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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태운 정밀 사장실.
"예전에 제안하신 적 있는데 제가 그때는 준비가 덜 되어 결정을 보류했죠. 지금 사장님 스카우트 제안에 응할 생각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할지는 새로 상의해야겠지만 말이죠."
"기억납니다. 초면에 내가 참 실례가 많았죠."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미끼 스킬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강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일도 많았고 제정신도 아니었다. 물론 제정신이고 할 일이 없어도 각성자의 스킬 하나에 흥미를 느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미끼 스킬을 한 곳에서 자주 사용하면 괴물을 지속해서 모을 수 있습니다. 괴물들이 한 곳으로 몰려가면 다른 곳들은 괴물이 적어지거나 사라지겠죠."
"나는 사업가이지 독지가가 아닙니다. 내게 어떤 이득이 있나요?"
"저는 사업가도 독지가도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말씀드릴 테니 사장님이 제 가치를 판단해 주시죠."
강유성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외로 편한 대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견고한 건물을 만듭니다. 괴물은 아주 멍청하거든요. 조금만 미로를 복잡하게 만들면 헤맵니다. 그러면 최대한 안전하게 괴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괴물을 처리하면 레벨을 올릴 수 있고 레벨이 100되면 등급을 올릴 수 있습니다."
"레벨을 올리는 것까지는 나도 압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바로는 괴물을 처리한 각성자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군에서도 등급이 높고 전투력이 강한 각성자만 전투에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헬기로 오면서 얻어들은 것들 때문에 신기는 현재 상태를 조금이나마 요해할 수 있었다.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신기는 홍차를 홀짝였다. 신기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강유성이 눈을 빛냈다.
"파티 기능이 있습니다. 파티를 맺으면 경험치를 나눌 수 있지요. 그리고 저는 다른 각성자를 파티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전투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각성자를 키울 수 있습니다."
강유성은 벌떡 일어났다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다시 앉았다. 그러나 마음의 격동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E급이나 F급 각성자들은 헌터 협회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모든 각성자를 받아들이고 지원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 등록만 하고 공무원으로 채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D급부터의 각성자도 전투 스킬을 보유한 각성자만 우대했다. 등급이 높으면 일단 공무원으로 채용하지만 레벨을 올려주고 키워주지는 않는다. 말만 공무원이지 하는 일 없이 맨날 놀다 보면 사람은 불안에 떨게 된다.
"E급이나 F급을 키워서 등급을 올려줍니다. 그리고 등급이 올라가면 일정 확률로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권인데 당첨 확률이 엄청 높습니다. 이 각성자들을 데리고 괴물이 없는 땅을 만들 수 있습니다."
'토지의 개인 소유!'
강유성의 머리에 불쑥 떠오른 생각이다. 버려진 태반의 국토는 지금 땅값이 말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돈을 주고 사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태운 그룹이라면 법을 개정해서 버려진 땅들을 사들일 수 있다.
주인이 살아 있다면 주인에게 돈 주고 사면 되고 주인이 없다면 국가에 돈 주고 사면 된다. 주인이 뒤늦게 나타나더라도 그건 땅 주인과 국가가 해결할 일이다. 만약 신기의 말대로 괴물을 싹 끌어가서 괴물이 없는 땅을 만든다면 사람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토지와 백성이 있으면 나라도 세울 수 있다.'
물론 국가를 직접 운영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기업과 달리 국가는 이익 단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장사치의 사고방식으로 국가를 다스리면 이득을 제외한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런 나라는 장구히 이어지지 못한다.
'대 귀족이 되는 것이지. 커다란 영지를 갖춘, 혈관에서 명예와 긍지가 흘러넘치는 그런 귀족.'
재벌이라는 다소 폄하의 의미를 담은 단어로 수식되지 않아도 된다. 돈밖에 모르는 장사치가 아닌 명예와 긍지를 아는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해줘야 할 것과 신기 씨가 할 수 있는 걸 명확히 말해 주세요."
신기는 광기가 흘러넘치는 강유성의 눈빛에 살짝 위축되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효주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등대에서 괴물을 불러서 처리하며 레벨업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면 등급을 올릴 정도로 빨랐죠. 왜냐면 한꺼번에 괴물을 많이 처리하면 경험치를 더 줍니다. 아마 일주일 정도 기간에 저희가 처리한 괴물의 숫자가 5만 마리는 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마지막 날에만 만 마리 훌쩍 넘게 처리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신기가 무척 겸손하게 말한 것이다. 첫날에야 1백에서 2백 마리 정도 몰려들었지 스킬 사용을 10초로 한 후에는 600마리 이상씩 몰려왔다.
"튼튼한 건물을 지어주십시오. 그리고 식량을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일체를 지원해 주시고 각성자를 모아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각성자를 최대한 쓸모 있게 키워서 사장님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공장 주변에 해주면 됩니까?"
"섬에 해주셔야 합니다. 일정 범위 안의 괴물을 불러모으는 동시에 더 먼 곳의 괴물도 서서히 끌어옵니다. 해안가를 비롯해 섬들에 이런 곳을 많이 만들어서 운영하면 한국 땅에서 괴물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좀 더 고민해 봐야겠지만 정말 괜찮은 상황이다. 강유성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신기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가 사장이긴 하지만 제멋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신기 씨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으로 진행하도록 하죠. 그간 고생 많았을 테니 푹 쉬세오. 머물 곳은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강유성과 인사를 하고 밖에 나오니 최 실장이 둘에게 핸드폰을 하나씩 건넸다. 핸드폰이 없다는 말을 헬기 안에서 하기는 했지만, 그사이 핸드폰을 장만해 준 이들의 능력이 놀랍다. 둘은 비서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차로 근처의 아파트에 안내받았다.
"전기는 24시간 공급됩니다만, 조명 시스템만은 밤에 전기를 공급하지 않습니다.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으니까요."
화장실이 세 개나 되는 커다란 방에 안내받은 둘은 일단 샤워부터 했다. 박철은 역시 서울 물이 때가 잘 벗겨진다며 입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거제 촌놈의 생쇼를 구경하며 신기는 자신이 놓친 게 없는지 그리고 실수한 게 없는지 자세히 점검했다.
"박철아, 우리 구슬 담은 가방 어디에 뒀지?"
"그거 효주 강아지가 물고 놓지 않아서 효주한테 갔을 거예요."
신기는 고민하다가 구슬은 일단 효주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괜히 찾았다가 관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확실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는 무시하기로 했다.
'정보 단말, 아직도 뭐 없어?'
- 시스템과 관련이 없는 물건입니다. 정보는 획득했지만 전달할 수 없습니다. 직접 연구하고 알아내십시오.
### DUAL SYSTEM ###
태운 그룹 강 회장의 삼성동 저택.
"회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자네가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는 걸 보면 무척 좋은 일인 모양이군."
"효주 아기씨가 거제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강 회장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 할미와는 달리 명줄이 긴 아이였군. 좋은 소식은 맞네그려."
"효주 아기씨가 데려온 애완견이 각성했답니다."
강 회장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해외 쪽에 이미 알아보았는데 공식적으로 동물이 각성한 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각성 경로는?"
"알아보고 있습니다. 일단 효주 아기씨는 모르고 있습니다. 효주 아기씨와 함께 온 두 청년이 있는데 막내 도련님이 빌라를 내줬다고 합니다."
강 회장은 뚜벅뚜벅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괜히 타초경사 하지 말고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해. 중요한 정보니까 잘못 건드리면 더 꼭꼭 숨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막내가 요즘 뭐 하는지 자세하게 알아내게."
"두 청년과 만나 십 분 정도 대화를 나눴고 박 대위와 술 약속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날인가?"
"맞습니다. 박 대위 형이 죽은 기일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해마다 그날에 만나면서 굳이 미리 약속을 잡을 일이 있나. 분명히 뭔가 있으니 자세히 주시하게."
### DUAL SYSTEM ###
서울 외곽 모 절간의 봉안당.
박영광과 강유성이 환하게 웃는 젊은 청년의 사진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강유성의 친구이자 박영광의 형인 박영명이다.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던 박영명의 자살은 둘에게 큰 충격이었다.
"형님, 복수의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때 형님을 괴롭힌 자식들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곧 저승으로 보내서 형님께 무릎 꿇고 사죄하게 할 테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주세요."
잘난 형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모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박영광은 형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보통 아이들이 유명한 장군이나 과학자를 우상으로 삼는 데 박영광은 형과 형이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이 우상이었다.
그런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 부모님의 자랑거리던 형이 갑자기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지속해서 따돌림과 폭행을 당했다고 적혀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형은 꾹 인내하다 그중 둘을 칼로 찌른 후 두려움에 자살을 택했다.
그때 형을 괴롭혔던 놈들 대부분 친일파 자손이었다. 그래서 박영광은 그때부터 친일파를 무척 미워했다. 그리고 그들이 형을 괴롭힌 이유는 단순히 서울 출신이라는 것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사투리를 쓰는 그들은 표준 서울말을 쓰는 형을 괴롭히며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다 박영광이 돌아버린 것은, 자기 집안도 친일파 후손이라는 사실을 안 후였다. 특히 형을 괴롭혀 죽인 자식의 부모와 아버지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한동안 자신은 이순신 장군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며 다녔다.
IMF 때 기울었던 가세가 다시 회복되며 박영광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친일파에 대한 증오는 전혀 가셔지지 않았고 형의 그림자는 박영광에게 짙게 드리워졌다. 일등을 놓칠 때마다 영명이는 안 이랬는데 하는 부모님의 한탄이 칼이 되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영광아, 너 형 믿지?"
"네, 제가 형님 안 믿으면 세상천지에 누굴 믿겠습니까."
"나 각성자 좀 키워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네가 수집한 각성자 정보 좀 넘겨라."
박영광이 눈을 끔벅이자 강유성은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각성자 네가 데리고 있어봤자 뭘 하겠냐? 결국 높은 분 한마디면 모든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텐데 말이다. 토사구팽이라는 말 몰라? 조진궁장이라는 말 몰라?"
토끼가 사라지면 쓸모없는 개를 삶아 먹고 새가 사라지면 활을 깊은 곳에 처박아 둔다.
"그리고 어차피 각성자한테 사람 죽이라고 시킬 거 아니잖아. 차라리 회사에서 데리고 있는 게 더 확실해."
"알겠습니다. 형님 도와주신 거에 비하면 이건 일도 아니죠. 쓸만한 놈들 명단 뽑아서 드릴게요."
"필요한 사람은 내가 직접 뽑으마. 그리고 일이 잘 풀리면 너 적당한 때에 군 떠나라. 거긴 정부 입김이 강해서 네 재능을 다 펼치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볼게요."
박영광이 한 고집 하는 걸 아는 강유성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재능은 평범하지만 하나에 집중하는 독기는 정말 강한 박영광은 뭘 시켜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몇 번이나 군을 나와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지만 형의 꿈이었던 장군이 되고 만다고 군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너에게만 말해주는 건데 우리 집 강아지가 각성했어. 그런데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몰라. 이거 알만한 사람 둘 내가 데리고 있거든. 네 밑에 감청 잘하는 애들로 좀 감시해 봐."
박영광의 작은 세모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만약 자기 수하들을 각성자로 만들 수 있다면 현재 싸움을 더 쉽게 이끌어 갈 수 있다. 싸울 줄 아는 군인은 대부분 각성자가 아니고 각성자는 대부분 싸우는 법을 모른다.
"방법을 알아내면 너랑 네 밑에 애들 다 데리고 군에서 나와. 우리 태운 그룹이 설마 군대보다 너희한테 못 해줄 것 같아? 어차피 군수품 대부분은 우리 태운 정밀에서 생산하고 의복과 식량도 우리 태운 그룹의 계열사가 가장 많이 공급하고 있어. 군대가 해줄 수 있는 건 우리가 다 해줄 수 있고 군대가 못 해주는 것도 우리가 해줄 수 있어."
- 작가의말
예전엔 이런 관계들을 숨기고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터뜨리려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읽는 분들이 무척 답답했을 것 같네요. 물론 저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지만, 제 원래 생각이 웹 일일 연재에 알맞지 않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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