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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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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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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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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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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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축복의 시간(1)

DUMMY


“빨리, 빨리 – 카이난 사제, 배급이 늦어지고 있지 않소!”

성마르게 터져 나오는 당번사제의 일갈에 커다란 나무판을 어깨에 짊어진 카이난은 서둘러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500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는, 장관이라면 장관인 풍경이지만 매일 네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보고 있자면 장관이라는 생각보다는 매번 먹여야 하는 입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먼저 나오는 풍경이기도 하다.

카이난은 내려놓은 나무판에서 두 마리 분의 염소 고기를 밀려드는 접시위에 배분하며 양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조절을 했다. 뭐, 매번 그가 이렇게 섬세하게 배분을 신경을 쓴다고 해도 한 입이라도 더 많아 보이는 접시는 반드시 약삭빠른 배식당번들이 자신들의 몫으로 따로 돌리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신성한 믓삼어를 공부하고 매일같이 기도를 하는 삶을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정령원 역시 인간이 모이는 곳이다. 하루 50시간에 겨우 네 번 제공되는 식사는 언제나 사람의 배를 굶주리게 만들기 마련이고 배가 고픈 인간은 한 입의 고기 덩어리 앞에서 양보와 자비의 미덕보다는 자기본위의 이익을 앞세우기 마련이었다.

“히가 레이온 드십니다.”

...히가.

기도를 낭독하는 대리석의 강단 위에서 들리는 낭독자의 목소리에 그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고위 사제들의 식사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히가.레이온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여전히 제대로 식사를 하고 있지 않는 모양의 노인은 깡마르고 초췌해 보인다. 왕비의 정령원 행차이후 한결 안정된 모습을 보이던 그는 최근 다시 어딘지 불안하고 예민해진 듯이 보였다. 그리고 보니 왕비일행이 곧 다시 정령원 행차를 하겠노라고 전령을 보내왔다고 하던데.

그 사실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의 고동을 억누르며 그는 저도 모르게 많이 담아버린 접시의 고기 조각을 황급히 덜어내었다.

진정해라, 진정해. 심장 – 그녀의 모습을 곧 다시 볼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 지금은 좀 진정을 해라. 배식시간에는 좀 배식에만 신경을 집중하라고!

물색을 모르게 뛰놀기 시작하는 스스로의 심장을 엄하게 나무라며 그는 한편으로 자신이 위화감을 느낀 부분에 슬쩍 이맛살을 접었다.

가만... 분명히 전에 로투남 성탑의 지하에서 히가의 상태가 극히 불안했을 때도 왕비님의 일행이 정령원을 방문했었지. 한 번도 연결해서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지만 설마 히가는 왕비님이 정령원을 방문할 때마다 이렇게 예민해지고 불안해하는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추측이야.

그는 자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의구심에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내었다.

그냥 우연이고 지나친 억측일 뿐이다. 무엇보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

왕비가 정령원을 찾는 것은 임신이 가지고 오는 마음의 불안과 육체의 흐트러진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요양을 위해서이다.

평소 독실한 국신교의 신들을 믿는 그녀가 정작 요양은 정령원을 찾는 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국신교가 있는 왕도를 떠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그리고 솔직하게 목소리를 높이자면 국신교보다는 훨씬 신성한 힘이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곳 에루나크 정령원을 찾는 것이 분명 마음의 평화를 찾기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평소 괴팍한 히가.레이온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는 지체 높은 왕비의 이러한 행차를 오히려 성가시게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 그래서 저렇게 예민해지는 것일까? 하지만 저 무시무시하다는 국왕 앞에서도 입 바른 소리를 곧잘 한다는 히가.레이온이 고작 그런 일로 예민하고 불안해한다고?

-아무래도 이 추측은 너무 억지스럽다.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자.

“모두 자리에 앉으셨습니까? 위대하신 엘샤.크라타페(정령교에서 말하는 물, 불, 바람, 대지의 4대 정령신을 통칭하는 명칭)의 축복아래 오늘의 운디나 (하루의 첫 번째 식사)를 시작합니다.”

...휴, 끝이 났다. 서기 사제가 눈치를 주기 전에 서둘러 조리장으로 돌아가자.

카이난은 배식이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 앉는 분위기 속에서 얼른 나무판을 챙겨서 식당의 벽 쪽으로 물러났다. 그가 조금이라도 미적거리면 모두가 불편해하므로 식사를 알리는 기도가 울리는 사이 벽의 그림자를 타고 식당을 벗어나며 카이난은 고위사제들의 식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홀쭉 마른 볼 근육을 움직이며 빵을 씹고 있는 히가.레이온의 깐깐해 보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의 빵에는 콘타오른이 특별히 말린 포도를 넣어서 구웠다. (오늘이 콘타오른의 수호정령인 만카르의 축일이기 때문이다.) 부디 히가가 맛있게 식사를 하기를.

-그렇다고는 해도 무척 바쁜 날의 연속이다.

조리장으로 돌아오며 카이난은 이맛살을 접고서 열심히 머릿속의 숫자를 셈해 보았다. 지난 한 달 하고도 37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을 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월동 준비에 분주했었다.

부족한 곡식을 수매하고 300마리가 넘는 양과 염소의 도축이 결정되었다. 젖소는 도축수량을 정하기 위해 몇날 며칠 동안 목장을 담당하는 사제와 요리장 콘타오른이 실랑이를 벌여야 했는데, 결국 <왕비 일행이 출산 때까지 한 번 더 이곳을 쳐들어오지 않소! 내 손가락을 잘라서 먹일까?>라는 콘타오른의 일갈이 먹혀들어서 젖소는 모두 70마리를 도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를 잇는 월동용 야채 저장, 겨우내 사용할 장작과 연료용 기름 구입, (물론 식용기름의 확보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맥주와 증류주를 제조하고 마지막으로 소금과 말린 생선들까지 잔뜩 사들이고 나서야 월동 준비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이난의 일이 끝이 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눈과 얼음의 계절은 그에게 겨울 폭풍을 대비한 정령원 곳곳의 수리와 겨울 야채들을 기르기 위한 밭갈이 작업을 요구했고, 사제들의 구두를 만들고 양피지를 제작하기 위한 무두질까지 모조리 그의 몫이었다.

오늘만 해도 서둘러 첫 번째 식사를 하고나면 며칠째 혼합액에 불려둔 짐승 가죽들을 꺼내어 털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루 종일 해야만 한다. 값이 비싼 양피지는 부족한 분은 구입을 하지만 정령원에서 자체 제작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어서 오게, 시장할 테니 일단 들지.”

식사를 위한 요리를 내어가고 나면 뒷정리가 잔뜩 남아있는 조리장이지만, 언제나처럼 ‘식사우선’을 외치며 콘타오른이 국자를 저어 감자와 빵가루가 듬뿍 들어간 스튜를 내밀어 온다.

카이난은 감사히 자신의 몫의 빵을 뜯으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의 기도 소리와 함께 언제나처럼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희한한 전갈이 마을로부터 왔더군.”

커다란 나무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절반 넘어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콘타오른이 입가를 훔치며 기도를 마치고서 수저를 드는 그를 향해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희한한 전갈이라니요?”

“왕도에서의 전갈이야. 우리 정령원에 신세를 졌다는 처녀라는데 <에루나크 정령원의 조리장 사제님께 – 휴가를 받았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일러주신 충고를 잘 기억합니다.>...또 뭐라더라? 어디 보자... <별의 날을 기억해 주세요.> 라는군.”

“...........!”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지 수도복의 주머니에서 나무껍질 조각을 꺼내어(양피지 대용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주로 마을 사람들이 사용한다.) 확인을 하며 콘타오른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것을 팔랑거려 보였다.

“우정국 전령을 통해 도착한 전갈인데 촌장이 내용을 받아 적었노라고 사냥꾼이 전해주더군. 그런데 정작 편지를 받는 장본인인 나는 왕도에 아는 사람이 없거든? 더군다나 나를 찾아오겠다는 처녀는 알지도 못한단 말일세. 알지도 못하는 처녀에게 충고를 한 기억은 더더욱 없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진즉에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카이난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무겁게 대답을 했다.

<만일 긴급한 연락을 해야 할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아무런 방법이 없나요?>라는 일레이네의 물음에 마지못해 조리장의 콘타오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물론, 함부로 연락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는데 설마 두 달도 못되어서 그녀가 <긴급한 연락>을 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네... 이러한 행동이 얼마나 자네의 신변을 위험하게 만드는지를 알고는 있겠지?”

“네. 죄송합니다. 사제님.”

“나중에 이야기하세.”

콘타오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을 하는 카이난의 어두운 표정과 말없이 음식을 입으로 나르고는 있지만 어찌할 수 없는 호기심에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예비 사제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더니 다시금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말을 아꼈다.

그러나 식사를 마무리하고 조리장의 뒷정리를 마친 카이난이 짐승의 가죽을 손질하기 위해 인적이 없는 무두장으로 향하자 그 뒤를 따라오며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제 단 둘이 되었으니 그 처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세나.”

“............”

땅을 파서 진흙을 발라 완성한 사각형의 구덩이 안에는 라임을 섞어서 만든 혼합물이 찰랑거리고 있다. 카이난은 그 속에 잠긴 젖은 가죽들을 끄집어내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틀에 고정을 시키며 허리춤에서 담배를 꺼내어 길다란 파이프에 채워 넣는 콘타오른을 돌아보았다.

아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담배까지 빼어 무는 것을 보니 자신과 일레이네에 관한 일을 낱낱이 듣기 전에는 물러갈 기색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에 한해서는 집요하다니까....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별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녀를 본 것은 왕비님이 처음 정령원을 찾아주시던 때입니다...”

“하아... 그것 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젖은 가죽의 한 면의 털을 칼로 밀어내는 작업을 하는 내내 그동안 그녀에게 가졌던 남모를 연정과 예기치 못한 만남, 그리고 재회의 약속에 이르는 모든 고백을 들은 콘타오른은 새삼 듣는 이가 없는지 주위를 살피며 긴 탄식의 한숨을 흘려 내었다. 그의 탄식과 함께 3대째 피우고 있는 담배 연기가 차가운 대기 속으로 흩어져 간다.

“사랑의 애타는 마음인 사라고나여, 여기, 당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내가 있나이다....”

콘타오른은 겨울의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자신의 담배 연기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쫓아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인간의 감정에서 한 발 떨어져서 살아가던 자네에게도 결국은 이러한 순간이 오고야 말았군. 하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데 어찌 인간의 감정에서 벗어나 생활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자네는 아직 젊으니...아니, 자네 종족의 수명을 생각하면 마냥 젊은 것도 아니지만...”

“............”

“자네도 알고 있지? 그 처녀에게 연심을 가진다고 한 들 허락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자네는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고 주어진 시간도 그리 많지는 않아. 그 생각을 하면 나도 심장이 오그라들지만 말이야.”

“잘...알고 있습니다.”

마음에 무거운 바위가 내려앉는 심정으로 카이난은 손에 들고 있던 작업 칼을 힘껏 쥐었다.

“...하다못해 자네에게 우리만큼의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나는 차라리 정령원과 이 나라를 벗어나 그 처녀와 함께 멀리 타국으로 도망을 가라는 조언이라도 하겠네마는... 그것이 히가의 뜻에 어긋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러라고 말하고 싶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카이난은 진심으로 콘타오른의 위험하고 불손한 발언에 감사의 말을 흘렸다. 자신조차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소망을 직접적으로 입에 올려준 그의 말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가슴을 울렸다.

그녀와 달아난다면... 이 나라를 벗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상을 향해서 함께 도망을 칠 수만 있다면... 아,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잔혹한 운명은 숨어 살아가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하이크란트 – 이제는 <크페스터스>라는 가축의 이름만이 주어진 존재. 보통의 인간들은 한참 힘을 쓰는 나이에 기력이 쇠해가는 짧은 수명이 그에게 주어진 거대한 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힘이 넘치고 있어. 아직은 젊음이 남아 있다고!

저도 모르게 칼자루가 부서지도록 칼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하며 카이난은 마음으로부터 운명에 강하게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은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단 말이야!

“어쨌거나 자네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만나러 온다니 예삿일은 아닌게로군. 심지어

몇 주 뒤면 다시금 왕비가 정령원에 행차를 할 텐데 그때까지도 기다릴 수 없는 긴급한 일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전갈이 알려주는 상황에 걱정이 고개를 든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겨서 그녀가 나를 찾아오겠다는 것일까? 그것도 일부러 휴가까지 내어서?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나로서는 자네가 외부에 더 드러나지 않도록 도울 수 밖에 없구먼... 하지만 보고는 올리겠네. 히가.레이온께서는 자네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셔야 하니까.”

마지막 뿜어 올린 연기를 손으로 저어 흩트리고서 파이프에서 담뱃재를 털어낸 콘타오른이 단호한 시선으로 카이난을 올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만일 히가께서 그 처녀와의 만남을 즉시 금지하시면 자네는 그 명령에 따라야만 할 것이야. 그것만큼은 나도 어찌할 수가 없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야.”

“사제님...?”

<공식적>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는 콘타오른의 발음에 카이난이 눈을 하릴없이 깜박이자 중년 사제의 굳어진 입가의 주름이 미소로 깊어졌다.

“사람의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네. 정령신 사라고나의 힘은 강력하고도 끈질기지. 한번 마음에 스며든 연심은 인력으로는 끊어낼 수가 없는 법이지 않나? 아무리 높으신 <히가>의 명령이래도 말이야.”

“사제님....”

“내 힘이라는 것이 대단할 것은 없지만 어쨌거나 입만은 굳게 닫아주겠네. 사랑의 불꽃이 자네를 태우는 동안에는 저항하지 말게. 저항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하하하, 좋은 일이야. 암. 누구에게든 사랑이 찾아온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고말고.”

사제의 발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세속적인 덕담을 남기고서 엉덩이를 툭툭 털며 콘타오른이 멀어져 간다.

카이난은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기쁨에 저도 모르게 멀어져가는 콘타오른의 뒷모습을 향해 두 손을 모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올 만큼 긴급한 상황에 대한 걱정이 앞서면서도 다시금 그 아름다운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곧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별의 날이면 그녀를 만날 수 있어.

이번 주의 별의 날일까? 아니면 다음 주의 별의 날일까? - 알 수는 없지만 별의 날이 오면 그는 로투남 성탑의 뒷 숲으로 찾아갈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아주 일찍 찾아들어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일레이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발음해 내었다.

차가운 겨울의 대기 속으로 속삭임과도 같은 이름이 달콤하게 흘러나와 퍼져 나간다. 카이난은 흠칫 어깨를 떨며 누가 들을세라 입술을 오므렸다.

하지만 입술에서 새어나온 이름은 마법처럼 그의 영혼을 감싸 안으며 입술을 저절로 움직였다.

“일레이네.....”

기다릴 수 없는 그리움이 아련한 아픔이 되어 심장을 찔러댄다. 이 순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왕도가 하늘벽 잉게라스 건너편의 멸망한 대지보다도 멀게만 느껴졌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나르고, 가축을 돌보고 끝없이 밀려오는 노동을 하면서도 카이난은 인내를 하고 또 인내를 했다.

첫 번째 별의 날은 허탕이었다. 로투남 성탑의 뒷길로 난 숲에서 밤이 새도록 기다려도 그녀는 오지를 않았다. 왕도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오지 못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는 새벽의 어둠이 물러갈 때까지 별을 헤아리며 그녀를 기다렸었다.

두 번째 별의 날에는 분명히 올 거야. - 아프도록 심장을 울려대는 그리움을 달래며 그는 하루하루의 시간을 새기듯이 견디어 내었다.

이럴 때는 생각 자체를 할 여유가 없도록 몸을 몰아붙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편으로는 <히가에게서 언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라는 불안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리장 사제 콘타오른의 보고가 올라갔음이 분명한대도 히가로부터는 아무런 명령이 떨어지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을 당장에 금한다는 명령을 각오했던 카이난으로서는 노인으로부터의 무관심을 기뻐해야하는 것인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외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을 칠 일인데 어째서 히가는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일까? 설마 나의 일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으리만치 다시 상태가 나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카이난 사제! 정신을 빼놓지 마시오! 지금 정신없는 것이 안보입니까?”

“죄송합니다, 사제님”

저도 모르게 고위사제들의 식탁으로 시선이 가는 그의 눈길에 당장에 당번 사제의 날카로운 면박이 돌아온다. 그는 얼른 눈을 내려 다시금 배식에 집중을 하며 히가의 창백하지만 평온한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기에는 지극히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은 손으로 밀가루만 이용해서 구운 하얀 빵을 뜯고 있었다. 고관대작이나 입에 넣을 고급 음식이지만 그에게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섭취하는 음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전혀 감흥이 없는 표정이다.

바삐 손을 놀려 쌓여있는 접시에 돼지고기를 올리고, 감자죽을 떠서 500명의 배를 채울 배식을 마치자 곧장 물러가라는 당변 사제의 눈치가 오늘따라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오늘은 다시금 맞이하는 별의 날 – 아, 시간의 정령신 일카베르여, 당신은 너무 더디게 저에게 오셨습니다.

서둘러 식당을 벗어나 조리장으로 돌아온 그는 다가온 기대감과 설렘으로 오늘의 마지막 식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식사시간은 고위 사제들에게만 주어질 야식뿐이고, 원래의 약속은 야식시간인 보레카가 끝난 다음에 숲에서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는 한 발 먼저 숲으로 갈 생각이었다.

보레카에 나갈 음식만 미리 준비를 한다면 달리 배식을 할 의무는 없으니 당번 사제들이 알아서 가져갈 것이다. 그 정도의 일은 기꺼이 콘타오른이 대신 해줄 것이니 자신은 적어도 두 시간은 앞당겨서 그녀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렴, 어두운 밤길, 그것도 처음 와보는 낯선 길을 찾아올 그녀를 위해 내가 길잡이가 되는 것이 더욱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안전한 방법이야.

그는 고위 사제들의 야식을 위해 간 고기에 밀을 섞어서 경단을 만들고 감자와 버터를 듬뿍 넣은 스튜를 끓이며 그녀가 걸어오게 될 경로를 궁리했다.

마을에서 걸어와도 최소한 2시간은 걸리는 길이다. 게다가 안전한 숲길이라고는 하지만 깊은 밤이라 그녀는 두렵고 불안할 지도 몰라. 차라리 내가 마중을 나가면?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 있으니 마을에 너무 접근을 하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마을 자경대의 순찰구역의 바깥에서 그녀를 마중하면 좋을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음식을 준비하는 손이 더욱 바빠진다. 그런 그의 바지런을 떠는 모습에 깊은 생각에 잠겨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던 콘타오른이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 원. 내가 그 냄비에다 독을 타도 자네는 알아차리지 못하겠구먼. 완전히 정신이 날아가 있어. 됐네, 됐어 – 가보게. 나머지는 내가 준비할 테니.”

“사제님...”

“부디 조심만 하게나. 자네를 숨겨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우리는 이 나라 왕의 분노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니 말일세.”

카이난의 손에서 커다란 국자를 빼앗아 냄비 속을 휘젓는 콘타오른의 혈색이 좋은 뺨이 걱정 탓인지, 일렁거리는 불꽃의 그림자 탓인지 한결 핼쑥해 보인다. 카이난은 그의 염려와 배려에 깊이 고개를 숙이고서 서둘러 조리장을 벗어났다.

만에 하나라도 누가 볼까 수도복에 달려있는 후드를 깊이 눌러쓴 그는 빠른 속도로 조리장의 담장을 넘고 정원의 담을 지나 울라한 폭포의 눈부신 하얀 절벽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보름달도 아니건만 하늘에 떠있는 환한 달빛을 받은 폭포물의 주홍빛과 하얀 절벽이 어둠을 물리치는 등불과 같이 떠올라있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그는 절벽을 가로질러 폭포수의 물을 통과한 다음 (덕분에 흠뻑 젖고 말았지만.) 성탑의 입구에 다다랐다.

이제 오솔길을 따라 뒤쪽의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계단을 따라 내려가 마을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올려다 본 하늘의 중심에는 길잡이 별인 마검(魔劍)자리의 손잡이 부분이 아직 세워져 있다. 서두른 덕에 그녀를 마중 갈 시간은 충분해.

“............!”

하지만 그가 계단을 따라 얼마간 내려가기도 전에 발달한 청각너머로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카이난은 제자리에서 펄떡 뛰어오르고 말았다.

어떡하지? 누군가 오고 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서 계단에서 폭포로 이어지는 절벽의 단면을 바라보았다. 이 부분은 돌출된 부분이 없어서 잡고 이동하거나 몸을 숨기기에도 용이하지가 않은데....?

-설마....?

생각지도 못한 인기척에 순간 당황을 했던 그는 그러나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발걸음이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가볍다는 사실에 어딘가 몸을 숨기려던 행동을 멈추고 더욱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온 신경을 집중해서 귀를 세우자 발걸음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가벼운 숨소리가 평소 산길을 걷는데 익숙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오고 있다. 정령원의 인물이라면 아래에서부터 성탑으로 올라올 리가 없고, 마을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산길에 헉헉거릴 정도로 연약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 남은 답은...

-일레이네!

그는 어쩌면 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상상을 떨쳐버리고서 서둘러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로 이어지는 숲에서 성탑으로 향하는 하얀 월광암의 계단이 마치 그녀에게로 이끌리는 그의 마음처럼 하얗게 떠올라 있다. 그리고 그 계단의 한 지점에 가벼운 숨을 차가운 대기에 흩뿌리며 두터운 망토로 몸을 감싼 그녀의 가냘픈 몸이 나타났다.

“어...어머나!”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다가오는 커다란 그림자에 그녀가 훌떡 놀라 자그마한 비명을 흘려낸다. 카이난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흘려 내었다.

“두려워 마십시오, 저입니다.”

“당연히 알았죠! 사제님처럼 크신 분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비명이 두려움이 아니라 반가움에서 터져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날듯이 망토자락을 팔랑거리며 그의 곁으로 뛰어 올랐다.

“서두르지 마세요. 오는 길이 낯설고 힘들었지요?”

자신의 품에 안길 듯이 반색을 하며 달려오는 일레이네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마주 내밀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반가움을 표현하자 그녀는 추위에 발갛게 얼은 뺨을 도리도리 저어 보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혀요, 마을을 벗어나는 숲길은 확실히 어두웠지만 길이 넓게 잘 닦여있는데다 폭포수의 주홍빛과 하얀 절벽이 마치 달의 궁전처럼 환하게 빛이 나고 있어서 길을 헤맬 걱정도 없었답니다. 계단이 많아서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사제님을 만나러 오는 길은 너무도 즐거운 길이었어요.”

...나를 만나러 오는 길....

달콤한 벌꿀처럼 귓가를 파고드는 그녀의 매혹적인 말에 심장이 녹아든다. 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목적에 신경을 집중하며 그는 진지하게 일레이네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먼 길을 감수하면서 까지 저를 만나야 할 일이란 긴급한 일이겠지요?”

“아.....”

그의 물음에 비로소 달빛처럼 환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번뇌가 담긴 그림자가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죄송해요. 너무도 혼란스럽고 걱정이 되는데 달리 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어서....”

그녀는 이렇게 운을 떼며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서 그에게 속삭였다.

“실은 왕비님...아인로테님의 일 때문에 저는 어찌해야 할 바를 알 수가 없어요. 사제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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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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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8화 – 공격(2) NEW 19시간 전 1 0 21쪽
28 27화 – 공격(1) 24.09.18 3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7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6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6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7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7 0 24쪽
»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6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9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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