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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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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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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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10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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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칠흑의 꽃. 제 8막. 휴식.

DUMMY

그렇게 말하고 샤를리즈는 뒤에 서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샤를리즈의 괴로운 유년 시절에 일조했음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이르다. 이 정도로 치욕을 주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샤를리즈는 안주머니에 있던 금화 다섯 닢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금화야. 이거 받고 입 닥치고 있어. 명줄 앞당기기 싫으면 말이야.”


샤를리즈는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갔다. 로비 앞에 서서야 그녀는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뒤에서 레베카가 말했다.


“경솔하셨습니다, 방금 일은.”


“알아요. 나도 아직 멀었나보네요. 겨우 이런 일로 진정도 못하고.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욱해요. 예전에도 이런 내 성격 때문에 된통 당했으면서.”


샤를리즈는 북부의 아스피트 공작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랐다. 그 때는 경황도 없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참패. 유리한 패는 다 가지고 있었는데도 휘둘렸다. 다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일까? 분명 어렸을 적부터 해오고 싶었던 일을 했음에도 개운하지 않다. 오히려 찝찝하다. 샤를리즈는 한숨을 쉬고는 레베카에게서 책을 받아들었다.


“에드리안을 잘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마세요. 샤를리즈 님의 생각과는 달리 도련님은 강한 분이십니다.”


그 말에 샤를리즈는 빙긋 웃는다.


“내가 그 애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샤를리즈가 다음 말을 하려던 찰나,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에 샤를리즈는 들어오는 자가 누군지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레베카에게 눈치를 주었고, 그녀는 알았다는 듯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뒤 물러갔다.


“병문안 선물로 이게 맞을 지 모르겠... 샤를리즈 양?”


낯익은 목소리에 샤를리즈의 눈썹이 까딱였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머리칼을 가진,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은 사내를 보고 샤를리즈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아, 공작이 쓰러지면 큰일 날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다. 한 번 장난이나 쳐볼까 싶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어머? 란 씨.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아...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샤를리즈 양이 그라니언 가문과 인연이 있었습니까?”


“제 성이 무엇인지 잊으셨나보네요. 저는 빈트뮐러 상단의 사람이에요. 총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지극히 꺼려하시니 각하의 병문안을 제가 오게 되었죠. 아시다시피 빈트뮐러 상단은 그라니언 가문의 투자를 받고 있으니까요.”


갑자기 지어낸 말치고는 그럴듯하다. 샤를리즈는 당황해하는 란을 보고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듯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러는 란 씨야말로 그라니언 가문과 인연이 있었군요. 지난번에는 에녹 경과도 벗이라고 하셨죠. 그러고 보면 참 권세가들과 인연이 많으신 것 같아요.”


샤를리즈의 말에 란은 빙긋 웃으며 말한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받던 장학금이 그라니언 가문의 투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까요. 저 외에도 제 동기들 중에는 그라니언 가문에 빚을 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그들도 곧 오겠죠. 저야 수도에 있어서 이렇게 빨리 오게 된 것이지만.”


“흐응. 그렇군요.”


저 쪽도 둘러대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다. 아마 자신이 란 크로프츠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공작은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에도 투자를 해 제 사람들을 많이 만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은 결국 에드리안의 사람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샤를리즈도 그런 공작의 행동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소개하죠. 이쪽은 제 후원자, 블라레트 후작 가문의 아드님이신 프랜시스 씨입니다. 프랜시스 씨. 이쪽은 샤를리즈 빈트뮐러 양이십니다.”


란의 소개에 샤를리즈는 란의 뒤에 서 있는 연갈색 머리칼을 가진 훤칠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 자가 블라레트 가문의 장자. 그리고 블라레트 가문은 선왕의 오른팔이었던 가문들 중 하나이자 빈트뮐러 상단이 주시하고 있는 가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악수를 권했다.


“반갑습니다. 샤를리즈 양. 란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제 얘기를요?”


“네. 요즈음에는 보기 드문, 교양 있는 아가씨라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교양 있다는 말은 책 깨나 읽었다는 말이리라. 그 말에 샤를리즈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블라레트 가문과는 인사를 트는 것이 좋았다. 만약 란이 도모하고 있는 반정이 성공한다면, 지금은 형편없는 블라레트 가문의 주가가 훨씬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훗날을 위해 좋은 인상을 남겨두는 것이 좋다.


“저도 블라레트 가문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많답니다.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요.”


“우리 가문에 대해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요즈음은 정계에 진출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많이 잊혀 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머? 그런 말씀 마세요. 조금이라도 귀족들의 사회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차, 두 분 모두 각하의 병문안을 오셨는데, 제가 너무 잡아둔 것 같군요.”


슬슬 자신도 상단에 가봐야 한다. 그러나 눈치가 없는 것인지 프랜시스가 당황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란씨?”


프랜시스의 행동에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샤를리즈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확실히 란의 그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는 그가 프랜시스보다 더 높은 직위를 가진 자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행동들은 그가 선왕의 아들임을 아는 샤를리즈나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의미부여를 할 필요 없는 행동이었지만.


“물론입니다. 하지만 샤를리즈 양은 이만 가보셔야 할 것 같군요. 시간이 늦지 않았습니까? 지난번처럼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안 되니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오늘은 마차를 타고 왔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다음에 한 번 식사나 같이 하죠.”


“좋아요. 만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프랜시스 씨.”


샤를리즈는 혹시나 저를 잡을까봐 재빨리 인사한 뒤 걸음을 옮겼다. 공작의 저택에서 저들과 오래 있어 좋을 것은 없다. 에드리안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과 공작의 분위기는 닮았다고 한다. 생김새야 에드리안 쪽이 훨씬 많이 닮았다지만. 아무튼 자신과 공작도 꽤 닮은 구석이 있었으므로 공작과 자신을 동시에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역시 꺼려진다.


혹시나 자신이 공작의 사생아임을 들킨다면? 끔찍하다.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에드리안에게 약점이 될 것이며, 동시에 에드리안의 출신 또한 자작가문에서 난 사생아가 아닌, 마구간지기의 아들임이 들통 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는다 해도 온갖 멸시를 당하게 되리라.



‘자네의 존재 자체가 자네의 동생인 에드리안 군에게는 약점이 되는 셈이거든.’



아스피트 공작의 말이 저주처럼 자신을 옭아맨다. 자신의 존재가 에드리안의 약점이 된다면, 아니 에드리안뿐만이 아니라 에단이나 빈트뮐러 상단의 약점이 된다면 자신은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샤를리즈의 표정이 한 층 어두워진다. 최선책은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겠지만 만일,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스피트 공작의 앞에서는 당당하게 기꺼이 사라지겠다 말했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그럴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자신이 강할까?


“샤를리즈 님.”


부름에 움찔해 고개를 든다. 마부이다. 아마도 다음 행선지를 물으려는 것이다. 샤를리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진다. 에드리안을 보고 갔으면 좋았으련만.


“상단으로 가줘요. 총수께 각하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니까요.”





* * *





“자네는 왜 그렇게 눈치가 없나?”


샤를리즈가 나가자마자 란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프랜시스를 노려봤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제가 뭘요?”


“그녀를 계속 잡아두면 우리들이 의심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건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두 공작 가문의 지인이자 후작 가문의 지인인 평민이 몇이나 있을 거라 생각해?”


란의 짜증 섞인 말에 프랜시스는 담담하게 답한다.


“그 정도까지 생각할까요? 아무리 교양이 있다 하더라도 여자 아닙니까? 전문적으로 학식을 배울 수 없는 여자. 현왕의 치세아래 당신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한 여성은 없습니다. 뭐, 당신은 저 여자를 높게 평가하는 듯하지만.”


프랜시스의 말에 란은 한숨을 쉬었다. 프랜시스의 말은 객관적으로 옳았다. 당장 그의 약혼녀인 프리실라만 봐도 그랬다. 왕국 최고 가문의 영애의 지식수준이 이 나라 상위 계층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다. 평민들이야 제 앞길이 바빠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글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전대만 하더라도 귀족 여성들은 이렇지 않았다고 그는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다 아쉬우니까요.”


뜻밖의 말에 란은 프랜시스를 바라본다. 설명하라는 듯 빤히 바라보자 프랜시스는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며 말한다.


“미인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전 저런 고전적인 미인이 취향이라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외모를 말하는 것이었나? 확실히 란이 보기에도 그녀는 미인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미인임을 인식하기 전에 그녀의 능력에 끌렸던 그이다.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 빈트뮐러 상단의 총수가 가장 아끼기에 막강한 재력 또한 보장되어 있는 그녀. 그리고 계산되어 나오는 표정과 반응들과 말들.


그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항상 무언가에 의해 시험을 받았거나, 혹은 삶이 항상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확실히 그녀는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자신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불쾌하다. 프랜시스는 마치 프리실라가 자신을 대하듯 샤를리즈를 대하고 있었다. 프랜시스와 프리실라가 묘하게 오버랩 된다.


작가의말

다음 혹은 다다음 막으로 제 8막은 끝입니다.
프랜시스의 성격은 왕국의 보편적인 귀족 남성의 성격입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 덧글 남겨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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