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속 야만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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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문
작품등록일 :
2024.08.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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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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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8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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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랑

DUMMY

여관은 한산했다.

난데없는 칼부림에 크게 놀란 주민들이 근처를 기웃거렸지만, 겁없이 다가오는 자는 없었다.


덕분에 편하게 여관을 털 수 있었다.

아니, 이게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어드렸다.

짤그랑.

커흠, 이건 소정의 수고비다.


내가 한때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어서 이 상황에 알맞는 불경을 외우고 있거든.

마하반야, ···뭐였더라? 아무튼 불경을 읊어 극락왕생을 빌어드렸으니 뭐라도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진짜 하는 수 없이 조금만 받은 것이다.

싫다고 그러는데 다들 가져가라고 눈을 반짝거려서.


“···오, 이건 금화 아닌가! 내가 좋은 곳에 쓰겠소이다. 극락왕생 하시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체의 눈을 감겨준 뒤 주머니를 든든하게 채워줬다.

물론 나도 미친놈은 아니라서 일반인의 시체까지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건 진짜 살인에 찌든 전쟁광들의 사고방식이다.


전쟁은 진절머리가 난다.


“흐흠.”


내가 죽인, 그리고 자기들끼리 싸우며 죽어버린 이들의 시체만 뒤적거린 뒤 윗층으로 갔다.


“오오!”


활짝 열린 방문이 여덟이다.

안에는 미처 챙기지 못한 짐들이 들어있었다.


어떤 불한당이 이들의 물건을 혹여 도둑질하지나 않았는지 꼼꼼히 점검한 뒤 내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내 짐은 멀쩡히 잘 있었다.


“그럼 돌아갈까.”


다시 아래로 내려왔는데, 이게 웬 걸?


“끄으으.”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자가 아직 살아있었다.

그것도 바닥을 기어갈 정도로 튼튼하다.


“뭐야. 왜 죽은 척하고 있었지?”


내가 짐 뒤지고 있을, 아니 극락왕생을 빌며 지박령들의 원귀를 달래고 있을 때는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왜 이제와서 움직이고 그러실까.


“다, 당신은.”

“다 봤으면서 모른척하지 말게. 그래, 왜 이제야 움직였지?”

“···다, 당신이 이미 떠난 줄 알았소이다.”

“거짓말.”


그렇게 시끄럽게 돌아다녔는데 내가 다시 내려오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진짜로 이 빌어먹게 삐그덕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를 못 들었다고?


“원하는 게 뭔가.”


유일하게 멀쩡한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쳤다.

청성문의 강, 뭐더라. 아무튼 강모씨가 먹다 남긴 술병이 보였다.

킁킁.

뭐야 이 새끼. 이거 차잖아? 아니,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왜 술병에 차를 담아 마셔?


“희한한 새끼네.”


꿍얼거리며 쓸모없는 이놈 대신 진짜 술병을 찾아 움직였다.

보자, 아까 슬쩍 보니까 여관주인이 꿍쳐둔 괜찮은 술이 있었는데.

옳지! 여기 있구나!


“흐흐. 발렌의 명주라니.”


부드러운 자태를 뽐내는 갈색병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데, 뒤에서 헛기침이 들려왔다.


“고, 공. 제발 살려주십시오.”

“응? 아직 안 갔어?”


모른척하고 있을 때 튀지. 왜 아직 남아있냐.

곧 있으면 강소 그 놈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아, 안 그러려나?

그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벌써 물령 근처까지 달려갔을지도 모르겠다.


“부탁드립니다, 공. 제 여동생을 살리고 싶습니다. 염치 없지만, 불쌍한 이를 도와주신다 생각하시고 한 번만.”

“싫어.”


단호한 거절에 침을 꿀꺽 삼킨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란돌. 성은 이즈한입니다.”

“란돌 이즈한. 아니, 이즈한 란돌인가? 성이 앞에 붙나 뒤에 붙나? 난 그런 쪽은 영 문외한이라서. 무식한 야만인 출신이거든.”

“···동생의 무례는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왕실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제발, 공.”

“흐흠.”


풀네임은 이미 알고 있다.


성과 이름으로만 이루어진 동양식 귀족들과 달리 서양식 귀족은 구성이 특이하다.

퍼스트, 미들, 라스트로 나뉘며 이중 라스트가 진짜 성씨다.


그리고 이들은 이즈한 란돌, 이즈한 레이나.

성씨가 앞에 붙는 동양식 귀족, 아니 왕족이다.


‘이즈한 왕국.’


이미 몰락한 동양의 소국, 이즈한.

하늘의 축복을 받은 듯한 천애의 위치를 뿌리 삼아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이들은 2백년 만에 몰락했다.

전부 왕족들의 잘못이다.


그러게 건드릴 걸 건드렸어야지.

아무리 영생이 탐나도 마족과 계약을 하면 쓰나.


“뭘 줄 수 있는데?”


란돌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몰락한 왕족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원래라면 돈이나 지위 같은 걸 약속했겠지만, 내 경지를 들었으니 그런 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란돌이 내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지식.


난 이즈한의 왕족이 가진 지식을 원한다.

그들이 마족과 계약하며 뜯어낸 세상의 진리는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각 중 하나다.


그렇기에 처음 각오와 달리 란돌과 레이나를 돕는 대신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들이 쓰는 검술을 보고 바로 이즈한의 왕족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에.

···뭐, 청성문과 엮이기 싫은 것도 한몫 했고.


‘주지 않겠다면, 뺏는 수밖에.’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란돌은 쪼잔하지 않았다.


“전부! 전부 드리겠습니다! 공께서 저희를 살려만 주신다면, 원하시는 걸 전부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몸이라 해도!”

“아니, 그건 필요없어.”

“크흑. 안타깝지만 제 정조라도 원하시면 드리겠,”

“필요없다고 이 새끼야.”


이 새끼들이 왜 자꾸 이러지.

보는 놈들마다 나를 게이로 생각하네. 난 건장한 사내라고.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내라서 여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하지 않게 똑바로 말하자.


“난 여자가 좋아.”

“제 여동생은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아, 꺼지라고!!!”


***


“크흑!”


숲을 뚫고 달려가던 레이나가 눈물을 훔쳤다.

거칠게 훑어낸 손목을 따라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 나 때문에.’


방심하고 있다가 일격을 허용하다니.

그 탓에 또 희생자가 생겼다.


‘난 왜 이럴까.’


멍청해도 너무 멍청하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성숙해지지 못하는 건, 비단 그녀의 성장배경 때문만은 아닐 터.

그녀도 스스로 품은 천성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챘다.

이놈의 성정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고생을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여태까지는 다른 이들의 희생으로 어찌어찌 위기를 넘겨왔지만, 이제는 그럴 사람도 없다.

남은 건 그녀 하나뿐이다.


‘그 새끼들!’


한심한 자신을 향한 자책은 이내 추격자들을 향한 분노로 뒤바뀌었다.

망할 새끼들.

왕국을 멸망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지독한 추격이라니.


그들이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저 항구 이용료를 조금 올렸을 뿐이다.

겨우 그 이유 하나로 선전포고를 하다니?

협상을 하려는 노력도 없이, 곧바로 시작된 전면전에 황망한 표정이 되었던 아버지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개새끼들!”


그건 분명 준비된 전쟁이었다.

아무리 이즈한이 작은 소국이라 해도 결코 약한 국가가 아니었다.

인구수가 적은 이유는 오직 기반으로 삼은 섬의 크기가 작아서일뿐, 되려 국가의 크기를 생각하면 거느린 해군의 숫자는 다른 국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아홉 개의 바다를 주름잡는 검은닻 해적단도 감히 이즈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막강한 함대도 황제의 발아래 모인 군대를 막는 건 힘겨운 일이었다.


제국의 위명이 허명이 아니라는 듯 바다를 가득 채운 함대의 물결은 경이로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 엄청난 물량공세에 이즈한은 결국 몰락했다.


‘배신자 새끼!’


허나 그토록 빨리 몰락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는 모두 배신자인 사공 위한 때문이었다.

국정을 총괄하던 그놈이 감히 아버지를 배신하고 기밀정보를 제국에 팔아넘긴 탓이다.


“찾았다!!”

“큭!”


어느새 뒤를 따라잡은 추격자들이 단검을 던져왔다.

이번에는 평범한 형태의 단검이 아니라, 끝을 날카롭게 벼리고 작살처럼 휘게 만든 변형단검이었다.


쉭!

허공을 날아온 수십개의 단검을 이리저리 비틀며 피하는 사이, 추격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흐흐.”


비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이리 될 것이었다면 뭣하러 도망쳤을까.

차라리 오라버니 옆에서 같이 죽는 게 나았을텐데.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그건 아마도 살아나갈 수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혈육과 충신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수 없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다.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질에 불과하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원수를 갚고자 하는 열망이 가슴속에 있었다면, 그럼 오라버니를 살렸어야 한다.


왕국을 부흥시킬 유일한 희망을 살리고, 그녀가 대신 그 자리에 남았어야 옳다.

하지만 쓰러진 오라버니를 본 순간 반사적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헛소리를 되뇌이면서.


“미안, 오빠. 나도 곧 따라갈게.”


조용히 각오를 마친 레이나가 칼을 뽑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치기 위해 던져버린 애검 대신 낭창낭창 휘어지는 연검이었다.

그 독특한 생김새에 적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연검은 다루기 힘든 무기다.

매미 날개처럼 얇고 투명하여 작은 바람에도 칼날이 휘며 경로가 틀어진다.

하지만 그런 패널티를 감수하며 경지에 오르면, 능히 두 단계 위의 고수도 상대할 수 있다는 기병이었다.


“흡!’


얕은 날숨과 함께 돌격했다.

하지만 그 각오와 자세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제압당해 검을 빼앗겼다.

긴장하고 있던 추격자들이 비웃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뭐야, 난 또.”

“괜히 긴장했군.”

“어서 해치우지.”

“벌써?”

“왜 아쉽나? 한 번 하려고?”


더러운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곧 당할 끔찍한 일에 치가 떨렸다.

혀라도 깨물고 싶었지만, 어느새 혈도가 짚혀 있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이상한 짓을 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개소리.”

“진정해. 농담이었으니까. 바로 고문하자고.”


대신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약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어금니에 독약을 숨겨뒀다.

적당히 고문 당하다 정보를 뱉는 척하며 깨물면 고통없이 단숨에 갈 수 있을 터.

그때까지는 싫어도 고문을 당해야 한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이즈한의 마지막 남은 왕족이니까.

싫어도 피할 수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만.”


굵직한 저음.

저벅저벅 걸어서 곁으로 다가온 사내가 바닥에 떨어진 연검을 집어들었다.

이제 40쯤 되었을까.

머리끝이 하얗게 세기 시작한 중년의 사내였다.

레이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내였다. 그렇다고 추격자들과 연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뭐냐!”

“조용. ···어느 고인이십니까?”


추격자들이 경계 섞인 표정으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의 눈은 정확히 레이나를 향했다.

그 눈이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연검을 다루기에 한껏 기대했더니, 쯧쯧. 그럼 그렇지. 소설에 찌든 여검사들의 망상이란.”


한숨을 푹푹 내쉰 사내가 손목을 비틀었다.

연검이 하늘거리며 허공을 휘저었다.

번데기를 벗어난지 얼마 안 된 매미의 날개처럼 볼품없이 흔들리는 연검.

검술에는 자신이 없는 레이나조차 저 정도 실력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생각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추격자들이 어깨를 풀었다.


“별 거 아닌 놈이었군.”

“그러게 난 또 기척도 없이 다가오기에 대단한 고수인 줄 알았네. ···쳐.”


남자가 혀를 찼다.


“쯧쯧쯧.”


달려들던 추격자들의 몸이 일제히 쪼개지며 흙바닥 위로 쏟아졌다.


“아둔한 것들. 이미 죽은 줄도 모르고 멋대로 떠드는구나.”


시체를 피해 가까이 다가온 중년의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몸이 무섭게 떨려왔다.


‘천령공 이상이다.’


왕족인 그녀조차 이 정도의 고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가야. 연검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닌, ···호오.”


멋대로 훈계를 늘어놓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허어. 별 일 아닌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네 출생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구나. 이 정도 고수가 뒤를 쫓다니 말이야.”


두 눈이 그녀가 도망쳐 온 길끝을 정확히 노려보고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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