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알아가다
주상복합 아파트 6층 신기의 방.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깨어난 신기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인터넷 개통을 신청했다. 휴대전화로도 검색할 수 있지만, 사용이 불편하다. 신기는 컴퓨터가 휴대전화보다 편했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로 각성자의 정보를 뒤적거리다 다시 잠들었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다. 서핑 고수들에게는 보물창고겠지만 아직 초보인 신기에게는 암초가 가득한 위험한 바다다. 신기는 오랜만에 인터넷에 빠져들었다.
신기는 각성자에 대한 정보를 우선으로 수집했다. 그 과정에 헌터 협회는 검증과 등록만 해줄 뿐 각성자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축구 협회가 축구를 관리하고 야구 협회는 야구를 관리한다. 그런데 헌터 협회는 아무것도 관리하지 않았다.
헌터 협회가 대한민국 최고의 협회라는 조롱 글도 가끔 보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고로 잘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각성자에 대한 정보는 의외로 적었다. 현재 최고의 화제임에 반해 검색 결과가 시원치 않다.
신기는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영어로 해외 사이트에서 검색했다. 검색어의 조합이 나쁜지 쓸모없는 검색결과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건진 건 조금 있었다. 미국인으로 짐작되는 건장한 사내들이 나오는 동영상은 친절하게 한글 자막이 입혀져서 이해하기 쉬웠다.
남자들은 지름이 5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섬에 견고한 작은 성채를 세웠다. 미리 제작한 시멘트벽을 세우고 삐져나온 철근들을 용접했다. 그리고 틈을 빠르게 응고하는 시멘트로 메꾸었다.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섬은 든든한 담으로 둘러싸였다.
그 후 이들은 빠른 속도로 침실을 비롯한 거주 구역을 짓고 창고도 지었다. 일하는 과정은 빠르게 감았고, 중간중간 멈춘 후 해설을 곁들였다. 며칠이 안 되어 섬은 견고한 군사 요새가 되었다.
태양열로 전기를 해결하고 바닷물을 담수로 바꾸는 기계도 돌아갔다. 담벽에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중화기들을 배치했다. 하이파이브로 자축하던 사내들이 갑자기 격렬한 말다툼을 했다.
너무 빠르게 말해서 자막도 없었지만, F로 시작하는 세계 대부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욕설이 난무했다. 한참 궁금증이 커질 때 자막이 나타났다. 모든 게 완벽하지만 식량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면이 휙 바뀌더니 미국의 모 회사에서 생산하는 민간인에게도 판매하는 전투식량의 광고가 시작되었다. 이 동영상은 전투식량 광고였고 섬을 요새로 만드는 모든 과정은 광고의 한 부분이었다.
상온에서 3년 보존 가능하다는 말에 신기는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광고에 나오는 사이트에 접속해서 전투식량 가격을 알아본 후 즐겨찾기에 추가했다. 가까운 일본에 자회사가 있어 그곳에서 주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재밌는 것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원하는 정보는 많이 얻지 못했다. 정보의 양 자체도 적지만, 가짜 정보가 많이 섞여서 정보를 선별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 현재 원시 정보 단말과 교류 중에 있습니다. 상대의 정보 저장 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52% 되었습니다. 정보의 왜곡을 배제하기 위해 이해도가 70% 이상이어야 합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신기는 생각을 바꿨다. 각성자에 대한 정보 말고 생존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이번에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문제다. 신기는 정보의 바다에서 손으로 더듬질하며 쓸모있는 정보를 하나씩 건져내기 시작했다.
### DUAL SYSTEM ###
서울 도봉구 헌터 협회 3층 사무실.
이경화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헌터 협회에 처음 왔을 때는 기분이 무척 가라앉았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헌터 협회로 발령받았다.
협회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정부 기관으로 이리저리 치이다가 기획재정부 밑에 통계청에 속하게 되었다. 혈연은 물론 학연조차 기댈 데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헌터 협회에 이름을 걸었다.
하는 일도 별로 없고 매일 뉴스나 읽다가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점점 암울해져 가는 분위기에 한 줄기 서광이 내린 건 몇 달 전이다. 정치계에서 꽤 무게감이 있는 사람이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 되었다.
"미스 리, 자료 정리가 아직인가?"
본인이 해외 유학파임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사가 또 재촉했다. 분명 한인 거주지역에서 한국말만 하다가 돌아왔을 거라고 직원들이 뒤에서 씹었다. 현재 헌터 협회에 저장된 각성자의 자료는 1300건이 조금 넘는다. 아침에 갑자기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통계 수치를 내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거의 다 됐어요. 틀린 데 없나 확인하는 중입니다."
'무능한 새끼. DB에서 데이터를 직접 내려받겠다는데 권한도 주지 않고 손으로 일일이 입력하라니.'
관리자 권한으로 DB에 직접 접속한 후 모든 데이터를 엑셀로 내려받을 수 있다.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한 후 엑셀 함수를 이용해 통계하면 이십 분도 안 걸리는 일이다. 그런데 멍청한 박 주임은 관리자 권한을 자신의 권위로 생각하는 듯 빌려주지 않았다.
검색 권한밖에 없는 이경화는 웹 브라우저로 한 페이지씩 마우스로 드래그해서 엑셀에 복사해 넣었다. 몇 초에 끝낼 일을 십여 분 씨름했다. 사실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일을 끝냈지만 박 주임에게 괘씸한 마음이 들어 지금까지 일하는 척 시늉했다.
'나는 왜 각성하지 않냐? 지방대 나온 돌머리도 7급 공무원이 되는데.'
아직 개명 신청이 통과되지 않아 김태풍의 이름은 여전히 김영호다. 각성자 검증기에서도 김영호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태풍이라는 이름이 무척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항상 자신을 김태풍으로 부를 것을 강조했다.
'각성자 70%가 20대, 25%가 10대, 나도 20대인데 왜 나는 각성자가 되지 못한 거냐고.'
지금까지 C급은 여럿 있지만 B급은 유일하다. 김태풍은 아침에 출근 도장을 찍고 바로 사라진다. 말로는 협회에서 마련한 곳에서 마법을 수련한다고 한다. 어벙하게 생긴 김태풍이 게임에서 나오는 마법사처럼 옷을 차려입고 마법을 사용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웃겼다.
"미스 리, 업무 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거 아냐?"
박 주임이 시비 걸자 이경화는 참지 않았다. 직장에서 무조건 참는 게 능사가 아니다. 더구나 협회 안에서 위신이 가장 떨어지는 박 주임에게까지 참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말씀이 지나친 거 아니에요? 1300명의 각성자 정보를 수동 입력하라니요. 각성자 정보 하나 입력하는 데 키보드 몇 번 두드려야 하는지 아세요? 50번은 두드려야 해요. 1300명이니 총 7만 번 정도 필요해요. 1초에 3번씩 두드려도 7시간이 걸리는 일이에요."
박 주임은 이경화의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직급으로 누르기엔 벅차다. 이 자리도 아버지가 겨우겨우 사정해서 얻어낸 자리다. 아버지는 잘하려고 하지 말고 제발 조용히 자리만 지키라고 당부했다.
"참, 미스 리도, 농담 가지고 뭘 그리 정색해. 미국에서는 이런 농담이 일상이란 말야."
이경화가 정리한 자료를 들고 박 주임은 협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보통 메일로 정리한 자료를 보내면 되는데 협회장은 종이에 프린트한 걸 선호했다.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며 좋아하지 않았다.
"이 자료 다 숙지했어? 나랑 같이 발표하러 가야 하는데."
협회장은 박 주임의 아버지와 군대 동기다. 아버지는 협회장 앞에서 거짓말을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거짓말이 한 번만 들키면 가차 없다는 말을 귓불이 닳도록 들은 것 같다.
"미스 리가 정리한 겁니다. 저는 업무가 많아서."
"미스 리 불러와."
그렇게 되어 이경화는 협회장과 함께 비싼 차를 타고 움직이게 되었다.
"미스 리, 내 또래 사람들은 여자를 경시하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능력만 있으면 성별이 왜 중요해.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남자를 누르고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경화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감사하다고만 했다. 협회장은 이경화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늘어놓았다.
"오늘 일은 공식적 행사가 아니야. 그러니 미스 리도 비밀로 해줘. 오늘 우리가 볼 사람은 군부 쪽 사람이야. 그 사람한테 각성자의 유용성을 강조해. 그렇게 되면 우리는 통계청이 아니라 국방부 밑으로 갈 수 있어."
이경화는 협회장의 널뛰기 화법을 따라갈 수 없었다. 배경 지식을 하나도 설명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자기 말만 하고 있다.
"국방부 밑에 헌터청이 새로 생기는 거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나에 대해 들어봤다면 내가 청장 따위를 욕심내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 거야. 미스 리가 열심히 하면 헌터청 청장이 될 기회라는 말이지."
차창 밖의 풍경이 점점 삭막해졌다. 막사 같은 곳으로 향할 줄 알았는데 제대로 된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 이경화는 영리한 여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검문도 없이 차가 무사통과했다는 것으로 지금 일반적인 상황이 아님을 눈치챘다.
"현재 B급 헌터는 한 명이고 C급 헌터는 일곱입니다. D급은 134명이고 E급이 360명이며 남은 800여 명은 F급입니다."
의외로 머리가 허연 늙은 군인이 아니라 표독한 세모 눈을 한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군인이었다. 협회장이 적당히 격식을 차리는 거로 봐서 예사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스킬별로 구분할 경우, 마력을 사용하는 스킬의 사용자가 36명이고 남은 사람들은 전부 기력 사용자로 추측합니다. 추측이라고 한 것은 E와 F급의 각성자들은 마력 혹은 기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E급의 마법 각성자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군인 남자는 자료를 자세히 훑었다. 자료를 내려놓은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한 후 바로 질문했다.
"예측이라는 스킬이 흥미롭습니다. 미래를 예지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D급부터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데 사용한 사람들은 전부 어두운 곳에 뼈만 남은 시체가 가득한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혹시 레벨이 변동하거나 등급이 오르는 경우가 있었나요?"
"지금까지 딱 한 번 재검사를 했고 참여한 각성자는 320명입니다. 대부분 서울 지역 각성자이고 지방의 각성자들은 거의 재검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20명 전부 등급이나 레벨이 똑같이 나왔습니다. 다만 스킬 등급 혹은 레벨이 변한 경우는 있었습니다."
"하나만 더 질문하죠. 각성자의 스킬은 각성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들었습니다. 일반인에게 유용한 스킬은 없나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각성자들의 협력을 얻어내기 어려워서 제대로 된 조사를 진행하기 힘듭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협회장이 입을 열었다.
"박 대위, 어때요? 우리 사이에 듣기 좋은 말은 필요 없어요."
"제가 어르신들을 설득하겠습니다. 그걸 위해서 항상 최신 자료를 받아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건 제 메일 주소입니다. 미스 리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죠. 군 메일이라 등록되지 않은 외부 메일은 반송됩니다."
협회장이 눈치 주자 이경화는 바로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어느 정도 설득이 되면 제가 자리를 한 번 마련하겠습니다. 협회장님 골프 솜씨가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번에 한 번 제대로 견식 해보겠습니다."
"적당한 내기도 곁들이는 게 좋겠어요. 나이가 나이다 보니 걸린 게 없으면 힘이 도통 나질 않아요."
협회장과 이경화를 배웅한 박영광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특별 작전조 조장들 전부 모여."
조장들을 모아놓고 박영광은 빠르고 정확하게 지시를 내렸다.
"예측 스킬을 가진 자들이다. 주소랑 전화번호 전부 있으니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라. 작전에 사용할 대포폰은 납치에 성공한 후 바로 파괴한다. 최대한 조사를 자세히 해서 가출로 그럴듯하게 꾸며라."
조장들이 각각 한 명의 자료를 가지고 떠난 후 박영광은 감시조 조장들을 불렀다.
"E급과 F급 예측 능력자들이다.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고, 가끔 접촉해서 뭐 이상한 거 본 게 없는지 확인해라."
조장들이 지역별로 정리한 명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강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특별 작전조 조장들이 떠나기 전과 똑같은 구호가 쩌렁쩌렁 울렸다.
- 작가의말
급하지 않게 뼈대에 살을 넉넉히 붙이며 진행하겠습니다. 모든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쓰고 있습니다. 전개가 너무 느린 건 아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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