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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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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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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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DUMMY

2부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오란바이트는 대륙북부에서 중요한 상업도시였다.

대륙을 종, 횡단하는 대상들이 반드시 들렀다가는 이 도시에는 대륙 북부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커다란 교역소가 있었고 바다가 없음에도 도시는 대륙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넘쳐났다.

상인들이 넘쳐나면 숙박업소가 넘쳐나고, 물건이 넘쳐나고, 여인들이 넘쳐난다. 한마디로 이 곳은 흥이 있고, 돈이 있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사고도 충분히 넉넉한 도시였다.

그런 도시의 160 개가 넘는 여관 중 지극히 평범한 한 여관에 그녀는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어이쿠, 여기사님이시구려, 머무시려고? 날씨도 더운데 먼저 시원한 맥주 한잔 어떻습니까?”

보기에도 질릴 만큼 육중한 방패를 들고, 등에는 대검을, 허리에는 장검을 찬 그녀를 발견한 주인이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한다. 그녀는 방패를 테이블에 기대어 놓고서 자리에 앉으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을 와서 시장하니 식사도 부탁하오, 주인. 그리고 깨끗한 방을 준비해주시오. 목욕물도 함께.”

“네, 네 – 잘 찾아오셨습니다. 오란바이트에서 저희 집만큼 편안한 곳도 드물 겁니다. 목욕물에 향이 좋은 약초도 띄워드립죠.”

-가장 편안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넓은 곳이기는 하다.

지나치게 북적거리는 큰 길 가의 여관을 피해서 들어온지라 넓은 홀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주인이 손수 손님시중까지 들 여유가 있는 모양이다.

그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고수머리를 단단히 동여 묶은 여인 리즈베테는 주인이 가져다 놓은 신선한 거품이 가득한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 달디 달게 들이켰다.

그런 리즈베테의 타오르는 불길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그리고 화려한 금빛 날개가 아로새겨진 문양의 가죽흉갑과 통이 넓은 가죽치마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훑어본 주인은 잔이 비기 전에 얼른 다시 한 잔을 가져다 놓았다.

하루 종일 말을 타고 걸어온 길이 무려 40트리언(60킬로)이다. 큰 도시에 도착하면 휴식을 가질 요량으로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길을 온 그녀는 한 잔의 맥주를 순식간에 비워내고 두 번째 잔을 손에 쥔 다음에야 가벼운 한숨을 흘려 내었다.

몸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대도시의 여관으로 들어왔지만 마음은 그리 가볍지가 못하다.

대륙 북부로 접어든지 벌써 3주가 넘었건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따듯한 호밀 빵과 고기수프를 담아오는 주인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네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대륙북부는 전쟁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고 들었소. 들은 바로는 가드란 왕국이 페테브란트라는 나라의 침공으로 멸망을 했다고 들었는데...”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기사님 – 난리도 이런 난리가 어디 있답니까?”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입가와 미간에 동시에 주름을 잡으며 주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그럼에도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것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은 다음, 불만스레 입술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오란바이트가 4개의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이 도시를 둘러싼 그들에게 1/4씩 세금을 나누어 바치고 자유 계약 도시가 되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나라중 하나가 가드란 왕국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소.”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이제 가드란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주인은 본격적으로 맥주 통으로 달려가 자신의 몫의 맥주를 받아오더니 단숨에 잔을 기울여 꿀꺽꿀꺽 옅은 갈색의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커어... 한 잔 하지 않고는 입을 열기가 힘든 이야기입니다, 기사님. 가드란 왕국은 나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세금만 받으면 모든 자치권을 허용했으니 제법 좋은 주인이었지요. 도시가 커져갈수록 다른 나라들은 세금을 올리고 싶어 했지만 가드란은 도시의 편을 들어주었어요. 세금을 올리면 무역이 위축된다면서 말이지요.... 좋은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저 페테브란트가...”

생각만으로도 울분이 솟는지 주인은 다시 한 번 벌컥, 술을 삼키더니 내뱉듯이 저주의 말부터 흘려내었다.

“깡패같은 놈들! 여신의 저주를 받아라! -소문에 의하면 다짜고짜로 시비를 걸더랍니다. 지놈 나라의 왕비가 죽었다고 왕비를 넘기라고 했답니다. 듣자하니 가드란의 왕비님의 미모가 아주 대단하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페테브란트의 왕이라는 놈은 왕비를 잡아먹는 괴물 같은 놈이 틀림이 없어요. 무슨 왕비가 또 죽는답니까? 하긴, 어느 여자가 그런 괴물 놈을 버티겠어요? 하여간 그딴 시비를 거니 가드란의 왕이신 니코스님이 참고 있겠습니까? 참으면 사내가 아니지요!”

“...페테브란트는 최근 무섭게 세를 늘리는 나라라고 들었소. 몇 년 전만 해도 쿠드론을 멸망시키고 그 전에도 주변 국가들을 정복한 나라라고 들었는데...”

“크세투스라고, 왕이 아주 전쟁광이랍니다. 그리 크지는 않은 나라였는데 얼어붙은 동토의 빙원 국가...그, 하겔란스트 였던가? 최강의 전투종족인 하이크란트 족의 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아주 기세가 살아서는 그 뒤로 허구한 날 전쟁이나 일으키고 있지요. 이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믿을만한 소식통입니다만...그 2년 전에는 아주 미쳐서는 자기 나라 백성들을 수천 명이나 학살을 했데요.”

“자기 나라 백성을? 대체 왜?”

꿈틀, 붉은 눈썹이 일그러지며 리즈베테의 짙은 초록색 눈동자에 분노가 스쳐지나가자 기세가 오른 주인은 입에서 침을 튀기며 한층 큰 목소리로 욕설을 흘려 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썩은 돼지 같은 놈! 예언때문이랍니다, 예언 – 어느 뜨내기 점쟁이가 예언을 했다네요. <멸망한 여자가 낳은 애로 인해서 나라가 멸망한다>고 말입니다. 흥, 제 발이 저린 것이지요. 하필 그 썩을 왕 놈의 왕비가 이웃나라를 쳐서, 그것도 친구를 죽이고 빼앗아온 여자였거든요. 그런데 그 왕비가 복수를 꿈꾸며 임신을 한 다음 반역을 시도했다네요. 그 예언 한 마디에 글쎄, 왕도 내의 젖먹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답니다. 자식을 지키려고 저항하는 부모들을 죽여가면서 말이지요. 이건 뭐...사람 잡는 백정이 따로 없다니까요!”

“.............”

주인의 설명에 잡은 잔에 힘을 주며 리즈베테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고서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머릿속과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런 야수와도 같은 나라에게 짓밟힌 가드란 왕국. 그리고...

“가드란 왕은 최후까지 응전을 했다고 하는데... 남은 왕족의 소식은 소문으로라도 돌고 있지 않소? 예를 들어 왕비라든가...”

“아, 가드란 왕국의 소문말입니까요?”

페테브란트에 대한 험담만큼 흥미로운 질문이라는 듯 주인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리즈베테를 향해서 건배의 동작을 취해 보였다.

“거기에 대한 소문도 꽤나 무성하지요. 뭐, 듣자하니 전쟁 막바지에 그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있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최후까지 싸우자는 의견이랑 항복을 하고 속국이 되더라도 목숨은 보존하자는 무리랑...하여간 항복을 주장했던 그 비겁한 무리들은 왕도가 무너질 때 지들만 살려고 도망을 간 모양입디다. 하긴, 대부분이 외국출신의 귀족들이었으니 가드란 왕국에 의리나 충성심은 없었겠지요. 그....어디였더라? 왕비의 출신 나라가....?”

“....아바디스 왕국이오.”

“아, 맞아, 맞습니다. 아바디스 왕국. 잘 아시는군요. 기사님 – 남쪽에서 오신 분입니까? 하여간 왕비를 둘러싼 그 나라의 귀족들은 대부분 도망을 간 모양입니다. 듣자하니...그때 왕비도 함께 탈출을 했다고 하던데...”

“역시! 그 행방에 대해서는?”

“행방이야 모르지요. 페테브란트의 영역권을 벗어나서 진즉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

리즈베테는 굳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어두워진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주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급격한 변화를 맞은 자신들의 상황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쨌거나 가드란 왕국이 멸망하는 바람에 페테브란트는 우리 도시에 대한 새로운 주인 중 한명이 되어 버렸어요.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세금을 요구하는 모양입니다. 심지어 다른 나라에 바치던 세금까지 몽땅 자신들에게 바치라는 거예요. 미친 소리지요. 그래서 지금 다른 3국이 연합을 해서 페테브란트의 요구에 맞서고 있는데... 불안해 죽겠습니다요. 이러다가 전쟁이라도 터지면 저희 도시는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되고 맙니다. 상인과 여행객들의 발길이 뚝 떨어지겠지요. 3국 연합이 이기면 다행이겠지만 만일 지기라도 한다면...으으으.....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페테브란트의 속주도시가 된다니... 그럼 우리 도시의 자치권은 끝장이라구요!”

“..............”

“거기다 뻔뻔스럽게 그 망할 페테브란트의 왕이 우리 도시를 시찰 오겠다고 합니다, 하! 시찰이라니... 아주 주인행세를 하려고 드는 것이지요. 우리 도시는 자유도시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계약을 맺음으로써 세금을 바치는 것인데 그 작자는 우리를 속주도시 취급을 하고 있어요....”

리즈베테는 이어지는 주인의 푸념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도 왕비의 행방을 모른다... 라는 사실이 마음에 묵직한 돌덩어리처럼 무겁게 내려 앉아 대단히 시장했음에도 눈앞의 따듯한 식사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먹어야 해. 먹고 쉬어서 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

그녀는 내키지 않은 손으로 스푼을 들고 고기가 듬뿍 들어간 수프를 입으로 가져가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적어도 귀족들이 함께 탈출을 했다면 발리아나님은 혼자가 아니야. 그 분이 이 거친 세상을 홀로 떠돌고 있다거나 페테브란트의 군대에게 붙잡혔다는 끔찍한 소식은 아직 없는 것이니 빨리 체력을 회복해서 행방을 더 알아보자. 이 거대한 도시에는 온갖 소문이 흘러들고 있으니 분명히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부지런히 빵을 뜯고 수프를 들이키며 그녀가 주린 배를 든든하게 채워가는 동안, 바깥에서는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일까, 제법 왁자한 웃음소리와 박수소리도 함께 들려오고 있다.

“뭐지? 유랑 악단이라도 들린 건가?”

주인 역시 호기심이 솟았는지 고개를 바깥으로 빼더니 ‘하하 -’ 라는 웃음소리와 함께 아예 자리를 비워 버린다.

비로소 채워진 위장에 만족스레 배를 두드린 리즈베테는 몸을 일으켜 사라진 주인을 찾아 문가를 나섰다. 목욕물을 준비하고 방을 안내해줄 다른 점원이 보이지 않는 터라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악단? 아니, 무희인가?

작은 우물이 있는 마당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벌써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러나 흥겹고 이국적인 (사실은 낯선...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녀로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묘한 음률이다.) 음악소리는 울리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악사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런 표현은 상당히 억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지금 마당을 울리는 음악소리는 그 중앙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무희 본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휙-휙 – 잘한다, 최고다!”

“아주 솜씨가 좋은 무희구먼. 이렇게 신기한 춤은 처음 구경한다고!”

“...........!”

리즈베테는 사람들의 칭찬과 환호에 춤을 추면서 활짝 미소를 짓는 무희를 발견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무희는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어린 소녀였다.

눈이 시리도록 하얗고 얇은 의상을 몸에 걸치고 햇볕을 받아 까마귀의 날개처럼 반짝거리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그 소녀의 머리는 열 사람 분의 머리털을 합친 양보다 많아 보였다.) 높이 올려 묶은 소녀는 빙글빙글 제 자리에서 돌며 신발을 신지 않은 다리를 높이 차 올렸다. 소녀의 피부는 너무도 신비로운 색을 지니고 있었는데 핏기가 하나도 없는 흰색, 아니 은색처럼 보였다. 높이 올려 묶었음에도 발목에까지 내려와 흔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넓게 펼친 망토처럼 그녀의 주변에서 굽슬거렸다.

벌써 5개월째 여행을 하며 넓은 세상의 여러 종족을 만나왔던 리즈베테의 눈에도 소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모였다. 그런 낯선 외모의 소녀가 낯선 음악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제자리에서 뛰고,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다리를 차올리며 춤을 추고 있다.

바로 그때, 소녀의 입술에서 흥겨운 가락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지고 있었지, 오색의 유리구슬.

빨간 머리카락의 인형, 녹색 돌의 반지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모두 빼앗겼어. 모두 빼앗겼어.

이제 남은 것은 나무로 만든 칼, 나무로 만든 방패.

망할 놈의 아버지, 내 보물을 돌려줘.

엉엉거리고 우는 동안 신전의 종이 울리네. 종이 울리네.


“.............!”

리즈베테는 놀라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소녀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그 노래는 마치 리즈베테의 머리통을 두드리듯이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의 노래는 마치 그녀의 기억을 들여다본 것만 같은 가사를 담고 있었다. 오색의 유리구슬, 빨간 머리카락의 인형, 녹색 돌의 반지.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와아아아-”

“잘한다, 잘해 – 옛다, 받아라.”

리즈베테는 높아지는 박수와 멈춘 음악, 그리고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함박 머금고서 손을 흔드는 소녀를 바라보며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소녀를 향해 사방에서 날아든 동전이 순식간에 돌바닥을 덮는다. 리즈베테는 그 동전들에 1리야 은화를 한 닢 보태고서 등을 돌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어느 사이에 돌아온 것인지 주인도 방금 전의 음률을 흥얼거리며 행주를 들고 탁자를 닦고 있었다.

“아, 구경 잘하셨습니까? 목욕물은 준비 중입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어요?”

“아아. 식사는 만족했소. 그리고 맥주를 한 잔 더.....?”

자신을 향해 유쾌하게 말을 걸어오는 주인을 향해 추가 주문을 하려던 리즈베테는 순간, 불쑥 여관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의 모습에 말끝을 흐렸다.

모두의 환호 속에서 춤추고 노래를 하던 소녀는 곧장 쪼르르 달려와 자신의 키보다 높은 카운터에 두 개의 동전을 올려놓으며 맑고도 허스키한 음성으로 외쳤다.

“아저씨- 나 시원한 맥주!”

“그건 안 돼!”

저도 모르게 입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에?”

리즈베테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눈동자와 (그 눈동자는 언뜻 검은색으로 보였지만 때로는 회색으로, 청색으로 복잡하게 빛이 나고 있다.) 깜박거리는 긴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변명을 하듯이 말을 이었다.

“너는 술을 마시기에는 너무 어리잖느냐?‘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은 반박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나, 목이 마른데.”

소녀가 기묘하게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리즈베테는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주인. 이 아이가 마실만한 음료는 없소?”

“글쎄요... 여기는 어린아이를 위한 곳이 아니라서... 레몬과 사과를 갈아서 즙을 낼 수는 있습니다.”

“어떠냐? 그것이면 되겠니?”

“언니랑 같이 먹을 수 있다면 받아들일게요.”

냉큼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리즈베테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소녀가 한 아름의 동전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씀씀이가 좋네요. 다른 도시에서보다 두 배는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렇더구나. 나도 잠깐 보았는데 음악은 어디서 연주가 된 것이냐? 악사는 전혀 보이지 않던데 마치...네 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은 마법이냐?”

차곡차곡 동전을 쌓아서 금액을 계산하는 소녀의 손동작을 눈으로 쫓으며 그녀가 묻자 곧장 가느다란 팔을 불쑥 내밀며 소녀가 대답했다.

“이 팔찌에서 나는 음악소리에요. 내 팔찌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음악을 연주해요. 마법....이냐고 물으면 마법의 일종일까나? 어쨌거나 내 소중한 보물.”

“그렇겠구나. ...그런데 너 혼자서 이렇게 벌어서 생활을 하는 것이냐? 이렇게나 어린데...보통 고단한 삶이 아니로구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느냐? 형제자매는?”

“으으응~? 난 형제자매가 없어요. 하지만 아빠는 있는데.”

다시금 주인이 가져다 놓은 맥주잔을 탐이 나는 듯이 바라보며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빠, 벌써 3일째인데 돌아오지를 않네.”

“어린 너를 혼자 두고 아버지는 어디를 가신 것이냐? 혼자서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를 하게 만들다니.”

슬쩍...본능적으로 이맛살을 접으며 잔을 집어 드는 리즈베테에게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턱을 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일하러 갔어요. 일이 끝나면 여자들이랑 같이 자요. 대부분의 여자들이 아빠에게 안기고 싶어 하거든요.”

“풉... 콜록!”

입에 머금었던 맥주가 턱하니 목구멍에 걸려서 리즈베테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토해내고 말았다. 마침 도착한 자신의 몫의 과일즙을 받아드는 소녀의 너무도 태연자약한 말의 내용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린 딸은 길거리 공연을 하면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비라는 자는....대체 뭘 한다고?”

“아닌데? 아빠는 얌전하게 이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면서 돈도 주고 갔는데? 춤은 내가 추고 싶어서 춘 거예요. 돈은 보통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좋아하면서 던져 주는 거고.”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는 리즈베테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소녀는 씨익~ 조그만 입술로 알만하다는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아빠가 여자들을 먼저 꼬시지는 않아요. 대부분 여자들이 아빠에게 마구 꼬리를 흔들죠. 아빠는 그냥 여자들이 주는 것을 받기만해요. 음...아빠는 그게 많이 필요하거든요. 뭐라고 하지? 여자들의 어두운 기운? 어두운 마음? 미워하고 증오하는 그런 마음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소녀여, 대체 너의 아버지는 무얼 하는 이라는 것이냐?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애비라는 존재에 리즈베테는 본격적으로 이맛살을 접었다. 하지만 달게 과일즙을 목구멍으로 넘겨버린 소녀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물음을 듣는 둥 마는 둥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이 도시에서도 도착하자마자 여우처럼 생긴 아줌마가 아빠에게 접근을 했어요. 우리 아빠는 무지 눈에 띄는 외모를 하고 있으니까 당연하겠지만... <내 남편을 빼앗아간 파렴치한 년에게 복수를 하고 싶으니 도와주세요. 정령사님>이라고 그 아줌마가 아빠를 데리고 간 것이 3일 전이거든요? 보통 그런 간단한 일이라면 하루 만에 해결을 할 텐데... 아빠가 이렇게 늦는 일은 잘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정령사? 너의 아버지가 정령사라는 말이냐?”

“설마 그 여우같이 생긴 아줌마가 아빠를 홀라당 잡아먹은 것은 아니겠죠? 아빠를 보는 눈이 탐스러운 요리를 앞에 둔 굶주린 먹보처럼 아주 게걸스럽게 불타오르고 있던데.”

“너는 참 어린 아이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나이에 비하여 어른의 언변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는 소녀의 이마를 주의를 주듯이 가볍게 손가락으로 찌르며 리즈베테는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어쨌거나 네가 이 여관에 머물고 있다니 안심이로구나.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너무 나돌아 다니지 않도록 하렴. 너처럼 어린아이가 낯선 도시에서 길이라도 헤매게 되면 걱정이니까. 나는 이만 올라가마.”

“저 무거운 것들이 전부 언니꺼? 언니는 무지 힘이 세구나.... 아, 아빠!”

탁자의 한 견에 기대어 둔 육중한 방패와 대검을 둘러메는 리즈베테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흘려내던 소녀가 갑자기 폴짝 자리에서 뛰어내렸다.

“.............!”

소녀의 반색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리즈베테는 여관으로 들어서는 거친 회색의 수도복을 입은 남자의 커다란 덩치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눈에 띄는 외모>라는 소녀의 표현 그대로 단정하고 미려한 얼굴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비록 그 잘생긴 얼굴이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표정이 없고 우울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늦었잖아, 아빠, 일은 다 해결한 거야? 벌써 해가 지고 있잖아. 같이 밥을 먹게 일찍 좀 다니라니깐! 어차피 밤에는 또 여자를 만나러 나갈 거잖아.”

“............”

한달음에 남자의 곁으로 다가간 소녀가 잔소리부터 늘어놓았지만 아빠라는 남자는 말없이 자리에 앉더니 맥주를 한 잔 청할 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혀 닮지 않은 부녀지간이로군.

리즈베테는 짙은 검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어디 한군데 닮은 곳이라는 보이지 않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어디선가 나타난 점원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소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참, 언니, 언니! 언니 이름이 뭐예요? 뭐라고 부르면 되요?”

소녀의 부름에 비로소 그녀의 존재를 인지한 남자가 고개를 들어 반응을 한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움찔, 그의 청남색 눈동자가 꿈틀거리며 굳어버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리즈베테는 본능적으로 반발감이 솟아올랐다.

뭔가, 저 사내는? 대체 사람의 얼굴을 보고서 왜 저렇게 반응을 하는 것인가? 마치 죽은 자를 마주한 것 같군.

“내 이름은 리즈베테라고 한다. 그러는 너는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

재빨리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해 버리는 남자의 반응에 더욱 솟구치는 반발심을 눌러 삭이며 리즈베테는 소녀를 향해 대답을 했다. 그러자 반짝, 마치 검은 밤하늘에 별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눈을 빛내며 소녀의 눈동자가 미소로 가늘어졌다.

“힙투비! 아빠는 나를 힙투비라고 불러요.”

“참 묘한 이름이구나. 힙투비 – 잘 자거라.”

소녀의 이름에 본능적으로 다시금 사내를 바라보며 그녀는 미소로 답하고서 다시 계단을 올랐다.

어린 여자아이의 이름이 <어린 여자 아이>라는 뜻이라니, 저 아비라는 작자는 딸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성의도 보인 것 같지가 않다.

“생긴 것만 멀끔해봤자... 사내가 얼굴값을 해서 무엇에 써?”

그녀는 자신을 향해 뚜렷하게 굳어지던 남자의 청남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나직하게 혀를 차고서 자신의 침실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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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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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8화 – 공격(2) NEW 18시간 전 1 0 21쪽
28 27화 – 공격(1) 24.09.18 2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6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6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5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6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6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5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8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7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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