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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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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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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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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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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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 전조(前兆) (1)

DUMMY

“............?”

-파르르르르...

귓가를 자극하는 공기의 흔들림과 미세한 날개 짓에 어둠속에서 카이난은 눈을 떴다. 벽난로의 불씨가 붉은 빛으로 사그라지는 시간. 그의 눈앞에 반짝이는 벌새와도 같은 전령이 <목소리>를 품고서 마력의 날개를 떨고 있었다.

<나에게로 즉시 오라.>

짧은 문장의 목소리가 담겨있는 마법의 전령은 카이난이 손을 뻗어 그것을 확인하자 곧 바로 산산히 분해되어 공기중으로 녹아들어 버린다.

카이난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수도복을 걸친 다음, 조리장을 빠져나가 로투남 성탑으로 향했다.

어둠을 밝히는 월광암의 빛과 울라한 폭포의 우레와 같은 소리가 언제나처럼 반겨주는 로투남 성탑의 문을 통과하자 불안하게 흔들리는 라벨렌들의 빛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왜 이리들 불안해하는 겁니까? 당신들은 아직 <감정>을 배울 단계가 아닙니다.”

그는 탑 속의 어둠을 뚫고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라벨렌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전해주는 불안함에 덩달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감정을 익히지 못한 라벨렌들이 이렇게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이 장소에서 무언가 불미스러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불미스러운 움직임이란 십중팔구....

“...........!”

좁은 계단을 내려가 대리석의 홀로 이어지는 작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커다란 공간에 작열하는 마력의 날카로운 가시에 카이난은 반사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광경에 저도 모르게 눈에 날을 세우고 말았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히가!”

“왔느냐, 와서 마력이 모자란 수정구들을 채워다오. 역시 내 힘만으로는 수정구들을 모두 채울 수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물음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카이난은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태연하게 정령술의 문장과 복잡한 마법진을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낯선 여인의 존재도.

여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베일을 쓴 채 정령진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온 몸을 덮고 있는 베일 속에서도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서 카이난의 등장에도 굳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러한 태도가 이 모든 상황을 그녀가 받아들이고 있으며 동조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머리위로 언뜻 보아도 백 명이 넘는 최하급 정령들, 흔히들 꼬마 정령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마력에 결박당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정령님들!”

카이난은 마법의 힘에 결박당해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는 정령들이 일으키는 날개 짓의 난반사에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면서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단단히 묶인 마법의 결박은 정령들을 향한 이러한 무례를 범하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히가.레이온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히가!”

가엾은 정령들의 비명 속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여인의 태도가 묘하게 신경을 거슬려 카이난은 평소보다 훨씬 날이 선 목소리로 노인을 다그쳤다.

“....어째서 이 많은 정령들을 결박해 놓으신 겁니까? 아무리 최하급정령들이라지만 정령사제가 이런 식으로 정령을 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만큼 지금부터 행해지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일이라고요? 인간에게만 중요한 일이겠지요. 정령인 저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 것이고요.”

“그래서? 도울 테냐, 돕지 않을 테냐? 말해두지만 돕지 않겠다고 말을 한다면 즉시 너를 파문하겠다. 링크레 상태에서 겨우 벗어난 최하급 정령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각오가 되어 있다면 즉시 이 모든 것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이 자리를 떠나라!”

“..........!”

자신의 비난어린 추궁에 대하여 즉시로 돌아오는 노인의 서릿발 같은 호통에 카이난은 입 안의 속살을 아프도록 깨물며 정령진을 둘러싼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여인과 정령진,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여덟 개의 수정구에는 절반 정도밖에 마력이 차 있지 않았다.

그리고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허공의 결박당한 정령들...

카이난은 그 가련한 작은 생명들을 올려다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금 노인과 여인을 돌아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여인을 둘러싼 정령진은 온통 암호로 가득해서 무엇을 위한 정령술이 펼쳐질 것인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는 고도의 정령술....아니, 강력한 마법일까?

바로 그 순간, 정령진의 중앙에 앉은 여인의 베일 너머로 차가운 샘물과도 같은 낭랑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나는 많은 것을 약속했소. 그럼에도 나의 약속이 부족하다고 말을 한다면-”

순간, 얇은 베일 너머의 그녀의 입술이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것처럼 카이난은 느껴졌다. 그런 그의 긴장된 표정을 주시하며 여인의 입술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가 그토록 원하는 나의 시녀를 기꺼이 허락하도록 하지.”

“............!”

카이난은 반사적으로 온 몸의 근육을 굳히고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자신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얇디얇은 베일 너머의 인물은 보지 않아도 그녀가 대단한 미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배를 감싸고 있던 두 손.... 역시 그녀의 정체는 이 나라의 왕비이자 소중한 일레이네의 주인인....!

“마력을 채워라, 카이난 – 너를 수호하는 순결의 에스투람의 가호를 우리에게 보여 다오.”

“.............”

카이난은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는 무거운 팔다리를 움직여 수정구 쪽으로 다가갔다.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하게,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정령신의 고귀한 가호를 함부로 사용하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만 하는데 어째서인지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어쩌면 그것은 노인의 명령을 거역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교육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고, 여인이 내민 제안이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어서 일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카이난은 투명한 수정구를 향하여 팔을 뻗으며 자신의 수호신 에스투람의 이름을 불렀다.

에스투람 – 자신이 이 지하의 방에 끌려 들어와 강제로 지식과 정령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가장 먼저 다가와 어린 뺨을 어루만져 주었던, 그리고 상냥한 미소를 지어 주었던 다정한 존재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본능이 일러준 기도를 흘려 내었다.

...언제나 나에게 친절하신 에스투람... 힘을 빌려주세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저는 일레이네를 원합니다. 그녀를 원하는 이 마음이 순결함을 상징하는 당신이 뜻하는 바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연인들의 사랑이 낳은 순수함과 순결함을 아끼고 사랑하시잖아요. 저는 일레이네를 순수하게 원합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그녀를 얻게 해 주세요. 그녀의 마음을 얻은 지금, 그녀의 자유도 얻게 해 주십시오. 당신이 사랑으로 힘을 빌려주시면...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성이 <무슨 주술인지도 모르는 의뭉스러운 정령술에 이렇게 힘을 보태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라는 강한 외침을 돌려주었지만 애써 그 차가운 목소리에 귀를 닫고서 그는 기도에 집중을 했다.

마음의 기도가 이어질수록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강력한 정령의 가호가 그대로 힘이 되어 수정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비어있는 수정구 속을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 충만한 힘의 범람에 경이로운 빛을 띠는 베일 너머의 여인과는 달리, 노인의 입에서는 새로운 주문이 흘러 나왔다.

“히가? ...무슨 짓을!”

비어있던 모든 수정구에서 힘이 넘쳐흐르는 순간, 노인의 몸에서 나온 강력한 힘의 밧줄이 카이난의 몸을 꽁꽁 옭아매었다. 꼬마 정령들을 묶은 것과 같은, 아니- 그 몇 배로 강한 마법의 밧줄에 묶여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카이난은 날카로운 항변을 노인에게 던졌다.

“너를 다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저 네가 날뛰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잠시만 참고 있으라는 뜻이다.”

“명하시는 바를 충실히 행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무얼 하실 생각인지 가르쳐....”

카이난의 항변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답으로 돌려받지 못했다. 대신 노인이 품에서 꺼낸 양피지를 펼치며 눈을 감고서 신비로운 믓삼어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쿠투 라이람...트발라스크 에로나난....”

“히가!”

카이난의 외침과 동시에 여덟 개의 수정구에서 강력한 빛의 기둥이 생겨나고, 허공에 사로잡힌 정령들의 비명이 높아진다.

“히가, 그러지 마세요! 정령들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카이난은 흘러나오는 믓삼어에 귀를 의심하며 소리쳤다.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믓삼어는 평소 그들이 하는 기도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단어와 발음이었다. 그것은 배울 때조차도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강력한 금기>라는 경고가 따라붙었던, 순수한 생명을 담보로 소망을 이루는 암흑의 영역에 속한 단어였다.

....정령들을 죽일 작정이야!

카이난은 몸부림을 칠수록 육체를 옭아매어오는 마법의 밧줄에 온 몸을 뒤틀어 저항을 하면서도 절망적인 시선으로 허우적거리며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는 가여운 정령들을 올려다보았다.

무력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육체적인 강한 힘은 마법의 힘 앞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카이난이 힘을 보탠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마력의 기둥은 여인을 둘러싼 정령진에 힘을 보태고 곧 하얀 월광암으로 깎아 만든 홀의 천장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인간 사내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비명 – 죽음을 맞이하는 정령들의 비명이 그의 유난히 발달된 고막을 찢을 듯이 뒤흔든다.

“그만! 히가, 그만!”

온 몸이 결박을 당하여 귀를 막을 수도 없는 카이난은 바닥을 구르며 머릿속까지 울리는 고통의 비명에 함께 비명을 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월광암의 천장에 떠오르듯이 나타난 거대한 사내의 그림자는 손을 뻗어 정령진의 중앙에 자리하고 앉은 여인의 – 왕비 아인로테의 몸을 감싸 안더니 곧장 그녀의 뱃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이 조금 떨리는 가 싶더니 마지막 힘을 짜내듯이 한층 새된 목소리가 소리를 높인다.

“킬데라티아 아르고난 쥬데, 쥬데 –펠리오스 세로이무스 – 쥬데, 이데오 쥬데!”

“젠장! 빌어먹을!”

그림자가 왕비의 뱃속을 파고드는 것과 함께 파스스..... 빛이 나는 가루가 되어 허공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정령들의 산화(散華)에 그는 알고있는 모든 욕설을 흘려내었다.

“미쳤어요 - 히가! 이건 미친 짓입니다!”

노인이 행한 주술은 잔혹하고 비열한 행위였다. 그것은 정령사제로서는 있을 수 없는 – 암흑의 경계에 선 힘을 끌어와 행한 금기의 주술이었다.

“대체 왜....”

어느새 눈가를 적시고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로 카이난은 힘의 소모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주저앉는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태어나지도 못한 아기에게 이 무슨 잔인한 짓을....”

“...욕을 하고 비난을 하려면 모두 나에게 해라....”

바닥에 주저앉아 새된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던 노인이 비처럼 쏟아지는 땀을 훔치며 후들거리는 몸을 움직여 정령진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암흑의 정령술을 한 몸으로 받은 왕비가 베일이 벗겨진 채 혼절해 있다.

“왕비님.... 아인로테님... 무사하십니까?”

“...끝이 난 것인가요?”

왕비의 몸을 안아 올리는 노인의 품에서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힘겹게 쓸어올리며 한결 기운이 약해진 목소리가 들린다. 카이난은 서서히 힘이 사라져가는 마법의 밧줄을 자신의 기력으로 단숨에 뜯어버리고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싸늘한 –기력을 잃어 파리한 낯빛을 하고 있음에도 소름이 돋도록 차갑고 아름다운 왕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색의 달님>이라고 그녀의 시녀인 일레이네는 표현을 했었다.

확실히 눈이 부시게 화려한 금발을 흩뜨리고 있는 그녀는 달님이라는 표현이 떠오를 만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너무도 차가워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이전에 저어하는 마음이 먼저 들 정도라고 카이난은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 차가운 눈동자에 기묘한 열기를 돌려받으며 왕비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성공인 것이지요, 히가.레이온? 나는 느꼈어요... 틀림이 없는 나의 펠리오스... 그 분을 느꼈어요. 그 분이 나에게로 들어온 것이 확실하지요?”

“...태중의 생명을 죽음의 세계로 쫓아내어 버리고서 말이지요?”

노인보다 앞서서 카이난이 확신에 찬 물음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에 찬 여인을 향한, 그리고 노인을 향한 의심과 혐오가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기를 죽여 버리다니, 너무도 잔혹한 처사입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까?”

“무엇을 위해서라니? 그대는 이상한 것을 묻는군.”

명백한 비난을 담은 카이난의 물음이 기분을 거스른 듯 열기를 담고 빛이 나던 눈동자에 싸늘한 냉기를 돌려받으며 왕비가 노인의 몸을 밀치고 일어나 앉아 자랑스럽게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를 감싸 안았다.

“보다시피 내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서지. 당연하지 않은가? 평생을 사랑해온 남편을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을 빼앗긴 미력한 여인이 순순히 원수의 아이를 낳으리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대, 하이크란트는 그렇게나 생각이 미련하고 포기가 빠르니 가축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멸망의 길을 순순히 밟고만 있는 것이야”

-알고 있어?

카이난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노인에게로 향했다. 그가 말을 한 것인가?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인 자신의 정체를 이 왕비에게는 밝혔더란 말인가?

“...너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카이난. 하지만 이것은 모두 너와 너의 고향을 되찾기 위한 일이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왕비의 기력이 달리는 신체를 살피던 노인이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이것은 너의 권리야. 비록 하이크란트는 멸종의 길에 들어섰고 아름다운 얼음의 왕국 하겔란스트는 멸망했지만....희망은 실낱처럼 미약하나마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위하여... 오로지 네가 되찾을 너의 권리를 위하여 손을 더럽히는 것이다.”

“히가....”

카이난은 원망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의문으로 차오르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서 노인의 호칭을 흘려 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체 그가 왜? 왜 이렇게까지 하이크란트의 생존자 한 명을 위하여 더러운 암흑 정령술까지 행하고 있단 말인가?

“뱃속의 아기님의 영혼을 죽이고서 몸을 차지한 이는 누구입니까? 펠리오스라고 하셨지요? 그 펠리오스가 제가 아는 인물이 맞는 것입니까?”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다.

카이난은 자신이 알고 있는 <펠리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단 한 명의 인물을 (그것은 직접 본 것도 아닌 이 나라의 승리의 역사를 위해 쓰인 패배자의 이름이었다.) 떠올리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죽은 이를 사자의 세계에서 불러내어 잉태된 아기의 몸에 깃들게 하다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는 계신 겁니까? 게다가 히가가 행하신 정령술은 무려 성장의 속도를 무시한.....”

“1, 2년.... 길어도 3년 안에는 아기의 몸을 찢고서 성체가 몸을 일으키겠지. 그래, 그러한 주술이었다.”

“저 수많은 정령들을 죽이시면서 까지.... 죽은 왕을 되살렸다는 뜻입니까?”

“무사히 탄생만 한다면 그리 되겠지.”

둥글게 솟아오른 배를 사랑스럽게 감싸며 왕비가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때가 오면, 이 허울 좋은 원수의 육체를 찢고 진짜 나의 왕이 돌아오시면 이 나라의 종말이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한 병력도 멸망한 나의 쿠드론 땅에서 집결을 하고 있지. 그때가 오면.... 저 더럽고 비열한 페테브란트의 왕, 크세투스의 목을 치는 날이 오면 나는 나의 고국을, 그대는 그대의 고향을 되찾을 것이다.”

“나의 고향이라고요!”

카이난은 허황된 희망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계획과 꿈에 절망적으로 냉소를 날렸다.

“나는 고향을 알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고향, 고국이 무슨 소용이 있지요? 하이크란트는 멸종했습니다. 사내는 모두 거세가 되어 늙어가고 있고 여자는 모조리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고향을 되찾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요?”

“페테브란트의 노예들로도 고향은 재건할 수 있다.”

번뜩, 냉소가 가득한 카이난을 향하여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일침을 가하며 노인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비록 원수의 땅의 백성들이지만 멸망한 그들을 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고향은 재건될 수 있다. 그리고 하이크란트의 희망은 네가 나의 스승, 히가.나드리얀을 뵙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야. 이것은 네 권리다, 카이난 –고향의 재건은 너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그 날을 위하여 나는 너를 지켜온 것이다. 너의 의무에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대체 히가에게 하이크란트가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까지 멸망한 나라와 종족에게 집착을 하는 것입니까? 대체 왜 저를.... 그저 한 명의 하이크란트에게 이렇게까지 무거운 짐을 지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이런....이런 끔찍한 살인까지 저지르면서 대체 어째서.....?”

“내가 하이크란트니까!”

버럭,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일갈이 월광암과 대리석의 공간을 퍼져 나간다.

그리고 내려앉는 무거운 충격의 침묵 속에 노인은 손을 뻗어 지친 왕비의 몸을 깊은 잠으로 이끌었다.

“...하이크...란트라고요? ...히가가? 그런...? 어떻게 그런...?”

한참을 멍하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이난은 정령의 잠에 빠져쓰러지는 왕비를 바닥에 눕히는 노인의 마르고 평범한 체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을 흘려내었다.

너무도 큰 충격과 혼란으로 말이 조리 있게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런 카이난의 굳은 표정을 차분히 올려다보며 노인은 우울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네가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내 모습 어디에도 하이크란트는 없지... 그래, 없다. 이 평범한 외모와 능력... 칸시르에 불과한 나에게는 하이크란트의 강인함을 기대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그래도 종족과 나라를 향한 내 충성심은 오직 하나였다.”

-칸시르.

너무도 낯설게 흘러나오는 단어에 카이난은 눈만 껌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머릿속에 무수한 지식을 담고 있는 카이난으로서도 언뜻 떠오르지 않는 –스쳐가듯 머릿속에 집어넣은 지식에 불과한 단어였다.

과거, 광활한 얼음의 평원을 지나 영구동토의 고원에 왕국의 터전을 마련한 하이크란트족은 상당히 고립된 국가였지만 자연환경이 주는 지형적 이점과 종족 개개인의 뛰어난 육체적 능력으로 타국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한다.

그런 국가의 유일한 고민은 혹독한 자연환경의 탓인지 종족의 특성 탓인지 인구가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명이 50대에 이르는 여성과는 달리 평균 수명이 삼십대 중반인 남성들은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 친척간의 근친혼이나 일처다부제를 유지하였음에도 인구는 만족스레 늘지를 않았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이방인 유입정책을 사용하여 혼혈을 통한 인구 증식을 꾀했지만... 과거, 하이크란트의 종족 기원 전설에 따르면 종족 전체에 내려진 태고의 초월체, 황금 거미의 저주 탓이었을까?

혼혈로 태어난 아이들은 외모도 육체적인 능력도 모두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부계나 모계 어느 쪽으로든 하이크란트의 특성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 부모의 특성만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렇게 하이크란트의 혈통을 이었음에도 그 능력까지 잇지 못한 이들을 가리켜 칸시르 –잇지 못한 자들- 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런... 평범한 아이들만 태어나서 하이크란트의 혼혈을 통한 인구 증식 계획은 곧 중단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내 나이가 몇 살인지를 잊은 거냐, 카이난? ...나는 초기 칸시르의 세대 중 한 명이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로 인해 다시금 노인의 왜소한 체구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노인은 힘에 부친 듯 긴 한숨을 흘려내며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커다란 카이난의 체구를 향해 선망의 눈길을 보내왔다.

“너와 같은 순수한 하이크란트의 존재를 내가 얼마나 부러워하고 열망했는지 너는 알지 못한다, 카이난.... 너를 가르치고 키우는 내내 얼마나 바라고 바랬었는지...내가 순수한 하이크란트였다면...나에게 너와 같은 힘과 능력이 주어졌더라면 저 뼈에 사무친 원수, 크세투스 놈의 머리를 분질러서 동족의 원수를 갚고야 말았을 텐데.”

“............”

“...하지만 헛된 망상이지. 내가 순수한 하이크란트였다면 진즉에 잡혀서 거세를 당하고 멍에를 끌면서 밭이나 가는 가축의 신세로 전락했을 테니까. 말도, 생각도...인간의 어떠한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가축이라 믿으며 늙어서...벌써 죽어 버렸겠지. 내가 이렇게 평범한 인간, 칸시르로 태어났기에 이 나이까지 살아서 정령술을 배우고 너를 가르치고 키우며... 이렇게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다니... 인생이란 얼마나 얄궂은 것이냐?”

“...........”

“너는 고귀한 혈통을 이어 받았다. 카이난.”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새로운 정보의 연속에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가슴이 무언가에 막힌 듯 답답해져 오는 가운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이난은 자신을 향한 노인의 새로운 발언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듣고 있는 거냐? 너는 고귀한 이의 피를 이어 받았다. 그러니 허튼 생각이나 물러터진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지 마라, 카이난 – 너는 권리와 의무를 타고 났고 그것을 이행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히가....”

“한때는 나도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너를 이곳 정령원에 숨겨두고 키우면서 언제나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정말 너를 키워서 나라를 되찾는 것이 가능한가? 만일 나라와 종족의 재기를 꿈꾸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저 원수 크세투스 왕을 죽여 복수라도 할 것인가? 아니...아니... 다 포기하고 그저 마지막 하이크란트가 될 너를 이 나라에서 탈출시켜 하다 못해 자유롭고 행복하게... 개인적인 행복이라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나의 도리가 아닐까....?”

“...히가...”

카이난은 절절하게 전해져오는 노인의 고뇌에 무겁게 그의 호칭을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 27년간, 그가 태어나고 자라오는 내내 이 노인은 그런 생각을 했더란 말인가? 우연히 지켜낸 자신의 생명 하나를 두고 그는 내내 지나치게 거대한 희망과 막막한 현실 앞에서 그렇게 마음을 저울질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무심한 세월만 흘러갔지... 네 나이가 스물하고도 중반을 넘어가자 나는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를 떠나보내려고 했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그렇게라도 살아보라고 너를 놓아주고 싶었다. 그러한 때에... 이 여인이 나타났다.”

“.............!”

카이난은 바닥에 떨어진 긴 베일을 들어 올려 깊은 잠에 빠진 왕비의 몸을 덮어주는 노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참담한 심정으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정령들의 죽음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혼이라도 내놓을 여인... 이 여인은 어디서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 생명을 희생시켜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암흑 정령술에 대해서 나에게 물어왔다. 그리고 약속을 하더군.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복수를 하고 이 나라를 멸망시켜 고국을 부활시킬 수 있다면 어떤 악의 늪에라도 발을 들이겠노라고...”

“그래서 말씀을 모두 해버리신 겁니까? 저의 정체와 당신이 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이루어 질 수 없는 소망을 말입니다.”

“뱃속의 아이가 탄생을 하면 더 이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아니다. 왕비는 약속을 지킬 거야. 배신에 대한 대가가 두렵다면 마땅히 그래야겠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아기를 죽여서 왕을 소생시키고 병력을 모아 이 나라를 멸망시킨다 한들....맙소사, 나라의 재기를 위해 또 한 나라를 멸망시켜야만 한다니, 이것은 피로 피를 씻는 어둠의 굴레입니다. 용서 받을 일이 아니에요!”

“용서...?”

노인은 복수의 잔혹함을 일깨우려는 카이난을 향해 짧은 냉소를 흘려 내었다. 그 냉소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가우며 음울했다.

“누구에게 용서를 바란다는 거냐? 응? 대체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거지? 저 증오스러운 크세투스 왕이 우리의 나라와 쿠드론을 멸망시킬 때 그 자는 대체 누구에게 용서를 구한거냐? 아무도 없어! 누구에게도 용서 따위는 구하지 않았단 말이다! 하물며 복수를 하는 우리가 대체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란 말이냐!”

“히가....!”

“물러가라, 카이난! 너의 나약한 칭얼거림이 나를 질리게 하는구나! 가서 네가 유일하게 인간으로 남은 하이크란트라는 사실을, 그 무거운 의미를 곱씹도록 해라!”

노인은 기력이 쇠한 육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동작으로 벌떡 몸을 일으키며 그를 향해 날카롭게 경고를 덧붙였다.

“하지만 잊지 마라, 너는 이 주술에 힘을 보태었다. 왕비의 시녀아이가 탐이 나서 말이다. 이제 너는 결코 이 의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제 떠나라, 멀리 떠나서 내가 오늘 행한 정령술의 완성을 지켜보아라. 그때가 되면 새로운 노예이자 백성들도, 고향도, 왕비의 시녀도 모두 네 것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나의 노고에 너도 감사를 하게 될 것이다!”

“...........!”

카이난은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왔다. 좁은 계단을 단 몇 걸음 만에 뛰어 올라 어두운 첨탑의 입구에 들어설 때 까지 그는 숨조차 쉬지 않았다.

그를 발견하고서 치르르르....떨리는 라벨렌들의 불안한 움직임이 <어째서 정령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느냐?>라는 비난어린 원망으로 느껴져 그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문을 열고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카이난님?”

“............!”

아름답고 둥근 달빛아래 눈이 부시게 빛을 발하는 월광암의 절벽, 그리고 주홍빛의 물결을 투명하게 쏟아내는 울라한 폭포수의 소리를 등에 지고서 그녀가 서 있었다.

선한 초록 눈동자에 놀라움과 염려를 동시에 담고 있는 소중한 그녀. 일레이네가.

“일레이네....”

“카이난님! 괜찮으세요? 세상에... 이렇게나 창백하시다니! 게다가 눈물....울고 계시잖아요?”

자신의 굳은 표정에 한달음에 달려와 턱으로 손을 뻗어오는 일레이네의 걱정 가득한 부름에 그는 쓰러지듯이 무릎을 꿇고서 팔을 뻗어 여린 그녀의 몸을 끌어 당겼다.

“왜 그러세요?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

어째서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그녀가 로투남의 성탑 앞에 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카이난은 안전한 피난처와도 같은 체온과 체취를 찾아 절망적으로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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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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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 – 공격(1) 24.09.18 2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6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7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6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5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6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6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5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8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7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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