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새글

pantaray1215
그림/삽화
판타.레이
작품등록일 :
2024.08.13 14:06
최근연재일 :
2024.09.19 07:00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172
추천수 :
0
글자수 :
285,811

작성
24.08.28 07:00
조회
6
추천
0
글자
26쪽

12화 - 축복의 시간(4)

DUMMY

치르르르르......

두터운 돌문을 열고 들어서자 색색의 정령의 불빛들이 언제나처럼 반겨준다. 카이난은 자신의 귓가를 간질이는 라벨렌들의 공간을 지나 지하로 향한 좁은 돌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커다란 대리석의 책상과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고서 두터운 고서적을 들여다보고 있는 히가.레이온의 모습이 있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은 그의 곁에 형태를 갖춘 하급정령들의 모습이 떠돌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이토록 많은 하급 정령들을 불러낸 것일까?

“히가... 카이난 왔습니다.”

“너를 부른 적이 없다.”

시선은 고대의 서적에, 오른 손은 양피지에 수은과 납을 개어 넣은 위험한 잉크로 찍은 주문을 그려넣으며 그가 무겁게 대꾸를 했다. 카이난은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노인의 곁으로 역시나 우울한 걸음을 옮기며 열기 어려운 입술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떠나야 할 날이 온 것 같아서 찾아뵈었습니다.”

“콘타오른이 말을 했던, 그 왕비의 시녀때문인 거냐?”

“....네.”

“그 여자랑 함께 있고 싶어서 정령원을 떠나고 싶은 거냐?”

비로소 시선을 책에서 떼어 자신에게로 향하는 노인의 눈동자에는 의외로 카이난이 예상했던 노여움이나 분노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해나 상냥함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타인의 눈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왕도에서 온 왕의 군인과....싸움도 했습니다.”

“카이난!”

카이난이 예상했던 분노가 비로소 노인의 눈에 떠올랐다. 노인은 <왕의 군인>이라는 단어에 험악하게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저지른 거냐? 다른 이도 아니고 하필 왕의 군인이라니! 만일 왕의 귀에 너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정체는 탄로 나지 않았습니다. 그 왕의 백인장은... 저를 남쪽에서 온 일가르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이난은 날이 선 노인의 반응에 깊이 고개를 숙이며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자가 앙심을 품고 저에 대해서 추궁을 한다면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떠나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비밀리에 정령원에서 하이크란트... 크페스터스가 가축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저를 평생 길러준 히가나 정령원에게 국명을 어긴 죄를 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네가 왕의 군인과 싸운 이유 역시 그 왕비의 시녀 때문인 것이냐?”

“...........”

-나로 인해서 그녀까지 비난을 받게 되는가?

카이난의 무거운 침묵에 정령원 최고위의 노인은 눈을 감고서 긴 한숨을 흘려 내었다.

“콘타오른의 입으로 네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이 사랑에 빠진 행위자체를 비난하는 말이 돌아오리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노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화를 낼 수도 너와 그 시녀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눌러두고 감추어도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그래. 내가 너에게 여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마음은 알아서 자신의 짝을 찾는 법인 것이지.”

“.............”

“네가 어디로 떠나야하는지 알고 있느냐?”

“전혀 알지 못합니다.”

카이난은 또 한 번 무겁게 대꾸를 했다. 사실, 히가의 입에서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면 대체 어디로 가야할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일은 있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모든 기억이 정령원에 속해있는 카이난으로서는 어디로 떠나야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너는 자유다. 하지만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

히가는 몸을 일으켜 공간을 떠도는 하급정령들의 날개 짓을 뿌리치면서 대리석의 계단을 올라 제단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어둠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는 시체 – 여자아이의 시체가 가로누워 있었다.

“떠나려면 이것을 넣을 상자도 필요하겠구나.”

노인은 한 겹의 얇은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여자아이의 몸을 가볍게 손으로 쓸어내렸다. 카이난은 무수히 떠다니는 하급정령들이 어찌된 셈인지 여자아이의 시체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령들이 이 시체를 꺼리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정령들이 시체를 경외하는군요.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해서 시체의 곁을 배회합니다.”

“그래, 마치 신성한 지역에서 소란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은 어린아이처럼 경거망동을 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고 있지. 아직 철없는 장난꾸러기에 불과한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하급정령들이면서 말이다.”

새삼 신비로운 시체에 대한 감탄의 한숨을 흘려내며 노인은 카이난을 바라보았다.

“네가 떠나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말리지 않겠다. 진즉에 보내고 싶었던 것은 다름이 아닌 나였으니까... 너의 목을 옭아매는 이 나라의 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늘과 땅을 거닐기를 진심으로 나는 바란다. 하지만 너의 여행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 카이난. -이 정령원과 이 나라를 벗어나면 남쪽으로 향해라. 16개의 나라를 지나 두 개의 산맥을 넘어 대 사막의 입구에 해당하는 이라베시 지역으로 가거라. 그곳의 도시국가 칼-이라베시의 정령원에서 히가.나드리얀을 찾아가라.”

“히가.나드리얀이시라면....!”

“그래, 남쪽의 대 현자이시다. 나의 스승님이시기도 하지. 많이 연로하신 나이지만 아직 건강하다고 하시는구나. 만일 이 시체가 너를 성가시게 할 뿐이라면 스승님에게 이 시체를 넘겨주어도 좋다. 스승님이라면 분명 연구대상이 생겨서 기뻐하시거나 아니면 이것에 대하여 달리 정보를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지.”

“명심해서 기억을 하겠습니다.”

-적어도 나의 방랑이 목적지가 없는 방랑은 아니로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을 느끼며 카아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의 표정에 약간의 망설임이 떠올랐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을 할지말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카이난...그곳으로 가게 된다면 너는 너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윽고, 입을 더 열기로 결심을 했는지 노인의 얼굴에서 단호함이 떠오르며 히가.레이온은 단숨에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너에 대한 이야기를 내 입으로 모두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래,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희망은 바로 목전에 와있지... 길어도 1,2년만 기다리면 나의 오랜 숙원은 이루어지고 너는 마땅히 네가 가졌어야 할 것들 모두 다시 되찾을 수...”

“히가....?”

“............!”

또 다시 눈을 번뜩이며 흥분된 상태가 되어가는 노인의 반응에 불안을 담아 카이난이 그를 부르자 퍼뜩,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인지 히가.레이온은 급격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일까, 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의 근육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네가 떠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네가 떠나있는 것은 현명하고 타당한 판단이다, 카이난.”

노인은 순순히 카이난의 결정에 수긍의 말을 흘려내면서도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너의 힘만은 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보아라, 이렇게나 많은 정령들을 불러 모았지만 내 힘은 미약하다. 네 도움이 필요해.”

“무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히가는 강력한 정령술을 펼치기 위해 위험한 잉크로 주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새삼 대리석 책상위에 펼쳐져있는 양피지로 시선을 돌린 카이난은 그것을 잡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가 채 들여다보기도 전에 양피지는 허공을 둥실 떠올라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듯 사라져 버렸다.

히가의 주문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너는 아직 내용을 알 필요가 없는 일이다.”

“히가...”

“이미 7할은 완성되고 실행이 되어버린 주문이다. 돌이키기란 불가능하지. 하지만 마지막 마무리를 할 힘이 더 이상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도와다오, 카이난. 너의 힘이 필요하다. 정령원의 누구도 믿지 못한다. 누구도 끌어들일 수 없는 일이다. 너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나는 진즉에 너를 떠나보내야 했음에도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내 힘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이렇게 혼자 힘으로는 마무리가 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내내 들어서 말이다.”

“..............”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본인이 가르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터득하기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노인이 자신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한 것은 처음이다.

카이난은 정령원의 최고위인 히가의 힘으로도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정령술이라는 것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언제, 어떻게 도와야 하는 겁니까?”

“2주후, 아인로테 왕비의 일행이 정령원에 요양기도를 오신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 너는 나를 돕게 될 것이다. 내가 따로 은밀히 너를 부르겠다. 그러니 나의 정령술의 마무리가 무사히 이루어지도록 힘을 보태어다오. 너의 수호정령인 순결함의 에스투람은 너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한다. 그의 가호라면 틀림없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때까지, 왕비님의 시녀를 향한 너의 마음은 소중히 해 두어라.”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카이난은 노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놀라운 말에 절로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지금,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비난하지 않고 보아주겠다는 것인가?

“나에게는 나의 꿈이 있듯이 너에게는 너의 꿈이 있겠지. 카이난... 그 시녀아이가 너의 꿈이라면 소중히 지켜라.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아끼고, 다듬고, 인내하라. 인내하고 또 인내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절대로 감정을 앞세워서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히가...”

비난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응원을 받고 있다!

예상치도 못한 노인의 반응에 절로 차오르는 감격으로 카이난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허락받을 수만 있다면 노인이 원하는 정령술에 힘을 보태는 것 정도는, 자신의 모든 힘이 다하게 될지라도 기꺼이 나서서 도울 일이다!

“물러가거라, 때가 되면 너를 부를 것이다. 그날까지 인내하라.”

“네, 히가 - 부디 평안하십시오!”

카이난은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날개라도 돋친 듯 가벼운 걸음으로 좁은 계단을 올라 방을 빠져나왔다. 색색의 구슬로 빛이 나는 라벨렌들의 떨리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정령신들의 축복처럼 느껴진다.

-아, 일레이네, 일레이네... 나의 마음은 비난을 받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누군가의 비난을 받을만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간, 떠나야한다는 마음의 고통만큼이나 절실하게 그녀가 그리워졌다.

여전히 정령원을 위해 자신이 멀리 떠나야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분명 희망은 작으나마 고개를 들고 있었다.

허락을 받을 수 있는 꿈이라면... 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부정당하고 비난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면 언젠가는... 히가의 말대로 인내하고 인내하면 언젠가는 그녀의 곁에 머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하다못해 그녀의 손을 잡고 이 나라를 멀리 떠나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만일 그녀가 나를 따라와 준다면.... 화려한 왕궁생활과 왕비의 시녀라는 직위를 버리고 나를 따라서 이 나라를 떠나준다면 나는 그 어떤 희생을 대가로 바치더라도 고통스럽지 않으리라!

로투남 성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우레와 같은 울라한 폭포의 소리가 그를 반겨준다.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새로운 희망으로 그의 갈색의 뺨에 온기를 더하고 있다. 카이난은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세상을 향하여 있는 힘껏 소리를 치고 싶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그녀를 그 무엇보다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다.



“닭, 닭이 부족해. 왕비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양심이 없는 놈들이야. 그 놈들은 그토록 많은 빵과 양과 돼지를 먹어치우고도 닭이라고 하면 머리수 당 한 마리씩을 먹으려고 든다니까! 뱃속에 거지가 든 건지, 아니면 전투훈련이랍시고 뱃구레만 키운 건지 원...”

하루, 하루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카이난은 밀가루를 반죽하던 손을 멈추고 장부를 들여다보며 혀를 차는 콘타오른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혈색이 좋은 요리장 사제는 코앞으로 닥친 왕비의 행차에 대비하여 그들이 머무는 기간 동안 별궁을 먹일 요리와 식량문제에 고심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닭이 부족하지요? 저번 행차 때 왕비님은 거액의 금화를 내어 놓으셨다고 하셨잖아요.”

“그 거액의 금화를 총무사제 양반이 서기 사제놈의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서 엄청난 양의 양피지와 고문서를 사들이는데 써버렸거든. 가축우리에 가축을 채워 넣기보다 도서관의 책을 채워 넣는데 돈을 엄청 들인 모양이야. 흥! 배가 고프면 그 책을 뜯어먹으라고 하면 되겠군!”

“별궁의 손님들은 술도 엄청 마시더군요. 하긴... 정령원에 머무는 동안에는 달리 오락거리가 없으니 무료한 것은 이해를 하지만 맥주를 아무리 비축해도 모자를 판이에요. 아무래도 이번 달에는 한 번 더 맥주를 빚어야 할 것 같은데요.”

밀가루 반죽에 호밀과 귀리가루를 섞으며 그가 중얼거리자 콘타오른은 소리가 나게 장부를 덮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어 커다란 배를 불만스레 쑤욱 내밀었다.

“마음에 안 들어, 하여간 그 왕비는 마음에 들지 않아. 멸망하기전 부터 쿠드론에는 불온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나? 나는 있네. 왕비의 미모가 너무도 치명적이어서 많은 쿠드론인들이 수군거렸다더군. 예언이 있었다는 거야. <쿠드론은 왕비의 미모로 인해서 멸망할 것이다>라는 예언이 말이야. 우리나라에도 그와 비슷한 예언이 있지 않나? 그...뭐였더라? 여자...멸망한 땅의 여자가 낳은.....”

“<미모의 왕비가 이 땅에 피를 불러오리라. 그리하여 멸망한 땅의 여자가 낳은 왕이 돌아와 나라의 종말을 가지고 오리라.>...사제님이 저한테 해주신 말이잖아요. 불길한 예언이 나와서 왕께서 예언자의 목을 쳐버렸다고요.”

“그랬지, 그랬어. – 불과 몇 년이 되지도 않은 일이었지. 그러니까 쿠드론의 왕비를 포로로 끌고 와 새로운 왕비로 삼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온 예언이었어. 듣기로는 가엾은 예언자 영감을 땅에 거꾸로 박아 죽였다고 하더구먼... 나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지만 확실히 왕비의 미색은 뭐랄까... 치명적이야. 사내에게도, 자기 팔자에도 말이야. 그녀의 미모는 죽음의 향기가 떠돈단 말이야.”

“...가여운 일이지요. 자신이 선택한 운명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카이난은 왕비를 걱정하는 충성스러운 일레이네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고향을 멸망시킨 나라의 왕비가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아뇨, 죄송합니다. 입은 화의 씨앗이 되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뭐, 이런 후미진 조리장까지 누가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고.”

언제나 신중한 카이난의 몸 사림에 조금은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흘리며 콘타오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칼을 들고는 썰어놓은 돼지고기 덩어리를 다지기 시작했다.

“자네는 마을에 내려가서 세속의 소문을 듣지 않으니 타인을 쉽게 동정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선량한 기운으로 차 있지 않아.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지.”

“사정이 좋지 않은 겁니까?”

문득, 몇 번이나 보았던 사령 케라론의 불길한 모습이 떠올라 반죽을 치대면서도 표정이 흐려지는 카이난의 물음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콘타오른은 다진 돼지고기를 커다란 통에 담았다.

“예비 사제 꼬맹이들은 모두 시골이 고향 아닌가. 그래서 나도 말을 아끼고 있었네만...”

말로는 조리장을 엿듣는 귀는 없다고 말을 했으면서 새삼 고개를 들어 누가 듣고 있지는 않은지 주위를 둘러본 다음, 콘타오른은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어. 왕도근처는 어떨지 몰라도 시골에서 시작된 경제 붕괴 현상은 이 근방에서도 틀림없이 진행중이네. ...전쟁에 눈이 뒤집혔는지 우리 왕은 너무 전쟁을 자주 일으켰어. 자네의 동족을 학살하고 나라를 멸망시키더니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자네 나라를 정복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미친 짓이었네. 곡식 한 톨 심을 수 없는 얼어붙은 땅을 차지해서 무얼 하겠다고? 어차피 영구동토의 땅에 사는 자네 동족들은 얼음평원을 넘어오지도 않는데 무엇하러 쳐들어가서는... 소문에는 자네 나라의 보물들을 탐냈다고 하던데 정작 그 보물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지 않나? 완전히 헛소문만 믿고 덤벼들었다가 고생만 하고 헛물만 켠 것이라니까.”

“............”

그러한 이야기는 카이난도 기록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이크란트의 나라 하겔란스트를 멸망시킨 기록은 많이 왜곡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당시의 상황을 비판하거나 있는 그대로 적은 말과 기록들은 삭제가 되거나 파괴되어져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 신성한 기도와 학문의 장소인 정령원 깊숙한 서가에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서적들이 적게나마 남아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동족에 대한 정보에 목이 말랐던 카이난은 그것들을 샅샅히 흩어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그야말로 헛된 정복활동>이라는 하겔란스트 정복은 광대한 얼음과 바위의 영토를 손에 넣었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런 득이 없는 전쟁이었다. 황금보다도, 보석보다도 값진 금속이 영구동토의 땅에서 난다는 소문은 무성했으나 페테브란트 정복군이 손에 넣은 금속은 존재하지를 않았고 결국, 금속에 대한 정보는 헛소문에 불과했거나 멸망해가는 하이크란트족이 정복자들의 손에 넘기기를 거부한 채 파괴를 해 버렸다는 소문만이 돌았다고 한다.

“덕분에 엄청난 돈과 인력만 낭비하고 말았지. 그래서 하이크란트 주변의 나라들을 정벌한 것은 이해를 해. 뭐라도 남는 장사가 되려면 그런 코딱지만한 나라들이라도 정복을 해서 전리품을 챙겼어야 했을 테니까. 다 이해를 한다고 –하지만 동맹국으로써 지원병도 보내주고 원조도 해주었던 친구의 나라 쿠드론에게 싸움을 건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었어.”

카이난은 보지 못한 과거의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아득한 눈빛이 되어버린 콘타오른은 건네어 받은 반죽을 밀방망이로 얇게 펴며 불만스레 입술을 비틀었다.

“책으로 얻은 지식은 자네가 나보다 한수 위지만 말이야. 자네는 전쟁을 본 적이 없지, 카이난? 나는 보았네. ...쿠드론은 풍요롭고 강한 나라였어. 그런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니, 무려 5년이야, 5년! 5년을 매달려서 겨우 거꾸러뜨렸어. 그것도 소문에 의하면 왕의 옆에 딱 붙어있는 요상한 괴승이 사악한 주술을 쓴 결과라고 하더구먼. 나는 당시만 해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전쟁터를 떠돌며 아군의 병사들을 먹이는 일을 기꺼이 감수했지.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그 전쟁은 무모한 생명의 낭비였네. 물론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겼고 쿠드론의 풍요로움을 손에 넣었지. ...뭐,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5년이나 계속된 전쟁으로 쿠드론도 어지간히 피폐해져 있었지만 말이야. 그 승리도 벌써 5년이 지났네. 그때의 전리품으로 얻은 재물과 땅, 노예들... 그런 것으로 우리나라 백성들의 허리도 조금은 펴지나 싶었지. 계속되는 전쟁으로 이겼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궁핍했으니까 말이야. 죽은 남자들을 대신해서 노예들이 밭을 갈고, 끌고 온 가축과 땅을 나누어 받고... 뭐, 괜찮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약빨도 이제 다 끝이 난 거네. 백성들은 다시 허리띠를 강제로 졸라 매여지고 있어.”

“설마 다시 전쟁을?”

놀라 반죽을 치대던 손을 멈추는 카이난의 물음에 콘타오른은 깊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5년, 전쟁이 멈춘 것이 불과 5년이다. 소문으로는 이전 왕비와 후궁들에서도 후사를 얻지 못했던 왕이 쿠드론의 포로로 잡아들인 왕비를 통해 후사를 도모하고자 (실제로는 그녀의 미모에 빠져서) 불미스러운 기운을 불러들이는 전쟁을 멈추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왕비가 회임을 했으니 그놈의 전쟁 병이 또 도진게지. 엄청난 기세로 다시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네. 각 마을마다 부여되는 세금의 가짓수도 늘고 금액도 껑충 뛰어서 다들 죽겠다고 불평이야.”“조금 더 내정에 힘을 써도 좋을 텐데... 쿠드론과 영구동토 근방의 땅들은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명실공이 대륙 최북부의 맹주가 되신 왕이신데 아직도 부족하신 것일까요?”

“소문으로는 겨울이 와도 얼지 않는 바다와 땅을 원한다고 하더군. 어이가 없는 소리지. – 대륙 최북단의 땅의 주인으로 태어난 것은 팔자인데 그 운명을 바꾸겠다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 땅을 차지하려면 윈자크 고원을 지나 베일 산맥을 넘어 대륙중앙의 나라들까지도 차지하겠다는 말이지 않나? 그 사이에 스무 개도 넘는 나라들이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우리의 왕은 돌대가리인가? 아니면 그 많은 나라를 다 차지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심하게 미쳐버린 것인가?”

“사제님, 목소리를 낮추세요. 말도 삼가시구요.”

급기야 자신들의 왕을 <돌대가리>에다 <미치광이>라고 비난을 하는 콘타오른의 핏대가 오른 목소리에 재빨리 주의를 주며 카이난은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후우... 미안하이, 내가 좀 흥분을 했네.”

콘타오른은 뒤늦게야 머쓱하니 어깨를 움츠리며 밀가루가 묻은 밀방망이로 자신의 입을 두드렸다.

“이놈의 입이 늘 조심성이 없지. 주인을 닮아 성급해서 그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하면 사제님의 운명뿐만이 아니라 정령원에도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참...기가 막힌 일이군. 속세와는 완전히 떨어져야 하는 정령원이 단지 이 나라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왕의 눈치를 봐야 하다니 말이야.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 정령원은 훨씬 속세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렇다고 히가를 비난하는 것은 아닐세. 히가 역시 왕의 폭력적인 기질 앞에서 정령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네.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히가는 내 도움을 청하면서까지 정령술을 펼치려고 하는가?

카이난은 며칠 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떠나는 시기의 유보를 명하던 노인의 흥분과 피로가 동시에 느껴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무엇을 위한,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정령술을 준비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그의 정령술이 행차하는 왕비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울라한 폭포의 이끼도 그렇고 사령 케라론의 출몰도 그렇고...이 모든 상서롭지 못한 징조는 이 나라가 다시 전쟁의 전화로 빠져 들어가는 불행에 대한 전조인 것일까?

나는 이렇게 불안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라에 일레이네, 그녀를 남겨두고 홀로 떠나도 좋은 것일까? 그녀에게까지 나라의 운명이 불길한 기운이 되어 스며들면 어쩌지?

피리리리링 —피리링---

“...........!”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풍금 티오라의 소리에 카이난은 뛰어오르는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고개를 들었다.

식사시간도, 예배 시간도 아니건만 높게 울리는 티오라의 소리는 고귀한 신분의 왕비 일행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에휴. 도착했나보군. – 정신없이 바쁘고 고단한 5일이 또 시작되겠구먼.”

탐탁지 않은 마음에 볼멘 한숨을 흘려내는 콘타오른과는 반대로 반죽을 치대는 손에 스피드를 가하며 카이난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었다.

예전 같으면 뭐라고 핑계를 대든 조리장을 빠져 나가서 푸른 샤프란 밭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눈을 피해서 몰래 그녀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겨우 찾아낸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을 훔쳐보며 연심을 달래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나는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어.

오늘은 별의 날이 아니지만 그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 야식시간마저 지나 모두가 잠자리에 들 때쯤이면 그녀는 폭포수로 난 길을 따라 하얀 빛을 발하는 성탑의 오솔길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작은 숲의 그루터기에 앉아 자신을 기다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밤 그곳으로 갈 것이니까.

서로 달리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약속을 나누지도 않았지만 카이난은 자신이 그럴 것임을, 그리고 그녀도 그러할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은 누구보다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계속>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28화 – 공격(2) NEW 19시간 전 1 0 21쪽
28 27화 – 공격(1) 24.09.18 3 0 20쪽
27 26화 - 귀신의 자식(3) 24.09.17 3 0 26쪽
26 25화 - 귀신의 자식(2) 24.09.16 4 0 21쪽
25 24화 - 귀신의 자식(1) 24.09.13 7 0 25쪽
24 23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4) 24.09.12 6 0 22쪽
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7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6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14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7 0 20쪽
»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7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7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7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6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9 0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