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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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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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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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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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 귀신의 자식(1)

DUMMY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파렴치한 범죄자 한 놈만을 잡아주면 즉시로 이 도시를 떠나게 해주겠소.”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제안인가?

카이난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머쓱함을 감추려드는 치안대장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지금 중년의 이 사내는 애꿎은 맥주잔과 턱수염을 번갈아 괴롭히며 카이난의 시선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임에도 높게 솟은 광대뼈에 붉은 기가 도는 것이 본인이 생각을 해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뭐... 염치가 없는 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소이다. 멀쩡한 사람을 살인 용의자로 몰아 세운데다 진범을 잡아주기 까지 했는데 범죄자를 또 잡아오라고 요구하다니, 뻔뻔하다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은 없소.”

“알고 있다면서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요? 우리는 목적이 있는 여행을 하고 있소. 곧 이 도시를 떠나야만 한단 말입니다.”

짙은 호박색으로 출렁거리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자 옆에 자리하고 앉아 붉은 기가 탐스러운 태양 무화과를 베어 물고 있던 힙투비가 끼어들었다.

“아빠 때문에 이 아저씨도 곤란한 모양인데?”

“바로 그거요. 말 잘했다, 꼬마야. 당신이 잡아준 그...호마르라고 주장하는 괴물을 검시한 의술사는 <어둠의 생명에게 먹힌 여인의 시체>라고만 결론을 내렸소. 당신 주장대로 애들 겁주려는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호마르>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단 말이지.”

“당신들이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호마르요.”

“그것이 호마르냐 아니냐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카이난의 무뚝뚝한 대꾸에 남은 맥주를 쭈욱 들이키고 나서 새로운 한 잔을 추가하더니 치안대장이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문제는 입이 가벼운 부하 녀석들이 그 시체가 호마르라고 떠들어대어서 소문이 쫙 퍼져버렸다는 것이오. 덕분에 시장님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지. 괜한 이야기 속의 괴물을 사실인양 들먹거려서 시민들의 불안이나 조장시킨다고 말이오.”

“............”

“사실은 헛소문을 만들어내고 유포한 죄로 당신을 당장 잡아들여 투옥하라고 명령을 하시더군. 하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는 일 아닌가, 그거야 말로 엄한 사람을 잡는 일이 되고 말테니.”

“...그래서?”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향하며 카이난은 더욱 크게 밀려오는 불쾌감으로 거칠게 되물었다.

가벼운 외출을 하려는 것인지 금색 날개의 화려한 문양이 아로새겨진 가죽 갑주와 발목까지 오는 통이 넓은 가죽치마를 입고는 있지만 허리에 긴 장검만을 찬 단출한 차림의 여기사 리즈베테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중재를 해야 했소. 일단 당신이 실력이 있는 정령사라는 것을 시장님께 설명한 다음에....”

“안녕, 엄마! 주인님 찾으러 나가는 거야?”

“아침은 먹었니, 힙투비? 그래 – 나가서 정보를 좀 모으고 오마.”

“돌아오면 힙투비랑 목욕 같이 해 줘야해~”

여기사를 발견하고서 반색을 하며 두 팔을 벌리는 힙투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는 여관주인에게 무어라 전갈을 남기고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순간 그녀의 시선이 카이난에게 와 닿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고서 맥주잔만을 기울였다.

저 익숙해지지 않는 이국적인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말 한마디 나누는 것조차 지금으로서는 거북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제발 그 오지랖은 다른 사람에게나 부리고 자신에게는 신경을 꺼줬으면 싶다.

“그래서 우리 도시의 골칫거리인 이 녀석을....내 말을 듣고 있는 거요?”

잠시 카이난에게 무어라 말을 걸까 망설이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곧장 생각을 고쳐먹은 듯 그늘이 선선한 여관을 벗어나 바깥으로 사라지자 눌러두었던 숨을 흘려내며 그는 불만스레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 카이난의 태도에 치안대장의 눈매가 불만스레 좁혀졌다.

“듣고 있소, 그러니까 결국은 당신들이 잡지 못하는 현상범을 잡아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오?”

“...케레스키 라는 놈이오. 여기, 이렇게 생긴 녀석이지.”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태도임에도 의뢰의 요지를 정확하게 짚는 카이난의 대답에 치안대장은 한숨을 내어 쉬며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펜으로 세밀하게 묘사된, 매부리코에 날카롭게 생긴 인상의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일부러 비싼 염료까지 써서 밝은 금발과 푸른 눈을 표시한 것을 보면 상당히 눈에 띄는 특징임이 틀림없다.

“이정도로 상세한 외모가 그려질 정도라면 쉽게 잡을 수 있을 텐데? 평범한 인상도 아니지 않소? 아니면 변장에 능한 자인가?”

“차라리 변장의 명수라면 이렇게까지 우리가 억울하지도 않겠지.”

한번만 보아도 잊어버릴 것 같지 않은 강한 인상의 그림을 내려다보며 카이난이 반문을 하자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치안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놈은 아주 악질이오. 이렇게나 얼굴이 알려졌는데도 얼마나 쥐새끼 같은 놈인지 우리 도시에서는 녀석이 그냥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헛소문까지 퍼지고 있소이다.”

“...현상금이 은화 20피오린? 이 정도면 거물이군. 대단한 흉악범인 거요?”

“뭐, 잡놈이라면 잡놈이오. 대신 아주 몸값이 비싼 잡놈이지. 외모는 좋은 혈통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 이름도, 성도 없는 것을 보면 천한 태생이 틀림이 없소. 항간에는 놈이 귀신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기는 하지. 뭐, 술에 취해서 본인이 떠든 말이니 만치 믿을 것은 못되는 소문이지만.”

경멸을 하듯 차갑게 코끝으로 웃어 보이며 치안 대장은 양피지에 그려진 얼굴을 손가락으로 톡톡 내리쳤다.

“이 잡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시껄렁한 도적에, 소매치기에, 청부살인, 그리고.... 꼬마, 너 귀 좀 막아라. 옳지. 잘했다. -그리고 색마라네. 여자라면 아주 환장을 하는 잡놈중의 잡놈이지.”

“...현상금이 높은 이유를 알만하군.”

“그렇소, 아래로는 무두장이의 마누라부터 위로는 영주의 딸까지 이놈이 뱀처럼 기어들지 않은 침대가 없을 지경이오. 뭔가 묘한 약이나 환술을 쓰는 것인지 이놈에게 걸려들면 여자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저항을 못하게 되고 만다더군. 당신의 경우처럼....”

순간, 번뜩 날카롭게 눈을 치뜨는 카이난의 반응에 치안대장은 어깨를 들썩이며 머쓱하게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물론 당신은 여자들 쪽에서 더 환장을 하고 덤비겠지만 말이오. 하여튼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남편이나 부모가 이 잡놈을 잡아달라고 너도나도 현상금을 걸어서 몸값만 높아져 버렸소.”

“치안대로서 역부족이라면 전문 현상금 사냥꾼들도 탐을 내었을 텐데. 20피오린이라면 적은 돈이 아니지 않나?”

양피지를 손에 들고서 선이 거칠고 눈매에 날이 선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카이난의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긴 한숨이다.

“물론 이 도시를 찾아온 현상금 사냥꾼들은 전부 이 그림을 받아갔을 거요. 실제로 붙잡은 적도 있기는 하지만... 이놈은 진짜 유령 같은 놈이라오. 아니면 허물을 벗는 뱀의 새끼든지. 하여간 도망이나 탈출에는 아주 명수라서 당신의 그 정령술로 아주 꼼짝을 못하게 해야 할 거요. 일전의 그 괴물을 잡을 때처럼 바람이나 불꽃으로 반쯤 죽여 놓아도 상관이 없소. 잡아만 주시오. 녀석이 이 도시를 자기 집안처럼 활개치고 다니지 못하게만 해달라는 말이오. 녀석 때문에 시장님이 잠을 설칠 정도니까.”

“..............”

“그렇게만 해주면 언제라도 이 도시를 떠나게 될 뿐만 아니라 시장의 특별 허가증도 발행해 주겠소. 웬만한 상업도시에서라면 아무런 검문 없이 무사통과를 보증하는 신분보장을 해주겠다는 뜻이오. 어떠신가? 물론 현상금도 당신의 것이 될 거요. 여행 중이라며? 여비에 큰 보탬이 되지 않겠소?”

“달콤한 꿀을 주는 체 하면서 실상으로는 거절하지 못하게 옥죄는군.”

“좋은 것이 좋다는 것이지. 당신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겠소. 시간은.... 갈 길을 서두는 것은 당신 쪽이니 최대한 서둘러 주시오.”

“..............”

할 말을 마친 치안대장이 남은 맥주를 마저 목구멍에 털어 넣고서 몸을 일으키자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던 힙투비가 냉큼 손을 내리며 눈을 빛내왔다.

“그래서? 그 잡놈을 잡으러 갈 거야, 아빠?”

“엥? 꼬마야, 너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냐?”

“뭐래, 나는 남의 말은 기본적으로 안 들어.”

놀라 반문을 하는 치안대장의 물음을 태연하게 받아 넘기며 힙투비는 커다란 무화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재미있겠다, 재미있겠어. 힙투비는 잡놈 잡는 거 보고 싶어.”

“어린애가 볼만한 것이 아니다. 너는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어라.”

“치, 그럼 엄마랑 함께 잡으러 갈 거야? 엄마가 도와주면 쉬울 거야. 아빠는 약하니까.”

“나는 약하지 않아. 그리고 혼자 갈 거다.”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그런 거친 움직임에도 기가 죽기는커녕 눈매를 사납게 치켜 올리며 힙투비가 맞받아쳤다.

“약해. 아빠는 약하다고. 몸도 마음도 엉망이잖아? 맨날 밤마다 울기만 하면서.”

“...나는 울지 않아.”

지끈 – 화가 남과 동시에 아프게 조여 오는 심장의 통증으로 카이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성큼 성큼 계단을 올랐다. 뒤를 따라오는 힙투비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그런 카이난을 비웃듯 가늘어 지고 있었다.


“서쪽으로! 확실하오?”

뜨겁다 못해 도시가 통째로 익어버릴 것만 같은 시간, 하늘의 중심에서 조금 기울어진 태양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달아오른 지열로 인적이 뜸한 거리에서 리즈베테는 반색을 하고서 가게 주인에게 되물었다.

손님을 끌기 위해서 색색의 넓은 차양을 드리워놓은 길가의 찻집에는 리즈베테 말고도 시원한 그늘을 찾아 들어온 손님이 가득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여기사님. - 확실하고말고요. 제가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답니다.”

리즈베테가 건네어 주는 50리야(0.5 피오린에 해당한다.) 은화를 반가이 받아들며 가게 주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워낙 옷차림이 좋은 일행인데다 그들이 모시던 분이 지극히 아름다우신 귀부인이라서 기억도 확실하게 납니다. 베일로 얼굴을 가렸지만 수심에 잠긴 표정이 느껴졌었지요. 분명히 남쪽의 억양이었습니다. 제가 ‘남쪽에서 오신 여행자신가 보군요.’ 라고 말을 걸자 수행원 중 한 사람이 ‘우리는 긍지 높은 위대한 국가 아바디스 출신이오.’ 라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요? 화려한 장신구와 옷차림은 가드란 왕국의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아, 이 사람들 멸망한 가드란 왕국에서 탈출한 사람들이구나. 아바디스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아바디스 출신의 왕비와 관련이 있는 귀족들이다.> 라는 감이 팍 오더군요. 그래서 그 아름다운 귀부인이 설마....? 라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만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깊은 사연까지 알려고 들면 몸을 다치는 법이지요. 그것이 이 상업도시에서 평온함을 지킬 수 있는 법이랍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두 말해 주시는구려. 당신의 평온함은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꽤나 높은 눈썰미와 추리력을 갖춘 주인은 리즈베테의 물음에 싱긋 – 주름이 잡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일신의 평온함이란 반짝이는 은화 앞에서는 늘 저울질을 당하게 되는 법이지요.”

“과연 이 도시의 시민다운 말이군.”

돈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숨기지 않는 주인의 대답에 다시금 50리야 은화를 내밀며 리즈베테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자, 이것이 그대의 기억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오. 그 일행의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해 보겠소?”

“물론입니다. 저는 매주 신전에 가서 국신교의 신들에게 헌금을 하지만 정령신들에게도 헌금을 하기 때문에 두 배로 돈이 나가는 사람이니 국교의 신들이든, 정령신들이든 저의 기억력을 늘 돌봐주실 겁니다.”

내밀어진 은화를 냉큼 받아든 가게 주인은 기억을 되살려내려는 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그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자>라고 말을 하더군요. 저는 차와 과자를 준비하며 그 <돌아갈>곳이 아바디스라고 짐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일을 쓴 귀부인이 고개를 가로젓더군요. 부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돌아가면 아버님의 손아귀에 다시 떨어지게 되어 같은 일만 되풀이해 당할 뿐이에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울먹이시는 겁니다. <나에게는 일말의 자유도 없는 것인가요? 하다못해 내 운명에 대해서 아무런 조언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냐고요?>...자세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대충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행원 중 한 사람이 <용암대지의 예언자>에 대한 말을 하더군요. 그 분에게 가서 앞날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고 말입니다. 사실 전 코웃음을 쳤습니다. 남쪽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용암대지의 예언자>가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는 길거리의 점쟁이도 아니고, 아무리 신분이 높고 가문이 훌륭해도 그렇지, 갑자기 찾아간다고 만나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음... 내 억양으로 주인장도 눈치를 채었겠지만 나 역시 아바디스 출신이오.”

리즈베테는 난처함에 미소를 머금으며 중년의 주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용암대지의 예언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오. 우리 아바디스에도 훌륭한 예언자가 있지만 그는 왕궁에서 생활을 하지. 용암대지의 예언자는 어떤 사람이오? 그가 서쪽에 살고 있다는 것이오? 그래서 발리...아니, 그 귀부인이 그곳으로 향했고?”

“아니, 여기사님도 모르신다고요? 남쪽에는 그 분의 명성이 퍼지지 않은 겁니까? 그 분은 사람을 싫어해요. 그렇기 때문에 태고의 괴물 황금거미가 토해 놓았다는 저주받은 땅 용암의 대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인간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 뜨거운 용암의 강을 건너 거처인 흑요석의 탑 앞의 종을 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문전에서 내쫓기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그 귀부인과 수행원들이 찾아간다고 해도 만나줄 리가 없어요.”

“그렇게나 괴팍한데도 명성이 높다니, 그만큼 그의 예언은 정확하다는 뜻이오?”

“물론이지요!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실은 가드란 왕국의 멸망도 오래전에 예언을 하셨답니다. 마지막 왕이 되어 버렸지만 니코스 왕이 태어났을 때, 온 세상이 왕자탄생을 축하할 때부터 예언자는 <왕자는 왕국의 마지막 왕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난 가드란의 왕이 각국에 왕자탄생의 기념선물을 돌리면서 용암대지의 예언자에게는 일부러 돌멩이 하나만 덜렁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말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모욕을 받은 예언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다들 예상을 했는데 정작 예언자는 <어차피 망할 나라>라고 하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놀랍군. 사람을 싫어하는 예언자의 소문이 어떻게 그리 자세히 퍼져 있는 거요? 누가 예언자에게 접근해서 이런 사실들을 알아낸 것이지?”

“하하하 – 세상의 소문이란 발이 없어도 널리 퍼지고 입이 없어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실은 아무리 천하에 명성 높은 예언자라고는 해도 본인도 먹어야 살 것 아닙니까? 용암대지 중앙에 있는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예언자의 생필품을 대고 있거든요. 그 사람들만이 예언자에게 접근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소문이 자연스레 흘러나온 것이랍니다.”

“...어쨌거나 <귀부인과 그 수행원들>이 그쪽으로 향한 것은 귀중한 정보요. 감사하오, 주인장. 그대의 사업과 가정이 늘 평안하기를 빌겠소.”

“저도 기사님의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찻값을 후하게 쳐서 건네어 주며 몸을 일으킨 리즈베테는 아프리만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거리로 걸어 나왔다.

아바디스를 떠난 지 5개월이 되도록 얻지 못하던 정보를 겨우 손에 넣은 그녀의 가슴은 조금 두근거리고 있었다. 찻집 주인이 말한 귀부인은 그의 짐작대로 가드란의 왕비이자 아바디스 제국의 4왕녀, 발리아나가 틀림이 없으리라.

...적어도 무사함을 확인했으니 안심이구나.

찻집 주인의 정보에 의하면 서른 명은 족히 되는 수행원과 함께였다고 하니 길거리의 도적떼라고 한들 쉽사리 덤비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드란 왕국을 탈출하고서도 돌아오지 않고 연락 한 장 없이 행방불명이 되어 고국의 모두를 애태웠던 왕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리즈베테는 작열하는 태양을 손 그늘을 하고서 올려다보며 이제는 오래전의 일이 되어버린 순간을 떠올렸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 날도 이렇게 무더운 여름철이었다.

<이 돼지! 사내들의 노리개! 그래도 너는 나보다 행복하겠지! 억지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그 날 왕녀는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을 하고서 온갖 악담을 쏟아내며 리즈베테를 몰아붙였었다. 국왕의 명령으로 멀리 떨어진 대륙 북쪽의 나라 가드란과의 혼담이 결정된 날이었다.

세상은 왕녀의 혼인으로 기쁨으로 떠들썩한데, 정작 행복한 신부가 되어 미소를 지어야 할 왕녀는 그렇게 충복기사인 리즈베테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모진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왕녀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 당겨...

“.............”

리즈베테는 굵은 가닥으로 땋아 내린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한숨을 흘려 내었다.

그날 잔혹하게 왕녀의 손에 의해 잘려 나갔던 머리카락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 다시 자라나 과거의 아픈 기억은 잊었노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왕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사실 자신도 젖먹이 아기였던지라 그녀 스스로의 의지와 입으로 한 맹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왕녀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불충한 마음도 허락되지 않는 리즈베테였지만 언제나 그 날을 생각하면 마음 속 깊은 곳이 찌르르....아픔을 호소해 온다.

-스스로의 미욱함을 곱씹지 마라, 리즈베테.엔마돌라.카트로스테!

그녀는 왕녀를 생각함과 동시에 아픔을 호소하는 심장을 호되게 나무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충한 이 몸의 어리석음은 언제나 연약한 계집의 마음으로 과거의 상처만을 핥고 있다. 그러니까 자꾸만 불충한 마음이 자라나게 두는 것이다. 그 불충함이 자꾸만.... 왕녀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하면서 다른 일에 마음을 쏟으려 하는 것이다.

“엄마!”

“..............”

자꾸만 얼굴을 드러내는 자신의 속 좁고 간사한 얼굴에 밀려드는 자괴감으로 머리를 흔들던 리즈베테는 여관으로 향하는 골목길에 접어들자 자신을 발견하고서 쪼르르 달려 나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단박에 그녀를 발견한 품이 아무래도 자신이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와~ 좋은 소식이 있었구나? 얼굴이 땀투성이인데다 굉장히 슬퍼 보이는데도 좋은 소식을 들은 것이 틀림이 없어 보이네.”

한 달음에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는 소녀의 활짝 피어나는 아름다운 미소에 리즈베테는 홀린 듯이 둥글고 큰 힙투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자꾸 이 아이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내 마음이 불충하기 때문일까?

“너는 정말 예언가가 아니면 타고난 독심술사구나, 힙투비. 휴우... 더운 남쪽 지방출신인 나도 견디기 힘든 더위구나. 어서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

“엄마가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주인아저씨한테 말해 두었어. 얼른 목욕을 하고 나랑 맥주를 마시자.”

“너는 안 돼. 너는 과일즙이다.”

두 손을 뻗어 달랑 힙투비를 안아 올리며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잠시 불만스러운 듯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도 소녀는 땀으로 젖은 리즈베테의 뺨에 자신의 서늘한 뺨을 비벼대었다.

“엄마가 그러라고 하면 그럴게. 힙투비는 착한 아이니까. ”

“...너의 아빠....는 보이지 않는구나.”

타오르는 바깥에 비하면 숨이 트일 정도로 서늘하게 느껴지는 여관의 실내로 들어서며 본능적으로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찾던 리즈베테는 보이지 않는 카이난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딱히 그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을 발견하기만 하면 불쾌한 듯이 표정을 구기는 남자 따위, 이쪽에서도 관심을 둘 이유도, 의리도 없다.

하지만 내가 외출을 할 때 이 도시의 치안대장이 찾아와 있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일까?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되어서 곧 이 도시를 떠나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곧 이 부녀는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겠지...물론 나도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서쪽으로 떠나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는 이들을...

“엄마,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거야?”

“아.......”

코끝에 와 닿는 물과 소녀의 낮고도 맑은 목소리에 퍼뜩 리즈베테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부드러운 비누거품이 가득한 나무 욕조에 걸터앉은 힙투비가 두 손으로 물을 담아 그녀의 콧등에다 붓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니... 너와 너의 <아빠>는 북쪽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었지?”

“응. 북쪽에서 페테브란트의 왕이 내려오고 있으니까. 아빠는 무고한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해. 그러니까 왕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죽이려고 들 거야.”

“너의 <아빠>가 그렇게 말을 했니?”

“아니, 하지만 나는 알아. 아빠가 말을 안 해도 나는 알아.”

생긋 – 신비로운 미소로 대답을 하며 힙투비는 두 손 가득 담아 올린 거품을 입을 모아 불면서 말을 이었다.

“아빠는 나에게 이렇게만 말했어. 아빠가 없어지거든 은행에 맡겨둔 돈을 여비로 삼아서 남쪽 대 사막 슈라칸트 근처의 나라 칼.이라베시로 가라고 했어. 거기서 히가.나드리얀을 찾아가래. 아빠의 이름을 대면 보살펴 줄 거라면서.”

-그 남자는 정말 왕을 암살할 작정인가?

며칠 전, 이 아이의 입에서 같은 말을 들었을 때도 믿어지지 않았던 대담한 목적에 리즈베테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접었다.

한 나라의 왕을 일개 정령사가 암살을 한다? 그것도 단신으로?

만일 힙투비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을 했다면 분명 실소를 흘리며 한 귀로 넘겨버렸을 정도로 황당하고 무모한 음모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어린 소녀의 말은 묘하게도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소녀의 <아빠>라는 남자가 주는 음울하고도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남자의 짙은 청남색의 눈동자가, 그 눈동자에 서린 깊은 슬픔과 뚜렷한 분노가 소녀의 말이 진실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안 돼. 군대를 몸에 두르고 있는 왕이라는 존재를 한 명의 남자가 무슨 수로 암살을 한단 말인가? 설령 그가 가진 정령술인지 뭔지의 힘을 빌려 그런 꿈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할지언정 그의 목숨은 분노한 군대의 창검앞에...

“.............!”

생각만으로도 미간이 좁혀지고 두 눈이 질끈 감겨지는 상상에 재빨리 상념을 끊어내며 리즈베테는 물을 가득 받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강하게 문질렀다.

바로 그 순간, 잘 단련된 그녀의 감각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며 손이 절로 세워놓은 장검으로 뻗는다.

“엄마?”

“쉿...”

천진난만하게 비누거품을 뭉치며 놀고 있던 힙투비의 물음에 한 손으로 수건을 몸에 감으며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간 그녀는 물러서려는 인기척을 놓치지 않고 반쯤 쳐놓은 무명의 휘장너머로 검을 내질렀다.

“누구냐, 네 놈은!”

“크억....”

검 끝에 와 닿는 감각으로는 분명 베였음에도 너무도 날랜 몸놀림으로 상대가 지붕을 타고 도망을 친다.

“놓칠 것 같은가!”

창가에 드리운 휘장까지 뜯어내어 몸에 두른 리즈베테는 맹렬한 기세로 지붕을 타고 달아나는 괴한을 쫒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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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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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8화 – 공격(2) NEW 18시간 전 1 0 21쪽
28 27화 – 공격(1) 24.09.18 2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7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6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5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6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6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5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8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8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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