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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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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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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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크마르의 각성

DUMMY

푸르머란트 왕국 출신의 예언자 발라스쿠스가 기존 성모정교를 비판하며 솔라멘테교를 세운지 30년이 넘어가면서 교세는 제국 내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프란디아는 개혁에 따른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잇따른 흉년, 페스트의 창궐 등으로 인해 기존 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늘면서 솔라멘테교로 투신하는 민초들의 수가 급증했다.




솔라멘테교 신도수가 프란디아처럼 일부 지역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성모정교는 984년 1월 교황령 칼스타드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이를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교황 테오도란트 14세를 비롯해 추기경 이상의 교구장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아닌데도 추기경들이 대부분 모였다는 것은 그만큼 솔라멘테교로 인한 위기감이 높았음을 방증했다.




회의는 보름간 계속됐다. 각 교구장들은 대부분 솔라멘테교의 이단성에 대해 성토했다. 보름간 계속된 회의 끝에 테오도란트 14세는 솔라멘테교가 고대 영지주의 신학의 한 분파로서 이단임을 선포한하는 '칼스타드 칙령'을 내렸다.




유일신 에쉬르를 믿는다는 점에서 일부 추기경들은 교단 내 하나의 분파로 허용해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핵심적 교리 해석에서의 차이로 인해 다수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성모정교의 경우 유일신 에쉬르로부터 성령 은혜를 입고 수많은 이적을 행한 뒤 승천한 성모 모니카의 신성성을 중시했다. 또한 일반 신도들은 직접 신과 소통할수 없고 성직자를 통해서만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교리의 골자였다.




하지만 솔라멘테교는 성모 모니카의 신성성을 부정했다. 성모도 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봤다. 또 성직자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직접적인 신과의 접촉, 직접 경전을 읽거나 기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것과 일반 신도가 직접 경전을 읽을 수 있다는 솔라멘테교의 교리 해석은 교황청의 분노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성모정교는 탄생 당시부터 사제 계급을 중시하는 종교였다. 일반 신도들은 이미 죄로 더렵혀진 영혼이었기 때문에 사제의 기도 인도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초창기 사제가 없는 일부 지역에서 일반 신도 중 하나가 통성기도로 다른 신도들을 인도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주로 나이가 많고 학식이 있는 신도가 기도를 주도했다.




문제는 기도를 이끌면서 자연스럽게 경전 내용을 암송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경전 내용의 해석이 교황청의 해석과 차이가 나는 일이 발생했다.




성모정교의 교세확장과 함께 이 같은 일이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면서 많은 분파들이 속속 생겨났다. 교단도 당시 확실한 체계가 잡혀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교단은 교단대로 교리논쟁이 벌어지면서 성모정교는 이 땅에 존재했던 다른 종교처럼, 탄생한 지 400년만에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성모정교가 현재와 같은 성세를 이어가게 된 것은 엘도르의 대주교 페르트랑이라는 걸출한 신학자 덕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페르트랑은 경전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대의 문서들과 각 지역 분파들의 교리까지 모두 수집한 뒤 이를 고증하고 분석해 새로운 경전 '신경'을 완성했다.




20년을 공들여 완성한 신경은 즉각 교황청에 보고됐고, 엄격한 감수를 거친 후 교황 레오 3세는 363년 신경이 기존의 경전을 대체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교황청은 필사가 200명을 동원해 신경 필사에 착수했고, 페르트랑의 신경은 제국 내 모든 교구로 전달됐다. 교단의 교리는 일통한 후 교황청은 즉각 산재한 분파들의 다양한 교리에 대한 정리를 시작했다.




교황청은 신앙교리국을 설치해 그 산하에 교리성과 종교재판소를 뒀다. 교리성은 분파의 교리에 대한 이단성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그 결과를 종교재판소로 넘겼다. 종교재판소는 교리성의 결과를 토대로 재판을 열어 이단성을 최종 결정했다.




종교재판소 설치 이후 많은 분파들이 사라져갔다. 이단으로 판결이 날 경우 그 지도자는 사형을 면치 못했다. 분파들은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지도자의 부재는 곧 그 분파의 와해로 이어졌다.




신경을 집필했던 페르트랑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371년 레오 3세 사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옹립됐다. 페르트랑은 로텐부르크 교황청에서 교황의 자리에 올라 교황명을 에스테비우스 3세라 했다.




에스테비우스 3세는 신학자이면서도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였다. 그는 여러 분파가 계속되는 현상의 원인으로 일반 신도들의 설교와 통성기도를 꼽았다.




사제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 신도가 설교와 통성기도를 하며 다른 신도들을 이끄는 행위가 계속된다면 분파의 등장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봤다.




에스테비우스 3세는 일반 신도의 설교행위가 이뤄지는 이유를 교세 확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제 공급에 있다고 보고 각 대교구에 사제양성기관을 설립할 것을 지시했다. 무작정 수만 늘릴 경우 사제의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사제 시험을 엄격히 관리했다.




10여 년이 지나자 교단은 확실한 체계가 잡혔고, 사제의 수도 증가해 이제 웬만한 교구에는 최소 1명 이상의 사제가 파견나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칼을 뽑았다. 에스테비우스 3세는 388년 회당 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성직자만이 설교를 할 수 있으며 소리를 내 기도할 수 있다는 '뤼베크 칙령'을 선포했다. 이를 어길 경우 종교재판에 회부, 최고 사형까지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뤼베크 칙령의 여파는 강했다. 제국 내에 산재했던 많은 분파들이 강제적 혹은 자연적으로 사라져갔고, 성모정교는 제국의 유일무이한 종교가 됐다.




한동안 잠잠했던 교리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2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593년 프리슬란트의 선제후 팔켄베르크 2세와 그리피오엔 대주교의 교리문답이 발단이었다.




팔켄베르크 2세는 장남으로 태어나 왕국을 물려받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신학자가 될 꿈을 가졌을 정도로 믿음이 신실했다. 그는 왕이 된 이후에도 대주교를 자주 궁궐로 불러 함께 교리문답을 나누는 게 취미였다.




어느날 팔켄베르크 2세는 뤼베크 칙령을 읽어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사제서품을 받지 않은 자가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반 신도가 통성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인가.




팔켄베르크 2세는 그리피오엔을 불러 이 부분을 질문했다. 그리피오엔의 대답은 간결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통성기도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기도를 들은 사람이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일반 신도가 자기 방에서 홀로 통성기도하는 건 어떤가 질문했다. 그리피오엔은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잠시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것도 불가하다고 못박았다.




팔켄베르크 2세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백번 양보해 다른 사람 앞에서 금지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도 혼자 통성기도를 하는 게 왜 문제인가.




신앙심이 깊은 팔켄베르크 2세는 어전회의에 앞서 다 같이 기도하는 걸 즐겼다. 그때 통성기도를 통해 뭇 신하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런데 신하들 앞에서 통성기도도 모자라 자기 방에서 혼자 통성기도를 하는 것도 금지하라니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팔켄베르크 2세는 로텐부르크의 교황 발렌티아누스 4세에게 청원을 넣었다. 별것 아닌 문제일 수 있었으나 일단 선제후가 직접 청원을 넣은 사안이었기 때문에 청원은 신앙교리국으로 넘겨져 교리성의 집중심사를 받았다.




신앙교리국 내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결국 이 문제는 비트레흐트의 종교재판소로 넘겨져 지루한 교리 공방이 시작됐다.




팔켄베르크 2세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신학자들을 매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했다. 처음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교황도 이 문제가 점점 커지자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교리 공방이었지만 어느새 교단과 재야 신학자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교단의 권위에 눌려 제 뜻을 펼치지 못했던 재야 신학자들에게는 이 재판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교리논쟁을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던 것이었다.




팔켄베르크 2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재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듯 보였다. 교단은 교단대로 재판에서 질 경우 교황청의 권위에 큰 상처를 입는다는 생각에 총력을 기울였다.




우유부단했던 교황은 쉽게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 없었다. 팔켄베르크 2세가 신의 충직한 종을 자처하며 그동안 교황청에 엄청난 헌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교단이 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는 재야의 신학자라는 불순한 자들의 승리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교리의 최종 해석 권한을 가진 교황청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시간은 그냥 흘러갔고 둘 사이의 접점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재판이 시작된 지 10년이 되었던 603년 고령의 발렌티아누스 4세가 사망했다.




콘클라베가 소집됐고 정통파의 지지를 받았던 테오도란트 4세가 새로운 교황이 됐다.




테오도란트 4세는 추기경 시절부터 교리 재판에 관한 자신의 의견은 확고했다. 일반 신도는 어디서도 함부로 통성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재판은 교황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성직자 이외에는 누구도 어느 장소에서든 통성기도를 할 수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이른바 '비트레흐트 판결'이었다.




교황은 이를 '뤼베크 수정 칙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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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신들의 돌 24.08.02 11 0 10쪽
62 신들의 돌 24.08.02 11 0 10쪽
61 신들의 돌 24.08.02 8 0 10쪽
60 신들의 돌 24.08.02 10 0 10쪽
59 신들의 돌 24.08.02 9 0 12쪽
58 신들의 돌 24.08.02 12 0 9쪽
57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10 0 11쪽
56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2쪽
55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4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9쪽
53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9쪽
52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6 0 10쪽
51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0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6 0 9쪽
49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5 0 9쪽
48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10쪽
»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8 0 10쪽
46 교종과 대상 24.07.31 13 0 13쪽
45 교종과 대상 24.07.31 8 0 10쪽
44 교종과 대상 24.07.31 9 0 9쪽
43 교종과 대상 24.07.31 9 0 9쪽
42 교종과 대상 24.07.30 11 0 11쪽
41 교종과 대상 24.07.30 11 0 13쪽
40 교종과 대상 24.07.30 14 0 9쪽
39 교종과 대상 24.07.30 15 0 10쪽
38 로젠테미온 참사 24.07.29 20 0 12쪽
37 로젠테미온 참사 24.07.28 1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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