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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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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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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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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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 공격(2)

DUMMY

“정지! 이 길은 사용불가다.”

창을 내밀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병사의 존재에 카이난은 걸음을 멈추었다.

쉬는 시간도 아껴가며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파라모드 협곡의 초입이다. 마차가 나란히 세 대도 통과하기 힘들어 보이는 좁은 협곡의 양쪽으로 넓은 병풍처럼 바위투성이의 산이 짙푸른 나무들을 옷처럼 두르고 높이 솟아 있다. 산봉우리가 안개처럼 뿌옇게 펼쳐진 구름사이에 가려져 있는 이 협곡의 입구에는 카이난 일행처럼 길을 제지당한 행렬이 항의라도 하듯이 길가에 뿌려진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앉아서 담배를 피우거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벌써 하늘의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번째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뭐야, 어째서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거야?”

두 개나 되는 산을 넘어와서 피곤한 다리를 주무르며 케레스키가 병사에게 항의의 말을 던지자 병사는 식사를 하고 있는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협곡을 가리켰다.

“이 길은 위대하신 페테브란트의 국왕께서 행차하실 길이다. 그러니 누구도 이 길을 통과할 수 없어. 다른 길로 돌아가라.”

“아니, 지가 국왕이면 국왕이지 이 길이 자기거야? 이 길은 엄연히 대륙 공로란 말이야!”

”이 놈이! 무엄한 소리를 지껄이면 이 창에 코가 꿰뚫릴 줄 알아라!“

노골적으로 얼굴의 근육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이는 케레스키의 코밑으로 창을 들이밀며 병사가 소리치자 곧장 한바탕 붙을 듯이 케레스키의 손이 허리의 단검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손을 제지하며 카이난은 병사를 향해 말을 걸었다.

“국왕께서는 언제쯤 협곡에 도착하시는 거요? 그리고 이 협곡은 얼마나 긴 것이지?”

“그야... 오늘 해가 질쯤에는 도착을 하실 거다. 1천이나 되는 군대가 움직이니까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느리지. 길이는... 오는 길에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10트리언(약 15km)은 너끈히 넘을 것 같던데 왜 물어 보는 것이냐?”

“...........”

자신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카이난의 큰 덩치에 압도를 당한 듯 병사가 제 풀에 겁을 먹은 듯이 대답을 했다. 카이난은 병사의 말에 즉시 가방에서 지도를 펼쳐 보았다. 협곡을 지나 북쪽의 도시 베란트까지는 꼬박 하루가 더 걸리는 거리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남쪽의 밤벌레 마을과도 하루거리. 즉, 이 협곡이야 말로 사람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가장 떨어진 곳이며 자신이 왕을 맞이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협곡의 길을 막는 다는 것은 결국 협곡 안의 넓어지는 공간에서 야영을 한다는 뜻이리라.

카이난은 지도 속에 드러난 긴 협곡의 넓은 중앙부분을 확인하고서 물을 꺼내어 마시고 있는 힙투비의 몸을 들어 등에 업었다.

“서둘러라, 케레스키. 해가 떠 있는 동안 저 산 등성이를 넘어가야 한다.”

그의 말에 본격적으로 바위에 걸터앉아 가죽신을 벗고 발바닥을 주무르고 있던 케레스키의 인상이 한층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이봐, 우리는 카모나(두 번째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면서 여기까지 강행군을 했다고. 그리고 벌써 세 번째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안보여? 사람은 먹고 마셔야 살아. 나는 당신 같은 괴물 체력이 아니란 말이야.”

“...........”

“그 꼬맹이만 해도 그래. 하루 종일 업혀만 있었는데도 지쳐 보이잖아. 제대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아빠~ 힙투비도 배고파.”

그의 등에 순순히 업히면서도 케레스키의 말에 동조하기로 결정을 한 것일까, 긴 검은 머리카락의 끝을 잡아 카이난의 뺨을 찔러대며 소녀가 종알거렸다.

그런 두 사람의 투정에 카이난은 한숨을 삼키며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커다란 바위가 굴러다니고 있는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구워놓은 산돼지의 고깃덩어리와 말린 빵조각을 꺼내었다.

“여기서는 30분만 쉬는 거다, 힙투비. 저 산만 넘어가면 오늘 밤은 충분히 쉴 수 있을 거다.”

“응. 아빠가 왜 서두는지는 알아.”

기름종이에 싸둔 고기 덩어리를 썰어 건네는 카이난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입으로 가져가며 힙투비는 바위덩어리에 검은 얼룩처럼 보이는 산의 나무들로 시선을 던졌다.

“험한 산이야. 저 산의 허리를 돌아서 협곡 안으로 들어갈 생각인거야? 왕이 도착하기 전까지 도착할 수 있겠어?”

“목소리를 낮춰라. ...지금부터 서두르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 참, 저승길을 이토록 서두르려는 미친놈은 형씨 밖에 없을 거다. 저 병사 놈의 말을 들었잖아? 상대는 천명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대체 무슨 재주로 왕의 목을....”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다. 케레스키.”

나직하지만 날카로운 카이난의 경고에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흙바닥에 뱉으며 케레스키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 망할 놈의 계약만 아니었어도 한 몫을 잡는 건데 말이야. 왕에게 쪼르르 달려가 <당신의 목을 노리는 암살자가 있다>고 고해바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시도해 봐도 좋다. 네가 나를 팔은 대가로 손에 금화를 쥐는 순간 계약의 파그리티우는 너를 죽음의 정령신 키리나테에게로 즉시 인도할 것이다.”

“흥, 내가 멍청이인줄 아나? 보잘 것 없어도 소중한 내 목숨을 가지고 도박은 하지 않아.”

케레스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먼 시선으로 높은 산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도통 이해를 못하겠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간의 마음 따위를 말이야. 왕후장상으로 태어난 고귀한 인간이든 나같이 바닥이나 기어 다니는 따라지든 목숨은 하나란 말이야. 뭐, 옛날이야기에 따르면 목숨이 다섯 개나 되는 잘난 종족도 있다지만 보질 못했으니 믿을 수가 있나. 하여간 우리 인간들은 목숨이 하나란 말이지. 그럼 뭐야? 아주 귀하다는 거잖아. 죽으면 큰달의 궁전으로 간다지만 그것도 안 가봤으니 못 믿을 소리고 결론은 목숨이란 것은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라는 거야. 하물며 내 목숨이니 얼마나 귀해? 그걸 함부로 여기는 년놈들은 하나같이 어서 죽어 뒈져 버리라고 해.”

“그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로군.”

“...........”

“너의 모친에 관한 이야기인가?”

번뜩- 카이난의 입에서 흘러나온 <모친>이라는 단어에 케레스키의 가늘게 찢어진 푸른 눈동자에 놀라움과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카이난은 그러한 케레스키에게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있어서 아직 서늘함을 유지하고 있는 맥주 한잔을 내밀었다.

오늘 새벽에 서둘러 출발한 밤벌레 마을에서 조달한 소박하지만 품질이 좋은 붉은 보리 맥주였다.

“놀랄 것 없다. 오란바이트 도서관의 문서 기록실에서 너와 모친에 대한 의료기록을 보았을 뿐이니까.”

“나 같은 놈에게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이야?”

“너는 오란바이트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그립트 마을 출생이더군. 이 지역 사람들과는 다른 골격이어서 외부인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소리 자주 들어. 이 보기 싫은 매부리코와 머리색, 눈동자 색도 이 지역 놈들과는 다르게 생겨 먹어서 그래. 하지만 이래봬도 오란바이트에서 자라난 토박이라고.”

한 잔의 맥주로는 부족한지 가죽 주머니를 넘겨받아 빈 잔을 채우며 케레스키는 입술을 심술궂게 비틀어 올렸다.

“애미, 애비도 없는 놈이라고 가는 곳 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지. 제일 오래된 기억이 오란바이트의 고아원이었는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꼬리만 보면 놀리기 일쑤였어. 참... 자기들은 뭐가 그리 대단해서... 아, 나 진짜 우리 엄마 많이 원망했다. 대체 왜 나를 낳은 거야? 아니, 그렇게 뗄 재주가 없었나? 원치도 않은 자식이었으면서 왜 떼지도 못하고 낳았느냐고?”

“...너를 받은 의술사는 너무도 기이한 출산이라 기록을 남긴 모양이더군. <도마뱀 귀신과 몸을 섞었다>며 겁에 질린 너의 모친은 꼬리가 달린 자식의 모습에 그대로 혼절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혼절만 했겠어? 나를 키워준 고아원 아줌마의 말로는 귀신의 자식을 낳았다고, 자신은 저주를 받아서 죽을 것이라고 미친 여자처럼 굴다가 내가 태어난 지 3일도 지나기 전에 목을 매달았다고 하더군. 웃기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내내 두려워한 여자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다니. 대체 어쩌자는 건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을 테지.”

“형씨도 그래?”

“.............”

여전히 시선을 먼 산봉우리에 두고서 케레스키가 되물었다. 그리고는 마른 빵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던 손이 멈추는 카이난을 향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형씨가 왕의 목을 따겠다고 덤비는 거, 나는 실감이 안 난단 말이야. 웃기잖아. 상대는 일국의 왕이라고. 천 명의 군대가 보호하는 왕을 죽이겠다고 덤비는 형씨의 행동이 나로서는 자살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아. 게다가 없어진다며? 왕을 죽이는데 성공하면 없어진다고 말했잖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왕을 죽일 이유가 뭐야? 무슨 원한 관계가 있는지 내가 알바 아니지만 그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거야?”

“...가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카이난은 마른 흙덩어리처럼 느껴지는 빵에서 손을 떼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목숨에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

“그건 아빠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빵에서 손을 떼어버린 카이난의 손에 다시금 빵을 쥐어주며 힙투비가 커다란 눈을 치켜떴다.

“아빠는 그래서 잘 먹지도 않잖아. 안 돼. 내일 목숨이 사라진다고 해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죽어서 큰달의 궁전에 가면 아빠의 엄마 아빠가 화를 낼 거야. 잘 챙겨 먹지 않았다고 화를 낼 거야. 힙투비를 보고 배워. 난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잖아. 엄마 아빠가 없어도 나는 잘 살아가. 하지만 아빠랑 엄마가 있는 쪽이 더 행복해.”

“.............”

카이난은 어린 소녀가 손 안에 다시금 쥐어준 빵조각을 내려다보며 내키지 않은 손으로 그것을 한 조각 뜯어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때는 자신도 먹성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늘 배가 고팠고, 그래서 먹음직스러운 먹거리가 있으면 저절로 눈이 가는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날이 아득히 먼 과거의 기억처럼 느껴지고 그러한 날에 대한 기억이 안개속의 풍경처럼 흐리기만 하다.

자신의 마음이 황량한 황무지처럼 텅 비어버린 그날 이후....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산을 올라야 한다.”

“아이구... 밤잠이라도 제대로 자려면 고생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구먼.”

한 두 입 억지로 빵조각을 삼킨 그가 곧장 가방을 챙겨 몸을 일으키자 큰 한숨으로 케레스키가 엉덩이의 흙을 털며 따라 일어났다. 카이난은 냉큼 업히는 힙투비와 가방을 들고서 병사들의 눈을 피해 바위투성이의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이면 페테브란트의 왕 크세투스는 이곳 파라모드 협곡에 도착을 할 것이다. 이제 곧 이다. 곧 그의 기다림이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한 발, 한 발. 바위를 오르고 수풀을 헤치면서 그는 험준한 산의 허리를 돌고 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한 발짝씩 나아갈 때 마다 하늘의 중심에서 눈에 띄게 기울은 태양이 긴 그림자를 남기며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황금빛으로 그리고 핏빛처럼 붉게 물드는 하늘이 곧장 푸른 밤을 불러들이고 언제나처럼 맑은 얼굴을 한 별들이 얼굴을 내밀 무렵, 카이난 일행은 협곡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세월의 힘에 의해 부수어진 바위가 단단한 모래로 다져져서 드넓은 폭을 자랑하는 협곡이 길게 몸을 늘인 뱀처럼 구불거리면서 이어져있다. 이윽고 협곡의 가장 넓은 장소를 발아래에 내려다보는 지점에 그들이 도달했을 때, 하늘에는 커다란 달이 떠올라 툭 불거져 나온 바위와 무성한 수풀에 짙은 그림자를 더하고 있었다.

“뱃가죽이 등에 닿을 지경이야. 대체 몇 시나 된 거야? 라므타(네 번째 식사시간)는 진즉에 넘긴 거지? 더 이상은 못가. 오늘 하루만 해도 50트리언(약 75km)은 넘게 걸었다고! 난 여기서 쉴 거야!”

협곡을 향하여 돌출된 바위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케레스키가 가쁜 호흡을 몰아쉬자 카이난은 등에서 잠이든 힙투비를 조심해서 내려놓았다.

크고 둥근 달빛 아래에 펼쳐진 협곡은 푸른 어둠과 대비되는 하얀 막사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장 넓은 공간에 도착한 군대의 천막이다. 곳곳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화톳불은 그들이 늦은 네 번째 식사를 마치고 휴식에 들어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너의 임무는 이제부터다, 케레스키. 얼른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해라. 저들이 잠이든 밤에 너는 저들사이에 있는 왕의 천막을 찾아내야 한다.”

“저놈들이 잠을 자겠어? 밤새 돌아가며 경계를 설 텐데....어휴, 최후의 만찬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말이야. 감각이 예리한 놈에게 걸리면 난 그 순간 뒈지는 목숨이 되는 거야.”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면서도 가죽 가방을 통째로 넘겨주는 그의 손에서 허겁지겁 먹거리를 찾아 꺼내는 케레스키를 내버려둔 채 카이난은 힙투비의 통통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힙투비, 일어나서 요기를 하고 자거라.”

“으응.... 왕이 도착한 거야, 아빠?”

뺨을 두드리는 카이난의 긴 손가락을 잡으며 힙투비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몇 번 깜박이더니 복잡한 빛을 돌려받았다.

“군사들이 나타나서 천막을 치는 것까지는 본 기억이 나는데... 후아암~ 왕은 보지 못했어. 깜박 잠이 들어버려서”

“깜박 잠이 들기는. 아주 대놓고 쿨쿨 잤으면서. 옛다, 먹어라.”

나른하게 사지를 쭉 뻗으며 몸을 일으키는 힙투비에게 둥근 보리빵을 던져 주며 케레스키가 게걸스레 가죽 주머니째 맥주를 들이키자 소녀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듯 코에 주름을 잡았다.

“나도 맥주 마실 거야, 더럽게 입을 대고 먹지 마. 잡놈아!”

“진짜 어른한테 말하는 본새하고는... 확 입을 찢어버릴까 보다.....어이, 형씨. 설마 또 먹지 않을 요량인거야?”

맥주를 향해 손을 뻗는 힙투비의 손을 매몰차게 밀어내던 케레스키는 몸을 일으켜 나무그늘이 무성한 어둠속으로 들어가려는 카이난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전 식사에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잖아. 그 큰 덩치가 쓰러져도 부축해줄 사람은 없다고.”

“오는 길에 산양의 무리를 보았다. 휴식을 취하고 있어라.”

카이난은 바위와 숲이 공존하는 험준한 산세를 올려다보며 그렇게만 말을 하고서 수풀의 그림자를 헤치고 나아갔다.

몇 개의 바위언덕을 넘고 벼랑에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나무숲을 헤치고 산의 동쪽 가장자리로 이동을 하자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초연한 모습으로 바위틈에 서 있는 산양의 모습이 들어온다.

카이난은 달빛 속에 교교히 떠오르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양을 향해 애도의 기도를 잠시 올린다음 손을 뻗어 커다란 돌멩이를 잡아 올렸다.

따악 – 그의 움직임에 한순간 본능적으로 주춤 달아나려던 산양의 고개가 기묘하게 틀어지더니 곧 그 몸이 바위에서 굴러 떨어진다. 동시에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산양의 무리가 삽시간에 바위들을 박차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카이난은 두개골이 깨어진 채 쓰러진 산양의 목을 잡고 단숨에 꺾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어깨에 짊어지고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넓은 바위 터로 돌아왔다.

“어, 마침 마지막 돼지고기를 먹어치운 참이지. 고 놈 참 크고 먹을 것이 푼푼하게 생겼구먼. 손질하는 거 거들어 줄까?”

기름으로 얼룩진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맥주를 들이켜고 있던 케레스키가 반색을 하며 맞이한다. 힙투비 역시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식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식량으로 삼는 것은 나중이다. 눈이나 붙이고 있어.”

카이난은 나무아래 흙을 손으로 파더니 움푹하게 파인 작은 구덩이에 한 장의 기름종이를 깔았다. 그리고 단도로 경동맥을 딴 염소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을 소중히 기름종이를 깐 구덩이 안에 모으기 시작했다.

“뭘 할 작정인거야?”

“.....준비.”

단지 그렇게만 대답을 하며 가방에서 새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낸 그는 나뭇가지에 피를 적셔 양피지에 무언가 복잡한 문양의 그림과 주문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정령술 나부랭이냐, 난 관심 없으니 잔다.”

한눈에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양과 문자에 빠른 속도로 흥미를 잃어버린 케레스키가 바위위에 모로 돌아눕더니 곧장 코를 골기 시작한다. 반면 힙투비는 바위 위에서 고개를 빼죽 내밀고서 발아래에 펼쳐진 협곡의 불빛과 무수히 펼쳐진 군용 천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이야, 아빠.”

“....천 명이라고 들었다.”

“천 명을 이길 수는 없어.”

“.............”

묵묵히 양피지를 채워나가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는 카이난의 모습에 힙투비는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이 많아. 아빠의 소망을 이루는 방법도 하나가 아닐 거야. 분명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 그런데 아빠는 하나밖에 선택하지를 않는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아빠도 죽는 방법이야. 내가 말했잖아. 아빠가 선택한 방법은 아빠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

단호한 그의 말에 고집스레 반박을 하며 힙투비는 달빛 속에 희뿌옇게 빛나는 은색의 다리를 그러모아 두 팔로 감쌌다.

“내가 아빠를 깨운 것을 기억해? 내가 아빠를 깨우지 않았으면 아빠는 그때 죽었어. 그때, 나를 깨우는 의식을 했을 때. 아빠는 나를 깨우고 나는 아빠를 깨웠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빠는 그때 왕의 추격대에게 죽었을 거야.”

“...............”

“나는 그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했어. 나는 깨어나는 것이 중요했거든. 누구든 나를 깨우기를 원하고 있었어. 나를 깨운 아빠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다고 해도, 혹은 추격자들에게 살해를 당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 힙투비는 약해. 아직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연약해. 그래서 나는 아빠가 계속 힙투비의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

“죽지 마, 아빠. 죽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찾을 수 있어.”

“..............”

카이난은 비로소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어 오도카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장 다시 눈길을 양피지로 떨어뜨리며 카이난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한 가지를 잘못 알고 있다. 힙투비.”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데?”

“나는 살아있지 않아.”

피가 고인 웅덩이에 나뭇가지를 찍어 주문서를 완성해 나가며 카이난은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살아있지 않다. 나의 시간은 이미 종말을 맞이했고 잠시 죽음을 유보해두었을 뿐이다. 내 목숨은 진즉에 죽음의 키리나테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완성이 된 양피지를 네 조각으로 자르더니 곧장 헐렁한 수도복을 벗어 던졌다. 푸른 달빛아래 상처자국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근육들이 드러난다.

힙투비는 속옷 한 장만을 걸친 채 피의 주문을 자신의 몸에 그려 넣기 시작하는 카이난의 손동작을 가만히 지켜보다 조용히 한숨을 흘려내었다.

“때때로 하나밖에 모르는 아빠의 결벽적인 순수함이 걱정스러워. 마치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다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는 투로 행동하잖아.”

“..............”

“하지만 아빠. 유보된 목숨이든 뭐든 살아있는 동안은 원치 않아도 다시 손에 쥐게 되는 것들이 있어.”

힙투비는 육체의 지면을 빼곡히 피의 문양으로 채워나가는 카이난의 손을 시선으로 따라가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아빠가 그것을 너무 늦게 눈치 채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너무 늦게 알아차리면 또 잃어버리고 후회할 수 있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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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 – 공격(1) 24.09.18 3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7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7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6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7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7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7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6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9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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