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7,414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4.04.28 04:22
조회
1,927
추천
35
글자
23쪽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

DUMMY

나는 변명을 싫어한다.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감내하며 스스로를 꾸짖는 것은 이미 습관을 넘어서 천성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나를 도우려는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 나 때문에 연합에 내분이 발생하면 제피온은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다. 차라리 만악(萬惡)의 근원이라 해도 좋을 내가 모든 것을 떠안고 가는 편이 나을 터다.

만약 힘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대륙연합 전체를 적대하면서 충분히 제피온까지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후퇴는 끝난 모양이군.”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떠났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가 이끌었던 정예병력 역시 후퇴를 마쳤다. 정말 드래곤 슬레이어가 무림인처럼 어쭙잖은 신의를 내세우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니지, 내 힘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어서일까?

“죽여라. 죽여라.”

단체로 무뚝뚝한 흉언(凶言)을 내뱉는 엘프들은 앞서 동족이 떼로 몰살을 당한 가운데도 스스럼없이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변한 성과는 없다.

“통 배우는 게 없군. 아무리 멍청해도 이정도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지...”

엘프는 모두 같다. 개인이 없고 집단으로만 존재하는 저들은 그야말로 거대한 존재와도 같았다. 엘프들의 목적인 하나이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엘프들은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맹점은 존재한다. 엘프들의 움직임이 아무리 일사불란하고 절묘해도, 단일 개체나 낼 수 있는 힘은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즉, 궤를 넘어선 존재를 물리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엘프는 드래곤을 상대하는 데는 빠져 있었지.

“꺼져라!”

검을 내뻗는 대신 발을 구른다. 지면이 우르릉 울리며 박살나고, 엘프들이 균형을 잃고 비틀댄다. 그 틈을 타서 나는 하늘 높이 도약한다. 이에 하늘에 떠 있던 엘프들이 활을 겨누는가 하면 나를 잡아보려 직접 날아들었다. 하지만 허공에서 재차 도약하는 능공허도의 경공 앞에서는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다. 오히려 나는 나를 잡으려드는 엘프를 발판삼아 더욱 빠르게 위로 솟구쳐 올랐다.

“후우.....”

연이어 허공을 박차고 올라, 마침내 나는 엘븐 포트리스가 내려다보이는 높이까지 올라왔다. 달처럼 둥글게 엮여있는 생목 아래로 엘프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다.

“벌집 같군.”

벌이 꼬인다고 벌을 죽여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벌집 자체를 깨부숴야 벌을 구제(驅除)할 수 있다. 천의결이 제시한 해법에 수긍하며, 나는 방향을 바꾸어 엘븐 포트리스로 쏘아져 나갔다.

“막아라!”

바닥에서 엘프들이 일제히 솟구쳐 오르고 엘븐 포트리스에서 엘프들이 엄청난 기세로 튀어나온다. 완전히 벌집을 건드린 꼴이다.

“비켜!”

선두로 날아든 엘프를 베어낸다. 아니, 완전히 베지 않고 쳐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든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두서너 번 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포위망을 돌파해서 엘븐 포트리스 안으로 진입했다.

“죽여라.”

“악적이다.”

“죽여라.”

엘븐 포트리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요새를 구성하는 나무와 지겨울 정도로 바글바글한 엘프 뿐이다. 대체 어떤 원리로 하늘에 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지긋지긋한 싸움도 여기까지다.”

천을 훌쩍 넘는 엘프도 나를 막지 못한다. 아니, 이 세상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그런 고양감에 휩싸인 한편, 나는 오히려 검을 집어넣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당황했는지 엘프들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춘다. 실수했다 너희들. 차라리 통제가 되지 않은 집단이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을.

“보라, 혼원(混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궁극의 경지에 오르며 내 힘은 모두 혼원으로 귀결되었다. 그 힘을 음양(陰陽)으로 나눈다. 음양은 또다시 삼재(三才), 사상(四象)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오행(五行)에 도달하였을 때, 내 의념에 따라 오행 중 화(火)가 세를 불린다.

“연옥겁(煉獄劫).”

내 주위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았고,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신 엘프들이 미친 듯이 기침을 토한다.

“어리석은 인간.”

“엘븐 포트리스는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다.”

“물을 가져와야 한다.”

어딘가에서 엘프 서넛이 보이지 않는 자루에 담긴 것처럼 출렁이는 물을 안고 날아온다. 나는 씩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엘프가 한 아름 안고 온 물을 불 위에 끼얹는 순간, 불길이 느닷없이 커진다.

“어리석은 짓 하지마라.”

불길이 커진 것뿐만이 아니다. 불똥이 튀지 않은 거목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황한 엘프들이 동분서주하며 물을 끼얹거나 불을 짓밟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다. 나는 난장판이 된 엘븐 포트리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물과 불은 상극이지만 저 불은 상극의 기운도 빨아들여 세를 불리는 지옥의 불길이지.”

물 뿐만이 아니다. 나무든 그 어떤 것이든 오행의 일부. 비록 완전치는 않지만 오행 역시 충분히 혼원을 설명하는 수단이었다.

“으아악!”

비명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 그리고 엘프들의 나직하지만 다급한 음성이 뒤섞인 지옥도가 펼쳐진다. 물을 안고 날아오다 하얀 날개에가 타올라 추락하는 엘프. 불을 끄려다 오히려 불에 휩쓸린 엘프. 엘프들은 산채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 치의 동요조차도 없다. 참 비정한 부동심이다. 프란츠를 죽였을 때도 그랬지만 영 어색하다.

“불을 끄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그 가운데서 나는 연기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엘프는 군체나 다름없으니 굳이 목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한 엘프에게만 말이 들리면 된다.

시커먼 연기를 타고 흩날리는 재. 그리고 시뻘건 혀를 날름대는 화마 사이에서 엘프들이 내 말에 주목한다.

“오행을 통제하는 나를 쓰러트리든지 아니면 나를 적대하는 멍청한 짓을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라.”

“불가능하다.”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온 저 말은 내 제안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는 말이다. 이에 나는 혀를 차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마지막 기회를 차버리다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천검.”

불길 속에서 천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엘프들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진다. 저항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모습이다. 절망이야말로 산 자가 품고 있는 천성. 설령 고귀한 엘프라 해도 다를 건 없다는 건가.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 주마.”

천 자루의 검이 까만 연기를 가르고 엘프의 목숨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연기에 질식하기 직전인 엘프들은 이제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더불어 엘븐 포트리스를 구성하고 있던 거목도 하나 둘 무너지고 있다.

허나 그 와중에도 엘프들은 둘로 나뉘어 절반은 불을 끄고 절반은 나를 상대하려 한다. 대단하긴 하군. 인간이었다면 진즉에 분열되어서 도망치거나 죽었을 텐데.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엘프의 숫자는 이제 백여 명에 불과했다. 빼곡하게 들어찼던 나무도 반 이상 불타서 엘븐 포트리스는 누더기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모습이 되었다.

“후퇴한다.”

“인간은 내버려두어라. 엘프의 보물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단순히 도망치는 게 아니군.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남은 엘프들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하고, 아직 타지 않은 나무로부터 기이한 기운이 새어나온다. 그리고 엘븐 포트리스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엘프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 것 같군. 텔레포트가 고도의 마법을 요한다면, 이건 특정한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매개체란 다름 아닌 나무.

천의결로 단번에 원리를 깨우친 나는, 흥미가 동해서 연옥겁의 통제를 그만두었다. 이제 물을 끼얹어도 불이 거세지는 기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엘프들은 이미 불을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불길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을 외고 있을 뿐이다.

“엘븐 트랜스퍼(Elven Transfer).”

엘프들이 내뱉은 저 말과 함께 엘븐 포트리스의 진동이 한순간 거세졌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장소가 바뀌었다. 휑한 구멍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므로아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멍청한 놈들. 본거지로 나를 데려온 거냐?”

“그렇다.”

기침을 연발하는 가운데도 엘프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입으로 말한다.

“이곳은 엘프의 고향이자 성지, 엘븐 생츄어리(Elven Sanctuary). 우리는 여기서 너를 벌할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엘븐 포트리스의 천장에 해당하는 곳이 무너져 내린다. 기둥 역할을 하던 거목이 대부분 부서진 탓이었으리라. 신록으로 물든 풍경이 매캐한 연기에 가려진다. 그 연기에 가려진 적의를 느낀 나는, 일검을 내뻗어 연기를 걷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꽤 많군.”

수만은 족히 되는 엘프떼가 보인다. 연기가 걷히자마자 엘프들이 화살을 날린다. 그리고 또한 벌떼처럼 내게 날아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순간 피바람이 불었다. 천 자루의 검이 무작정 날아드는 엘프을 도륙하며 벌어진 일이다.

“고작 숫자로....”

기가 찬다. 이놈들은 정말로 배우는 게 없다. 모두 똑같은 건 좋지만 죄다 멍청한 놈들뿐이다.

“그래, 끝장을 보자.”

이렇게 된 이상 엘프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그리고 엠펠로니아로 향하면 그만이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직감 상 대륙에서 먼 곳은 아닌 듯하다. 돌아가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지.

“간다.”

나는 온 몸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했다. 도를 넘은 살기가 유형화되어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짓눌렀다. 엘븐 포트리스가 그 분노를 두려워하듯 우르릉 떨리며 검게 탄 나무가 몇 그루 주저앉는다.

그렇게 한 종족을 멸할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그만두세요.”

엘프 너머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세가인을 떠올릴 정도로 고고한 그 목소리에 나는 바짝 긴장해서 더욱 기세를 피워 올렸다. 이에 엘프들이 일제히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린다.

“그대의 힘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짓은 그만두세요.”

앞을 막고 있는 엘프들을 유령처럼 지나쳐 온 존재는 목소리와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희고 풍성한 옷을 펄럭이며 내게 다가온 그 존재는 마치 모든 엘프들의 위에 서 있는 존재와도 같아 보였다. 아니, 사실이다. 저자는....

“당신이 엘프를 만들었군.”

“그래요. 나는 이들의 어미랍니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미들스쿨에서 배웠던 지식이다. 고대 인간에게 마법을 전수한 인세의 수호자, 엘븐 퀸(Elven Queen)의 전설을 떠올린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라고 잊었었는데 그 당사자와 조우할 줄이야.

“케이오스의 사도님, 부디 그 검을 내려놓으세요. 이곳은 싸움을 위한 곳이 아니랍니다.”

혼돈을 알고 있어?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은 중요치 않다. 내가 긴장할 수밖에 없던 이유. 그것은 바로 저 존재가 나와 대등한, 궁극의 경지에 오른 초월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호승심이 들끓는다. 한 번도 한계까지 몰아붙인 적 없는 내 힘을 시험해보고 싶다. 저자라면 내 모든 검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지.”

나는 씩 웃으며 기세를 줄이고 긴장의 끈을 놓았다. 이에 운신이 자유로워진 엘프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마치 그들의 여왕과 한 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경건하게. 나는 그것들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그들의 여왕을 바라본다. 아름답다. 그리고 강하다. 그리고 다시금 확신한다. 저 존재는 소렌 폰테일이 그랬던 것처럼 내 검을 확실히 받아낼 것을.

“단.”

기세를 줄인 것이 아니다. 긴장을 낮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최고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무질서하게 날뛰던 몸을 정련한 것이다. 그것을 알아챈 여왕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다. 그제야 여유가 넘치던 얼굴이 엘프의 것과 비슷하게 변한다.

“내 검을 받아낸다면.”

호쾌하게 검을 뻗어낸다. 그리고 순식간에 여왕의 섬섬옥수와 내 검이 충돌한다. 그 어떤 수작도, 요령도 없는 순수한 힘과 힘의 충돌. 그 여파는 한참 뒤에야 발생했다. 주위를 뒤덮은 초목이 나자빠지고 땅거죽이 벗겨진다. 천지를 울리는 파공음이 울리며 엘프들이 막대한 충격에 뒤로 날려간다. 엉망이 된 내 소매가 터져나가고 여왕이 걸친 하얀 옷이 정신없이 펄럭인다.

“그만두세요.”

평온한 저 목소리를 듣고 나는 웃었다. 박장대소했다. 예감은 정확했다. 저 존재는 나와 같은 궁극의 경지에 있다. 나는 진정 이 힘을 펼쳐낼 존재를 찾은 것이다. 혼돈이고 제피온이고 모조리 잊고 나는 실로 무인다운 만행을 저지르기로 했다.

“한 번 더.”

“잠깐...”

다시금 파공음이 인다.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검을 뻗어냈다. 이에 여왕 역시 이번에는 두 손으로 내 공격을 막아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세 번째 검을 준비했다. 평생을 쌓아온 모든 울화가 풀리는 기분이다.

“그만두라 하였습니다!”

여왕의 노호성과 함께 팔다리가 무거워진다. 땅에서 솟아난 거목이며 덩굴 따위가 내 온몸을 구속한 것이다. 재미있군. 식물의 생육을 의지대로 조종한단 말이지? 별다른 효용을 노리고 한 짓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이건 그저 여왕의 마음이 이끌어낸 자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아직이다!”

가뿐히 식물의 구속을 풀어내고 나는 세 번째 검을 날렸다. 검을 날리는 시간을 극한까지 줄인 극쾌의 검. 혼원의 무리(武理)를 구체화하지 않은 궁극의 검 그 자체다. 과연 이것도 막아낼 수 있을까?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손으로 검을 받아내지 않고 여왕이 몸으로 검을 받아낸다. 무슨 짓이지? 아무리 궁극의 경지에 올랐다지만 이건 충분히 치명적인 검인데?

의문도 잠시. 검에 맞은 여왕의 몸이 돌연 산산이 흩어진다. 검력을 받아 폭발한 건가? 아니다. 흩어진 옷이며 육신은 어느새 나뭇잎이며 나뭇가지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여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디냐!”

천의결을 운용한다. 어디 숨었다 해도 천의결로 짚어내면 그만. 그러나 천의결을 운용한 순간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린다. 머리가 터지지 않은 건 내가 궁극의 경지에 올라 그릇이 커진 덕이다. 여왕은 사라진 게 아니다. 여왕은 이 숲 자체였다. 나를 상대한 몸은 말하자면 허깨비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네 번째 검은 이미 정했다. 베고자 하는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나는 검을 굳세게 말아 쥔다. 그러나 그때 숲이 한차례 출렁이며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마치 이 장소 자체가 나를 잡아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의 힘을 봉하겠습니다.]

무슨! 나는 삽시간에 땅 속 깊은 곳에 끌려들어갔다. 사지를 움켜쥔 나무뿌리며 흙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제기랄, 이 따위 것 쯤...

[포기하세요. 나는 이 땅의 정령. 당신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이상 저를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힘이 끊임없이 빨려나간다. 말도 안 된다. 드래곤의 막대한 마나가 이토록 쉽게? 그 순간 이 힘은 본래 므로아에 봉인된 것이었다는 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봉인은 가능하다. 기적 그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무한대에 가까운 이 힘을 억누르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빌어먹을.”

설마 또 힘을 빼앗기는 건가? 그러나 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전과는 달리 내가 이 힘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끊임없이 힘을 빼앗겨 육신으로 발출하는 게 불가능할 뿐. 이렇게 날 땅 속에 처박아 둘 셈일까?

[움직이지 마세요.]

서서히 몸이 지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흙이 스스로 길을 열어가며 나는 나무줄기에 구속된 채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왔다. 여왕이 조금 지친 모습으로 말했다.

“그대의 힘은 실로 경이롭군요. 이 정도라면 대륙을 통째로 파괴할 수도 있겠어요.”

“제 힘의 맛이 괜찮은가보군요.”

나는 맥이 탁 풀려서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다. 엘프의 여왕은 무림에서 회자되는 신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곳은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아니, 인세이되 인세가 아닌 곳. 오직 엘프를 위해 존재하는 선계(仙界)였다.

“이제 진정되었나요?”

“예.”

호승심은 잠든 지 오래다. 그 대답을 들려주자마자 나를 구속했던 나무뿌리가 축 늘어지고 나는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그와 함께 막대한 기운이 다시 내 전신을 휘감는다. 아직도 건재하군.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힘이다.

“이제 당신은 제 존재를 이해했군요.”

“제 생각이 짧았지요. 무림에도 신선이 있는데 왜 여기라고 없겠습니까? 그럼 저것들은 당신이 부리는 것들입니까?”

엘프들을 바라보며 묻자,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에게 물러가라 손짓한다. 그리고는 반 이상 불타버린 엘븐 포트리스를 바라보며 그것을 애처로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가엾게도 많은 나무가 죽었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듯 너무나도 애처로운 모습에 나는 조금은 죄책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여왕이 하얀 손가락으로 엘븐 포트리스를 톡 건드리자 엘븐 포트리스가 서서히 땅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랍니다. 제 아이들이 너무 무모한 판단을 내린 탓이지요.”

이윽고 엘븐 포트리스가 완전히 땅 아래 가라앉고, 엘프의 여왕이 길쭉한 팔을 들어 숲 속을 가리키고는 그 쪽으로 걸어갔다. 이에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어딜 가는 겁니까?‘

“나가는 길로 안내해 드리는 거랍니다. 당신의 힘이라면 이곳을 스스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대륙까지 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배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하나 묻고 싶습니다. 엘프는 왜 저를 죽이려 하는 거죠?”

여러모로 마음이 진정되자 자연히 의문이 피어오른다. 대체 왜 엘프는 나를 죽이려 드는 걸까? 단지 엘프를 죽였다는 죄를 저지른 게 문제라면 제피온도 똑같이 위해를 당해야 할 텐데 엘프들은 유독 나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성녀가 나를 악이라 지목한 사실 하나만으로 나를 이토록 물고 늘어질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그대가 짐작한 대로 우리는 성녀의 말 하나 때문에 움직이는 게 아니랍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가? 하기야 그녀가 신선이라면 놀랄 것도 없겠지. 여왕은 스스로 길을 비켜나가는 숲을 가로질러 가며 말을 이었다.

“모든 건 제가 당신을 막으라 했기 때문이에요. 목숨을 빼앗더라도 말이에요.”

태연하게 내뱉는 한 마디에 기가 찬다. 하지만 수많은 엘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잔혹함 질리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이 커진다.

“뭐가 문제라 그런 겁니까? 제가 혼돈의 사도라서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숲이 끝났다. 우리는 어느새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벽 같은 것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여왕은 그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못다 한 설명을 이었다.

“케이오스의 사도는 당신이 알던 것처럼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랍니다. 당신이나 저와 같은 이들을 엘더(Elder)라 한다면 혼돈의 사도는 반쪽짜리 엘더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겁니까?”

“쉽게 말해서 당신은 세상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거랍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뭐라고 세상의 흐름을 좌우한단 말인가? 그러나 곧 납득할 수 있었다. 내 행동이 부른 파란들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소드마스터나 왕족은 모두 혼돈의 사도란 말인가?

“물론 케이오스의 사도만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랍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끼쳐요. 하지만 케이오스의 사도는 유독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커요. 좋을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저는 나쁜 쪽인 모양이군요. 그래서 저를 막으려 하는 거고요.”

조금 기분이 가라앉아서 나는 허탈하게 내뱉었다. 단순히 말해서 그런 운명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숱한 고생을 하면서 깨달았듯 벗어날 수 없는 거고.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여왕이 고개를 젓고 내 손을 잡는다.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 너머로 구름처럼 부드러운 손가락이 느껴진다.

“나쁘고 좋고는 알 수 없는 거랍니다. 제가 말한 나쁜 쪽은 우리 엘프. 그리고 당신들 인간의 입장에서 나쁘다는 말이에요.”

내 머리가 명석하지 않은 게 이제 와서 발목을 잡는군. 아직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왕이 내 손을 조금 힘주어 잡으면서 말했다.

“지금 세상을 휘두르려는 자. 그자가 세상 위에 군림한다면 숱한 몬스터들에게는 좋은 일이겠죠? 반대로 대륙연합이 승리한다면 몬스터들에게는 불행한 일이겠고요.”

이제 이해가 된다. 혼돈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었군. 조금은 충격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드래곤이 모든 것을 죽인다 해도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단지 왕국이나 몬스터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될 뿐.

“다만 저는 두려워요.”

여왕이 슬며시 손을 놓고 고개를 살짝 숙인다. 뜬금없이 저손을 조금 더 잡고 싶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다. 신선에게 홀리다니, 이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당신과 같은 존재가 움직이게 되면 이 세상이 분열되어요.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몬스터와 인간이 화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말을 내뱉고 후회한다. 그럴 리 없지. 그렇다면 엘프를 전쟁에 내보내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 당연히도 엘프의 여왕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너무 느닷없는 말이었네요.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더는 무리 같네요.”

“무리라니요?”

“시간의 흐름을 억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는 힘들 것 같아서요. 이곳의 시간은 대륙의 시간과 흐름이 다르답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가 썩는다는 이야기인가? 별 수 없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의문투성이일 뿐이지만 더 시간을 끌어봐야 제피온만 신나겠지.

나는 한 치의 지체도 없이 하얀 벽으로 걸어 들어갔다. 딱히 방법을 듣지는 않았지만 천의결이 있으니 문제는 없다. 숱한 의문을 해소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케이오스의 사도님.”

여왕이 목소리가 나를 잡아 세운다. 나는 하얀 벽을 코앞에 두고 고개를 돌렸다. 여왕이 공손히 나를 배웅하며 말했다.

“제 아이를 보내도록 할게요. 그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제 이야기를 듣도록 하세요. 그 아이가 돕는다면 당신은 케이오스가 아니라 제 이야기를 듣는 것도 가능하답니다.”

이건 단지 여왕이 내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호의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행보를 막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하얀 빛 속으로 들어갔다. 부디 신선놀음에 내 의지가 흔들리지 않기를 기원하며.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치킨이 되었더라도 천박하지 않은 먼치킨이 되고파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Inferior Struggle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1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4) +9 14.04.22 1,578 27 16쪽
110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3) +10 14.04.13 1,304 34 18쪽
109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2) +6 14.04.05 1,323 28 14쪽
108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1) +3 14.04.04 1,287 25 14쪽
107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0) +4 14.03.29 1,614 28 17쪽
106 10. 혼돈무제(混沌武帝) (9) +5 14.03.21 1,726 28 15쪽
105 10. 혼돈무제(混沌武帝) (8) +4 14.03.14 1,785 30 14쪽
104 10. 혼돈무제(混沌武帝) (7) +2 14.03.03 1,604 28 12쪽
103 10. 혼돈무제(混沌武帝) (6) +10 14.02.22 1,471 29 22쪽
102 10. 혼돈무제(混沌武帝) (5) +7 14.02.18 1,592 29 17쪽
101 10. 혼돈무제(混沌武帝) (4) +8 14.02.12 1,498 27 14쪽
100 10. 혼돈무제(混沌武帝) (3) +4 14.02.01 1,871 30 10쪽
99 10. 혼돈무제(混沌武帝) (2) +5 14.01.21 1,609 32 14쪽
98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 +13 14.01.07 1,990 29 12쪽
97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10) +8 13.12.29 1,738 30 12쪽
96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9) +10 13.12.20 1,505 26 11쪽
95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8) +6 13.12.08 1,586 26 13쪽
94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7) +4 13.12.04 1,808 29 13쪽
93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6) +4 13.11.28 1,415 33 12쪽
92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5) +4 13.11.25 1,881 30 13쪽
91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4) +10 13.11.19 1,751 31 13쪽
90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3) +8 13.11.11 1,632 32 14쪽
89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2) +7 13.11.08 2,173 37 12쪽
88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1) +4 13.11.06 1,844 39 17쪽
87 8. 무인과 군인 (14) +3 13.11.01 1,777 41 16쪽
86 8. 무인과 군인 (13) +3 13.10.23 1,857 41 14쪽
85 8. 무인과 군인 (12) +8 13.10.19 1,965 34 16쪽
84 8. 무인과 군인 (11) +4 13.10.17 1,645 38 14쪽
83 8. 무인과 군인 (10) +5 13.10.13 2,203 49 13쪽
82 8. 무인과 군인 (9) +6 13.10.11 2,150 43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