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속 야만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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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문
작품등록일 :
2024.08.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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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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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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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물

DUMMY

***


왕족은 그에 걸맞는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책임도 의무도 아닌 권리다.


천민이나 양민들은 기품도 위엄도 없으며, 설령 있다해도 드러내면 아니된다.

그걸 드러내야 할 의무를 가진 이들은 귀족과 왕족 같은 푸른 피들이다.

붉은 피들이 이들을 흉내내면, 바로 붙잡아 감히 그 불경한 핏물을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 지배자들의 생각이었다.


해서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 한 것이다.

오직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곤란하군.’


허나 란돌은 평생 간직한 그 소중한 특권을 누릴 수 없는 형편에 처했다.


“곤란하군.”


비단 란돌과 똑같은 말을 입에 담는 눈앞의 사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란돌을 사로잡은 이 정체불명의 미녀 납치범 때문도 아니었다.


“너는 설마···.”


란돌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

열 대의 마차와 오십 마리의 말과 기수, 그 뒤를 따르는 백여 명의 병사들 너머 홀로 동떨어진 여인.


“란돌?”


가장 고귀하다는 파란 눈과 금발.

하얀 뺨과 목 아래에는 마탑의 선생들에게만 허용되는 붉은용수와 초록색 로브가 드러났다.


“맞구나.”


여인이 환하게 웃었다.


“사,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란돌이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피했지만, 여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말을 몰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대치중인 괴한과 사내를 무시한 채 란돌에게 접근했다.


“꺼져라.”


괴한의 손이 검집을 치자 그제야 여인이 웃었다.


“뭐야, 그새 새 애인을 구했어? 하여튼 참 부지런하다니까.”

“유, 유리아. 오해야. 내가 차근차근 설명할게. 일단 진정부터하고···.”

“진정? 난 지금 굉장히 차분해. 사랑하는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고생 중인 줄 알았던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사랑의 도피 중인 걸 발견했을 뿐인걸? 하나도 화나지 않았어. 세상 전체를 뒤져도 지금 나보다 더 차분한 사람을 찾기도 힘들걸?”


유리가 환하게 웃자 손에 들린 마법봉이 그 미소처럼 빛났다.

오색찬란한 마력이 봉 끝에서 줄줄 새어나오더니 바닥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휘릭! 휙!

촉수처럼 이리저리 튀며 꿈틀거리는 마력. 아니, 마법.

그건 유리아가 스승이자 대마법사인 레슨놀에게 사사받은 비전마법 중 하나였다.


“지, 진정해! 그걸 여기서 쓰면,”

“도시 하나는 날아가겠지. 걱정하지 마. 예전보다 실력이 늘어서 잘 다룰 수 있게 됐거든. 도시가 아니라 사람 하나만 날리면 돼. 겸사겸사 그 빌어먹을 거시기도 잘라주지. 잘린 뒤에도 바람을 필 수 있을지 궁금한걸?”

“튀어요! 당장!!!”


촉수가 튀어올랐다.


‘빠르군.’


하지만 괴한, 아니 암살자인 16호는 그럴 수 없었다.

멀쩡한 이름이 있었지만, 스승님께 부여받은 이 번호가 그녀의 진짜 이름이다.

16호가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켜쥔 채 정면을 응시했다.


휘릭! 휙! 휘리리릭!

전력으로 달리는 말보다 빠른 속도. 하지만 진짜 고수들에 비하면 굼벵이 같이 느려터졌다.

특히 최근에 만난 레손과의 전투가 그녀에게 큰 깨달음을 전해줬다.


‘아무리 빨라도 도착하는 곳은 한 점이다.’


아무리 기묘하고 빠른 공격이라 한들, 결국 노리는 것은 그녀의 몸 중 한 부위다.

저 유리아라는 마법사가 자기 말처럼 통제력이 뛰어나다면 노리는 곳은 급소일 터.


‘목 아니면 머리.’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인 부위를 노릴 터.

16호가 칼을 뽑았다. 지척에 도달한 촉수가 그녀의 칼에 휘감겼다.

생각하던 곳과 정확히 일치하는 공격에 그녀의 눈에 잠시 환희가 깃들었다.


‘그 배신자 놈의 말로 깨닫다니.’


울컥 짜증이 치솟았지만, 그렇다해서 이미 얻은 깨달음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지, 이 깨달음으로 널 죽여주마.’


잘난 듯이 지껄이던 흉악한 면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잠시 얻은 깨달음의 유열은 그녀를 너무나 방심케 만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유리아의 촉수가 몸을 비틀었다.


“마법사가 힘 싸움을!!”


건방진 짓거리에 화가 치밀어오른 16호가 칼을 잡아당기며 사선으로 비틀었다.

회오리치듯 날이 뒤틀리며 촉수가 잘려나갔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도 검기에는 견딜 수 없다.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검사들이 마법사의 천적이 된 첫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바로 단련된 육체의 차이였다.


엄청난 속도로 접근한 16호가 유리아의 면상에 칼을 내리찍었다.

란돌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윽.”


끔찍한 파육음이 울렸다.

돈까스 망치로 살코기를 마구 내리찍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

뒤이어 바닥에 떨어진 것은 피투성이가 된 16호였다. 발목에는 촉수가 휘감겨 있었다.


“자, 우리 자기.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유리아. 이러지 마. 너희까지 휩쓸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걱정할 필요 없어.”


가까이 다가온 유리아가 란돌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독수리의 손톱처럼 날카롭게 움켜쥔 뒤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이 마치 자기 먹잇감에 하자가 없는지 확인하는 맹수 같았다.


“스승님을 설득했거든.”

“너, 설마.”

“그놈의 위치만 불어. 아니, 위치는 모르겠구나.”


유리아가 미소를 짓자 눈가를 따라 마력이 눈물처럼 떨어졌다.

푸른 마력이 아닌 검은색 마력. 그건 흑마술사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모든 원소가 뒤섞이며 검은 구정물처럼 변한 것 뿐이었다.


“기억을 확인할 거야. 뇌를 좀 건드릴건데 큰 문제는 없을테니 너무 걱정하지마.”

“···식물인간은 관심없는데.”

“그럴 일 없어.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지금처럼 멋대로 좆대가리를 휘두르고 다닐 일은 없을테니까.”

“왕족다운 언변을 썼으면 좋겠군.”

”너만 할까.”


유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혼자인 란돌의 머리를 쥔 채로 질질 끌며 마차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짐짝을 다루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닥에 닿기 전 역장을 펼쳐 다치는 걸 막는 모습을 보면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군.’


란돌의 눈이 바닥을 물들이는 핏덩어리로 향했다.


“끄으으. 무, 무슨 마법사가.”


출혈이 심각한데도 아직 움직이다니. 확실히 검사들은 터프하다.

하지만 유리아는 그보다 더 터프했다.


“마법사도 그 나름이지.”


모든 원소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기실 저주와도 같다.

한쪽으로만 특화되어야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전부를 익히는 것보다는 하나만 줄창 파고드는 편이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하지만 타고난 마력 친화력을 버릴 방법은 없다.


해서 유리아는 접근 방식을 바꿨다.

모든 마력을 뒤섞어 벽을 넘는다.

써클뿐 아니라 무사들의 연공법, 그리고 주술사들의 술법까지 익혀 원소를 제어했다.

그 결과 유리아는 육관에 준하는 검사들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무식한 육체를 손에 넣었다.

여기에 마법까지 더해지자, 그녀는 단숨에 마탑이 최고전력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돌아가자.”

“예, 부학장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폭풍이 몰아쳤다.

그건 폭풍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칠고 흉악했다.

후두둑.

깊게 패인 흙더미를 뚫고 남자 하나가 걸어나왔다.

남자를 알아본 란돌이 기껍게 외쳤다.


“레손 공!”

“레손?”


유리아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흘러내리던 마력이 다시 역류하며 시커멓게 뒤덮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지?”

“그건 알 거 없고. 그 남자한테 볼일이 있다. 돌려줬으면 좋겠군.”

“흑마술사의 위치는 모를 겁니다.”


레손이 피식 웃었다.


“정보만 얻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흐음.”


잠시 고민하던 유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제국에 들키면 전부 몰살 당할테니.”

“안 들킬거야.”

“믿을 수 없군요. 그리고.”


유리아의 손이 란돌의 뺨을 쓸어내렸다.


“제 약혼자를 외간남자에게 맡길 수야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약혼? 이야! 아주 개새끼였네!! 이렇게 예쁜 애인이 있으면서 그러고 다닌거야? 세상에!! 사람 새끼가 아니로군.”

“···뭐라고요?”

“아 이런, 실언을 했군. 예쁜 사랑하시오.”


레손이 몸을 돌리자 유리아가 급히 불러세웠다.

란돌의 얼굴은 이미 검게 죽어 있었다. 저 인간이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란 말인가.


‘설마 봤나?’


여동생한테도 안 들켰는데?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유리아가 무서운 눈으로 란돌을 노려봤다.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가능한 자세하게.”

“그게 말이지. 저 친구가, 그. 아유, 기루에 들리더라고.”

“기루?”

“거짓말이다! 유리아! 내가 머물던 도시에는 기루가 없어!! 내가 싹 훑어봤다고!”

“왜 훑어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흑마술사에 대한 정보를 풀겠다! 당장 나를 데리고 가! 어서 여기를 벗어나자고. 빨리 너와 단둘이 있고 싶,”

“쯧쯧쯧.”


혀를 차던 레손이 란돌을 가리켰다.


“그 기루가 아니고, 왜, 그 남자만 있는 곳 있지 않은가. 거길 들리더라고. 저 친구 이제는 여자로는 만족을 못하는 몸이 된 모양이야.”

“씨발!?”

“란돌.”


유리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 갈 때까지 갔구나.”


란돌은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렴 아무리 그가 바람둥이라지만, 이제는 하다하다 남자까지 손을 댔다고 오해를 하다니?

아니, 애초에 저 인간의 어디를 믿고 그런 말도 안되는 누명을 믿는단 말인가!


“너라면 그럴 법해. 충분히 하고도 남지.”

“···.”


물론 전부 란돌의 잘못이었다.


유리아가 손을 들어 촉수를 불러들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란돌의 몸을 휘감는 것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참에 제대로 낙인을 찍어주지. 네 몸뚱이가 누구 것인지 평생 잊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촉수가 몸을 더듬으며 올라왔다. 뺨을 철퍽철퍽 치는 꼴이 굉장히 음산했다.


“유, 유리아 살려줘.”

“닥쳐.”


옷이 찢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기척도 없이 다가온 레손이 유리아의 뒤에 서 있었다.


“멈춰.”

“···경지를 숨겼군.”

“그래. 그러니까 멈춰. 네 약혼자는 내가 데려가야겠다.”


주먹이 유리아를 후려쳤다.

풍압에 마차가 통째로 박살났다.

하지만 유리아의 몸은 바닥을 튕기며 날아갔다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갑자기 허공에 멈춰섰다.

거꾸로 서 있던 육신이 빙글 회전하며 신형을 바로했다.

그 모습이 마치 거인이 유리아라는 인형을 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은 형상 같았다.


“단단하네. 그 이상 무리하지 마라. 일부러 살살 친거니까. 네 약혼자는··· 음, 내가 적당히 쓰다 돌려줄테니 너무 걱정하지말고. 다 쓰면 돌려주지.”


란돌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누가 들어도 오해할 말투 아닌가.


“뭐?”


예상대로 유리아의 눈이 쭉 찢어졌다.

인상을 찌푸렸다는 뜻이 아니었다.

정말 좌우로 찢어졌다. 그것도 10cm 가량을.

철퍽.

찢어진 눈 사이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촉수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유리병에서 문어가 기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 나암.자.를.네,네.가 왜 써.”

“···란돌. 너 저런거랑 약혼한 거냐? 사람이 아닌데?”

“유리아가 계약한 외신 중 하나입니다. 레손 공이라 해도 위험할테니 일단 피하시지요.”

“그래야겠는걸.”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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