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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우우른
작품등록일 :
2024.06.10 18:50
최근연재일 :
2024.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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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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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제

DUMMY

칼의 눈꺼풀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빛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흐릿한 시야는 점차 조금씩 선명해졌지만, 눈앞의 형체만 알아볼 뿐 정확히 사물을 분간하기 쉽지 않았다. 눈꺼풀이 아직 완전히 떠지지 않아 눈이 반쯤 뜨다 말았기 때문이다.

칼은 겨우내 열린 눈을 힘껏 끔뻑이거나 눈 주변에 힘을 주고는 눈앞의 상황을 살폈지만, 시야는 흐릿하게 보일 뿐 도저히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 칼의 눈앞에 나타났다. 시선을 위로 옮길 수 없어 그저 내려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 같았다.

그것은 고운 블라우스 인지 아니면 거적때기인지 구분할 수 없는 흰옷을 입고 있었다.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던 건 시야가 흐릿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블라우스와 거적때기가 겹쳐 보였기에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 흰옷을 입은 사람은 칼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아니 인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칼은 그 손에 대해 왠지 모를 열망을 느꼈다. 그 열망은 아주 작은 불씨처럼 톡하며 튀어 올라 주변으로 삽시간 번지며 칼의 몸을 덮쳤다.


칼은 눈을 떴다. 칼은 후안이 자랑하는, 아니 어쩌면 그의 마누라보다 더 아끼는 침대를 거의 박살 낸 채 겨우 형체가 남아있는 침대의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자고 있던 자신을 자각한다.

칼의 몸 구석구석에는 그 험난한 야생에서 지내며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간 야영을 하며 울퉁불퉁한 돌바닥이나 평평하지 않고 경사진 흙바닥에서 자고 일어나더라도 어떤 근육통도 느껴보지 못한 칼에게 아무리 주물러도 개운해지지 않는 목과 어깨의 통증은 매우 어색한 것이었다. 목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통증이 줄었지만, 어깨, 특히 왼쪽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칼은 어떤 불만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툭-.


작업실 안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툭-.


한 번 더


툭-, 툭-.


이번에는 두 번이다.

이 소리가 세 번 더 들렸을 때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아니 이 인간이 어떻게 배낭 속에 계속 처박아 두냐?

툭툭거리던 소리는 배낭에 숨었던 AI로봇이 배낭에서 탈출하며 내던 소리였다.

-저기요. 아니~ 상황을 보면서 꺼낼 줄 땐 꺼내 줘야죠.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때만 기다리고 있던 저는 어떻겠냐고요?

공중에 떠 있는 로봇에서 들리는 웅웅거리는 소리는 로봇의 불만이 한 것 담겨있는지 유난히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칼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로봇을 응시할 뿐이다. 언제나 속 타는 건 로봇뿐이다.

-하···. 진짜 저 표정 뭐지. 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 내가 잘못된 건가? 내가 틀렸나? 엉? 그래···. 내가 미쳤지.

칼은 마치 진짜 사람이 말하는 듯 발달한 AI의 기술력에 마음속으로 감탄하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문득 칼의 머리로 꾸었던 꿈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칼은 꿈에서 보았던 것,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그러나 방사능 처리반은 가족에 대한 기억을 제거당하기에 가족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AI, 방사능 처리반 중에서 기억이 떠오른 경우가 있었나?

-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죠? 꿈에서 가족이라도 봤나요?

칼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만 기다릴 뿐 로봇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에이~ 설마~ 응? 요즘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기억 소거쯤이야 완전히 완벽하게~ 간단히 버튼 하나로 가능한 시대인데···.

칼은 여전히 말이 없다.

-봤나 보군.

로봇은 속삭였다.

-기다려 봐요.

온갖 표정을 내비치던 디스플레이가 잠잠해지더니 10초도 안 돼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사례는 없군요. 그래서 매뉴얼 내 기억 소거 관련 사항에도 별다른 내용은 없어요. 기억이 떠오를 땐 어떤 조치를 해야 할지 자세한 내용은 없네요.

-그렇군.

-그런데 희한하네요. 웬만해선 기억이 안 날 텐데. 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련의 주인공이 다시 기억이 돌아오는 이야기는 많으니···.AI는 능청을 떨 듯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죠? 내내 배낭에 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없으니 원···.그렇게 말하며 로봇은 작업실을 쭉 둘러보았다. 여러 공구와 장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작업대와 나무로 뚝딱뚝딱 만들어진 가구들, 칼이 부숴 놓은 침대.

-이 가구는 참 신기하게 생겼군요. 마치 마구잡이로 퍼뜨린 퍼즐 조각 같은 느낌이에요.

AI가 칼이 누웠던 침대를 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혜와 아이는 어딨죠?


칼은 어제 혜가 자기 집이라 소개했던 낡은 오두막으로 향했다. 이제야 숨 좀 쉬려 배낭에서 나온 AI는 다시 배낭 속에 처박혀 있다. 가끔 이런 상황에 불만을 내비칠 때면 배낭 속에서 한껏 난장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칼은 그러려니 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처음 칼을 보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칼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다. 비록 어제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함께 죽은 이를 추모하며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칼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일 때마다 가만히 멈춰 서서 머뭇거리며 어찌할 줄 몰랐다. 자꾸 꿈속의 인사를 하던 그 사람이 떠올라 몸이 경직되었다.

-어렵군.

그때 후안이 칼의 뒤에서 나타나 등을 가볍게 한 대 갈겼다.

-잘 잤나?

칼은 후안을 보고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은 잊어버리고 후안의 박살 난 침대가 떠올랐다. 칼은 침대를 박살 난 것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후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한동안은 거기서 지네. 아직 딱히 거처랄 데가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당분간 작업장을 쓸 일이 없기도 하고 말이지.

후안은 칼의 어깨너머로 턱 끝을 올리며 말했다.

-수색대도 돌아왔고 게다가 수확제가 있으니 며칠간 마을 사람들 모두 축제를 즐길 테야. 나도 오전 작업만 마무리하고 축제를 즐길 준비 해야지.

후안은 한 손에 들고 있는 공구 상자를 칼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떠나면서도 칼의 등을 가볍게 한 대 두드리고 갈 길을 갔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던 이유가 수확제를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누군가는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먹을 탁자나 의자를 옮기고 있다. 어느 한구석에서는 어설픈 실력으로 악기를 연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누군가는 벌써 술 한 병을 들고 사람들과 유쾌하게 떠들고 있었다.

항상 고립된 삶을 살아왔던 칼은 언젠가 한 번 의심을 한 적이 있었다. 정말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을까? 지하도시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은 나뿐이지 않을까? 주어진 임무를 다하며 가끔 다른 방사능 처리반을 만날 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다수의 사람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칼에게 이 광경은 매우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진다.

-여기서 뭐 해?

혜가 칼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혜는 이미 벌써 일어나 마을 사람들과 같이 수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벌써 일어났었군.

-당연하지,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1년에 한 번뿐인 수확제거든. 사실 뭐 이렇다 할 결과물은 없더라도 말이야. 게다가 수색대도 돌아왔으니 엄청~ 아주~ 매우~ 중요한 날이지!

혜는 신이 난 듯 흥분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의 침울한 분위기와 달리 사람들은 벌써 기운을 차린 듯 다들 기쁜 표정을 하고 있다.

-다들 대단하군. 어제와 사뭇 달라.

-물론 어제 힘든 일이 있었지만···. 슬픔 속에서 살 수 없으니까. 오히려 억지로 기뻐하며 슬픈 기분을 날려버리겠지.

혜는 뒷짐을 지고 몸을 배배 꼬며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 아니, 루나는?

-루나? 아! 저기 유다와 놀고 있어.

헤는 아이의 이름을 루나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얼버무린 사실을 떠올리며 유다와 함께 놀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바로 그 곁에는 레나와 노아가 아이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서로 팔짱을 끼고 있다.

-내가 잠시 수확제를 준비하는 동안 노아와 레나가 루나를 돌봐주기로 했거든.

그때 루나는 칼을 발견하고는 유다와 함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려놓고 칼에게 뛰어왔다. 아침 햇살이 루나의 얼굴을 비추니 아이의 얼굴은 밝은 빛을 내었다. 한없이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루나를 보니 칼은 무언가 뭉클거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제까지 보았던 음울함이 사라진 루나의 얼굴은 정말 아이 같았다. 이제 아이의 얼굴이었다.

칼은 루나를 안아 올렸다. 착 감기듯 루나의 몸이 칼의 몸에 달라붙었다. 칼은 드디어 아이를 안는 방법을 깨쳤다.

유다의 가족이 있는 쪽을 보니 노아와 레나가 칼을 보고 꾸벅 인사를 한다. 칼은 다시 경직되어 노아와 레나의 행동과 그나마 유사하게 따라 한다.

-왜 이리 경직되었어?

헤는 칼을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인사를 해본 적이 많이 없어서 그렇다.

혜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다 둘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아’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 뺨을 어루만졌다.

-여기 있었군.

마넬리가 칼과 헤에게 다가왔다. 마넬리는 칼을 유심히 쳐다보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도 같이 마을에 사는 게 어떤가? 마을에 오자마자 추모제는 물론 수확제까지 하다니. 거의 마을 사람이 된 거 아닌가?

마넬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칼의 허리를 팔꿈치로 꾹꾹 찔러댔다.

혜는 마넬리의 말에 칼이 어떻게 반응할지 쳐다보았지만 끝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큼···. 암튼 칼, 오늘도 도와줘야 할 일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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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을 24.06.13 32 0 12쪽
8 부탁 24.06.13 33 0 12쪽
7 대화 24.06.13 34 0 11쪽
6 오해 24.06.13 3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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