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했더니 귀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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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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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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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아무거나

DUMMY

이날은 대성이 산을 물려받고 ‘대충 살자.’라고 마음먹은 지 5일째 되는 날이자, ‘다음 작물로 무엇을 키울까’ 고민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며


들깨에서 싹이 튼 지 열흘째 되는 날이자, 들깨를 수확해야 하는 날이었다.


“들깨가······ 열흘 만에······.”


수확이라고는 해도 수 자체가 많지 않아 그냥 혼자 쓱 훑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 간단한 일을 금방 끝내 놓은 대성이 다음 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원래 이렇게 많이 나오나?”


생각했던 것보다 들깨의 양이 너무 많은 탓도 있고


“향은 왜 이렇게 진해?”


들깨의 향 또한 예상외로 너무 진했던 탓도 있다.


“오늘은 대충 다음 계획이나 짤 생각이었지만······.”


이만한 향의 들깨로 들기름을 만든다면, 요리의 질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한동안은 그것만 키웠으니까.’


한동안 들깨 농사만 지었다는 아버지의 주방에는, 조금 어이없지만 채유기(기름을 채취하는 기계)가 있다. 그것도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이는 녀석으로.


“이 회사에서 이런 제품도 만들었나? 그건 그렇고 어디 보자······ 설명서가 어디에 있나······.”


설명서를 찾아 열심히 주방을 뒤지는 대성 옆에 윙윙이가 불쑥 나타났다.


“아저씨. 머해?”

“응. 들깨를 짜면 기름이 나오거든.”

“드깨를······.”


윙윙이는 약간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혹시 기름을 짠다는 말 때문일까.


“안 뽀바, 삐노키오, 드깨, 깬니. 이르미가 너무 만아.”


다른 건 몰라도, 저 중 하나는 윙윙이가 임의로 지은 이름이지만, 다행히 기름을 짜는 것은 통과인 모양이다. 속으로 안도하며 대성은 ‘이름’에 혼란을 겪는 윙윙이에게 하나를 더 던져주었다.


“아저씨 이름은 전대성이야.”

“!”


새삼 깨달은 모양이다. 아저씨의 이름이 아저씨가 아니었다는 걸.


“아저씨 이르미는 전대성······. 삐노키오 이르미는 드깨······. 안 뽀바 이르미는 삐노키오? 깬니?”


대성은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윙윙이에게 잎 부분은 깻잎, 알맹이는 들깨, 줄기 부분을 피노키오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본다.


“!”


단번에 깨우친 모양인지 윙윙이는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사실 수확 후 가공에 있어 대성의 가장 큰 걱정은 윙윙이가 이걸 일종의 도살(屠殺)이라고 인식하면 어쩌나였다. 작물을 친구처럼 인식하는 아이인 만큼


‘어떤 의미에서 보면 친구를 먹는 거니까.’


물론 일전에 살짝 운을 띄웠을 때 윙윙이는


‘언능 먹고 디퍼.’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것은 다를 수도 있으니 내심 조마조마했던 대성.


“오케이, 가장 큰 문제는 해결됐고······ 설명서가······ 이건가? 아니, 무슨 설명서를 이렇게 만들어?”


‘들깨 전용 채유기 설명서’는 양장본이었다. 겉표지는 가죽이고 속 내용은 빳빳한 고급지로 구성된 양장본.


‘들깨 전용’이라고 명시한 것치고는 온갖 기능들이 탑재되어 있다고 자랑하는 이 설명서 중간중간에는 조금 과다할 정도의 친절 문구도 있었다.


‘혹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부담 없이 전화 주세요. 24시간 365일 언제든 좋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아버지의 고급진 장난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버지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리고 이 정도 정성이면 설령 장난이라 해도 자식 된 도리로서 당해주는 게 효도다. 대성은 별 고민 없이 적힌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아, 네. 채유기 사용법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네? 아, 전 아들입니다. 전대성이요. 네. 제품번호는······ 네.”


* * *


대성은 일전에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혼자 힘으로 농사를 지으며 어떻게 이 많은 돈을 모았을까. 어린 시절 수확 철마다 와서 수확해주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래, 그 아들이 농사를 이은 것 같다고?”

“그렇습니다. 채유기 사용법을 물어봤다고 합니다.”

“규모는? 예전 그대로 한다던가? 맛은 어떻던가?”

“회장님··· 저도 방금 전해 들은 터라······.”

“아, 그랬지. 미안하네.”


민망하다는 듯이 웃는 회장을 보며 비서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을 만들어 낸 회장이 딱 하나 갖지 못한 것. 미각.


회장은 선천적이고 고질적인 미맹이었다.


“5년 만에 다시 맛을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더니 조금 신이 나서 말이야.”


국내 최고 부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음식 맛을 못 느낀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나마 10년 전에는 어떤 귀인을 만났는지 맛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이 고작이었지만, 회장은 그 5년의 세월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렇게 갑자기 끝날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들기름이라도 최대한 아껴 놓는 건데······.”


그렇게 찾아온 미각이 다시 사라지고 지금까지 5년. 회장의 인생에서 이토록 절망적이었던 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말입니까?”

“내가 10년간 그 집을 가끔 가보기도 했단 말이지? 그런데 자식에 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거든.”


비서의 표정이 묘해졌다.


“조사해 볼까요?”

“그러지 말게. 내가 그 친구랑 유일하게 딱 하나 약속한 것이 ‘뒷조사하지 않기’였어.”


비서의 표정이 조금 더 묘해졌다. 신뢰를 중시하는 회장의 신념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과감한 판단을 내릴 줄도 아는 사람이 회장이었다.


비서의 의문을 눈치챈 회장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가 당부하신 일이기도 했고 말이야.”


지금은 죽고 없는 전대 회장의 당부도 있었던 모양.


“농장째로 다른 사람에게 넘겼을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농장째로 넘길 거라면 나한테 넘기는 게 낫지. 내가 당시에 제시한 금액이 시세의 세 배였거든.”


그곳에서 나온 식재료를 먹고 미각이 회복되었다. 그곳의 재료를 못 먹게 되자 미각도 다시 사라졌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을 거라면 땅이라도 팔아달라 애걸하던 회장에게, 어느새 친구가 되었던 그 주인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직접 사람을 보내서 농사를 대신 지어보기도 했다. 물론, 맛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를 것인가. 회장은 그게 간절히 궁금했다.


“아무래도 직접 가 봐야겠어.”

“예? 직접요?”

“아무렴 어떤가. 누가 날 알아본다고.”

“······회장님 못 알아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서의 만류에도 한동안 고집을 부리던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직접 안 갔다가 다른 놈이 채가면 어떡하나.”

“회장님이 가셨다가 괜히 콧대만 높아질 수도 있지요.”


비서의 지적은 타당했다. 실제로 회장은 미각을 회복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회장이 간절함을 보일수록 돌아오는 것은 사기와 을질뿐.


“하긴, 인생을 통틀어서 나를 걸어 다니는 돈주머니로 보지 않은 것은 그 친구가 유일했지.”


회장이 지금까지 대성의 아버지를 기억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장난기가 좀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만한 친구가 없었는데 말이야.”


어쩌면 인생에서 처음 얻게 된 미각만큼이나 소중했던, 친구. 그 친구의 자식은 어떤 녀석일까.


과거의 친구를 잠깐 떠올리던 회장은 이내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한동안 찾지도 않은 주제에 이제와서 가는 건 조금 염치가 없구만. 그래도 그 집 재료는 꼭 구하고 싶은데, 누굴 보낸다······.”


혼자 중얼거리던 회장의 머리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막내를 보내는 게 좋겠어.”

“······막내분을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말고. 오히려 막내를 꼭 보내야겠네.”


재벌가 후광은 입을 대로 다 입어놓고, 정작 재벌 구조 자체는 무지하게 혐오하던 막내딸. 가문의 이름빨은 필요 없다며 혼자 힘으로 해보겠다 당당하게 외친 주제에 온갖 사업을 다 말아먹은 막내딸.


“우리 가족 중에 얼굴 안 팔리고 이름 안 알려진 녀석이 막내 말고 더 있나?”

“막내 아가씨가 아니라 회장님을 걱정하는 겁니다. 저번에 유학 보내셨을 때도 한동안 못 주무셨잖습니까.”

“크흠, 그때랑 지금이랑은 조금 다르지.”


걱정이 가득 담긴 비서의 목소리에 회장은 함박웃음으로 답했다.


“상속도 싫다. 재벌가 이름도 싫다. 결혼도 싫다. 그나마 좋아하는 거라고는 자기 이름으로 가게 차려서 말아 먹는 거랑 이 애비밖에 없는데.”


재벌가의 논리를 거부하는, 말 안 듣는 딸이라고 해서 부녀 관계까지 엉망이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회장과 막내의 관계는 다른 자식들보다 좋은 편이었다.


“그럼 내가 줄 수 있는 게 인연 말고 더 있겠나?”


짧지 않은 인생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그 음식들, 그리고 어쩌면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과 이상하게 안정이 되던 그 공간까지.


생각 같아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이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 내려놓기에 자신은 그때보다 가진 것이 더 많아졌고, 그 친구와의 우정 또한 조금 어색해졌다.


“걱정 말게. 다 잘될 거야. 그 친구와 엮여서 잘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 * *


채유기의 사용법을 완벽하게 숙지한 대성은 갓 짜낸 들기름 두 병을 잘 보관한 뒤 제사상을 차렸다.


오늘의 식탁과 제사상은 어딘가 이상하다.


흰쌀밥이야 늘 올라오는 것이니까 오케이. 그리고 나머지가 모조리 이상하다.


토마토, 고구마, 강낭콩, 깻잎, 부추, 표고버섯, 호박, 옥수수, 닭갈비. 가짓수가 아홉이니 구첩반상이라면 구첩반상인데 조합이 이상하다.


“아, 여러분. 제가 오늘 상을 이렇게 차린 이유는······.”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귀신들에게 대성이 변명하듯 말했다.


“어, 음. 마음이 살랑이는 봄을 맞아, 우리 텃밭에서 키울 작물에 대한, 여러분의 취향을 알아보고자······.”


무엇을 키우더라도 열심히 키우겠지만, 정작 그 ‘무엇’을 고르는 데는 온갖 고민이 뒤따랐다.


고민 끝에 대성이 선택한 방식이 바로 ‘기왕 아무거나 키울 거면 귀신들의 입맛에 맞는 작물’을 키워보자는 것.


그렇게 어쩌다 보니 3, 4월에 자주 심는 작물을 선별해 올린 것이었다. 물론 사 온 것은 모두 하우스 작물.


“아저씨······ 윙윙이는 반짝반짝이 복잡해.”


윙윙이가 말하는 반짝반짝이란, 일전에 한 번 먹고 매운맛에 정신을 못 차렸던 닭갈비를 말한다.


그리고 복잡하다는 말은 ‘닭갈비는 먹고 싶은데 매운 건 무섭다’라는 윙윙이 특유의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윙윙이를 위해 닭갈비의 양념을 물에 씻어주며 대성은 제사상 위를 유심히 관찰했다. 결정됐나?


“아저씨······. 윙윙이 그냥 반짝반짝할래······.”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괴상한 음식 조합에 놀란 듯한 반응은 잠시. 열 살부터 백 살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귀신들이 각자 말없이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다들······ 결정하셨습니까?”


식사를 마친 그들이 보란 듯이 하나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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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하자 +1 24.09.17 74 7 11쪽
12 할 수 있으면 24.09.16 79 6 12쪽
» 대충 아무거나 24.09.14 82 10 12쪽
10 웃으며 전력 질주 24.09.13 94 9 11쪽
9 사과의 방식 (2) 24.09.12 98 9 12쪽
8 사과의 방식 (1) 24.09.11 107 10 12쪽
7 적당히 해 +1 24.09.10 118 10 12쪽
6 윈-윈. 윙윙 +1 24.09.09 120 11 12쪽
5 개화만사성 +1 24.09.08 132 12 11쪽
4 아버지와 아들 +1 24.09.07 144 12 11쪽
3 뽀바 +1 24.09.06 161 13 12쪽
2 귀농의 귀가 그런 뜻이었어? +1 24.09.05 173 12 11쪽
1 힘들면 그래도 된다 +1 24.09.04 186 1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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