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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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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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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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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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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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DUMMY

퍼억-!

벌써 몇 대째의 화살일까?

카이난은 세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날아와 자신의 몸에 박히는 화살이 주는 고통에 숨을 삼키며 정원을 벗어나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마차와 야외 화덕이 줄을 지어 있는 곳,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더미와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한 샘가가 조성되어 있는 곳. 그는 드디어 찾은 조리장으로 짐작이 되는 건물의 문을 단숨에 부수고 달려 들어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바닥을 시선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찾는 물체가 실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분명 후원에 있으리라.

시체를 둘러메고서 나타난 그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커다란 화덕 앞에 앉아서 꾸벅거리면서 졸고 있던 당번들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에게 하수도로 통하는 입구의 위치를 묻고 싶었지만 그들이 자신의 행방을 병사들에게 일러바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카이난은 건물의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커다란 우물이 있는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아 우물이 있는 뒷마당의 가장 구석진 곳에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문이 보인다. 지하로 통하는 문이다. 철제 사다리를 타고 더러운 오수가 흐르는 좁은 하수도 바닥으로 내려간 그는 참았던 고통의 신음소리를 흘려 내었다.

“으.....윽.....”

등과 다리에 와 박힌 화살을 (전부 해서 여섯 대였다.) 모조리 뽑아낸 카이난은 거친 한 겹의 수도복을 더듬었다. 화살에 입은 상처는 사실 괴승 시투람의 암흑술에 비하면 대단할 것도 없는 상처였다. 시투람의 암흑술은 강한 독기를 지니고서 강철 같은 카이난의 피부를 가뭄의 대지처럼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 갈라진 상처마다 흘러나오는 출혈의 양은 결코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었다.

...이런 지금의 내 몰골이 일레이네를 겁주지는 말아야 할 텐데.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한없이 험해져 있을 것이 분명한 자신의 외모가 사랑하는 연인을 겁먹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동시에 애써 누르고 있던 불안이 되살아난다.

...지금쯤 그녀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무사히 신전으로 숨어들었다면 분명히 이만보르 사제가 안전하게 피신처를 마련해 주었을 텐데. 하지만 만일 아직 신전으로 숨어들지 못했다면 병사들의 매서운 눈을 어떻게 피하고 있을까? 저 백인장의 말로는 왕도의 아기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분명 아기를 데리고 있는 여인은 그들의 첫 번째 목표물이 되었을 텐데 그녀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버티어 내고 있을까?

“............!”

입을 벌리고 붉은 선혈을 토해내고 있는 상처를 회복술로 억누르며 손을 뻗어 차가운 주검으로 변해있는 노인의 시신을 어깨에 짊어진 그는 그 대답을 몇 발자국 걷지 않아서 얻을 수 있었다.

....핏자국. 자신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핏자국이 있다!

그는 군데군데 뚫려 창백한 달빛이 희미하게 새어들고 있는 어두운 하수도의 바닥에 뚜렷하게 나 있는 핏자국을 손으로 더듬었다.

아직 채 굳지 않은 피가 떨리는 손끝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이 피가 만일 그녀의 것이라면.....

순식간에 쿵쾅거리는 심장이 공포로 미친 듯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그녀는 어린 시절, 왕궁의 부엌에서 처음 일을 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조리장의 하수구를 탈출구로 생각했음이 틀림이 없다. 그리고 분명 자신처럼 그 과정에서 끈질긴 추격을 당했으리라.

-그녀는 상처를 입었어!

카이난은 자신의 부상도 잊고서 어두운 하수도 밑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깨에 짊어진 노인의 주검이 허공 속에 팔다리가 흔들릴 정도로 맹렬하게 지하를 달리며 그는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디를, 대체 얼마나 다친 것일까? 저렇게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의 양이라면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닐 텐데.... 세상에! 에스투람! 세상의 모든 정령신들이여. 그녀를 보호해 주소서! 저에 대한 마지막 수호까지도 모두 거두어 오직 그녀를 보호하소서!

육체를 파고드는 모든 고통을 간절한 기도로 바꾸며 지하를 내달린 카이난은 이윽고 드러나는 사다리에 조심스레 그것을 올라 머리위의 두터운 문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확인했다. 자신의 소망이,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세상은 자신의 마지막 기억과 너무도 확연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 그가 하르베스 교단의 신전을 벗어나 왕궁으로 내달렸을 때만 해도 세상은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불빛으로 빛이 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넓은 거리를 평온하게 오가고 있었다.

밤은 아직 푸른빛으로 희미하게 서쪽 끝에 남아서 밤새 안녕을 고하며 사라진 태양을 그리워하고 있었고 밤의 정령신은 눈부신 별들과 함께 그 검은 망토를 도시에 내리고 있었다.

그래, 도시는....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평화로웠는데....

“꺄아아악- 안 돼요! 안 됩니다, 안 돼요!”

가지런하고 단단한 포석이 깔린 도시의 한 귀퉁이의 하수구 문을 열고 그가 도시로 몸을 드러내는 동시에 불을 밝힌 골목의 한 쪽에서 울부짖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반대편 골목에서도 분노에 찬 남자의 항변이 터져 나왔다.

“내 딸을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야 할 거다, 이놈들아! 이 미친 왕의 개들아!”

“안 돼...안 돼...아아악!”

가족을 지키려고 병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남자의 노기어린 목소리에 뒤섞여 울부짖던 여인의 비명소리가 곧 죽음의 그것으로 바뀐다.

동시에 맞은 편 골목에서도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서두르라고 호통을 치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장 남성의 비명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윽고 카이난이 숨어든 골목의 그림자 사이로 한 떼의 병사들이 커다란 주머니를 끌며 나타나 벽에 붙은 그의 앞을 지나간다.

커다란 삼베 자루...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이 무나 양배추가 아니라는 사실에 카이난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삼키며 바짝 건물의 그림자에 엎드렸다.

삼베자루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단단한 포석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그의 눈앞을 지나간다. 그리고 발달한 그의 청각을 바늘로 찌르듯이 파고드는 곳곳에서의 비명과 울부짖음.

도시는 공포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단순히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곳곳에서 화재가 난 것인지 밤하늘을 향해 몸을 뻗치는 검은 연기들이 보인다.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들려오는 인간의 눈물과, 증오와, 애원과, 분노와, 절망적인 기도의 소리로 카이난은 귀가 멀 것만 같았다.

....신전으로 가야 해. 일레이네의 안전부터 확인을 해야 해.

그는 귀를 틀어막고만 싶은 소리들의 파도에 밀려오는 욕지기를 애써 되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인의 시체를 어깨에 짊어진 다음 건물의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왕궁과는 달리 이마를 맞닿은 것처럼 늘어서 있는 건물의 지붕이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안전한 통로로 보인다.

카이난은 도시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불길, 그리고 하늘을 향해 던져지는 기도처럼 도시를 울리는 울부짖음과 죽음의 비명 속에 신전이 있는 방향을 더듬어 걸음을 재촉했다.

<도시의 모든 젖먹이를 죽여라>

왕의 명령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카이난은 지붕을 타고 넘어 도시를 이동하며 왕도 샴.베스타의 인구가 약 30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 도시의 젖먹이는 대체 몇 명이나 될까? 수백? 수천? 대체 왕은 자신의 도시에게, 자신의 백성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단지 아내가 자신을 배신하고 반역을 꾀했다는 사실 하나에, 단지 불길한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왕은 대체 어디까지 자신의 나라를 상처 입힐 작정인 것일까?

<멸망한 땅의 여자가 낳은 왕이 돌아와 나라의 종말을 가지고 오리라>

멍청한 예언! 빌어먹을 예언같으니라고!

그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노인의 무게를 한순간 내팽개쳐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에 휩싸였다.

자신의 입단속조차 못해서 스스로 비참한 죽음을 당해버린 예언자의 그 신뢰성 낮은 예언 하나에 히가도, 쿠드론의 왕비도 운명을 저당 잡혀 버렸다.

그들은 그 예언 하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위험천만한 시도를 했고 그 결과로 의심 많은 괴승의 감시망에 걸려 죽음의 칼날아래 쓰러졌다.

그깟 예언... 대체 누가 믿는다고!

카이난은 귓속을 파고들어 머리까지 울리는 도시의 절망과 비명에 차라리 자신도 고함을 치고 싶었다.

천벌을 받을 것이다, 페테브란트의 왕 크세투스! 나의 나라를, 동족을 멸망시키고 주변의 나라들을 멸망시킨 것도 모자라 자신의 백성들의 목숨까지 학살하는 폭군! 세상의 모든 정령신들이 너의 악행을 기억하고 반드시 천벌을 내릴....

-퍼억!

“...........컥!”

넓게 펼쳐진 광장을 맞이하여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건물의 지붕에서 내려오던 카이난은 난데없이 날아드는 고통에 그만 노인의 시신과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어디선가 날아든 쇠뇌에 그만 허리가 꿰어지고 말았다. 보통의 인간종족이었다면 갈비뼈가 모조리 날아가고 내장이 터져버렸을 것이다.

“으윽.....”

“수상한 놈! 어디서 나타난 놈이냐? 설마 왕궁을 더럽힌 쿠드론의 반역자들이냐?”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 아마도 로카라는 자와 같은 백인대장으로 보인다. – 장교의 일갈에 카이난은 무릎을 세우며 자신의 허리를 꿰뚫은 쇠뇌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한숨의 기합으로 그것을 몸에서 뽑아내었다.

“하압!”

“무...무슨...? 괴물인가? 모두, 이놈을 죽여라!”

2디트(약 2.2미터)가 넘는 길이에 둘레만도 15헤벤 (약18.75센티)이 넘는 굵기의 쇠뇌를 단숨에 뽑아내는 카이난의 괴력에 놀란 장교가 지시를 내리자 예리한 칼날들이 그의 머리와 심장을 노리고서 사방에서 달려든다.

“하아압!”

주문을 외울 시간도 얻지 못한 그는 세운 무릎으로 바닥을 박차고 돌진을 하여 눈앞의 장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장교의 머리는 너무도 연약하고 부드러운 공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카이난의 손에 들어온 장교의 머리는 단숨에 목에서 꺾여 기묘한 형태로 뒤집어져 버렸다.

“괴물 놈아, 죽어라!”

쇠뇌를 뽑아냄에 분수처럼 피를 쏟아내는 옆구리를 노리고서 날아드는 검은 그가 힘을 준 팔뚝으로 쳐내자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린다. 카이난은 상처 입은 야수와도 같은 으르렁거림으로 자신을 둘러싼 병사들의 검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몸부림에 병사들이 주춤 걸음을 뒤로 물리는 찰나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카이난은 노인의 시체를 낚아채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맹렬한 질주도 잠시, 그는 엄청난 인파에 다시금 발길이 묶이고 말았다.

국신교라 불리는 하르베스 교단의 신전이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던 광장은 도시의 학살을 피해서 몰려든 시민들로 인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문을 열어 주시오! 들어가게 해 줘요! 병사들이 우리 아기를 죽이려고 해요!”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인다오, 왕은 미쳤어!”

“아빠, 아빠....무서워요.”

“쿨럭....”

참고 참았던 욕지기가 상처의 고통과 함께 밀려와 카이난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핏덩어리를 토해 내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소리, 소리, 소리 – 분노와 공포에 짓눌린 목소리들이 자비와 구원을 외치고 있다.

도시의 각지에서 신의 자비와 기적을 바라며 몰려든 시민들 모두가 젖먹이를 품에 안고, 걸을 수 있는 아이들은 걸리거나 업고서 신전의 입구로 들어가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젖먹이를 순순히 내어놓으라고 외치는 병사들의 군세가 광장을 포위하고 접근을 하고 있다.

“으.....윽.....”

카이난은 필사적으로 토혈을 억누르며 상처를 손으로 누르고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하이크란트의 강인함으로 무장한 그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출혈로 인해서 (그리고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사람들의 소리로 인해서)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로 현기증이 일어난다.

“물러서요, 물러서십시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신전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젖먹이를 가진 이들에게 순서를 양보해 주십시오!”

“병사들, 멈추시오- 우리의 자비로우신 여신은 잔혹한 명령에 따르는 그대들을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신전의 입구에서는 몰려드는 인파를 감당하지 못해서 필사적으로 외치는 사제들의 모습이 있다. 그러나 평소에는 열 명도 거뜬히 들어갈 넓은 입구도 밀려드는 인파에는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일레이네는 무사히 신전에 들어갔을까?

카이난은 빠른 속도로 좁혀 들어오는 군사들의 무리와 공포에 더욱 커지는 사람들의 비명 속에 신전의 담장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신전 전체를 포위하지는 못한 병사들의 군세를 확인한 다음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담장을 단숨에 타고 올라 한적한 후원으로 들어섰다. 자신이 숨어있던 외진 숙소와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정원이다.

그는 회복술로도 제대로 입을 다물지 않는 상처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힘겹게 노인의 시체를 한 팔에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공포는 이미 신전 안에도 가득해서 피에 절은 자신의 몰골을 발견한 국신교 사제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가까이 오지를 않고서 도망을 가기 바쁘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존재는 빠른 속도로 사제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갔다.

“여신님이여! 이게 무슨.... 카이난 사제!”

점차로 흐려지는 시야에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 세운다. 카이난은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는 창백한 얼굴을 확인함에 비로소 온 몸을 퍼져 나가는 안도감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돌아왔습니다, 이만보르 사제님... 혹시 그녀......일레이네의 소식을...”

“쉿! 이쪽으로 오시오... 오, 세상에 여신님.... 이토록 참혹한 이 순간이 현실이라고 말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제님.....?”

온 몸이 피에 젖어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축축하게 선혈이 묻어나는 카이난의 몰골에 차마 그를 바로 바라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년의 사제는 자신의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흘려내는 절망어린 탄식에 카이난은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의 몰골을 보고서 이러한 탄식을 흘려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사제님, 그녀에게 설마.....”

“들어가시게. 시간이 없으니까.”

저도 모르게 상처를 누르고 있던 손을 뻗어 이만보르를 잡으려 들었던 카이난은 그가 열어주는 방문 너머의 광경에 – 정확하게는 그 문 너머, 어두운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언뜻 평화로운 그림속의 한 장면처럼 여인은 등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실내에서 달빛에 몸을 의지한 채 벽에 기대어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카이난은 창가에 드리운 달빛을 받아 평온한 조각상처럼 보이는 그녀의 무릎 아래의 두 다리가 없다는 사실에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복부가 날카롭게 베여져 바깥으로 흘러나온 창자가 두 팔로도 수습을 하지 못해 흘러넘치고 있다는 사실도.

덜.....덜덜덜.......

그는 급격하게 떨려오는 자신의 육체가 무너지듯이 앞으로 쓰러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뻗은 그의 손끝에 와 닿는 그녀는 놀랍게도 여전히 부드럽고 아직...온기를 지니고 있다.

“일...레이네.......”

“.............”

스스로 발음을 했는지도 인식하지 못했던 그의 부름에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가만히 열리고... 언제나 황홀한 보석처럼 반짝이던 초록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더니...느리게 한번 깜박였다.

“내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었네....”

너무도 참혹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시선을 외면한 채 이만보르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심각한 상처를 입고도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모양이지만 신전 근처에서....당한 모양이야. 두 다리가 잘린 채로 기어서 신전의 약초밭으로 숨어들었다더군.... 발견한 것이 기적이었지... 마침 치원사제가 약초를 캐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지혈을 했지만 너무 때가 늦어서... 배는 저 모양일세. 상처가 너무 큰데다 도무지 내장을 도로 집어넣을 방법이.... 눕히려고 했지만 본인이 괴롭다고 거부를 해서....”

“.....안 보여요....”

아, 죽음이여 – 카이난은 자신의 시야를 가리며 그녀에게로 몰려드는 죽음의 하급정령 나달의 존재에 일레이네의 손을 잡았다. 그런 그의 상처 입은 온기에도 안도감을 느끼는 것인지 가만히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죽는...거죠 나....? 그래도 아기...를....”

“...............”

“...열.... 열심히....노력....성공 했..다고... 방...심.....”

“....일레이...네....”

“지..켜줘..요... 아기....”

“...............”

여전히 보석 같은 눈동자를 뜨고 있건만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세상의 그 무엇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이난은 그녀의 말에 일레이네의 곁에 놓인 강보를 바라보았다. 피에 젖어있는 강보는 그 천에 감싸인 생명이 이미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피에 젖은 그 작은 덩어리에는 뚜렷하게 박혔다 뽑힌 칼날의 흔적이 보였다.

“...말해 주지 못했네... 본인은 아직 아무것도 몰라.”

카이난의 시선에 이만보르가 꺼져드는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지키려고 들었던 존재가 이미 본인보다 먼저 생명의 불꽃을 꺼뜨렸음을 그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카이난은 터져 오르는 오열 속에 그녀의 붕대로 감싸인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의 떨림으로 인해 그녀의 몸까지 가늘게 떨려온다.

-그것으로 끝.

카이난은 자신의 귓가를 파닥거리던 정령들의 날개소리가 멀어져 감에, 그리고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서 늘어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스스로에게 말을 했다.

“....이걸로 끝이라고...?”

“카이난 사제....”

“..............”

카이난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얼굴을 들어 비록 피가 묻어있고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차림의 험한 입성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젊은 연인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달빛 속에 드러나 있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은 험한 장난을 치다가 지쳐 잠이든 것처럼 보인다. 활달하고 귀여운 장난기도 있던 그녀. 아름다운 초록의 눈동자를 가진....

“카이난 사제. 서둘러 지혈을 하도록 하게. 일레이네를 위하여 자네의 목숨이라도 보존을 해야...”

그녀의 죽음을 뒤늦게 확인한 이만보르의 입술에서 흐트러진 호흡으로 이성적인 재촉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침묵을 지키며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가만히 쓸어 내렸다.

멀리서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린 누군가의 탄식이 울려온다.

“이 나라는 저주를 받았어! 병사들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천벌을 받을 왕.... 오, 여신이여 – 저 가련한 백성들을 구원하소서!”

“.............”

참지 못한 오열로 흐느끼는 이만보르의 절망적인 기도에도 카이난은 침묵을 지키며 일레이네와 강보에 싸인 아기의 시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기를 지켜줘요>

...라고 그녀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아기는 살아남지 못했다.

왕비의 강렬한 복수심으로도, 히가의 간절한 소망으로도 아기는 살아남지 못했다.

<멸망한 땅의 여자가 낳은 왕이 돌아와 나라의 종말을 가지고 오리라>

“............!”

순간, 저주와도 같은 예언이 머릿속을 화살처럼 뚫고 들어온다.

아기, 왕 – 죽은 왕이 돌아와서 이 나라의 종말을 가지고 오리라.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지고 왔던 상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상....자? 아... 그거라면 자네가 있던 숙소에 그대로....”

“...그녀를 부탁합니다. 밖에... 제가 모시고 온 노인의 시신도 함께 부탁합니다. 국신교의 방법으로라도 상관이 없으니 평온한 안식을 주십시오.”

“카이난 사제...? 어디로?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건가? 자네의 상처도 때가 늦으면...”

“부탁합니다.”

이만보르의 만류를 단호하게 끊어내며 카이난은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상처를 부여잡고 복도를 내달렸다.


-그날, 도시는 무수한 비명과 죽음에 휩싸였다.

신을 향한 구원의 기도와 잔혹한 명령을 내린 왕을 향한 애원과 저주가 공포의 이름으로 밤의 강을 건넜을 때, 도시는 이미 너무도 많은 죽음을 떠오르는 태양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포와 혼돈과 죽음의 시간 속에 – 한 명의 정령사제가 왕도에서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샴.베스타의 학살> -훗날 역사가들과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그렇게 명명되어진 그날의 사건은 사람들을 감히 문 밖으로 나서지 못하게 만들었고 왕도 근교의 심마니들이 다시 약초를 찾아 산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 날로부터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의 늙은 심마니가 기묘한 것을 발견했는데 – 그것은 깊은 산속 넓은 바위 터에 그렸다가 지워진 정령진의 흔적과 엄청난 양의 피의 흔적이었다. 그것이 사람이 흘린 출혈인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제물을 바치기 위해 짐승을 잡은 흔적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산속에서 울부짖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었지. 짐승의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의 소리 같기도 하고.... <으아아아아아----> 하는, 하여간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무서운 소리였지. 성 안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진 그 날이었어.

심마니 노인은 무식한 자신으로서는 알아볼 수가 없는 정령진의 흔적과 오금이 저리던 비명소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새삼 부르르...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불길한 기억을 떨치려는 듯 이미 지워진 바위 위의 정령진 흔적을 괜스레 거칠게 발로 밟아 문질렀다.


-대륙 공통 연표인 알제하스력 제 3시대 130기, 24년 10월의 일이었다.

................................................................................................................<계속 –1부 끝->





작가의말

1부를 끝내었습니다. 월요일에 2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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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7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7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6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6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7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7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6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9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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