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 처리반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새글

푸우우우른
작품등록일 :
2024.06.10 18:50
최근연재일 :
2024.09.19 00:0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344
추천수 :
4
글자수 :
281,647

작성
24.06.13 22:00
조회
29
추천
0
글자
12쪽

와그너

DUMMY

갑자기 들려오는 곡소리에 웃음을 짓고 떠들던 이들은 말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 순간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숙연해졌다.

그 광경을 제일 늦게 목도한 사람들은 칼과 혜 그리고 아이였다. 그들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혜와 칼 사이에 서서 그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람의 죽음을 일찍이 경험한 아이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때의 분위기와 감정에 다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는 칼과 혜의 손에 깍지를 끼며 그들의 손을 붙들었다.


몇 분 전, 아이는 판자를 엮고 있는 칼을 발견하자마자 혜의 손을 더 세게 부여잡고는 그곳으로 그녀를 끌었다. 혜는 아이가 손을 매섭게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 그곳에 칼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아이와 함께 칼을 향해 뛰었다. 마침내 칼에게 매달려 얼굴을 파묻고 나서야 아이의 불안감과 공포감은 진정되었다.

후안은 칼과 아이를 유심히 보았다.

-음···. 자네를 향해 달려오길래 딸 인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이를 안고 있는 칼의 자태는 심히 경직되어 보인다. 칼은 아이를 안을 때 아이가 다치질 않을까?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이를 안았다.

-누가 그렇게 아이를 안나? 그렇게 안으면 아이가 불편해. 안는 사람이 편해야 안기는 아이도 편한 법이야. 아이를 안아준 적이 많이 없는 것 같은데···. 자네 딸이 아니거나 자네가 한심한 아빠거나 그러겠지. 근데 얼굴을 보니 딸은 아닌 게 확실하니까.

칼은 자세를 조금씩 바꾸며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자세를 잡기가 쉽지 않다.

-에잉 쯧쯧···.

후안은 칼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보았다. 그전에 있던 두 명이 만든 엉성한 것보다 괜찮아 보이는 것을 보고 후안은 말했다.

-아이와 마을 한 바퀴하고 와.

-아직 해야 할 게 많습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러니까 놀아주고 오라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마 예정보다 일이 늘어날 테니까.

칼은 고개만 기웃거렸다.

-아 얼른 가! 어서 가! 자식 울고 있으면 잡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법이야. 갔다가 얼른 와!


칼과 만나 잠시 안정되었던 아이가 다시금 불안에 젖어 들어가는 것을 혜는 알아차렸다. 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쪼그려 앉아 아이의 눈높이를 맞춘 뒤 물었다.

-괜찮니? 우리 다른 곳으로 가자.

아이는 혜와 눈동자를 마주쳤다. 크고 맑은 아이의 눈에는 음울함과 탁한 기운이 짙게 퍼져있었다. 혜는 아이를, 아이는 혜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는 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에서 두 사람이 혜에게 다가왔다. 한 명은 방금 막 복귀한 수색대원 빌리이다. 혜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빌리는 수색대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아직 20대 초반이었지만 벗겨진 이마를 길게 기른 앞머리로 겨우 덮고 있었고 유독 크고 튀어나온 앞니 때문에 입술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작고 찢어진 눈 사이에 자세히 보아야 휘어진 것을 알 수 있는 콧대가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마을에서 지내고 있는 파피다. 혜와 비슷한 연령대의 그녀는 혜와 얼핏 비슷한 시기에 마을에 합류하였다. 물결이 치는 듯한 붉은 머릿결을 가진 그녀의 반쯤 감긴 눈은 짙은 갈색빛을 내는 동공과 유려하게 뻗은 긴 속눈썹 덕분에 생기가 돌지 않더라도 충분히 매혹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아담하지만 오뚝한 콧날과 작고 갸름한 턱에 두툼한 입술이 다른 비슷한 나이의 사람보다도 퇴폐적이고 성숙한 느낌을 자아냈다.

빌리는 파피의 허리에 팔을 감싼 상태로 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자기 손 위치를 자각한 빌리는 냉큼 손을 미끄러지듯 밑으로 내려 자신의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빌리의 행동과 그 의미를 알고 있는 파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빌리를 눈을 흘기듯 슬쩍 보고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파피는 물 흐르듯 시선을 칼에게 던졌다. 칼은 매혹적인 여성의 시선에도 덤덤히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고선 파피는 뒤돌고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빌리는 파피가 가버리든 말든 상관없는지 잘 가란 인사도 하지 않았다. 빌리의 시선은 혜에게 꽂혀있었다.

혜는 빌리의 시선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고는 칼과 파피가 눈이 맞은 것을 보고 나서 돌아서서 가버리는 파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혜, 잘 지냈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빌리는 혜에게 물었다.

-어···. 안녕?

혜는 아이를 꼭 안은 채로 일어나 빌리를 보고 말했다. 자연스레 아이의 시선이 빌리에게 닿았다. 곧 아이는 다시 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빌리를 외면했다. 그러면서 한 팔로 헤의 목에 둘렀고 다른 팔은 칼에게 뻗어 그의 소매를 잡고 움켜쥐었다.

빌리는 그런 아이가 거추장스러웠다.

-못 보던 아인데? 누구 애야?

그러면서 빌리는 칼을 위아래로 한번 훑고는 다시 혜를 보았다.

-이분의 딸?

-아니, 조카야.

빌리의 오른쪽 눈이 움찔거리며 핏대가 솟았다. 그리고 애써 칼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경직된 자세로 혜의 미간에 시선을 꽂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빌리는 이 마을에서 혜의 짝이 될 사람이 본인뿐이라 생각했다. 빌리도 혜가 빌리 본인에게 마음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빌리의 이 미련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은 마을에 결혼하지 않거나 짝이 없는 사람이 본인과 파피 그리고 혜 뿐이라는 상황에서 기인했다.

정작 혜는 빌리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다. 빌리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서로 이야기를 해보거나 어울려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혜는 마을에 누가 결혼을 했고 안 했는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아가느라 바쁜 상황에서 연애 같은 시시한 감정에 투자할 시간 따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방금 빌리가 혜에게 말을 걸었을 때 평소 한, 두 번 이야기해 본 사람이 갑자기 안부를 물어오며 다가오니 혼란스러웠다.

자기 생각에 의심 한 톨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 아둔한 빌리는 수색대 일을 마치고 헤매게 청혼하여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간혹 짝이 없어 외로울 파피를 가끔 위로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빌리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을에 새로운 생존자가 왔다. 그것도 젊은 남자가.


마을에 도착했을 당시 수색대를 환영해 주는 사람들 틈 사이로 보느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혜가 아이와 손을 잡고 있었으며 어떤 덩치 큰 사내와 함께 있다. 빌리는 배알이 뒤틀려 확인하지 않고선 버틸 수 없었다.

‘혜에게 아이가 있었나?’

‘아이가 있다면 내가 없는 사이에 낳았나? 그러면 언제 아이가 생긴 거지?’

‘혜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나 말고 누군가가 있었나? 이 나쁜 년!’

‘제발 네 아이가 아니라고 해줘! 아니면 널 죽일 테야! 너 같은 창녀는 죽어버려야 해!’

빌리는 목구멍에서 아른거리는 마음의 소리를 애써 참으며 혜에게 물었다.

-혜, 잘 지냈어?


빌리는 점차 신경질적인 태도로 혜를 대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네 아이가 아니야?

-갑자기 대뜸···. 왜 그래?

빌리는 추악한 얼굴을 혜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혜는 아이를 최대한 빌리에게서 멀어지도록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빌리는 더욱 혜에게 다가왔다.

-거기까지 하지.

칼은 빌리의 어깨를 손으로 찍어 내리며 말했다. 빌리의 키가 작은 편이고 칼의 키가 큰 편이라 칼의 손이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처럼 어깨를 내려찍었다. 사실 칼은 자기 생각으론 힘을 조절한 것이지만 빌리의 몸은 그렇게 튼튼하지 않았던 터라 내려찍은 것처럼 상황이 연출되었다.

-뭐야 이 새ㄲ-

칼이 빌리의 입을 막았다. 빌리의 넓적한 얼굴이 칼의 손으로 인해 거의 가려졌다.

-아이가 듣는데 욕을 하면 쓰나.

칼은 빌리의 얼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웁웁!

빌리가 부들부들 떨며 발악한다. 칼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빌리를 쳐다본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하다.

-칼, 그만해!

혜가 칼의 팔을 잡고 말리며 말했다. 그러나 칼을 그를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이지? 자네는 대체 누군가?

왼팔에 흰 손수건을 두른 사람이 나타나 매섭게 칼을 노려보며 말했다.

-와그너 씨···. 그, 고생하셨어요. 이 사람은 이번에 새로 온 생존자···.

-내가 자네에게 물었나?

와그너라는 사람은 목소리를 떨며 변명을 늘어놓는 듯한 혜에게 나무랐다. 혜는 움찔거리며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혜는 와그너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와그너는 칼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혜에게 시선을 옮기고 멸시하듯 바라보며 말한다.

-이래서 새로운 생존자는 받는 게 아니야. 새로운 생존자가 올 때마다 마을에 문제가 생기니 원!

혜는 그 말을 흘려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와그너는 그 일로 혜를 마을 사람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와그너는 그 일 이후로 새로 유입되는 생존자를 불신하며 살아왔다. 실제로는 혜의 잘못이 아닌데 말이다.

-그 녀석, 쓸모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수색대의 일원이다. 오늘 몸이 성한 채로 돌아가고 싶으면 그 손을 놓는 게 좋을 거야.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이 녀석이 먼저 혜를 위협했습니다. 난 단지 그를 제지했을 뿐입니다.

와그너는 눈을 부라리며 칼을 바라보았으나 생각과 달리 칼의 눈동자는 어느 떨림도 없이 평온해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부담스럽고 강압적인 눈빛을 보내면 눈동자가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기 마련이지만 칼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빌리를 죽일 듯이 그의 얼굴을 옥죄고 있지만 칼의 눈빛에서는 분노나 흥분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와그너는 이 눈빛을 본 적이 있다.

와그너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칼에게 뜻을 관철하고 싶었지만, 칼에게 이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와그너는 무력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긴 외부 생활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로 온몸이 절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와그너는 분명 오히려 싸움을 걸면 지는 쪽은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넬리와 함께 마을의 설립자인 와그너는 칼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칼의 말에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것을 택한 이유는 수색대의 리더라는 이유로 저런 쓰레기 같은 녀석이라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인력난이 심한 상황이다.

빌리는 와그너의 속도 모른 채 대장이 저 아무개를 처치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빌리는 칼의 손에 아직 잡혀 있었지만, 신이 난 사람처럼 흥분하였다.

그때 칼은 빌리를 놓아주었다. 빌리는 바닥에 까무러치듯 주저앉고는 의기양양하게 칼에게 말했다.

-넌 이제 뒤졌다. 우리 대장이 너를-!

-조용.

와그너는 빌리를 보며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는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의미를 표했다.

그럼에도 빌리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와그너가 칼을 묵사발 낼 거라는 말에 온갖 수식어를 붙이듯이 욕설을 섞어 내뱉고 나서야 그 주둥아리는 다물었다.

-대장! 뭐 해요! 어서 저 새끼를-

다시 열린 그 주둥이를 막아버린 건 와그너였다. 와그너는 말없이 빌리를 내려다보았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와그너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이 정확히 빌리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와그너.

마넬리가 와그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와그너가 빌리를 내려다보는 눈을 돌려 마넬리에게 향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도중에 죽어버리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고?

-당연하지.

와그너는 눈을 감고 피식 웃고서는 한숨을 내뱉었다.

마넬리는 불쑥 와그너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까이 닿을 듯 말 듯 한 서로의 입술은 비껴가 그녀의 입술이 그의 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방사능 처리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 변이(2) 24.06.13 32 0 11쪽
19 변이(1) 24.06.13 31 0 12쪽
18 그리움 24.06.13 30 0 12쪽
17 축제의 밤 24.06.13 28 0 11쪽
16 문양 24.06.13 30 0 19쪽
15 수확제 24.06.13 29 0 10쪽
14 추모 24.06.13 31 0 13쪽
» 와그너 24.06.13 30 0 12쪽
12 수색대 24.06.13 29 0 11쪽
11 후안 24.06.13 32 0 12쪽
10 마넬리 24.06.13 32 0 12쪽
9 마을 24.06.13 33 0 12쪽
8 부탁 24.06.13 34 0 12쪽
7 대화 24.06.13 35 0 11쪽
6 오해 24.06.13 33 0 10쪽
5 늑대 24.06.10 41 0 11쪽
4 납치 24.06.10 45 0 10쪽
3 AI 24.06.10 51 0 14쪽
2 생존자 24.06.10 59 0 13쪽
1 24.06.10 99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