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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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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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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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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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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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 공격(1)

DUMMY

“이건 미친 짓이야... 죽는다고. 우리 모두 죽을 거야. 우걱...우걱....아니, 알게 뭐람 나는 확실히 죽을 것이 빤한데.”

“그만 좀 쳐 먹어, 이 잡놈아. 그건 내 몫의 빵이란 말이야.”

다섯 개 째의 보리빵에 손을 내미는 케레스키의 손을 찰싹 쳐내며 힙투비는 빵을 품에 껴안았다. 그리고는 근처에서 잡은 가시 토끼의 배를 가르고 날카로운 등가시를 뽑아내고 있는 카이난을 향해 볼멘소리를 흘려 내었다.

“아빠, 이 잡놈 보고 그만 먹으라고 해줘. 그리고 나 혼자서도 칼.이라베시에 갈 수 있단 말이야. 이런 녀석이랑 같이 가기 싫어.”

“가능한 어른과 동행하는 것이 좋다, 힙투비. 아이 혼자서 가기에는 너무 먼 길이야.”

10하루스 (약 12kg)는 거뜬히 나가는 묵직한 짐승의 등가시를 모두 뽑아낸 카이난은 고깃덩어리를 나뭇가지에 꿰어 모닥불에 올리며 불만스러운 힙투비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일이다. 내가 없어지면 저 자와 함께 가거라. 저 자는 계약을 했어. 목숨이 아까운 이상 계약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선택의 여지나 있었나? 억지로 한 계약 따위...퉷!”

그의 말에 미어져라 쑤셔넣은 빵조각과 함께 물을 마시던 케레스키가 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뱉어내며 고통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아~ 내가 어쩌자고 이딴 계약을... 굶어 죽는 것이 싫어서 무시무시한 군대의 창칼 앞에 내 목숨을 내어 놓다니...”

“네가 가진 재주를 잘 활용한다면 군대의 창칼도 너를 죽이지 못할 거다, 케레스키. 네가 죽을 때는 계약을 어기고 멋대로 달아날 때뿐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이 아이를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면 계약의 파그리티우는 너를 자유롭게 풀어줄 것이다. 자유를 얻고 싶다면 충실히 계약의 내용을 수행해라.”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토끼 고기에 소금을 덧뿌리며 카이난이 무심히 대꾸하자 케레스키는 냄새에 홀린 듯 모닥불에 다가와 앉았다.

“이봐, 나는 말이야. 제 힘으로 일어서서 걸어 다닌 나이부터 자유로웠어.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에는 발도 들이지 않으며 살아왔다고. 그런데 갑자기 왕의 목을 따러간다는 미친놈에게 걸려서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한복판으로 기어들어가게 생겼으니 심란하지 않겠어? 말해봐, 너는 언제 없어질 예정인데? 망할 칼.이라베시인지 뭔지 하는 나라는 대체 얼마나 먼 곳인거고? 내가 저 꼬마를 데리고 몇 달이나 이 망할 계약에 묶여 있어야 하느냔 말이야?”

“칼.이라베시는 대륙공로를 이용해서 빛의 왕국 인세르바야를 통과해서 가면 5개월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언제 사라질지는 너에게 달렸지. 네가 가지고 오는 정보가 정확하다면 며칠 걸리지 않을 거다.”

“굳이 아빠가 없어질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없어진다는 것은 무슨 소리야? 설마 왕을 죽이고 자살이라도 할 작정인거야, 정령사?”

“.............”

카이난은 동시에 날아드는 힙투비의 투덜거림과 케레스키의 물음에 깊은 침묵으로 답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익은 고기의 절반을 떼어내어서 케레스키에게 던져 주고 부드러운 부위를 골라내어 힙투비의 손에 쥐어주는 것으로 대화를 종료시켜 버렸다.

“새해 첫날에 신전에 공물을 안 바친 탓인가... 아주 재수가 없어 그냥.”

고기를 몇 점 떼어내어 입에 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장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아 버리는 카이난을 노려보며 케레스키가 투덜거리자 힙투비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토끼고기를 입에 넣었다.

“잡놈도 신전에 공물을 바쳐? 신을 믿는 거야?”

“당연히 신을 믿지. 내가 귀신의 자식인데 안 믿을 이유가 뭐야? 그리고 자꾸 어른을 보고 잡놈이라고 부르면 확 잡아 먹어버린다. 귀신의 자식은 어린 아이의 살코기를 좋아한다고.”

“너무 무서워서 코웃음이 나오네.”

“안 믿냐? 이 꼬리를 보고도 안 믿는단 말이지?”

“아얏! 웃기셔!”

옷을 입고 있음에도 우윳빛의 꼬리가 빠르게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와 힙투비의 커다란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그러나 통쾌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힙투비가 그 꼬리를 잡아 불길 속에 밀어 넣어 버리자 케레스키는 고통 속에 펄떡펄떡 뛰다가 뒹굴기 시작했다.

...적어도 저 아이의 신변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군.

눈을 감고서 투닥거리는 케레스키와 힙투비의 실랑이를 듣고 있던 카이난은 조용히 몸 안을 휘어 도는 어둠의 힘이 전하는 싸늘하고도 묵직한 감각에 조용히 눈꺼풀을 열었다.

<굳이 아빠가 없어질 필요는 없잖아>라고 불만스레 어린 소녀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카이난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2년간 모아온 이 어둠의 힘을 폭발시켜 금기의 존재를 소환하게 된다면 자신의 육체는 그 대가로 바쳐지게 되리라.

그것이 죽음이라면 당연히 치러야할 죽음이다. 무엇보다 페테브란트의 왕 크세투스의 숨통을 끊어놓는다는 목적을 이루게 되면 더 이상 살아가야할 이유 역시 사라지게 된다.

“............”

카이난은 실랑이를 멈추고서 식사를 계속하면서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힙투비의 커다랗고 색색으로 변하는 검은 눈동자를 조용히 마주 바라보았다.

처음 자신의 목적을 가르쳐주고 혼자가 될 저 아이의 행보를 일러주었을 때도 소녀는 지금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보기라도 하듯이, 그리하여 그의 내면에서 한 오라기라도 삶에 대한 희망이나 미련을 찾아내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는 말했지.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거야?>라고 말이다.

정말 이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인가?

카이난은 문득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삶에 대한 미련이 생긴 것은 아닌데. 그래도 정말 이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입가에 쓸쓸한 냉소를 자아낸다.

그러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밖에 없는 일개의 정령사가 수많은 군사와 마법의 수호까지 받고 있는 일국의 국왕의 목을 무슨 수로 취한단 말인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가장 확실한 승률로 목적을 이루는 방법을 골라내었다. 그러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라면 기꺼이 이 목숨 따위는....

“달이 떴어. 아빠.”

입으로는 부지런히 고기를 씹으면서도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힙투비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에는 크고 둥근 달이 어둠이 내린 숲을 환상적인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러 풀숲 사이에서 기어 나온 월광충들이 한가로이 빛을 내며 날아다닌다. 그들이 내는 맑은 종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애수어린 음악소리처럼 공간을 울리며 흩어진다.

“1시간 후에 출발한다.”

떠올릴 때마다 숨통이 막혀버리는 초록의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달빛에 시선을 돌리며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밤길을 걸어서 조금이라도 더 북쪽으로 가야한다.”


“도저히 무리입니다, 기사님. 보시다시피 저 상태이니까요.”

“...........”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과 검댕이로 얼룩져서 눈동자만이 묘하게 반짝거리는 주민의 말에 리즈베테는 말을 잃고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무시무시한 열기와 함께 타오르는 화염은 아름다운 숲의 흔적마저 지워버릴 듯 맹렬한 기세로 불타오르고 하늘로 번져가는 검은 연기는 아름답게 떠오른 둥근 달까지도 가려버렸다. 쉴 사이 없이 도끼를 휘두르며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있는 마을의 남자들은 아이까지 동원되어 있지만 타오르는 불길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오란바이트의 서쪽 문을 나서서 하루 종일 걸려서 도착한 마을이다. 그런데 서쪽으로 향한 길은 숲에서 난 큰 불로 인해서 지옥의 입구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진압은커녕 마을까지 불길이 번지지 않는 것을 막기도 녹록치 않아 보이는군. 언제부터 난 불이오?”

“오늘 아침부터 난 불입니다. 발견하는 것이 늦어서 이미 진압은 글러버렸어요. 바람이 마을 방향으로 바뀌지 않기만을 빌어야지요. 이 일대의 나무는 모조리 잘라내야 합니다. 마을과의 거리를 벌려놓아야 해요.”

이가 나간 도끼를 들고서 다시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하는 주민의 말에 애마 글로엔에서 내린 리즈베테는 낭패의 심정으로 맹렬한 불길을 건너다보았다.

이런 큰 불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숲의 화재는 숲이 모조리 전소될 때까지 열흘을 멈추지 않고 타올랐었지. 눈앞의 화재 역시 그에 못지않은 규모로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열흘 이상 서쪽으로 가는 길이 지체된다는 뜻이지.

“다른 길로 서쪽을 향하는 방법은 없겠소?”

“여기서 북쪽으로 선회하는 방법이 있지요. 안개나무 마을, 밤벌레 마을을 거치면 파라모드 협곡이 나옵니다. 그 협곡을 통과해서 베란트라는 도시를 가면 서쪽으로 통하는 다른 길이 있습니다.”

“...적어도 사나흘은 족히 걸리겠군.”

리즈베테는 짧은 한숨을 흘리며 말을 한곳에 묶고서 방패와 대검을 내려놓았다.

“도와주시는 겁니까?”

“오늘 밤만이라도 거들겠소.”

도끼를 청하는 그녀의 말에 반색을 하는 주민에게 리즈베테는 쓴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발리아나 왕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어지러워지는 충성심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발길을 잡는 화재 앞에서 리즈베테는 절로 자신에게 변명을 하고 있었다.

찻집 주인에게서 왕녀의 일행이 <용암의 대지>로 떠났을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을 때, 이미 시간은 3주 이상이나 차이가 나 버렸다. 지금 서둘러 용암의 대지로 간다고 한들 왕녀는 이미 그곳에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눈앞의 이 화마로부터 마을을 구해내는 일을 우선시 한다고 한들 누가 자신을 비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발리아나님은 나를 비난하시겠지.

손에 든 도끼를 높이 들어 나무를 찍어 내리며 리즈베테는 오래전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쏘아보던 갈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내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면 너의 충성 같은 것은 필요 없어! 너는 나의 기사가 아니야!>

열네 살의 왕녀는 그렇게 말을 하며 리즈베테의 뺨을 매섭게 올려붙였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미워하실까? 아니... 나의 존재를 떠올리기나 하실까? 어쩌면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리즈베테는 넘어지는 나무를 피해 옆의 나무로 옮겨가며 왕녀를 보지 못한 세월이 벌써 10년이나 되었음을 절감했다.

그리고 차라리 왕녀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기억조차 하지 못하기를, 자신이 내심 그런 상황을 바라고 있음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내 충성심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만도 못한 것이로구나. 이런 마음을 숨기고서 그분의 충복기사라는 명예를 감히 어떻게 감당하려는 것인가?

명예?

그 단어를 떠올리자 갑자기 왕녀의 비웃음으로 말려 올라가던 붉은 입술이 생각난다.

<운드라 기사단 최초의 여기사라니,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직책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턱을 잘 정리된 손톱으로 긁어 간질이며 왕녀는 가엾다는 듯 가늘게 뜬 눈동자로 리즈베테를 올려다보았다.

<천만에. 가엾은 나의 충복기사 – 너는 장난감이야. 보기 좋은 장신구지. 남자 기사들이 여흥으로 가지고 놀 장난감 말이야.>

그리고 까르르 구슬소리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육중한 체구를 밀어 내었다.

<너는 나에게 속해서만 명예로울 수 있어. 나의 충복기사라는 명예 외에 무슨 명예가 더 필요하다는 거지?>

-그런데도 저는 명예가 필요했습니다, 발리아나님.

“기사님, 물이라도 좀 마시면서 하세요.”

몇 그루 째 인지 모를 나무에 도끼날을 박아 넣으며 리즈베테는 땀으로 젖은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마을의 여인이 주는 물을 달게 받아 마시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는 듯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노려보았다.

당신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저는 명예롭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주는 명예만으로는 제 욕심많은 심장이 만족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저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었고 왕국의 믿음직한 전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겨우 그러한 노력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아이구, 기사님 위험해요!”

마을의 여인이 놀라서 외치는 만류의 소리에도 성큼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불이 옮겨 붙고 있는 키작은 나무들을 향해 도끼를 내려치며 그녀는 아프게 인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나기가 거북스럽습니다, 발리아나님!


“휴우... 이제 한 시름 덜었군요.”

밤새워 온 마을 사람이 총동원되어 매달렸던 나무 베기 작업은 푸른 새벽을 지나 다음날 14시까지 계속되었다.

빠른 불길의 속도에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어젯밤부터 식사시간도 거른 채 나무를 잘라내는 작업에 매달렸던 마을 사람들은 힘겹게 확보된 숲과 마을과의 공간에 안도 섞인 신음소리를 흘리며 모두가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널브러져 있었다.

리즈베테 역시 물에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내며 잘려나간 나무 등걸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런 그녀에게 붉은 뺨을 한 처녀가 다가와 수줍은 미소로 다진 고기를 넣은 커다란 빵 덩어리와 맥주 항아리를 내밀었다.

“드세요. 기사님. 저희 마을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력한 도움인데 뭘... 사람의 도리로 못 본체 하지 못했을 뿐이오.”

“그 못 본체를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쉽게 하던걸요? 상인이고 군인이고 모험자고... 얼마나 잘나시고 바쁜 사람들인지 숲에서 불이 났다고 하는데도 다들 자신들의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고 혀만 차면서 다른 길을 찾아서 떠나버리더라고요.”

“다들 피치 못할 사정들이 있는 것이겠지.”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맥주를 달게 넘기며 쓴웃음을 짓는 리즈베테의 대답에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처녀는 그녀의 붉은 고수 머리카락과 큰 키, 그리고 폭이 넓은 가죽치마와 금색의 아름다운 날개문양이 새겨진 가죽흉갑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자 기사님은 처음 봐요. 참 키가 크시네요. 저 커다란 칼과 방패도 모두 기사님 것이에요? 뿔이 달긴 말도요?”

“그렇소. 남쪽 아바디스 왕국에서 왔지.”

“들어본 적은 있어요. 얼마 전에 우리 집에서 묶은 귀족들도 그 이름을 말하던데....”

“아바디스에서 온 귀족들이던가? 베일을 쓴 귀부인을 수행한?”

“아시는 분들이에요?”

리즈베테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처녀는 동시에 미간을 사납게 구겼다.

“되게 거만한 사람들이었어요. 기사님과는 딴판이던데... 그 귀부인만 해도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침대였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차에서 자신의 깔개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더라고요. 게다가 일주일 치 사용할 물을 모조리 자신의 목욕물로 써 버렸어요. 보통 그 정도 물 양이면 다섯 사람은 씻었을 거라고요.”

“그들이 서쪽으로 간다고 말을 하던가? <용암의 대지>로 간다는 말을 혹시 들었소?”

“글쎄요, 어디로 간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하지만 뭐라더라... 대충 예언자가 뭐라고 하든 말하신 아바디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불만스레 중얼거리던 남자 귀족이 하는 말은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동조하는 분위기였고요. 하지만 그...듣고 있던 다른 귀족이 말하기를, 그래봐야 자기들의 입지만 줄어든다...라든가? 하여간 그런 말을 했어요. 전 술과 안주만 챙겨주고 바로 나와서 다른 말은 별로 듣지 못했어요. 다음날 그 사람들은 바로 떠났거든요.”

...입지가 줄어든다라....

리즈베테는 처녀에게 감사의 뜻으로 5리야 은화를 한 닢 쥐어 주었다. 처녀는 얼굴을 더욱 붉히면서도 그것을 받아들고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총총히 멀어져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즈베테는 <그러면 우리의 입지만 줄어든다.>라고 모두의 불만을 눌렀다는 인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가드란 왕국이 멸망했을 때, 일신을 위하여 왕녀를 모시고 왕궁을 빠져나온 아바디스의 귀족들은 당연히 고향인 본국으로 귀국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리아나 왕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아버지인 국왕의 강압으로 인해 또 다시 어딘가와 정략결혼을 해야 할 것이 분명한 자신의 운명에 저항을 하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왕녀와 가드란의 정략결혼을 강력히 주선을 했었던, 그리하여 가드란 왕국에서도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인물들은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오면 입지가 줄어들 것이다.

변변찮은 국혼을 진행했다는 비난과 가드란 왕국을 지키지 못한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겠지. 적어도 그러한 귀족 중 한 명은 왕녀에게서 상당히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빨리 귀국하기를 꿈꾸는 대부분의 귀족들의 불만을 누르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자는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일까? 예언자의 예언이 변변치 않을 경우, 더군다나 왕녀가 그 예언의 결과로 아바디스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이지?

만일 이대로 왕녀가 아바디스로 돌아오지 않고 잠적이라도 해 버린다면.... 이미 왕녀는 충분히 반항적으로 굴고 있지 않은가?

리즈베테는 딸의 반항에 대노할 국왕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오래전의 기억이지만 발리아나 왕녀는 곧잘 <나는 자유와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어디든 갈 수가 있어>라며 꿈같은 말을 종알거렸었다.

아니, 한 번은 그 꿈을 실행에 옮기는 위험천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던가? 만일 리즈베테가 나서서 그것을 막지 못했더라면 왕녀는 왕의 분노 앞에서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로 나는 발리아나님에게 제대로 미운 살이 박히고 말았지만.

그는 세월의 기억 속에서도 또렷이 떠오르는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의 순박한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휘두른 검 날에 닿아 붉은 피를 흘리던 그 순박한 얼굴의 소년의 영혼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을까? 그날 자신이 한 행동은 어디까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지?

“아니, 벌써 가십니까?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는데...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 떠나시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묶여진 글로엔의 혁을 풀어내는 리즈베테를 발견한 마을 주민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걸어온다.

“갈 길이 멀고 바빠서 지체할 수가 없소. 마음만 받으리다.”

리즈베테는 만류하는 주민에게 미소로 답을 하며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이대로 나아가면 해가 지기 전까지는 일러주었던 북쪽의 마을 한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북쪽으로 나아가 파라모드라는 협곡을 지나 도시에 다다르면 다시 서쪽으로 가는 길이 생긴다.

북쪽으로.....

그녀는 문득 커다랗고 신비한 눈동자를 가진, 은색 피부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소녀가 <아빠>라고 부르는 커다란 남자의 존재도.

이대로 북쪽으로 향하면 말을 탄 자신의 속도가 그들을 따라잡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쩌면.... 다시 그들 부녀를 만날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순간 묘하게도 가슴 안쪽이 간질거리면서 동시에 뜨거워지는 현상에 리즈베테는 일부러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빨라지는 심장의 속도만큼이나 말을 재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힙투비 때문이야”

그녀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변명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보고 싶기 때문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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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 공격(1) 24.09.18 3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7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6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5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7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6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5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8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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