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의 검은사탑과 작두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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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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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작10

DUMMY

10화


세계수 중앙은행 앞은 지금 엘프녀들의 축제로 떠들썩하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언제 왔는지, 필수인력을 제외한 골렘비전의 직원들도 버스를 타고 와서 같이 합석하였다. 거기에는 이세옥 사장도 와 있었다.


무복(巫服)을 입은 동방진을 양옆에 테레지아와 실비아가 꽉 붙잡고 놔주질 않아 꼼짝없이 앉아 술과 음식을 먹이는데, 그는 지금 불면증의 피로감에 작두타기로 인한 체력과 정신력 모두 바닥인 상태라 지금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용하다.


동방진의 작두굿이 끝나고 굿을 위한 상차림 음식들을 제사상 음복(飮福)하는 것처럼, 엘프들도 다 같이 모여 앉아 먹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많이 차렸는지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예상외로 엘프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데, 먹는 양이 상당했다. 정말 보기와는 달랐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알 수 있다.


그때, 골렘비전의 이세옥 사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진 씨, 덕분에 엘프들의 한풀이가 제대로 된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동방진이 물음에 이세옥 사장은,

“사실 엘프 사회는 자연을 중시하고 소통하는 토속신앙이 강한데, 자발적이긴 하나 공장에서 전쟁 군수품을 만드느라 근래에 이런 초자연적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기다 제사장님도 연로하시기도 하고, 요즘에는 마법에 관해서 조언 정도만 해주시는 고문 역할만 하셨거든요.”


“그래서 엘프족들 전체가 이런 초자연적 경험에 대한 욕구불만이 상당했는데 그걸 오늘 진 씨께서 풀어주신 겁니다.”

라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을 들은 테레지아와 실비아가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대강 알아들은 동방진은 어제부터 궁금했던 점을 그에게 물어본다.


“사장님, 그런데 왜 여기는 엘프 남자들이 제사장님을 제외하고 한 명도 없나요?”


“진 씨가 물어보실 줄 알았습니다. 그건 10년 전 연합군들과 함께 엘프 남자들이 모두 저 검은 사탑으로 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건 저번에 말씀해주신 얘기로 대충 짐작은 하였는데, 제 말은 여기 1,000명에 가까운 한국 남성들이 있고, 이렇게 청춘남녀들이 어울려 사는데, 왜 혼혈 아이들이 한 명도 없는 거죠?”


“아, 그건······.”


대답하기 곤란한 표정을 짓는 이세옥 사장이었다.


****


그를 대신해 옆에서 살짝 취기가 돈 테레지아가 대신 대답하였다.


“그건 우리가 아이 낳기를 거부하고 있는 거야.”


“아니, 왜? 나한테 1등 신랑감이라며 그렇다면 여기 나보다 잘생긴 남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저들은 1등 신랑감이 아니야? 아니면 지금 탑을 오르고 있는 엘프 남자들하고 미래를 약속했어?”


동방진은 테레지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세계수를 휘감고 있는 검은 사탑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여기 있는 한국 남자 전부다 1등 신랑감 맞아. 숫총각에 겨드랑이 암내도 안 나고 완전 우리 이상형들이야. 그리고 세계수의 신성한 부름에 응한 엘프 남자들은 대부분 우리 오빠나 남동생들이야. 다 가족이라고.”


“우리가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건 바로 저거 때문이야. 저 검은 사탑 때문에 이 콘돔 없는 짝짓기는 공포 그 자체라고.”


“우린 저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사탑의 영향을 인간들보다 훨씬 많이 받아. 우리 여자들이 위에 올라간 우리 가족들을 위해 군수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고 있으니까 덜 신경 쓰이는 거지. 내 아이를 여기서 낳고 키운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육아하다가 미쳐버릴 거야.”


털썩-

“언니.”


취기에 속에 있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테레지아는 마음이 홀가분한지 그대로 잔디밭에 누워 잤다. 그런 그녀를 돌보는 실비아였다.


“테레지아 씨가 연구소에서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네요. 저기, 진 씨. 저랑 같이 어디 좀 들를 데가 있는데, 혹시 지금 괜찮으시겠어요?”


이세옥 사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동방진이다.


“네, 가시죠.”


아무래도 긴히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여서, 동방진은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


벌써 해는 넘어갔고, 중앙은행 앞 공터에서는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아예 캠핑할 작정이다. 삼삼오오 모여 텐트를 치는데 어째 한국 남자 한 명에 엘프녀 서너 명이 자연스럽게 뭉쳤다.


이세옥 사장의 뒤를 따르던 동방진은 뒤돌아 그 광경을 보고 물어본다.


“사장님, 오늘 무슨 날인가요? 그리고 남자들보다 엘프녀들이 상당히 많네요.”


“하하, 오늘 제사장님 권한으로 특별히 공장들이 쉬는 날이기도 하고요. 아마 오늘 테레지아 씨가 만든 콘돔이 가장 많이 팔릴 날이기도 하겠네요.”


골렘비전 사장이 직접 남성 피임 용품 관련 농담하자, 동방진은 조금 놀랐다.


“네? 그게 무슨······.”


“하하, 사실 이곳의 성비가 5 대 1입니다. 10년 전 저를 따라 봉기했던 병사들이 약 1,000명 정도가 되는데, 그때 엘프족 남자들만 검은 사탑으로 가고 그들의 혈육인 엘프 여성들과 제사장님만 남게 되어 그 수가 5,000이 조금 넘지요.”


그렇게 둘이 이야기하다가 도착한 데가 잘은 안 보이지만, 커다란 금속 벽이 가로막은 곳이었다.


“진 씨, 저를 따라 이렇게 걸으시면 됩니다. 여기는 제가 머리가 복잡할 때나 생각할 게 많을 때 찾는 저만의 둘레길 같은 곳이지요.”


둘은 커다란 금속 벽을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한 바퀴를 걸었는데 생각보다 길었다.


“사장님, 이건 뭐죠? 무슨 벽인데 이렇게 허허벌판에 덜렁 있는 거죠?”


“저도 몰라요. 옛날부터 있는 것인데 엘프들하고 웰시코기들은 신성한 곳이라며 함부로 오지 않더군요. 거기다 검은 사탑교 신도들도 오지 않는 곳이라 제가 애용하고 있지요.”


“아까 그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 말씀인가요?”


“네, 맞습니다. 교주가 강완몽이라고 10년 전에 같이 온 대위였던 여성입니다. 신도들도 대부분 여군 출신들이고요. 지금은 군인도 뭣도 아니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주폭(酒暴)이랄까요. 하하하.”


“아, 네 그렇군요.”


저벅저벅-

동방진은 이세옥 사장과 같이 걸으면서 금속 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우선 이 사장이 자기를 따로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저기 사장님 그런데 저를 따로 부른 이유가 있지 않은가요?”


“그건 진 씨가 불면증이기도 하고 거의 쓰러지기 일보인 상태인데, 괜히 엘프 여성들에게 이끌려 같이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가 복상사할까 봐서요.”


“네?”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오늘따라 이 사장님 농담을 많이 하시네요.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닙니다. 저 지금 겨우 서 있는 겁니다. 어차피 세계수 양반이 절 자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사실 제가 엘프들과도 진 씨의 증세를 상의했지만, 아마도 저희가 가지고 있는 포션이나 해독제도 소용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엘프들은 세계수의 강력한 부름일 거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즉 진 씨께서 저 검은 사탑에 오를 운명이라는 거지요.”


이세옥 사장의 말에 동방진은 속으로 납득하였다.


‘진짜 신병 같은 건가 보네.’

‘작두도령이 될 때도 신병은 안 앓았는데.’


세습무인 동방진 입장에서는 이곳 세계수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신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해결하려면 직접 그 문제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검은 사탑으로 가려고 마음먹은 동방진에게 이세옥 사장이 본론을 꺼냈다.


“진 씨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동기가 정당하든 아니든 국가 입장에서 저희는 사실상 명령 불복종한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렇겠네요.”


****


이세옥 사장은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표정을 한 동방진에게 뭔가 호소하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저를 비롯해 직원 모두가 여기에 살고 싶어 합니다. 엘프 여성들과도 관계도 좋고, 마나라는 미지의 에너지도 풍부해 인류와 엘프의 번영은 약속된 거랑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저 검은 사탑 때문에 엘프들이 출산을 거부하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그녀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달라 고민이 많습니다.”


“10년이야, 천년을 사는 엘프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아니잖습니까. 20대였던 우리가 벌써 30대가 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 멋진 세계에서 아름다운 여성들과 후대를 못 잇는다면 그건 아름다운 헬 반도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장의 열변에도 덤덤한 표정인 동방진이었다. 그의 약지에 있는 호박 가락지 신령인 훤화 아씨 때문에 어차피 이성과의 관계도 맺지 못한다.


만약 절정상태에서 잘못해 만지거나 입김이 닿는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뻔하지 않은가. 물론 엘프 여성들이 매우 매력적이지만 지금은 성욕보다 수면욕에 대한 갈망이 아주 큰 그였다.


“사장님 말씀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저 검은 사탑에 가봐야겠습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갈 때 가야지 이러다가 불면증 때문에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 할 지경입니다. 그럼 이만.”


“진 씨, 미안합니다.”


“네?”


덥석- 탁

갑자기 이세옥 사장이 그의 손을 붙잡고서 그대로 금속 벽에 그의 오른손바닥을 닿게 하였다.


츠츠츳- 파지직-

금속 벽에 닿은 동방진의 오른손바닥이 접착제를 발라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고, 그의 손바닥에서는 뇌전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뭐야! 이 사장님 지금 이게 뭡니까?”


“진 씨, 전 공학도로 무당의 말 따윈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당신이 보여준 그 빙의는 진짜입니다. 어떤 한국인이 엘프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하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손을 대고 있는 이 벽은 사실 벽이 아니라 ‘무명 거인의 대검’이라 불리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잘랐던 ‘작두대검’입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동방진은 소리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 양반 뜬금없이 뭐라고 한 거야. 무슨 독고구검도 아니고 작두대검?’


동방진이 속으로 어이없어하든 말든 이세옥 사장은 멀찍이 물러나며 자기 말만 하였다.


“당신같이 세계수의 강력한 부름을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작두대검이 반응한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선택받은 전사예요. 저 검은 사탑을 무너뜨리고 우리를 이 신세계에서 살게 해줄 선택받은 사람이요.”


“아니 이 사람아, 이······.”


파지직- 파지직-

동방진은 얄미워 보이는 이세옥 사장을 향해 욕을 하려 했는데, 그 순간 엄청난 힘이 온몸에 뻗치면서 그를 위로 끌어올렸다.


[맙소사, 동방진 너 지금 누굴 깨운 거니?]


작두대검에 흐르는 엄청난 에너지에 강제로 불린 훤화 아씨가 동방진을 부르며 찾았다. 하지만 이미 그는 무아지경 상태로 작두대검 칼날 위에 서 있었다.


그의 발바닥과 두 눈에는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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