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어려움은 다르다.
여전히 대국은 어려웠지만 승패에 구애 받지 않고 조금씩 변화를 섞어가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문제는 나의 변화 속도보다 상대들의 대응 기술이 더 빨리 발전하는 것 같다는 점.
지고 지고 또 지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연패의 한복판에서 난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번 시즌 그리 많이 남지도 않은 대국을 소화하면서 이 지경에 이르자 어떤 날은 트라우마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다.
나름대로 결과를 만들려 노력했지만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상황을 맞아 어쩔 줄 모르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대국에서 참고 또 참다보면 한동안 떠나있던 소란한 연구회가 그리워졌다.
“아이고, 올해도 망한 것 같다.”
“형은 거의 망했지만 이미 나는 다 망했어.”
“거의나 다나 거기서 거기지. 나도 지방예선 하나 남은 거야.”
“그래도 형은 대국이 남았잖아. 그럼 아직 희망이라도 있는 거라고. 난 다음 기 예선까지 뭘 해야 할지···. 막막하다. 막막해.”
“뭘 하긴... 공부해야지. 하고 또 하고 될 때까지 해야지.”
“어휴!”
모처럼 있었던 대국 때문에 며칠 만에 들렀더니 입구부터 푸념 소리만 들린다. 예선 탈락자는 비참하다. 모든 기전 예선에서 떨어졌다면 다음 기 예선까지 대국이 없다. 그것은 수입이 없어진다는 말과 동일한 표현이다.
만약, 모든 기전에 출전해서 1회전 탈락이라면 일 년에 9번 대국하고 끝이다. 대국료도 대국 중요도 따라 차등 지급된다. 아직까진 우리 같은 하위랭킹 기사들에게도 그 기본이라는 것이 있지만 곧 제도의 변화가 온다. 이제 한 3년 남았다.
지금도 프로에게 패배는 지옥문과 닿아 있지만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전업기사를 유지하지 못하는 많은 수의 기사가 발생할 것이다. 대화를 못 들은 척 하며 슬그머니 몸을 드러냈다.
“어! 재영이 왔냐?‘
“네 안녕하세요. 형들.”
“음··· 고생했다. 어제 대국 봤어. 잘 참던데··· 음. 아무튼 수고가 많았어.”
“아니 뭘요. 그냥···”
굉장히 쑥스럽다. 난 이런 위로에 익숙하지 못하다.
‘참! 별로 미안할 일도 없는데 괜히 미안해지네.’
그래도 난 아직 적응이 필요한 데뷰하는 해였고 국기전 본선 시드가 내년까지 유효하다.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란 거다. 이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기중 형편이 좀 낫다. 누구만 빼면···
“작년에도 하나 올라가더니 올해는 세 개나 최종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오르셨군요. 이 정도면 거의 자리가 잡혀가는 거 같은데 역시 민호 형이야.”
모두가 힘든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나름 실속파는 존재한다.
“아직 멀었어. 그런 이야기 듣기에는···”
반쯤 웃음 띤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설득력이 없다.
현재 정기적인 기전이 9개가 있다. 주로 신문사에서 주최하고 도전기 형식이다.
‘종합격투기나 권투 같은 종목을 보면 챔피언이 있고 도전자가 있다. 도전기란 그런 것이다. 간단히 말헤 예선을 거쳐 올라온 기사들이 본선을 치러 도전자를 뽑아 챔피언과 겨루게 하는 형식이다.
‘챔피언은 도전자만 기다리면 되는 거지.’
이기면 그 해의 우승 상금을 차지한다. 져도 준우승은 보장되고. 다음 해 본선에 한자리가 보장되는 시드를 덤으로 받는다. 너무 기득권에 유리한 룰이라고 해서 몇 년 지나면 도전기 형식의 기전은 거의 없어져 버린다.
“그거야 누가 알겠어요? 혹시 형이 본선을 넘어 도전자가 되고··· 타이틀 홀더가 될 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다 일단 본선에 오른 이상 리그전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글쎄. 열심히 둬야지.”
“좀 옛날 일이긴 해도 강 기성님이 명인전 첫 본선진출에서 바로 도전자가 되고 타이틀을 따 낸 일이 있었잖아요. 형라고 못할 건 없지 않겠어?”
이건 좀 발언이 세다. 덕담이 너무 지나쳤다.
“그건···”
“민호 형. 오늘 저 먼저 갈게요.”
최성국 2단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고, 왜 그러냐? 나의 무슨 말이 네 역린을 건드린 거야? 그놈의 자격지심이 항상 문제라니까.’
그가 내가 들어올 때 올해 다 망했다면서 투덜거리던 장본인이다.
“뭐? 왜 벌써 가려고 별일 없다며? 성국아··· 이렇게···”
역시 분위기 파악은 바둑기사의 종특이다. 이미 다들 대충 감 잡고 모르는 척 그를 붙들려고 했다. 서로 뭐라고 말하기도 이상하고 그 때문에 분위기 역시 어색해진 이상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휴우! 제가 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아는데···. 제 잘못입니다. 그런데 좀 그래요. 다들 죄송합니다.”
결국 최 2단으로 부터 이런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성국이 형. 그러지 말고···”
내가 나설 장면은 아닌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이 자리에 그나마 올해 프로기사로서 위치를 보존 했다고 할 만한 사람은 민호 형과 나밖에 없었다.
보통 형은 형이라서 그렇거니 하는 부분이 많은데 동생에게는 그게 쉽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민호 형과의 비교 때문에 일어난 일 같지만 숨은 원인은 내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재영아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다. 내가 스스로 너무 한심해서 오늘은 좀··· 못난 형이 미안하다. 민호 형 미안해요. 저 먼저 가요.”
성국이 형이 만류을 뒤로하고 가버렸다. 아주 어색하다. 그는 갔지만, 방안에 침묵을 남겼다.
“험. 험. 재영아 밥은 먹었니? 짜장면 시켜줄까?”
민호 형이 정말 어색한가 보다 아무 말이나 막 한다.
“지금 11시 인데?”
“그래도 먹자. 아무려면 어때. 점심 좀 일찍 먹는 거지. 여기 배달도 늦게 와서 지금 시키면 거진 점심 때가 맞을 거다.”
누가 나서서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
짜장면은 굉장히 일찍 도착했지만 그 기다림은 몹시 길게 느껴졌다. 짜장면을 먹는데 왠지 슬며시 웃음이 난다.
“푸하하. 민호 형. 이런 면이 있었어? 크크··· 안 어울리게 왜 그래요?”
“야! 웃음 조심해. 다 튄다. 먹을 때 이야기 하지 말랬지. 그래도 웃기긴 하네. 푸하하하”
“민호 형 왜 그렇게 긴장했었어? 킥킥··· 포커페이스는 안 되는 거야?”
모두들 짜장면 먹다 눈물이 날 때까지 웃고 말았다. 좀 전의 일이 없었던 일인 양 분위기는 금방 회복 되었다.
“오늘은 또 누구 안 와요?”
“나도 모르지. 대부분의 기전이 본선 중이라서 다들 바쁘겠지. 이긴 사람은 다음 대국 준비에 바쁘고 졌으면 내년 준비하면서 마음 다스려야 하고,”
생각해 보니 내가 살아남은 국기전 일정이 연중 가장 빠르게 진해되어서 내게 득이 되었던 것 같다.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요즘 그 본선대국을 치러야 했다면 본선 잔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시 내가 운빨이 좋다.
“우리 쪽 기사들은 다들 성적이 바닥이라 요즘 한가하지만 다들 아프다고 마음이··· 보통은 이럴 때 어디 움직이고 그러지는 않지. 물론 나 역시 비슷한 처지이지만 난 어디 한곳에 진득하게 붙어있질 못하는 체질이라···”
“그런 분이 바둑은 어떻게 몇 시간씩 앉아 두는 거예요?”
이제는 어느 정도 수위늬 농담을 해도 괜찮을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 어릴 때 우리 부모님이 애가 시도 때도 없이 하도 나대니까 집중력 키우게 한다고 바둑학원을 보내셨는데 지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래서 모두가 후회하고 있는 중이야.”
조 4단은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형은 다음 대국은 언제에요?”
“다음 주 지방 대회에서 하나 살아남은 게 있는데···”
“부산?”
“맞아.”
그럼 조금 이상하다.
“지방 대회라면 보통 예선 끝나면 본선은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지금···”
대부분 기사의 거주기가 서울이기 때문에 지방에 여러 번에 걸쳐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 그런 기전의 대국 스케쥴은 되도록이면 한 번에 모아서 한다.
“요즘 다른 기전 예선들이 몰려서 말이야. 본선 대국 스케쥴에 변동이 있었지. 원래 대국 일자가 며칠 연기됐어. 중간 텀이 너무 길어져 기다리기도 그렇고 해서 일단 올라왔지.”
“연기? 그렇게도 해 줘요? 원래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정대진 대국에 참석못하면 기권패다. 이렇게 봐주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다. 기사 스케쥴에 맞춰 대회 일정을 바꾼다?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일이다.
“얘가? 안되는 게 어디 있냐? 이번 상대가 센돌 사범이었어. 사실상 현재 1인자잖아. 지방에서 열리는 작은 기전이 그 없이 흥행이 되겠냐고. 그 정도 네임밸류면 웬만하면 다 조정을 해 줘.”
“그래도 그러려면 형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어요?”
“나한테 스테쥴 변동을 동의하냐고 먼저 물어보긴 하던데 내가 그런 장면에서 어떻게 다른 답을 하겠니? 원하는 답이 안 나왔을 때 내 말을 들어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불공평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말인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너도 이 생활 좀 더 해보면 이해하게 될 거다. 이 동넨 바둑이 세면 대부분의 일들이 허용이 돼. 손해 보지 않으려면 이기고 또 이기는 수밖에 없어. 아마 애초부터 센돌 사범은 이 기전에 출전하기 싫어했을 거야.”
“예? 기사들이 지방대회 안 나가려고 해요? 왜요? 저야 학교를 그렇게 길게 뺄 수가 없어서 못 나갔지만···”
이래서 일찍 입단한 기사들이 학업을 일찍 끝내는 것이구나를 새삼 느꼈다. 지금 무조건 공식대국만 하면 돈을 주는데 대회에 못나가서 못 받게 되다니 몹시 억울했다. 내가 학교에 큰 애착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직 의무교육 과정인 중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 어쩔 수 없었다.
“지방 기전은 계륵 같은 거야. 기본적으로 전체 기전 규모가 작아 이건 기본 대국료가 적어진다는 말과 같은 거지. 아무리 일정을 모아 준다고 해도 예선 때문에 무조건 그 지역에 며칠 머물러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그게 다 본인 부담이거든.”
“그렇군요.”
“예선 1회전에서 떨어지면 체제 경비도 모자란다고. 몇 판 이겨야 손익계산이 되는데 그게 안 될 것 같은 기사들은 고민스럽지.”
본인은 그렇지 않은 쪽이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형은 원래 자신이 있어서 나간 거였어요? 아님 대국료에 구애받지 않는··· 오호.”
“그럴 리가 있겠니? 이번 기에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 그리고 현재 내 위상이 이 대회 저 대회 가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잖아. 어떤 대회든 부지런히 얼굴을 내밀고 실력을 키워가야지.”
대개 이런 식 자신감의 원천은 경제적 여유에 있다.
“그렇겠네요.”
“듣기로는 일부 유명 기사들에게 숙소 제공이니 뭐니 해서 초청을 한다는데 철저하게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야. 그만한 이름값이 있으면 지방대국 역시 할만한 건지도 몰라.”
“그래요?”
“어쩌면 아까 성국이가 그렇게 반응했던 게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화가 났을 수도 있어.”
조 4단이 거의 다 잊어가던 최 2단을 다시 소환시켰다.
"성국이는 많이 어렵지. 어디서 후원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대국에서 이기지는 못하니 생활도 어렵고 걔도 마음이··· 뭐라도 다른 일을 하자니 승부에 미련이 남아서 놓지는 못하겠고··· 많이 답답하긴 할 거야..”
보급기사 등으로 겸업을 하면 경제적 부담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지만, 승부에서 멀어진다는 인식이 있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기사들은 승부의 감을 잃지 않으려고 겸업을 피한다.
‘다들 자기만의 사정을 가지고 분투하고 있는데 난 지금 뭐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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