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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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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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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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과 대상

DUMMY

알크마르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지만 두려움보다는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혀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자리를 뒤척이던 알크마르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탈리파의 집으로 향했다. 2~3년 못본 새 탈리파는 부쩍 늙어보였다.




"여기를 떠나려느냐?"




알크마르는 자기가 말도 하기 전에 이 질문을 받자 깜짝 놀랐다.




"내가 떠나려는 걸 어떻게 안거야?"




탈리파는 대답 대신 친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탈리파, 사실 내일 베르벤으로 떠날건데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부모님을 두고 간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알크마르."




"응?"




"넌 똑똑한 아이야. 여기 우트레흐트는 너를 품기에 너무 좁은 곳이지. 독수리 새끼가 자라서 창공을 날아 멀리 날아가는 건 자연의 법칙이야. 너에겐 수많은 기회가 널려 있어. 그 기회를 잡느냐 못잡느냐 하는 건 순전히 네 몫이지."




"내가 어떤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난 여기서 농부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알크마르, 난 어릴 때부터 널 지켜봐왔어. 절대 농부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을거야."




알크마르는 탈리파의 말에 뭔가 자신감을 얻는 것 같았다. 점성술을 하는 무당이니 혹시 자신의 미래를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탈리파, 내 미래를 본 거야? 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는 거야?"




알크마르는 먹을 걸 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탈리파를 채근했다.




"내가 점성술로 너의 미래의 단면을 볼 수 있지만 이 또한 정해진 것은 아니야.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미래는 바뀌게 돼 있어. 숙명이란 건 없어. 운명은 네가 개척하기 나름이야."




"결국 탈리파도 내 미래를 모른다는 거네."




알크마르는 탈리파의 자존심을 건드려 뭔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듣고 싶었다. 그런 알크마르의 의도를 알아챈 듯 탈리파는 조용히 미소만 머금을 뿐이었다.




"하나만 말해 준다면 넌 앞으로 이 세상에서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인물이 될 거야.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큰인물이 된다고? 내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무슨 큰인물이 된다는 말이지?"




"현재까지 너에게 놓여진 길은 그렇게 예비돼 있어. 방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야. 어떤 상황 변화에 따라 어떻게 네 운명이 변할지는 나도 추측할 수 없어."




알크마르는 탈리파의 말이 아리송했다. 도대체 큰인물이 된다는 건지 아닌 건지... 하지만 뭔가 나쁜 점괘는 아닌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이제 떠나면 언제 탈리파를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네. 몸 건강히 오래 살아."




"슈크라스 블리파..."




"무슨 말이야?"




"너의 앞길을 축복한다는 뜻이야."




"그래? 그럼 탈리파도 슈크라스 블리파..."








두 달이 꼬박 걸어 도착한 레르담주의 베르벤은 알크마르에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햇빛에 검게 그을린 농부들만 봐왔던 터라 화장을 하고 거리를 다니는 귀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차를 끄는 마부에게서도 부티가 줄줄 흘러넘쳐 보였다.




알크마르가 베르벤에 도착한 때가 녹인장이 발행되기 1년 전이었던 984년 무렵이라 베르벤은 무역항으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전국 각지에서 부자가 될 수 있으리란 꿈을 안고서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알크마르는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세르베스 왕국은 모든 이들이 꿈꾸던 환상의 나라였다.




세르베스의 수도 레지라는 모든 건물이 황금색으로 도색돼 있고 커다란 수정이 영롱하게 거리 곳곳을 밝혀주며, 집집마다 산해진미가 넘쳐흐르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으로 묘사됐다. 세르베스를 다녀와 부자가 됐다는 사람들의 성공스토리는 베르벤 선술집에서 항상 들을 수 있는 안줏감이었다.




알크마르를 비롯해 모든 선원들은 저마다 새로운 모험에 대한 희망과 대박의 꿈을 안고서 산 안드레아스호에 올랐다.




세르베스로 향하는 여정은 알크마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혹독했다. 풍랑을 만난 것만 3차례였고, 해적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괴혈병으로 10여명이 사망하면서 당초 산 안드레아스호에 탑승했던 선원 153명 중 6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세르베스의 가르보 항구에 도달한 자는 72명에 불과했다. 선채도 많이 파손돼 산 안드레아스호는 가르보 항구에서 수리를 해야 했다.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알크마르는 처음 겪어본 오랜 항해에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지만 타고난 튼튼한 체력 덕분에 며칠 지나지 않아 금세 회복했다.




알크마르는 가르보 항구에 내린 후 항해 중 친해진 클라우스를 따라다녔다. 나이는 알크마르보다 한 살 많은 클라우스는 열다섯 살 때부터 배를 타온 항해 경력 6년차 베테랑이었다. 클라우스는 붙임성 좋은 알크마르를 친동생처럼 여기며 항해에 필요한 여러가지 사항들을 알려줬다.




"알크마르, 물건을 고를 때는 일단 휴대하기 좋은 걸 사야해. 그리고 베르벤에서의 물건 가격을 생각해야 하고..."




클라우스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이곳저곳 상점들을 들리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다. 장차 자신의 배를 소유한 무역상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클라우스는 그동안 항해를 통해 모았던 돈을 아낌없이 썼다.




알크마르 역시 항해로 받은 삯의 대부분을 투자해 양탄자를 구입했다. 고향을 떠난 후 여행을 하며 얻은 귓동냥으로 프란디아의 귀족들 사이에서 화려한 양탄자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자짜리 양탄자 5필과 은촛대 1개를 사자 가진 돈이 거의 떨어졌다.




알크마르는 가르보에서 머무는 동안 하역작업으로 일당을 벌어가며 산 안드레아스호가 수리를 마치고 다시 베르벤으로 출항하는 날을 기다렸다. 985년 1월이 되자 산 안드레아스호는 다시 선원들을 모집했고, 알크마르는 클라우스와 함께 배에 올랐다.




1월말 세르베스의 상품을 가득 실은 산 안드레아스호는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했다. 가르보에서 산 양탄자 5필과 은촛대를 베르벤에서 팔면 출발할 당시의 물건값 그대로라고 가정할 때 100길론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단 5길론 10실링을 들여 20배를 남기는 장사였다. 10길론이면 농촌의 한 가족 5명의 1년 생계비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이 돈을 내놨을 때 기뻐할 부모님 얼굴을 생각하니 벅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알크마르의 머릿속에는 몇년 후 대상인이 돼 바다를 누비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한동안 별탈없이 항해하던 산 안드레아스호가 가장 해적이 많이 출몰한다는 볼가 해협을 지나칠 때 알크마르 등 선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저 멀리 해적이 출몰했지만 다행히도 해적이 산 안드레아스호를 쫓지 않고 다른 배를 노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날씨도 알크마르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 같았다. 몇 차례 만난 풍랑도 지난번 항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약해 선원들의 희생도 거의 없었다.




몇몇 기착지에서 식량 등을 보급받으며 4개월여가 지나자 항해사는 이틀 뒤면 베르벤 항구가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항해 내내 긴장했던 알크마르는 베르벤 항구에 곧 도달한다는 소식에 긴장이 풀어져 오랜만에 선원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던 알크마르는 럼주 몇 잔에 금세 정신을 잃고 다음날 오후가 됐을 때야 깨어났다.




산 안드레아스호가 베르벤 항구에 다다랐을 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985년 4월 시행된 항해법에 따라 녹인장을 발급받지 못한 선박은 프란디아 왕국 내 어느 항구에도 정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산 안드레아스호의 선장 슈페터는 베르벤 항구의 관리들에게 이 배는 지난해 베르벤을 떠난 배라고 항변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뇌물을 전달해 이 난관을 타개해보려 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돼 온 절도사 고트프리트는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한 관료였다. 슈페터는 고트프리트에게 뇌물을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베르벤 항구 주변에는 산 안드레아스호처럼 갑작스럽게 시행된 녹인장 제도로 인해 부두에 정박하지 못한 배들이 수두룩했다.




선장 슈페터는 녹인장을 발급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신청해서 발급까지 3개월 이상 걸린다는 말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육지를 눈앞에 두고 하선하지 못하는 상황이 며칠째 이어지자 선원들은 점점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슈페터는 이들을 얼르고 달래 보았지만 녹인장 발급에 3개월이 걸리는 데다 물론 자신들이 가지고 온 상품들에 높은 세금이 붙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보였다. 당장 배에서 내려 관리들을 때려죽이자는 사람도 있었다.




슈페터는 하염없이 여기서 기다리기 보다는 힐베르담으로 가서 물건들을 처분하는 게 낫다고 여겼다. 슈페터는 선원들에게 며칠만 더 고생하자고 설득했고,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원들은 슈페터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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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신들의 돌 24.08.02 11 0 10쪽
62 신들의 돌 24.08.02 11 0 10쪽
61 신들의 돌 24.08.02 8 0 10쪽
60 신들의 돌 24.08.02 10 0 10쪽
59 신들의 돌 24.08.02 9 0 12쪽
58 신들의 돌 24.08.02 12 0 9쪽
57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10 0 11쪽
56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2쪽
55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4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9쪽
53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9쪽
52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6 0 10쪽
51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0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6 0 9쪽
49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5 0 9쪽
48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10쪽
47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8 0 10쪽
46 교종과 대상 24.07.31 13 0 13쪽
45 교종과 대상 24.07.31 8 0 10쪽
44 교종과 대상 24.07.31 9 0 9쪽
43 교종과 대상 24.07.31 9 0 9쪽
42 교종과 대상 24.07.30 12 0 11쪽
41 교종과 대상 24.07.30 11 0 13쪽
» 교종과 대상 24.07.30 14 0 9쪽
39 교종과 대상 24.07.30 15 0 10쪽
38 로젠테미온 참사 24.07.29 21 0 12쪽
37 로젠테미온 참사 24.07.28 1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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