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했더니 귀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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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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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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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윈. 윙윙

DUMMY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지?”


들깨 꽃이다. 아직 3월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하얀 들깨꽃이 하나씩 피어나고 있었다.


“하루도 안 되어서 잎이 나더니 오늘은 꽃이네.”


이미 비슷한(?) 것을 한 번 본 탓인지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성은 오히려 한 발 떨어진 태도로 상황을 분석해 볼 수 있었다.


“매운 걸 먹었더니 뜨거워진 건가?”


깻잎이 자랄 때도 그랬지만, 꽃이 피는 지금은 확연히 온도가 달랐다. 매운 맛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한, 다소 상기된 얼굴로 아이가 외쳤다.


“반짝반짝 해!”


* * *


아침에 박사장 아저씨, 점심에는 계씨 아주머니, 오후에 장을 보고 돌아온 저녁. 밥과 술이 식탁에 올라간다.


햇빛을 크게 가리지 않으면서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방수포와 천막으로 적당히 가려 놓은 텃밭은, 아직까진 들깨꽃들 뿐이다.


그리 작지 않은 밭에 그 흔한 잡초 하나 없이 들깨꽃 몇대만 덩그러니 있는 풍경은 당연히 황량하지만


그걸 보는 마음은 어딘지 여유롭다. 저녁이라서일까. 어쩌면 마음이란 어떤 풍경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풍경을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될까요.”


다소 괴상한 현실이 괴롭고, 낯설고, 무섭지 않다.


“계속 되길 바라냐, 이쯤에서 멈춰주길 바라냐.”


술을 한 잔 따라주며 아버지가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냥.”


붉게 타던 석양이 산을 넘어가며 보랏빛 구름을 남기고, 파스텔풍 하늘이 점차 채도를 낮춰가면, 산에서 볼 수 있었던 모든 풍경들은 눈이 감긴듯 검게 물들어 간다.


방금 지은 따끈한 밥을 한 숟갈 떠 입 안에 넣고, 발갛게 양념된 닭갈비를 깻잎 위에 한 점, 아니 욕심을 좀 내어 두 점을. 그리고 냠냠 먹는다.


“아까 전에 저 애가 닭갈비를 먹더니 막 매워하는데, 가슴이 철렁하더라고요.”


하늘이 완전히 검어지기 전, 성급히 나와 있던 별들이 친구라도 부른양 다 함께 쏟아지고


깻잎쌈 오물오물하며 삼키기도 전에 소주를 한 잔 주고 받는다. 맛있다. 달다.


“그런데, 제가 물도 좀 주고, 맵지 말라고 몇마디 했더니만 꽃을 피워버리지 뭡니까?”


달도, 별도 쏟아지고 술잔도 오고가고, 아버지도, 아들도, 아이도 신이난듯 각자의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뭐? 얼른 마시고 얘기해 봐라.”

“서로 윈-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윈-윈?”

“네, 제가 일방적으로 받는 게 아니라 제가 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아버지의 말에는 재촉은 있어도 압박은 없다. 별 것 아닌 이 순간을 지난 10년간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냥, 뭐가 됐건 이대로 살고 싶다고요. 초봄에 들깨 꽃이 피는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나건 여기서 멈추건. 그냥 여기서 되는대로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웃음이 대성의 술잔 위로 더해지고, 술잔 쨍하는 소리가 함께 설렁설렁. 오늘, 2월의 하루가 또 한 번 마무리 되어 간다.


* * *


풍경 좋고 공기 좋은 시골 산 속이라도 도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으으······.”


숙취다.


“일어나라, 젊은 녀석이 뭐 이렇게 잠이 많아?”


전 날에는 새벽에 절로 눈이 떠졌건만, 밤새도록 마신 여파인지 오늘은 몸이 무거웠다.


“으으······ 10분만 더······.”

“이미 10시간을 넘게 잤다 이 녀석아.”


방 안이 밝다. 눈이 번쩍 뜨인다. 황급히 일어나 양복을 찾는다. 역시나 해가 중천.


“좆 됐!···을리가 없지.”


잠깐이지만 퇴직 후 시골에 내려왔다는 사실을 망각한 모양. 멋쩍게 웃는 대성에게 아버지의 손이 내밀어졌다.


“얼른 일어나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읏차! 하며 일어난다.

아버지와 대성의 옛 습관 중 하나다.


“어제는 제법 어른 같은 말을 하나 싶었더니, 아직도 아버지 손 잡고 일어나는 걸 보니 애구나.”

“손은 아버지가 내밀어 놓고 무슨 말입니까 그게.”


서로 씨익 웃으며 부자가 식탁 앞에 앉았다.


“농사 짓겠다는 녀석이 첫 끼를 점심으로 먹으면 어떡하냐. 얼른 먹고 일해야지.”

“예? 일이요? 할 게 있나 지금······?”

“박사장한테 연락 왔다. 씨앗 들여 놨다더라.”

“하루만에요?”

“대량으로 구하는 게 어렵지, 밭 한 뙈기도 안 되는 양 구하는 건 쉬워. 읍내 다녀와라.”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식탁 위가 하나씩 채워진다. 팔팔 끓인 라면과 적당히 식은 밥.


“라면?”

“주는대로 먹어. 대충 차렸다.”


어차피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린 지금, 산해진미를 차린들 제대로 먹을 수 있을리가 없다.


“대충이라뇨. 이 정도면 미슐랭인데.”


자세히 보니 이것저것 많이 들어가 있다.


“오호, 콩나물에, 대파에. 어? 이건 오랜만이네요?”

“이장님네 가서 얻어왔다.”


아버지표 해장라면에는 늘 꽃게가 들어간다. 라면에 넣기에 썩 저렴한 재료는 아니지만, 당연하게도 넣고 안 넣고의 차이는 크다.


“아침에 다녀 오신 거예요? 설마 저 먹이려고?”

“무슨 소리냐? 그냥 인사차 다녀온 거지, 다 큰 아들 뭐가 이쁘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콩나물의 뿌리가 세심하게 다듬어져 있고, 대파와 꽃게도 라면의 맛을 해칠만한 부분은 모두 제거 되어 있다.


“아버지는 안 드세요?”

“너나 먹어라. 나는 정크 푸드 안 먹는다.”


정성스레 차린 음식을 자신이 직접 폄하하며 아버지는 이불 속으로 들어 갔다.


“다 먹고 설거지는 네가 해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후식도 대접하겠습니다.”


첫 젓가락을 뜰 때만해도 이걸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코로 스며드는 향과 게껍질에서 우러나온 깊은 맛에, 곧바로 입이 움직인다.


“아, 시원하다.”


사실 국물이 얼큰하다고해서 해장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맵고 짠 음식은 수분 섭취를 어렵게하여 해장을 방해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티언해?”


어느새 나타난 아이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라면이 담긴 그릇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아, 이건 뜨겁게 시원하다는 뜻이야.”

“뜨거 별로야.”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아이를 보고 피식 웃은 대성이 다음 메뉴를 꺼냈다.


“아버지, 라면은 안 드셨어도 이건 같이 드시죠?”


이불을 돌돌 말고 창 밖을 구경하는 아버지 앞에 시원한 동치미 한 사발과 꿀물 한 컵이 놓인다.


뜨찬뜨찬. 뜨거움 뒤에 찬 걸로 해장한다.

집안의 유구한 전통이다.


얼큰한 라면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겨우내 담가둔 시원한 동치미가 내장에 스며든다.


살얼음 떠 있는 동치미 국에서 느껴지는 발효된 탄산이 일품이다. 사실 들어가는 것도 소금에 절인 무, 청양고추, 파, 마늘이니 어떻게보면 나트륨 과다 섭취지만.


“누가 해장을 영양으로 하나, 맛으로 하지.”


이 정도 조합이면 영양이야 둘째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야, 이건 진짜 시원하다!”


빼꼼하고 슬그머니 나오는 아이에게 대성이 물었다.


“이건 진짜 시원한데, 한번 마셔볼래?”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아이를 위해 대성은 그릇을 하나 더 놓았다.


* * *


발아한 들깨는 몇 대 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당장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얼른 다녀 올게요.”

“천천히 다녀와라.”

“네네, 얼른 다녀올게요. 뭐 드시고 싶은거 있으세요?”

“천천히 다녀오라고.”


어딘가 어색한 말투에 대성이 멈칫했다.


“천천히 다녀와. 나 어디 좀 갈 데가 있다.”

“어디 가시는데요? 태워다 드릴게요.”

“됐다 이 녀석아. 이 아부지는 다른 사람 차 못 타.”


대성의 국산 승용차 옆에 주차된 신형 벤츠가 삑하고 라이트를 빛냈다.


“네 차로는 못 가.”

“네네, 저는 국산차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천천히 다녀 와라.”


* * *


박사장 아저씨에게서 산삼 씨를 받고, 기타 여러 물품을 사서 돌아온 대성은 그새 아버지의 벤츠가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야, 그새 도망 가셨네.”

“윙윙이가 머야?”


대성의 장바구니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이가 물었다.


“응? 윙윙이가 뭐냐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하라부지가 그래떠.”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응. 윙윙이 조으다고 그래떠.”


무슨 말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윙윙이라, 다 커따! 시가니도 업덨는데 다행이다!”

“윈윈이라, 다 컸구나. 시간도 없었는데 다행이다?”


고개를 맹렬히 끄덕이는 아이의 모습.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이 닭갈비 먹고나서 꽃 피운 것 때문에 윈-윈을 생각했었지. 문득 이전에 다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모르네? 난 대성이야. 넌 이름이 뭐야?”

“이르미가 머야?”

“남들이 널 뭐라고 부르는 지 같은거지. 뽀바 같은?”

“아무도 말 안 해.”


생각해 보면 귀신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종종 봤지만, 서로 대화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럼 아저씨 오기 전에는 아무랑 말도 안 하고? 못 하고 그랬던 거야?”

“응. 아무도 말 안 해.”


금새 또 시무룩해져 있다.


“그럼 아저씨랑 앞으로 말도 많이 하고 그러면 되겠다. 그치?”

“어디 안 가?”

“아저씨가 가긴 어딜 가? 갔다가도 금방 오지.”

“그럼 아저띠랑 계독 이뜰래.”


뭔가 와락! 하고 안겨드는 느낌이며, 울컥! 하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대성은 잠깐 목이 메였다.


“크흠, 앞으로 계속 있으려면 이름이가 있는 게 좋겠지? 뭐가 좋을까?”

“뽀바가 조아.”

“뽀바는 뽀바 이름이니까 다른 게 좋을 것 같은데?”


한치의 고민 없이 아이는 다음 후보를 외쳤다.


“윙윙이.”

“응?”

“하라부지랑 아저띠가 조아해. 윙윙이.”


잠깐 동안, 그건 윙윙이가 아니라 윈윈이라고 읽는 거야라고 알려줄까 했지만, 대개 이름이란 실제 뜻과는 별개로 읽히다가 나중에 고유한 가치를 띠게 마련이니


“윙윙이가 좋겠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윙윙이야.”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 그 이름은 아버지가 좋다고 생각했던 윈윈이에서 딴 윙윙이라는 것.


그 윙윙이와 함께 방금 산삼 씨를 심었다는 것 등등.


“아버지, 어디 계세요? 얼른 오세요.”

“그냥 멀리 좀 나와 봤다.”

“좋은 데 가실거면 같이 가시지. 아들 놓고 어딜······.”

“꿈도 꾸지 마라. 넌 아직 멀었어.”


통화는 종료 되고, 이 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아버지의 부재가 위화감으로 다가온 것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은 사흘째. 어느새 3월이 된 날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10년 동안 서울 한 번을 안 오셨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히 설명 된다. 지금 대성의 눈 앞에서 윙윙이가 방방 놀고 있었으니까.


‘이런 애가 있으면 나라도 어디 못 가겠지.’


아버지가 윙윙이를 보진 못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귀신을 여럿 보는 걸 신기해 하셨으니까.


하지만 꼬박꼬박 농사를 시도했거나 제사상을 차려온 것은 집 안과 집 밖의 풍경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시도는 꾸준히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집에만 계시던 분이 지금은 왜 이렇게 안 오시지?’


이제는 전화도 되지 않는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의문이 조금씩 걱정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대성의 머리에 문득 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천천히 다녀와라.’

‘네 차로는 못 가.’

‘꿈도 꾸지 마라. 넌 아직 멀었어.’


무슨 일이 있다. 분명히.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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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적당히 해 +1 24.09.10 118 10 12쪽
» 윈-윈. 윙윙 +1 24.09.09 120 11 12쪽
5 개화만사성 +1 24.09.08 131 12 11쪽
4 아버지와 아들 +1 24.09.07 143 12 11쪽
3 뽀바 +1 24.09.06 160 13 12쪽
2 귀농의 귀가 그런 뜻이었어? +1 24.09.05 173 12 11쪽
1 힘들면 그래도 된다 +1 24.09.04 184 1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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