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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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그림/삽화
판타.레이
작품등록일 :
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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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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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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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DUMMY

-그녀가 왔다.

굳이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예민한 후각을 자극해오는 푸른 샤프란의 향기이건만 꽃잎에 코를 바짝 가져다 댄 체 엎드려 있던 청년은 두근거리는 기대감과 그에 정비례하는 긴장감으로 손바닥 가득히 잡히는 땀을 회색의 수도복에 문질렀다.

사원의 재산들 가운데에서도 1급 재산에 속하는 푸른 샤프란 밭 한 모퉁이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언덕 아래만을 굽어보는 그의 이와 같은 모양새를 만일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라치면 질책과 비웃음을 동시에 덮어쓰고 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원에서 가장 몸집이 큰 인간인 그에게 있어서 황금보다도 귀중한 향신료를 얻을 수 있는 이 꽃밭은 출입금지의 지역이었고 꽃을 가꾸는 사제들은 그의 커다란 덩치가 멀리서 나타나기만 해도 귀한 꽃이 상할까 지레 커다란 목소리로 쫓아내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만큼 자세히 그녀를 훔쳐 볼 수 있는 장소도 없는걸.

그는 운이 없어서 정원을 돌보는 사제에게 들통이 나더라도 어쩔 수 없노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햇살을 받아 빛나는 아름다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올해 열아홉 살이라고 했던가.

그는 언젠가 훔쳐 들었던 여인의 나이와 <일레이네>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성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국의 왕비의 시녀이니 만치 성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성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조심스레 준비해온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에스투람, 에스투람 - 밤하늘의 상냥함을 갖추신 이여. 순결한 존귀함의 실체이시여, 당신의 손길이 닿기를 바라는 연약한 생명의 소망을 위해 귀를 열어 주시어 화덕에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연인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열정의 노래처럼 사랑스러운 마음의 연인 일레이네의 안녕을.....”

무병장수와 위험회피, 편안한 꿈의 소망이 가득 적혀진 주문서의 주문을 나직한 목소리로 단숨에 읽어 내리고서 행여 누가 볼세라 계약의 불꽃으로 소멸 시켜 버리는 청년의 얼굴에는 가무잡잡한 피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몇 번을 기억을 돌이켜 보아도 처음임이 틀림없는 감정이다.

왕의 후계자를 잉태한 후, 몸과 마음의 힘과 평안을 얻기 위하여 두 달에 한번 이곳 에루나크 정령원으로 행차하는 왕비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그녀를 처음 발견했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태어난 이후 줄곧 자신만의 것이었던 심장을, 그리고 영혼을 사로잡았던 그 신비로운 두근거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힘으로 그의 혈관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멀리 윈자크 고원을 타고 넘어온 은혜로운 바람이 일레이네의 황갈색 머리카락을 스치고서 자신에게로 날아옴에 그는 바람의 대(大)정령신 누아에게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살금살금 (그의 큰 덩치로는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무릎과 두 팔을 움직여 밭의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생긋-

마차에서 내리는 왕비를 보좌하던 그녀가 갸름한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는 것이 보인다.

따스한 가을의 햇살아래 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지는 모습은 정령원의 중앙 홀을 장식하고 있는 에메랄드의 정령상 보다도 눈부시고 신비롭다.

그는 그녀의 미소로 인해 숨을 흘려내는 것조차 버거워지는 스스로를 느끼며 금세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까 겁이 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

양털로 두텁게 짠 회색의 수도복이 커다랗고 못이 박힌 손바닥에 거친 감촉을 남기며 턱까지 차 오른 심장의 고동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자신의 수도복을 내려다보며 어둡게 흐려지는 청남색의 눈동자는 그의 인상을 정령 사제라기보다는 거친 전사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거기 누구 있..... 카이난 사제?"

“.................!"


-너무 정신을 빼 놓았던 모양이다.

그는 남달리 발달되었음에도 상념에 빠져 버린 탓에 주인을 곤경에 빠트리고만 자신의 귀를 원망하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오늘은 운수가 사나운 날이 되려나 보다.

대륙 각지에서 흘러 들어온 수많은 종족들이 살아가는 정령원에서도 가장 키가 큰 그인지라 평소 키가 작은 사제들의 심술에 곧 잘 시달리곤 했지만 지금 다가오는 이는 그 중에서도 가장 자신을 고깝게 여기는 서기 사제가 아니던가!

“카이난 사제, 여기서 무얼 하는 겁니까! 치원(治園)사제들에게 폐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곧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서기 사제님”

“곤란합니다, 정말이지 이 정령원은 당신 같은 존재에게 있어서 정령신들의 자비가 깃드는 유일한 장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폐가 되지도 말아야지요!”

“죄송합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흘려내는 그의 태도에 잔뜩 이맛살을 접으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체트족의 - 이들의 키는 1디트(약 1.1m)를 넘는 일이 없다고 들었다. - 중년사제는 짜증스레 혀를 차는 것으로 보다 많은 잔소리를 삼켰다.

“쯧... 어째 요리장에도, 축사에도 보이지를 않아서 어디를 갔나 했더니... 히가.레이온께서 성탑에서 찾으십니다. 서둘러 가보세요.”

“네! 곧 가겠습니다. 서기 사제님!”

뜻밖의 전언에 구원을 받은 심정으로 그가 크게 대답을 하자 미간 가득한 잔주름을 더욱 깊이 세우며 서기 사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멀어져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히가가 자신을 찾다니, 그것도 사람을 써서 호출을 하다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사제들의 눈에 뜨일 세라 서둘러 꽃밭을 벗어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을 서기 사제의 잔소리로부터 구해준 전언의 내용에 이맛살을 접었다.

평소에는 얼굴을 마주할 일도 없는데다, 있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는 말도 걸어주지 않는 히가.레이온이 말이다. 거기에다 분명히....

“꼴이 말이 아니군”

카이난은 가뜩이나 거친 직물에 엉겨 붙은 부드러운 흙을 손으로 털어 내며 성탑이 위치한 북쪽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제들의 시선을 피해 그늘진 곳을 골라 나아가는 -이것은 어려서부터 익혀온 서글픈 습관이다. - 그의 시선이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색색의 깃발을 나부끼는 왕비의 마차행렬로 향한다.

더 이상 그리운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동공에 각인되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그리듯 마차에 눈을 못 박은 채로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행렬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차분해지는 심장의 소리와 함께 6개여 월 전 자신을 향한 히가.레이온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제는 너와 결별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카이난.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아도 좋다.>


3월로 접어들었건만 여전히 봄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어느 날, 정령원의 최고위 사제이자 대륙 북쪽의 현자로서 이름 높은 히가.레이온은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그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종결지었었다.

결별의 이유-?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유라는 것은 답을 원하는 의문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처음부터 의혹 그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히가는 그들의 만남에 있어서,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카이난이 허락받지 않은 질문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허락받은 질문과 허락받지 못한 질문을 현명하게 구별하는 법. 그것이야말로 그가 정령원의 최고위 사제에게서 배운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히가.레이온과 함께 한 수많은 비밀스러운 만남과 내용에 대하여 철저하게 함구해야하는 의무만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상대가 결별을 선언했을 때도 카이난에게는 이유를 물을 권리가 없었다.

아니 -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리라는 것이 비단 의문을 드러낼 권리뿐이던가?

그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많은 것들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받기도 했다.

-그래, 최소한 자신과 같은 종족의 그 누구보다도 말이다.


그는 북쪽의 잘 손질된 정원의 황금빛 잔디를 지나 하얀 포석이 깔린 회랑으로 들어서며 준비된 눈빛으로 정면만을 주시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무심하고 감흥 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회랑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하얀 대리석의 부조들을 지나쳐 간다.

아울러 자신을 스쳐 가는 사제들의 눈빛에서 떠오르는 작은 혐오와 비웃음, 그리고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날아드는 미약한 연민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채 두 손을 폭이 넓은 수도복 안으로 밀어 넣고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다행이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가끔 그의 발달한 청각을 자극하는 쑥덕거림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그가 이 부조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 아니, 이 부조의 내용에 의구심을 가진 적이나 있을까?>

<읽고 쓰기를 배우기 전에는 꿈에도 알 수 없는 내용일 테지.>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동족들의 운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다고? 그렇게나 멍청할까?>

<그들의 불행한 모습에 비하면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를 비교해 보기는 할 테지.>

문장이 다르고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 언제나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였다.

-자신이 억세게 운이 좋은 녀석이며, 신분에 맞지 않는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끼루릭---

“............!”

끝도 없이 이어져있을 것만 같은 (실제의 길이가 20돌트(약 240m)에 이르는 탓이기도 하다) 회랑을 폭이 넓은 걸음으로 지나던 그는 순간, 귓전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황금빛의 잔디밭 사이를 노려보았다.

-또 녀석이 보인다.

거대한 알제하스대륙을 두 조각 내어버린 <하늘 벽>잉게라스의 만년설과도 같은 은색의 홍채와 그 속에 가로누운 진홍빛의 동공, 온 몸이 쥐색의 털로 뒤덮인 사령(邪靈) 케라론이라 불리는 녀석이.

자신을 커다란 눈으로 응시하며 잔디 사이를 헤치고서 따라오는 그 작고 반투명한 몸에서 시선을 외면한 채 그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생명들 중에서 지성체(知性體)라면 누구도 원하지 않는 불청객이 바로 저 녀석, 케라론이다.

하물며 약하고 짧은 생명을 지닌 인간족들 - 그 중에서도 자신과 같은 페이드(=지구인과 흡사한 종족: 저자 주)에게 있어서 저것의 존재는 <불길함>이라는 단어만을 연상시킬 뿐이다.

불행과 절망, 죽음의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어둠의 생물.

한 때는 세상을 유지하는 정령중의 하나였다고 전해지지만 그것은 아득한 태고의 일일 뿐, 현재의 저것은 누구도 가까이하기를 원하지 않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녀석이 자신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벌써 세 번째다.

회랑을 지나 백색의 성탑이 자리한 언덕을 오르며 그는 이맛살을 접었다 최근 불길한 전조를 보이는 것이 비단 저 사령의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백색의 절벽 사이로 눈부신 주홍의 빛을 쏟으며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더 늘어났군.”

창공을 붉게 태우는 석양에서 태어나 월광암(月光岩)으로 이루어진 하얀 절벽의 대지와 사랑에 빠졌다는 -그래서 스스로 주홍빛의 폭포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울라한 폭포.

신성한 성역으로 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위대한 마법의 힘을 지녔다고 하는 이 폭포의 바위에는 여태껏 이끼가 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를 넘기면서 나타나기 시작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푸른 이끼가 이제는 제법 멀리서 보아도 얼룩처럼 월광암을 물들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산 아래의 숲에도 부쩍 과실 수확이 줄고 강의 물고기들이 남쪽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다고 계곡의 사냥꾼이 요리장 사제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어쩌면 히가.레이온이 자신을 찾는 이유가 최근의 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성탑(聖塔)>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하면 실소가 나올 정도로 볼품이 없이 길쭉하기만 한 하얀 탑의 작은 석문을 밀고 들어서며 언제나처럼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내부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받아 들였다.

이 세계와 시작을 함께 했다는 정령과 그들을 숭배하는 정령신앙이 음유시인들의 노래 속 이야기처럼 절대 권력을 누렸던 것은 이미 3만년 이상이나 지난 옛일이다. 대륙의 수많은 지성체들을 지배하던 정령술이 힘의 정점에서 내려와 민간 신앙으로 정착한 것도 그 만큼이나 오래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하얗게 빛나는 월광암으로 이루어진 에루나크 계곡에 자리한 이 정령원은 여전히 대륙 북부 최고의 정령 성지로서 백성들의 추앙과 그만큼의 특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로 이 빛나는 존재들 덕분에 -

“당신님들도 느끼고 있는 겁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색색의 빛 구슬을 향하여 그는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그의 물음에 치르르- 벌새의 날개 짓과도 같은 가벼운 소리의 파장이 발달한 청력을 가진 귓가를 타고 흘러들었다.

언뜻 보면 반딧불처럼도 보이지만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이 귀한, <라벨렌>이라 불리는 존재들이다.

자연의 가장 순수한 생명인 정령들의 움직이는 씨앗인 라벨렌은 희귀한 만큼 특별한 힘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면 허무하리만치 쉽사리 대기 속으로 녹아들어버리는 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이곳 정령원에 속한 사제들의 가장 큰 임무야말로 이들 라벨렌이 대기의 일부가 되는 일 없이 수를 불리고 또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자연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새싹인 <링크레>로 변할 수 있도록 기도와 정령술을 통하여 신성하고 청결한 주변 환경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기운들이 없군요.”

어두운 공간을 흐르는 빛의 응집체를 하나하나 눈으로 살피며 그는 중얼거렸다.

확실히 6개월 전, 마지막 보았을 때에 비하여 라벨렌의 움직임과 광채가 둔해진 느낌이다. 아직 어떠한 자아나 지각능력을 지니지 못했음에도 최근의 현상들을 불안으로 감지한 것일까?

끝없이 위로 뻗은 어두운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빛 구슬의 사이를 지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발바닥의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계단의 좁은 폭에 언제나처럼 나직이 혀를 찼다.

어느 종족이 만든 계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대 사막 남쪽의 솜씨 좋은 소인족인 란타족들이 정령원의 건축에 일조했다고 전해지지만 그들이 이 계단까지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큰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발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위험천만한 계단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의 큰 신장과 별다른 훈련을 하지 않았음에도 혈통적으로 타고난 바위 덩어리 같은 근육들이 비단 이 계단 앞에서만 방해물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당의 주임사제만 하더라도 그가 다른 사제들에 비하여 한입이라도 더 먹을까, 혹은 한 덩어리의 빵이라도 훔쳐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는 다른 사제들의 식사 시중을 드는 내내 감시의 눈길을 거두는 법이 없는 주임 사제의 불쾌한 눈동자를 떠올리며 좁은 계단을 노려보았다.

비록 그 빵을 굽는 화덕의 수리를 도맡아 하는 이가 자신일 지라도, 나아가 그들의 입에 들어가는 고기 덩어리 역시 자신이 도살한 양과 염소일지라도 천한 <크페스터스>에게 제대로 된 식사라는 것은 과분한 호사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일 테지.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 사막 슈라칸트의 남쪽에서 온 사제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과거 하이크란트 -영원한 동토(凍土)에서 삶을 영위하던 종족에 관한 기억을 가진 이들의 두려움이 담긴 눈동자를 제외한다면, 그를 향한 시선은 무관심과 경멸, 혹은 동정이거나 분에 넘치는 <사제>라는 대우에 대한 질투와 불만을 담고 있을 뿐임에도 <크페스터스>인 자신은 스스로의 행운에 감사를 거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행운아이기는 하지, 크페스터스인 주제에 말이야.

<신이 외면한 핏줄>.

그는 자신의 종족을 지칭하는 <크페스터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떠올리고는 반항적으로 입가의 근육을 실룩거렸다.

종족이라니, 웃기는 소리!

한때는 동토의 주인 <하이크란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겠지만 지금은 100여 개체도 남지 않은 가축들을 종족이라고? 거기에다 크페스터스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불러주기까지 하니 황송할 따름이다.

가축.

좁은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벽을 짚고 있는 자신의 손을 노려보았다. 매일 정령원의 사제들을 먹이기 위해 동물을 기르고 도축하는 그의 손은 분명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가축의 손에 불과하다.

현재 크페스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의 종족은 모두 가축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예라는 신분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 나라의 사회구조 속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놓여 인간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하이크란트라는 이름을 잃는 순간부터 모든 암컷의 죽음과 2차 성징이 시작되기 전의 어린 수컷의 거세라는 - 한마디로 단 한 세대만으로 영원한 멸종이 결정된 운명체들.

영원한-?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에 그의 냉소가 깊어졌다.

멸종이라는 단어에 <영원한>이라니? 멸종이라는 말자체가 영원히 끝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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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6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7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6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5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4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6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6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5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8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7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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