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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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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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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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과 대상

DUMMY

새로운 세기를 10년도 채 남겨두지 않은 991년의 베르벤 거리는 활기보다는 어두운 세기말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베르벤은 원래 터프한 선원들과 이들을 유혹하는 창녀들, 거리의 날품팔이 소년들, 좌판을 펴고 생선을 파는 아낙네들, 그리고 물건을 사러 온 외국 상인들이 늘 북적대며 활기가 넘쳐흐르는 프란디아 왕국 내 최대의 항구도시였다.




하지만 후추, 육두구를 비롯한 향신료와 도자기, 유리세공품, 양탄자 등 외국 사치품 수입이 범람하면서 은의 유출이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프란디아 왕정은 6년 전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고 일부 품목은 아예 수입을 금지시켜버렸다.




이와 더불어 무역선을 규제하기 위한 녹인장을 발행, 국왕의 허가서인 녹인장 없이는 프란디아 왕국의 어느 항구에도 정박할 수 없도록 했다.




코반트 대륙과의 신규 항로의 개척으로 하루가 다르게 도시 규모를 키워가던 베르벤으로서는 도시의 주요 기능이 마비될 정도의 큰 타격이었다.




무역상들은 관세를 피해 자연스럽게 인근 자유도시연합의 항구도시 힐베르담으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수입품에 대한 수요는 여전했기 때문에 프란디아 왕국은 힐베르담을 거치며 가격이 오른 외국 상품들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녹인장을 발행한 지 6년 만에 베르벤은 완전히 다른 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활력을 잃은 거리에는 부랑자들과 거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좌판 상인들은 드문드문 거리를 지킬 뿐이었다. 다양한 상품을 거래하던 가게들도 세 곳 중 두 곳은 문을 닫는 바람에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황량한 베르벤 항구에 정오가 다가올 무렵 배 한 척이 정박했다. 녹인장 발행 이후 베르벤을 드나드는 배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200명은 능히 실을 수 있는 거대한 범선의 등장은 베르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7년 만에 이곳에 돌아온 것인가."




알크마르는 베르벤 항구를 바라보며 회한에 젖은 듯 잠시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알크마르는 7년 전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항해에 나섰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고향에서 돈을 벌기 위해 막 올라온 알크마르는 당시 휘황찬란했던 베르벤 거리를 보고 감탄을 거듭했었다. 그때와 비교하자 현재의 황량한 베르벤 거리가 낯설었다.




"교종 성하,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알크마르와 함께 배에서 내린 무리들 중 우두머리인 판테오스가 물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일을 도모해봐야지. 참 자네들도 베르벤이 처음이라 이곳 지리를 잘 모르겠군."




"아닙니다. 저희들 중 이곳 베르벤 출신이 한 명 있사옵니다. 클리프, 어서 나오시게."




판테오스의 부름에 무리 뒤편에 있던 클리프가 얼른 앞으로 나와 알크마르 옆에 섰다.




"교종 성하, 하명하실 게 있으면 하명하시옵소서."




"지금의 베르벤은 자네가 살던 때와 많이 다를 듯 한데 우리가 모두 거처할 만한 공간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여기 지인들을 통해 한 번 알아보겠나이다. 지금 빈 집이 많아 보이는데 일단 들어가서 쉬고 계시면 제가 알아오겠사옵니다."




알크마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크마르는 무리를 이끌고 대로변에 있는 빈 가게로 들어갔다. 생선비린내가 아직 가시질 않은 것으로 봐서 생선가게였던 모양이었다.




20여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가게 안에 자리를 잡은 알크마르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불과 6~7년 전만 해도 가진 것 없는 시골소년이었던 자신이 엄청난 사명을 띄고 이곳에 오게 된 게 믿기지 않았다.




초대 교종이었던 발라스쿠스가 서거하면서 자신에게 모든 권한을 넘긴 게 불과 6개월 전이었다. 하지만 대제자 사이몬트가 이에 반발해 자신이 2대 교종임을 선포하는 등 교단이 두 조각으로 갈리고 말았다.




교권을 둘러싸고 알크마르의 유훈사수파와 사이몬트의 교리파로 나뉘었고, 둘은 각각 자신을 정통 2대 교종이라고 주장하며 갈등이 첨예화됐다. 발라스쿠스로부터 직접 후계자로 지명된 알크마르가 명분에서는 앞섰지만 수십 년 동안 교단의 살림살이를 맡아온 사이몬트는 세력에서 압도했다.




이를 예상한 것인지 발라스쿠스는 알크마르에게 뮈덴바흐를 떠나 새로운 교단의 둥지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죽기 전 마지막 예언을 통해 그 장소를 지정해줬고 그곳이 바로 베르벤이었다.




유훈사수파는 마치 도망가는 모양새가 된다며 만류했지만 알크마르는 군말없이 유훈을 따르기로 했다. 발라스쿠스의 유훈은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솔라멘테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도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 알크마르가 선발대와 함께 먼저 베르벤으로 향했다.




클리프는 오래지 않아 교도들이 기거할 만한 장소를 물색해왔다. 한창 무역이 흥했던 시절 식량창고로 썼던 건물이었는데 창고가 텅빈 채 방치돼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철수한 지 얼마되지 않아 건물 상태는 조금만 손보면 20여 명이 머물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날 저녁 알크마르는 자신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알크마르는 앞으로 어떻게 베르벤에 정착할 것인지와 함께 향후 포교계획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판테오스, 자네는 앞으로 이곳을 우리 교단의 거점으로 삼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하도록 하게. 조만간 후발대가 이곳에 도착할텐데 그들이 어려움 없이 정착할 수 있어야 해."




"알겠사옵니다, 교종 성하."




알크마르는 현재 베르벤에 빈집들이 많으니 최대한 빨리 교도들을 그곳으로 들여 거처를 마련할 것과 비밀 성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솔라멘테교에 대한 교황청의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성전을 짓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런데 교종 성하께서는 정말 피로스 산맥을 넘으실 생각이십니까."




판테오스는 걱정된다는 듯 알크마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위대한 선지자 발라스쿠스님께서 예비하신 길이오. 거기에는 어떠한 변경도 있을 수 없소."




알크마르는 베르벤으로 오기 전 발라스쿠스로부터 여러가지 예언을 들었다. 발라스쿠스는 솔라멘테교가 대륙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터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발라스쿠스의 예언에 따르면 프란디아는 조만간 큰 정치적 사변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솔라멘테교는 최소한 프란디아에서는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리라 내다봤다.




그리고 피로스 산맥 너머의 호튼족을 솔라멘테교로 개종시켜 현실적인 힘으로 삼으라는 예언도 덧붙였다. 이미 솔라멘테교로 개종한 대륙 중남부의 크레디족과 더불어 호튼족은 향후 교황청에 대항할 첨병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크레디족이야 자기들이 원해서 우리 솔라멘테교를 받아들였지만 서쪽 변방의 야만족속인 호튼족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렇지만 현재 호튼족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등을 잘 이용한다면 가능할 것이오. 무엇보다 발라스쿠스님께서 예언하신 일인데 어떤 변수가 있겠소."




알크마르는 뮈덴바흐를 떠날 때 예정됐던 일정들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알크마르는 조만간 후발대가 베르벤에 도착하는 것을 본 후 곧바로 피로스 산맥을 넘기로 했다.








왕세자가 사냥 중 암살된 '로젠테미온 참사'가 발생한 이듬해인 966년 알크마르는 미드웰 지방 우트레흐트의 가난한 농가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크마르는 열 살이 채 되기도 전부터 농가에서 자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농사를 돕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리회전이 빠르고 말주변이 좋았던 알크마르는 농사에 영 관심이 없었다. 일 끝나기 무섭게 마을 외곽에 있는 무당 탈리파의 집으로 놀러가 늙은 무당이 해주는 옛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공식적으로 성모정교가 국교인 프란디아에서 주술을 행하는 무속인들은 제재 대상이었다. 하지만 중앙 행정력이나 교단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외딴 마을에는 아직까지 무속인들이 살고 있었다.




변방의 귀족층에서도 앞날을 점치기 위해 무속인들을 가까이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특히 무식한 농민들에게 있어서 존재 자체가 의문스러운 천상의 신보다는 자신의 앞날을 예견해주고 주변을 살펴주는 무속인의 존재가 더 필요했다.




대부분의 마을 아이들은 귀신과 대화하는 늙은 무당이 무섭다며 그 근처도 가길 꺼려했으나 알크마르는 달랐다. 알크마르는 매일 같이 탈리파의 집으로 가 옛날 이야기에 푹 빠졌다.




대륙을 호령했던 영웅들과 요정, 악마, 용들의 전쟁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꿈속에서는 자신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영웅이 되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천상 농부가 되었어야 할 알크마르의 운명이 바뀐 것은 열여덟 살 무렵이었다. 어떻게든 농부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던 알크마르에게 우연찮게 베르벤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선원이 되겠다며 고향을 떠났던 젊은이가 큰돈을 가지고 돌아와 자신의 항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어깨너머로 들었다.




그는 머나먼 코반트 대륙의 세르베스 왕국으로 떠나는 무역선에 탑승할 선원들을 계속 모집하고 있다며 누구나 기회는 있다고 떠들어댔다.




우트레흐트는 고향에서 태어나 평생 반경 10킬로미터를 벗어나지 않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외진 촌이었다. 돈을 벌어왔다는 건 부러웠지만 모험을 하겠다며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알크마르는 달랐다. 평생을 땅을 일구며 가난과 싸워야 하는 농민의 삶을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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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8 0 10쪽
65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5 0 10쪽
64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11 0 9쪽
63 신들의 돌 24.08.02 11 0 10쪽
62 신들의 돌 24.08.02 12 0 10쪽
61 신들의 돌 24.08.02 8 0 10쪽
60 신들의 돌 24.08.02 10 0 10쪽
59 신들의 돌 24.08.02 9 0 12쪽
58 신들의 돌 24.08.02 12 0 9쪽
57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10 0 11쪽
56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10 0 12쪽
55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4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9쪽
53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9쪽
52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10쪽
51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0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6 0 9쪽
49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5 0 9쪽
48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10쪽
47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8 0 10쪽
46 교종과 대상 24.07.31 13 0 13쪽
45 교종과 대상 24.07.31 8 0 10쪽
44 교종과 대상 24.07.31 9 0 9쪽
43 교종과 대상 24.07.31 10 0 9쪽
42 교종과 대상 24.07.30 12 0 11쪽
41 교종과 대상 24.07.30 11 0 13쪽
40 교종과 대상 24.07.30 15 0 9쪽
» 교종과 대상 24.07.30 16 0 10쪽
38 로젠테미온 참사 24.07.29 21 0 12쪽
37 로젠테미온 참사 24.07.28 1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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