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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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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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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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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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과 대상

DUMMY

힐베르담을 출발해 파르펜산 인근 마을까지 도착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마을에서 식량과 물을 공급받은 클라우스 일행은 파르펜산 등정에 나섰다.




파르펜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지세가 험하고 중간중간에 늪지대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수레가 다닐 만한 넓은 길이 별로 없어 길을 내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게 더 고역이었다.




오브레로들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파르펜산에 접어든 지 사흘째 되던 날 늪지대를 만나 수레 하나와 오브레로 3명을 잃었다.




몇 개월이 걸리는 육상무역에서 이 정도 손실이면 큰 성공이었다. 파르펜산을 벗어나 다시 드넓은 초원지대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저 멀리 말을 탄 일단의 무리들이 횡대로 클라우스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바짝 긴장했다.




파르펜산을 넘어서면 올더스 평원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곳에서 크레디족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이들은 계절에 따라 초원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유목민족으로 아직 국가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고 부족 단위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크레디족 언어를 할 줄 아는 오브레로를 앞장 세워 그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이곳은 우리 부족의 땅이다. 당신들은 이곳을 함부로 지나갈 수 없다."




숫자는 10여명이었지만 모두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는 것으로 봐서 부족의 전사들로 보였다. 클라우스 일행은 20명이 넘었지만 전사들과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클라우스는 꼭 지나가야 하니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향유를 좀 나눠줄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향유는 이들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클라우스는 여기서 입씨름 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 부족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뭔가 이야기를 나눈 후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이들과 말썽을 일으켜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 순순히 따라나섰다.




약 5킬로미터를 가자 오아시스 주변에 천막을 치고 있는 크레디족 부족을 볼 수 있었다. 클라우스는 크레디족의 부족장 부판 앞으로 안내됐다.




덮수룩한 수염에 황금색 터번을 쓴 부판은 50세 전후의 남성이었다.




"당신들은 힐베르담에서 오는 길인가?"




행색과 달리 부판의 입에서는 유창한 프란드어가 쏟아져 나왔다.




"프란드어를 할 줄 아시는군요? 다행입니다."




부판은 자신의 막사로 보이는 곳 앞에 놓여진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호리병에 담긴 술을 잔에 따랐다.




"한 잔 할텐가?"




"주신다면 기꺼이..."




다행히 부판은 클라우스 일행에게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클라우스는 부판이 건넨 술잔을 입에 댔다.




양젖을 발효해 만든 양유주 같았다. 몇 년 전 항해에서 동료 선원이 건네준 양유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당신들 같은 상인들이 자꾸 이곳을 지나가면서 우리의 초원을 망치고 있네."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부판은 자신의 술잔을 쭉 들이킨 뒤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게 내려놓았다. 클라우스는 깜짝 놀라 약간 움츠러들었다.




"우리가 풀어놓은 양들을 훔쳐가는 놈들도 있고 말이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클라우스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어떻게 해주길..."




부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간단한 일 아닌가?"




"간단하다면?"




"자네, 상인이라면서 왜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혔나? 우리가 여기서 양치기나 한다고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말하는 뉘앙스로 봐서 통행세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액수였다.




"저희들도 지금 물건을 팔러 가는 입장이라 당장 가진 게 저기 있는 물건밖에 없습니다."




"오크통에 든 향유 말인가? 저건 우리 부족들에게 전혀 쓸데 없는 물건이야."




"네, 그래서 저걸 뮈덴바흐에 팔아야만 물건 값을 받고, 족장님이 원하시는 걸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뮈덴바흐까지면 보름이면 갈 수 있겠군."




보름이라는 말에 클라우스는 깜짝 놀랐다. 현재 속도대로 간다면 한 달은 더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뮈덴바흐로 가는 길목에 교단 감찰국이 지키고 있어 우회로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한 달 이상 걸릴 것으로..."




"이쪽 초원은 우리 부족의 땅일세. 그 교단 감찰국인지 뭔지 그들이 아무리 힘이 세다 하더라도 이런 초원에서 우리의 허락 없이 머물 수 있을 것 같나?"




"그 말씀은..."




"감찰국의 사냥개들도 나의 허락 하에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지. 내가 힘을 쓰면 그곳을 통과하는 건 일도 아니야."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크레디족이 오히려 난관을 헤쳐갈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클라우스의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지는 것 같았다. 사실 파르펜산을 넘기는 했지만 마지막 뮈덴바흐로 들어가는 데 감찰국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희들 물건값의 일 할을 드리겠습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부판은 다시 술을 한 잔 들이킨 후 피식 웃었다.




"날 바보로 아나? 내가 프란드어를 어디서 배웠을 거라 생각하나?"




부판은 갑자기 자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대 부족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부판은 어려서부터 꿈이 컸다. 초원을 지나는 상인들을 접촉하면서 자신도 양치기로 생을 마감하기보다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차피 부족장 자리는 큰아들 몫이었기 때문에 부판은 스무살이 됐을 때 미련없이 부족을 떠나 힐베르담으로 갔다. 힐베르담에서 장사에 뛰어든 부판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보는 시야를 크게 키워갔다.




바깥 세계는 정신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초원에서 한가하게 양들 먹일 풀이나 뜯고 있을 동족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변 강국들에게 땅이며 재산이며 모두 빼앗길 게 뻔해 보였다.




마흔 살 무렵 많은 돈을 모은 부판은 자기 혼자만 잘 살아서 될 게 아니라 동족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어느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호튼족의 영웅 도들란의 전기를 읽은 후 자신이 크레디족의 도들란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부판은 열심히 아버지를 설득했다. 많은 돈을 들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안겨드렸다. 아버지는 이런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며 오히려 부판을 나무랐다.




후계수업을 받고 있던 형 케말도 마찬가지였다. 물질이 사람의 영혼을 망칠 수 있다며 부판에게 부족을 다시 떠나라고 말했다.




수차례 말했지만 아버지와 형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부판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모았다. 젊은이들에게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야망을 키우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적지 않은 수의 젊은이들이 부판의 휘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5년 전 부판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동지 10여명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와 형 케말을 제거하고 스스로 부족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부판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각 부족장들을 만나 작은 부족으로 찢어져 있다가는 조만간 큰 나라의 침략을 받고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겁박했다.




오랜 관습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몇몇 부족들은 부판의 말에 동조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부족들은 통합을거부했다.




"어떤가? 아직도 내가 여기서 양치기나 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얼마를 원하시는지?"




"힐베르담에서 향유를 얼마에 사서 뮈덴바흐에 파는지 대충 시세는 알고 있어. 2할을 요구하고 싶네만 자네에게 부탁할 것도 있고 해서 1할5푼으로 하지."




클라우스는 재빨리 주판알을 튕겨봤다. 안전을 보장받고 물건을 뮈덴바흐로 넘길 수 있다면 이정도 수수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1할5푼으로 하죠. 그런데 부탁할 게 있다고 하셨는데..."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은 정말 쉽지 않더군. 우리 크레디족이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통합되기에는 뭔가 하나 부족하다는 걸 최근에 느꼈네."




"그게 무엇일까요?"




"니튼하임 제국이나 주변 국가들을 보게. 모두 국가와 백성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물질 이상의 정신적인 무언가가 있어."




클라우스는 한 번도 생각해본 바 없는 주제여서 입을 꾹 다물었다.




"난 그걸 이념이라고 보는데, 그 이념으로 표출되는 게 바로 종교야."




"아... 종교..."




클라우스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지배적 종교가 있다면 우리 민족을 충분히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보네. 그래서 내 부탁은 다름 아니라 뮈덴바흐로 가거든 솔라멘테교의 교부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달라는 거야."




"솔라멘테교는 현재 성모정교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받고 있는 종교인데 차라리 성모정교가 낫지 않을까요?"




부판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크레디부족이 통합된 우리들만의 나라야. 성모정교를 들여 온다면 교황청이라는 '옥상옥'을 두게 돼. 그렇게 된다면 우린 교황청의 간섭을 견딜 수 없을 거야."




"솔라멘테교는 괜찮다는 말씀이신가요?"




"거긴 아직 성모정교처럼 완벽한 체계를 갖춘 종교가 아니잖아? 우리 부족들을 묶어줄 하나의 이념으로서만 빌려쓸거야. 정치에는 절대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야지."




부판은 클라우스에게 뮈덴바흐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줬다. 그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는 감찰국 사제들에게 전할 서신을 쥐어주었다.




"자네를 믿네만 그렇다고 담보가 없어서야 되겠나? 나도 장사꾼 출신이다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기기에는 좀 찜찜해."




"담보라면 어떤 걸?"




"뮈덴바흐로는 자네 동료 알크마르를 보내고 자네는 여기에 남게나. 알크마르가 저 물건들을 다 넘기고 돈과 함께 교부를 데리고 오면 우리의 거래는 깔끔하게 끝나는 거지."




"하지만 알크마르는 아직 이런 큰 거래를 해본 경험이 없는 친군데..."




"물건이 있는데 거래야 무에 어렵겠나. 그래도 '견물생심'이라 큰돈을 보고 마음이 어찌 바뀔지 모르니 호위 겸 감시자 2명을 따로 붙여 보내겠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클라우스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클라우스는 알크마르를 불러 부판과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준 후 뮈덴바흐로 혼자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클라우스, 이 일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너무 겁 먹지마, 알크마르. 내가 시킨 대로만 하면 아무런 문제 없을거야. 이번 일로 너도 어엿한 상인으로 거듭나는거야,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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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신들의 돌 24.08.02 8 0 10쪽
60 신들의 돌 24.08.02 10 0 10쪽
59 신들의 돌 24.08.02 9 0 12쪽
58 신들의 돌 24.08.02 12 0 9쪽
57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10 0 11쪽
56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2쪽
55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4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9쪽
53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9쪽
52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6 0 10쪽
51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9 0 11쪽
50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6 0 9쪽
49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5 0 9쪽
48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7 0 10쪽
47 알크마르의 각성 24.08.01 8 0 10쪽
46 교종과 대상 24.07.31 13 0 13쪽
45 교종과 대상 24.07.31 8 0 10쪽
44 교종과 대상 24.07.31 9 0 9쪽
43 교종과 대상 24.07.31 9 0 9쪽
» 교종과 대상 24.07.30 12 0 11쪽
41 교종과 대상 24.07.30 11 0 13쪽
40 교종과 대상 24.07.30 14 0 9쪽
39 교종과 대상 24.07.30 15 0 10쪽
38 로젠테미온 참사 24.07.29 21 0 12쪽
37 로젠테미온 참사 24.07.28 1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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