저 청년이 자네를 도와줄 거야. 이번에 혜가 귀환하며 데리고 왔지. 듣기론 그가 늑대를 다 때려잡았더군. 그것도 아주 무자비하게 말이야.

후안은 고개를 들고 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판자를 묶고 있는 둘을 슬쩍 보고 다시 하던 일을 하며 말했다.

-저것들보다 쓸모 있겠지.

마넬리는 빙그레 웃으며 헛일하던 두 명을 부르더니 각자 원래 맡은 일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마넬리는 칼을 보고 고개를 그 둘을 향해 까닥이더니 말했다.

-저래 보여도 다른 일은 잘해. 추모를 위한 배를 만드는 일은 본업이 아니니까. 그들도 이 일에 일손이 없어 도와주었을 뿐이야.

-어이, 자네.

후안이 칼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도와.

칼은 마넬리를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마넬리는 능글스럽게 칼과 눈빛을 맞추고 씩 웃으며 후안 쪽으로 고개를 한번 까닥이고 돌아서 가버렸다.

칼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넬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하냐니까? 얼른 일해.

칼은 후안을 바라보고 고개를 내저으며 방금 판자를 묶고 있던 사람들이 있던 자리에 섰다.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일을 부여받은 칼이 후안이 만족할 만한 배를 3개 정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어딘가로 향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림이 칼에게도 들려왔다.

-수색대가 돌아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방사능 처리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 변이(2) 24.06.13 30 0 11쪽
19 변이(1) 24.06.13 30 0 12쪽
18 그리움 24.06.13 29 0 12쪽
17 축제의 밤 24.06.13 27 0 11쪽
16 문양 24.06.13 29 0 19쪽
15 수확제 24.06.13 28 0 10쪽
14 추모 24.06.13 30 0 13쪽
13 와그너 24.06.13 29 0 12쪽
12 수색대 24.06.13 28 0 11쪽
» 후안 24.06.13 32 0 12쪽
10 마넬리 24.06.13 31 0 12쪽
9 마을 24.06.13 32 0 12쪽
8 부탁 24.06.13 33 0 12쪽
7 대화 24.06.13 34 0 11쪽
6 오해 24.06.13 32 0 10쪽
5 늑대 24.06.10 40 0 11쪽
4 납치 24.06.10 44 0 10쪽
3 AI 24.06.10 50 0 14쪽
2 생존자 24.06.10 58 0 13쪽
1 24.06.10 98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