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속 야만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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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문
작품등록일 :
2024.08.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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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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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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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삭제

DUMMY

하얀 화면 안에 노란색 도형과 검은색 글자가 가득하다.


‘4.75 시즌 공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함께 한 게임의 다음 시즌 공지였다.

매시즌마다 새로운 게임을 하는 듯한 감각이 들 정도로 이 게임, 리슬라니아의 패치는 광대하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 또 다시 뉴비가 된 듯한 가슴 뛰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터.

하지만 마땅히 느껴야 할 기쁨보다는 착잡함이 더욱 컸다.

기쁨이 클수록 더욱더.


‘이것도 이제 끝이네.’


마우스를 움직여 게임에 접속했다.

평범한 그래픽과 캐릭터.

하지만 수천 개의 스킬과 그 스킬들을 보조하는 패시브들은 이 게임 리슬라니아를 유일한 게임으로 만들어줬다.


다른 게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을, 리슬라니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실현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엄청난 자유도와 무수한 선택지들은 수많은 매니아층을 양산했다.

이후로 비슷한 게임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지속적인 패치로 밸런싱을 해온 리슬라니아를 넘어선 녀석은 없다.

나 또한 그 매니아들 중 하나가 되어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전부 끝이다.


‘한달.’


시한부 판정.

매일 지속된 야근과 술담배는 결국 내 몸을 완전히 좀 먹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한달이라는 시간과 어디에 써야할지도 모를 재산뿐이다.


뭐, 재산이라고 해봐야 실은 얼마되지도 않는다.

살아보겠다고 온갖 병원에 무속인까지 찾아다니느라 대부분 탕진했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이 돈이라도 가족에게 주고 가고 싶었다.


허나 현실의 재산은 그렇게 처리한다쳐도 게임속 재산은?

그것들까지 가족에게 줄 수는 없다.

일단 현금도 안 될 뿐더러, 내가 죽으면 내 계정에는 접속도 할 수 없을테니까.


무엇보다 이 녀석들은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보자. ···한산하네.’


시즌 막바지에 도달한 탓인지 마을은 한산했다.

거리를 채운 건 수많은 NPC, 그리고 다음 시즌을 대비해 연습을 하고 있는 고수들뿐이다.

그들 중 몇명이 아는 척을 해왔지만, 가볍게 인사만 하고 넘겼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세달 동안 뭐했음? 이번 시즌 오프한 줄 알았는데.


귓속말을 적당히 받아넘기며 창고로 다가갔다.

이들은 내가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말하지 않았다.

게임을 접는 이유와 상황이야 다양하니,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그냥 접었다고 생각할테지.

온라인 속 인연이란 딱 그 정도가 좋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정도가 딱이다.


‘흠.’


이번 시즌에는 제대로 즐기지 못한 탓에 창고도 텅 비어 있었다.

이래서야 처리할 녀석도 없겠네.

적당히 창고를 뒤적거리다가 캐릭터 창으로 이동했다.


'캐릭터는, 어차피 계정을 삭제하면 통째로 날아가겠지. 그래도 일단 살펴는 볼까.'


하나씩 들어가서 점검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맨 위의 캐릭터. 듬직한 야만인 레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 통합서버도 있었지. 그리고 이 캐릭터.’


리슬라니아의 캐릭터는 해당 시즌이 종료된 순간 통합서버로 전송된다.

보유하고 있던 아이템과 스킬 또한 당연히 통합서버로 간다.

나야 거기까지 쫓아가서 정리하는 건 너무 귀찮아서 시즌이 끝나면 캐릭터를 통째로 삭제하는 식으로 처리했지만, 이 야만인 캐릭터만은 그렇게 매정하게 삭제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


이 녀석은 무려 10년 전에 생성한 캐릭터로, 내가 제일 먼저 만들고 플레이했던, 이 게임에 빠져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녀석이었으니까.


10년 전 캐릭터이니, 당연히 지금은 얻을 수도 없는 독특한 아이템들을 잔뜩 가지고 있을 터.

구경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야.”


97레벨.

만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캐릭터인 야만인 ‘레손’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온갖 아이템을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다.


‘서리창, 맹신자의 낙인, 고통의 굴레, ···이야. 이게 있네.’


사기적인 성능과 독특한 기제 때문에 계속해서 하향 패치를 당하다 결국 하나씩 사라져 간 비운의 아이템과 스킬들.

그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녀석은 바로 이 ‘알 수 없는 보석함’이었다.


낡고 빛바랜 보석함.

바다에 빠졌는지 겉에는 소금기가 가득하고 이음새는 녹슬었다.

안쪽은 텅 비어있다.


보석함이라는 이름과는 맞지 않는 녀석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안에 들어있는 보석을 보관하는 게 아니라, 변경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보자. 뭐가 좋을까.’


창고를 뒤적거렸다.

스킬을 담고 있는 오색의 보석들이 서로 자기를 골라달라며 아양을 떠는 것 같다.

그중 가장 등급이 높은 스킬을 두 개 꺼냈다.


이 알 수 없는 보석함은 1등급 스킬을 넣으면 6등급 스킬 중 하나로 바꿔준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서버 내에 백 개도 드랍되지 않는 최고등급 스킬로 바꿔주는 로또성 물건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사실 5등급이나 4등급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사용 뒤에는 보석함도 사라진다.

그래서 로또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 이유로 아이템 자체를 삭제해야할 정도로 사기적인 녀석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게 이후 시즌부터 드랍되지 않도록 변경된 이유는 1등급이 아니라 반대로 6등급 스킬을 넣었을 때 나온다.


‘1등급으로 바꿔주지.’


최고등급에서 최하급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스킬의 설명과 능력이 바뀐다.

지금까지 서버에 존재하지 않았던 특별하고 유일한 스킬로 바뀐다.

그것도 기존에 넣은 6등급 스킬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녀석으로.


‘서리창이나 맹신자의 낙인 중 하나를 넣으면 되겠군.’


둘 다 6등급, 게임내 최고등급이다.

성능은 그냥저냥 쓸만한 정도.

같은 급으로 분류되는 하늘의 소실과는 격이 다른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 시즌에는 정말 잠도 안 자고 한달 내내 게임만 했었기에 달성할 수 있었던 위업이다.


그 고생들을 생각하자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대견했다.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정리할 것들이니 가기 전에 즐거운 구경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바로 스킬이 담긴 보석을 보석함에 넣었다.


“읍!”


갑자기 지독한 복통이 치밀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겨우 진통제를 찾아서 입에 밀어넣었다.

통증이 갈수록 심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다시 화면을 살폈다.

내가 드래그 해둔 푸른색 보석이 보석함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제 버튼을 눌러 닫으면, 저기 담긴 서리창이 다른 것으로 뒤바뀐다.


‘잠깐만.’


하나 더 넣자.

어차피 삭제할 아이템들이다. 굳이 아낄 필요가 있나?

둘 다 넣자.


서리창과 맹신자의 낙인을 동시에 넣고 보석함을 닫았다. 겉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어떻게 될까.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다시 뱉으려나? 아니면 둘 다 좋은 것으로 바뀔까? 그도 아니면, 이미 하향패치 당해서 아무것도 안 남고 내용물이 삭제될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보석함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흐음.”


역시, 서버에서 삭제된 녀석답게 화끈하구만.

최고등급 스킬을 두 개나 날름 먹어버리다니.

텅 빈 보석함은 천천히 흐릿하게 변하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냥 누구 주고 갈 걸 그랬네.'


허허 웃으며 창고를 정리했다.

통합서버에도 유저는 있다.

그들에게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판매하거나 무상으로 넘겨줬다.

지금은 드랍되지도 않을 녀석들이라 그런지 모두 좋아했다.

끝까지 팔리지 않은 장검, 고통의 굴레는 캐릭터에게 장착해줬다.

이건 성능이 없느니만 못한 장난감이다.

그래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애초에 구하기 너무 쉬웠던 탓에 매물이 많기도 하고.


-정말 계정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 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마지막 문구가 마음에 걸렸지만, 계정삭제버튼을 눌러 마무리했다.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다.

오랜 시간 치우지 않던 방을 대청소한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입맛이 씁쓸했다.


‘약이나 먹어야지.’


아까전부터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아무래도 약을 하나 더 먹어야겠다.


“왜 물이 없, 아, 아까 다 먹었지.”


냉장고 문을 여는데 눈앞이 핑글 돌았다.

등에 충격이 전해진다. 누가 등짝을 후려친 것처럼 아프다.

시커먼 천장이 눈을 어지럽혔다.

빙글빙글. 잔망스럽게 춤춘다.


-투발의 이름으로!!!


뜬금없이 고함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건 천지를 뒤흔들 것처럼 거대하고 끔찍한 고통에 찌든 목소리였다.


눈이 감겼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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