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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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그림/삽화
판타.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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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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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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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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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 전조(前兆) (2)

DUMMY

“이제 좀 진정이 되세요?”

“.......네.”

카이난은 달이 동쪽으로 한참을 기울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일레이네가 이끄는 대로 숲으로 들어와 부드러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노랗게 색이 바래버린 풀잎의 향기를 얼마동안이나 맡고 있었던 것일까?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는 차가운 기온에도 그를 위하여 기꺼이 추위를 감내하며 무릎을 빌려준 일레이네는 카이난의 무거운 대답에 조그맣게 한숨을 흘리며 물음을 던졌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봐서는 안 되는 것인가요?”

“...........”

“자다가 놀래서 깨어났어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서운 꿈을 꾸었거든요. 아마도 시투람 샤먼이 무서운 표정으로 저를 윽박지르는 것 같은 꿈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하지만 도중에 깨어나는 바람에 저는 아인로테님이 시녀도 거느리지 않고서 몰래 침전을 빠져 나와 이곳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무릎에 누운 카이난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쓸어 넘겨주며 일레이네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차가운 대지에 하얀 김으로 흩뿌렸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너무도 은밀하게 움직이시는 왕비님의 태도가 수상쩍고 이상해서....저도 모르게 뒤를 따라왔는데 저 하얀 돌탑 안으로 들어가신 후 한참을 나오지 않으셔서 내심 불안했었지요. 저는 따라 들어갈 수 없었는데 아인로테님은 마치 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저 하얀 탑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요.”

“...로투남 성탑은 라벨렌... 정령들의 씨앗이 자라나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이 정령원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지요. 평소에는 히가.레이온만이 머무시는 장소라 허락되지 않은 이는 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곳을 카이난님은 출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네요? 그렇다면 카이난님은...”

일레이네가 망설이듯 말끝을 흐렸다. 마치 이어지는 질문으로 호기심을 드러내어도 좋은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힘든 모양이다.

“왕비님을 뵈었습니다.”

그녀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카이난은 총총히 뜬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비님은 정령술을 행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도와야만 했습니다.”

“정령술이라고요? 태중에 아기님이 계신데... 그것은 아기님과 왕비님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아닌가요?”

“.............”

본능적으로 아기와 왕비의 몸을 먼저 걱정하는 그녀의 반응에 카이난은 몸을 일으켰다. 위험한 일은 아니었냐고? 자칫 마력이 부족하거나 정령주문이 어설퍼서 주술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산모와 뱃속의 아기는 조각조각 나버렸을지도 모를 위험한 주술이었다. 하지만 저토록 커다란 초록의 눈동자에 순수한 염려를 담고 있는 그녀에게 어떻게 모든 사실을 말한단 말인가?

“...왕비님이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뱃속의 아기님...을 위하여.”

카이난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거짓말이자 동시에 진실인 기묘한 표현이다. 왕비는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를 죽였다. 정확하게는 그 어린 생명의 영혼을 죽여 버린 것이지. 그리고 그 비어버린 영혼의 공간에 죽어버린 자신의 남편의 영혼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아기의 육체는 멀쩡하지. 몇 년 후면 그 작은 육체를 찢어버리고 성체가 태어나겠지만 아직은 그 육체는 왕비와 이 나라 국왕의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왕비는, 이 무서운 정령술을 원했던 여인은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애지중지 하겠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려고 들 것이다. 자신의 자식이자 남편인 존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지....

“하여간 아인로테님은 무모하시다니까요!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아기를 그토록 원하지 않으시는 태도를 보이시더니 정작 아기님이 생기자 잠을 설칠 정도로 아기님에 대한 걱정만 하시는 거예요. 아기님이 무사히 태어나야만 한다며, 당신은 젊지가 않아서 두 번은 회임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유일한 기회라고 걱정을 하시면서요. 나이가 젊지 않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젊으신 나이인데 무얼 그리 겁을 내시는지... 우리 마을의 푸줏간의 안주인은 마흔도 되기 전에 아이를 열 네 명이나 낳았는데 말이에요.”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위하여 정령술까지 행하는 왕비의 노심초사에 절로 이맛살을 접으며 일레이네는 동정심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네요. 아인로테님은 오래전, 쿠드론의 왕비로써 왕자를 한 번 출산한 경험이 있지만 쿠드론의 어린 왕자님은 전쟁이 한창일 때, 도시를 침범했던 역병으로 인해서 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데요. 그러니 왕비님의 마음이 오죽하겠어요. 자식을 잃은 마음에 두 번 다시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가도 이렇게 막상 태중에 아기님이 자라나니 다시 잃을까봐 걱정이 앞서시는 거겠지요.”

...왕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오로지 복수심으로 이 나라 왕의 핏줄을 잇게 될 아기를 원하지 않았고 정작 임신을 하게 되자 복수에 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이기도 한 아기의 생명을 육체로부터 뜯어내어 버린 모질고도 무서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라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와 카이난은 애써 숨과 함께 말을 되삼켰다.

그런 그의 달빛에 비친 창백한 표정에 일레이네의 걱정스러운 손길이 와서 닿았다.

“평소 구릿빛의 피부가 오늘따라 무섭도록 창백하게 보이네요. 무척 기력이 소모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좀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자신의 뺨을 감싸는 차가운 일레이네의 손바닥에 깊은 입맞춤을 남기며 카이난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제가 오늘의 일을 도운 결과로 왕비님은 당신을 저에게 주신다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자유에요. 그러니 하루빨리 떠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자유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일레이네가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왕비님에게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어서 자유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청했을 때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셨는데.... 저는 태어나는 아기님을 위해 꼭 필요한 시녀라고... 최소한 아기님이 세 살이 되기 전에는 자유를 줄 수 없다고 하셨던 왕비님이 저의 자유를 허락하셨다고요?”

“그만큼 저의 도움이 필요하셨으니까요.”

카이난은 다시금 머릿속으로 밀려오는 가련한 정령들의 비명소리와 위협적으로 어른거리던 커다란 사내의 그림자를 애써 밀어내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당장 이 나라를 떠나기를 당신에게 청합니다, 일레이네... 저는 불안합니다. 평생 저의 목숨을 위협해 온 이 나라를 이토록 벗어나기를 원한 적이 없을 정도로 저는 하루빨리 이 나라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나라를 벗어나 자유롭게 마을과 거리를 거닐고 싶어요.”

“평생 이 나라가 당신의 목숨을 위협해 왔다고요? 그럼 왜 진즉에 떠나지 않으셨던 거예요? 이 나라를 벗어나는 것만으로 당신이 안전해 진다면 왜...?”

-지극히 타당한 물음에 카이난은 쓴웃음으로 그녀의 여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 역시 당신처럼 자유로운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정령원은 태어나면서부터 저를 지켜주는 방벽인 동시에 움직임을 제한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히가.레이온의 허락이 없는 한 저는 자유롭게 이곳을 떠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저도 이제는 자유입니다. 그러니 하루 빨리 이곳을 떠나서 남쪽나라 칼.이라베시로 떠나고 싶습니다.”

“옳으신 말씀이에요. 하지만... 저에게 조금만 말미를 주시면 안 되나요?”

카이난의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불안감을 미소로 걸러 받으며 일레이네가 그를 위로하듯이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날이 밝으면 저희는 다시 왕도로 돌아가요. 돌아가는 길만 3일이 걸리죠. 그러면 하루만 더...하루만 더 말미를 주시면 정들었던 사람들과 작별의 인사를 하고 싶어요. 그간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제가 지참금으로 챙겨 두었던 재산도 정리를 하고요. 무엇보다도 제가 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국신교 신전의 이만보르 사제님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하루만 저에게 말미를 주시면...”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일 당신이 왕도로 돌아가는 길을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카이난님이요? 하지만 카이난님은 사람들의 눈에 띄시면...”

깜짝 놀라 염려로 표정이 흐려지는 일레이네의 여린 등을 다독이며 그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산을 타고 다니면 됩니다. 느린 행렬에 비하면 길은 험해도 제 이동속도가 더 빠를 터이니 제가 먼저 왕도에 도착하겠지요. 그때는 남쪽에서 순례를 온 일가르 족인 것처럼 행세를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전에 그 백인장도 저를 일가르 족이라고 생각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이전의 카이난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과감함으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 역시 진짜 일가르 족을 본 일은 한번도 없지만 그때의 백인장은 하이크란트 –크페스터스를 부리고 있음에도 눈앞의 카이난이 크페스터스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즉, 다른 이들도 정령사제의 수도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인간의 언어조차 배우지 못한 가축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용기가 되어 주었다.

“지금의 저에게도 카이난님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실 수 없는 것인가요? 저는 카이난님이 실제로 어떤 종족인지도 알지 못해요. ...우리나라 사람은 확실히 아니잖아요?”

그를 향한 신뢰와 조심성을 가지고서도 역시 어쩔수 없는 호기심으로 말끔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일레이네의 시선에 그는 다시금 쓴 미소로 그녀의 작은 턱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 나라를 벗어나면...그때는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이든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답해드리지요.”

생긋 – 그의 대답에 안도와 믿음을 담은 미소가 돌아오며 그녀의 여린 몸이 더욱 그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 이 나라를 벗어나면....

그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릿속을 휘고 도는 정령들의 비명과 왕비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사내의 음울한 그림자 속에서 뚜렷한 희망을 보았다.

하루 빨리 이 나라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제 떠나려는 건가?”

“............!”

다음날 아침, 그로서는 마지막이 될 카모나(두 번째 식사시간)의 배식을 마치고 조리장으로 돌아온 카이난을 맞이하며 콘타오른이 던진 말에 그는 놀라 우뚝 멈추어 섰다.

“놀랄 일은 아니지. 히가께서 자네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야.”

국자로 커다란 솥을 휘저으며 음식의 간을 보던 콘타오른은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카이난을 향하여 씨익 – 특유의 두터운 입술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아침에 왕비 일행이 떠났는데도 자네가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기에 대충 짐작은 했었네. 그런데 왕비 일행과 함께 본인도 왕도로 가게 되었다고 히가께서 난데없이 전언을 주시지 않겠나? 자네를 보지 못하고 떠나니 대신 잘 배웅하라고 말일세. 그래서 나도 확신을 하게 되었지. 자네가 여기를 드디어 떠난다고 말이야.”

“...미리 말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긴, 미리 말해주었으면 좋았겠지. 누가 뭐래도 자네는 열 사람 이상의 몫을 하는 조리장의 소중한 인재였으니 말이야. 이제 자네가 떠나면 당장 세 번째 식사부터 어떻게 마련한담? 아, 신경 쓰지 말게. 자네가 떠난 후에야 총무사제에게 가서 말을 할 생각이니 말이야. 좀 똘똘한 녀석들로 인원을 보충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자, 들게. 먼 길을 가게 될테니 든든히 챙겨먹고 떠나야지.”

“사제님....”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이 사람아. 히가 말씀이 자네가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니라면서? 일이 잘되면 –그런데 일이 잘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자네는 아나?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던데. 하여간 몇 년 만 지나면 자네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시더군. 나는 그 동안 이 조리장을 잘 지키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몸 건강히 돌아오라고.”

커다란 그릇에 고기와 감자가 듬뿍 담긴 죽을 내려놓고 잘 구워진 염소고개를 두껍게 썰어 내어주며 콘타오른은 커다란 배를 두드려 대었다.

“어딜 가든지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이국의 맛있는 음식도 잘 기록해 두었다가 나에게 전해달라고. 내가 얼마나 이국의 음식에 관심이 많은지 자네는 잘 알고 있지?”

“네... 꼭 돌아와서 이국의 요리에 대해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별의 서운함을 대신하는 요리장 사제의 너스레에 눈물이 돌 것 같아 카이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지런히 음식을 입으로 쑤셔 넣었다.

새삼 태어나서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보금자리를 떠난다는, 그리고 익숙하고 정이 든 인물을 떠나간다는 고독함과 두려움이 몸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설렘 – 이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낯선 곳으로 향한다는 설렘, 오로지 책으로만 접하고 알았던 세상을 이제 곧 몸으로 접한다는 설렘이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잘 다녀오라고. 히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네가 돌아올 즈음에는 이 나라가 적어도 자네 같은 사람이 활보하고 다녀도 안전한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져보네.”

“...저도 그리되기를 희망합니다.”

차마 그러한 <자신이 활보하고 다녀도 안전한 나라>가 되기 위한 조건이 그 무서운 정령술의 결과일 것이라는 사실은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카이난은 그렇게만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 나라가 눈앞의 남자, 콘타오른의 나라라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왕비의 뱃속의 아기는 몇 살쯤에 숨겨진 정체를 드러낼까? 아기의 몸을 찢고 죽은 왕은 부활을 한다고 했다. 그 때를 대비하여 왕비는 멸망한 세력을 규합해 군대를 준비한다고 했지. 말로는 이 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의 목을 따서 복수를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것은 명백한 전쟁. 그 전쟁의 결과가 정말 그녀의 승리로 돌아갈 것인가?

만일 그녀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복수에 성공한다면, 그리하여 히가의 소망도 이루어져 자신과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족이 자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나라의 멸망이며 이 나라 백성들이 난민이 되고 노예가 된다는 뜻이다.

나는 일레이네의, 그리고 콘타오른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들을 노예의 신분으로 만들면서 까지 자유를 원하는 것일까? 기억에도 없는 내 나라, 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서?

-적어도 그러한 날이 온다면 일레이네도, 콘타오른도 나의 곁에서 함께 있기를 원한다.

카이난은 식사를 마친 다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는 요리장 사제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이 사람 좋은 요리장은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손을 흔들었지만 곧장 등을 돌려서 눈가의 눈물을 훔쳐 내었다.) 홀로 로투남 성탑으로 향했다.

거의 27년을 살아온 보금자리이건만 그가 가져갈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수도복 외에 여벌의 옷 한 벌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름다운 울라한 폭포가를 걷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로구나... 그는 월광암으로 이루어진 하얀 절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성탑의 문을 열었다.

짙은 어둠과 함께 치르르..... 떨리는 공기의 흔들림과 함께 눈부신 정령의 씨앗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이별입니다. 소중한 라벨렌들이여.”

어둠의 공간을 벌새의 날갯짓처럼 엷은 파장을 울리며 돌아다니는 빛의 구슬들을 향하여 카이난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색색의 빛으로 어둠을 가르고 날아다니는 정령의 씨앗들은 여전히 조금은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곳 지하에서 무수한 하급 정령들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직 30시간도 되기 전이다.

카이난은 좁고 깊은 계단을 내려가 주인이 부재중인 공간으로 들어섰다. 왕비 일행을 보좌해서 왕도로 향한 히가.레이온의 공간은 마치 물로 씻은 듯이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이난을 맞이하듯이 대리석의 제단위에 올라가 있는 회색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상자가 하나.

“.....이제는 너랑 오랜 여행을 같이 하겠구나.”

그는 금속의 상자뚜껑을 열고서 가지런히 누워있는 어린 소녀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은빛으로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소녀의 매끄러운 피부는 금세라도 살아서 몸을 일으킬 듯이 생생한 생기를 머금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발밑에 놓인 또 하나의 상자에는 카이난이 놀랄 만큼 많은 고액의 금화가 담겨 있다. (대륙 공용화폐인 세테르 금화가 언뜻 보아도 100개 이상 주머니에 담겨있다.) 칼.이라베시가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여비가 부족할 리는 없을 것 같다.

“알제하스 대륙의 전체 지도... 그리고 이건 히가.나드리얀에게 보내는 서신인가? 정령석도 열 개나 넣으시다니... 내가 용을 때려잡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히가는 참 이리 귀한 것을....”

상자를 들여다보던 카이난은 새삼 울컥 치솟아 오르는 감동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가운 배웅하나, 편지한 장 남기지 않았지만 저 무뚝뚝하고 무심한 노인은 이렇게나 그를 위해 세심한 여행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서둘러 왕도로 가자. 그리고 일레이네가 모두와 작별 인사를 마치는 것을 기다려 그녀와 함께 낯설지만 자유로운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다.

“좋아, 가자!”

그는 깃털처럼 가볍게만 느껴지는 상자를 안고는 곧장 계단을 올라 성탑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리운 정경 –주홍빛 물보라를 피어 올리는 아름다운 올라한 폭포와, 하얀 월광암의 절벽과 평화롭기 그지없는 정령원의 풍경을 눈으로 둘러본 다음 상자를 등에 지고서 씩씩하게 산을 타기 시작했다.

왕비 일행이 출발한 것이 거의 여섯 시간 앞이지만 서쪽 왕도로 향하는 산을 바로 뚫는 자신이 훨씬 앞질러 가게 될 것이다.

왕도에 도착하면 국신교라고 불리는 하르베스 교단의 신전을 찾아가자. 그리고 일레이네가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른다는 이만보르 사제를 찾아서 그녀를 만날 때 까지 신세를 지는 것이다. 그때까지 남쪽에서 온 일가르 족인 것처럼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행동을 해야지. ...괜찮아. 해낼 수 있어. 아무도 내가 크페스터스... 가축이 되어버린 하이크란트 족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는 못할 거야.

그는 암벽과 울창한 숲으로 들어서며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상황을 예행연습을 했다.

왕도에는 분명 나와 같은 동족이 또 있을 거야. 하이크란트의 나라 하겔란스트가 멸망을 한 다음, 살아남은 5살 미만의 사내들은 모조리 거세를 하고 왕도로 끌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히 왕도에는 나와 같은 동족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 ...백인장이 데리고 있던 동족처럼 말이야. 그러니 그들을 발견하더라도 놀란 표정이나 동정심이 어린 표정을 지어 보여서는 안 돼. 그냥 자연스럽게... 순례여행중인 이방인처럼 행동을 해야 해. 그래, 아예 이 나라 말을 사용하지 말자. 대륙 공용어만으로 말을 하는 거야. 그러면 모두가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믿게 될 거야. 일가르 족에 대해서 내가 읽은 책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일단 속담 몇 가지를 들먹이면.....?

“............!”

손을 뻗어 단단한 나무 등걸을 잡아 산을 타고 오르던 그의 눈빛이 단박에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길도 나지 않은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는 거대한 안개 사슴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눈동자가 평소의 맑은 밤색이 아닌 흐릿한 회색으로 변한 사슴의 머리와 뿔 사이에 반투명한 형태로 사령 케라론이 웅크리고 있다. 주홍빛의 홍채를 희번덕거리며 가련한 사슴의 육체에 기생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라져라-! 불길한 사령(邪靈)아!”

카이난은 자신의 희망과 설렘을 단박에 박살내어 버리는 사령의 존재에 날카롭게 주문을 외웠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주문과 동시에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화살처럼 사령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그리 피아!-불꽃의 화살이여, 적을 뚫어라!”

끼르르룩-!

단박에 머리를 꿰뚫려 불이 타오르는 사령으로 인해 곧 빙의되어진 사슴의 육체도 화염에 휩싸인다. 카이난은 손을 뻗어 고통 받고 있는 사슴의 목을 단숨에 꺾어 숨을 끊어주며 조용히 위령(慰靈)의 기도를 올렸다.

“하르이 윗캇셈. 울리히르 오르힘...”

불행하게도 사령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육체를 지배당해 온 사슴의 영혼을 자연으로 돌려놓으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사령으로 우울해진 마음으로 인해 발걸음까지 무겁게 느껴진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사령 케라론의 존재는 곧 이 대지가 불행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다. 대체 이 사령은 어디까지 영역을 퍼트리고 있는 것일까? 정령원을 둘러싼 이 신성한 대지에 무슨 일이 닥치려고 하는 것이지?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일까? 설마 저 불가침의 지역인 에루나크 정령원까지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게 된다는 뜻은 아닐 테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을 죄여오는 불길함을 애써 떨치며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낯설고 물 설은 몇 개의 산을 지나고 골짜기를 지나 그는 몇 개의 마을을 마주쳤지만 모두 멀리 돌아서 서쪽으로 – 더욱 서쪽으로 나아갔다.

낮에는 지도에 의지하고 밤에는 별자리에 의지하며 서쪽으로 나아가는 동안 두 번의 해가 지고 세 번째의 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세 번째의 해도 한참을 기울어 붉은 빛으로 대지를 물들이는 시간에, 그는 기억하는 한 다섯 번째의 마을을 피해서 넘은 산꼭대기에서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도시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발견해 온 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언뜻 보아도 화려한 건물과 성벽들, 그리고 멀리서 빛나는 거대한 내 성벽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도시다.

“도착한 건가...?”

그는 거대한 화강암의 대지처럼 펼쳐진 도시의 거대한 모습에 압도되어 중얼거리며 다시금 지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발아래에 펼쳐진 거대한 도시는 바로 인구 30만의 왕도 – 샴.베스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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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7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6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5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4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6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6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5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8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7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7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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