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최근연재일 :
2014.08.09 22:52
연재수 :
207 회
조회수 :
362,645
추천수 :
4,774
글자수 :
1,024,746

작성
13.07.20 13:39
조회
953
추천
18
글자
23쪽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DUMMY

왕은 천천히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안 그래도 키가 큰 왕인 데다가 붉은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고, 풍기는 분위기자체가 상당했던지라 마치 거인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떨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끝이라도 내겠다는 듯. 그가 말했다.


"폐하의 뜻대로 해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죽어도 수도에 올라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룬, 그 아이를 폐하께 드리지요. 아내가 반대를 많이 하겠지만, 폐하의 뜻이라고 하면 결국 따르겠지요."


"내게 청이 있는 게로군. 그리 저자세로 나오는 것을 보니."


그에 레지스는 표정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오만하고, 자신을 깔보는 눈으로 왕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왕비는 살릴 수 없다. 이미 측근들에게도 이야기가 간 문제. 게다가 데스마타, 그 놈의 귀에도 들어갔으니. 게다가 네가 왕비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그런 생각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죽기 전에 아들을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너는 네가 그 지경이 되고서도 왕비를 생각하는 게냐? 참으로 눈물겨운 애정이로구나. 이러니 내가 의심을 안 할 수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 여자가 폐하께 간 순간 저는 마음을 접었습니다. 이 부탁을 드리는 것은 그저 한 사람으로써 그 여자가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레지스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왕은 한참을 그 눈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자신과도 같은 눈. 그와 레지스는 닮은 점이 거의 없었는데도 부왕의 저 눈만큼은 닮아 있었다. 재미있지. 이렇게 성격이 다르고, 지위도 다르고, 지향하는 것도 다른데도 눈만큼은 닮았다니. 왕은 코웃음을 친 뒤 몸을 돌렸다.


“고려해보마. 그 정도 선처는 해줄 수도 있겠지. 접시는 게 놓고 가거라.”


“예. 감사합니다, 폐하.”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리 될 것입니다.”


왕은 고개를 돌렸다. 레지스는 탁자에 접시를 놓은 뒤 절을 하고는 왕의 사저를 나갔다. 그에 왕은 탁자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성에가 낀 유리잔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경비병!”


왕의 부름에 경비병이 급히 달려왔다. 그에 왕은 경비병에게 야식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먹게. 시종이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인데 깜빡하고 지시를 하지 못했지 뭔가.”


“아...”


독이 있을 지도 모르니 먹어보라는 뜻이었다. 그에 경비병이 움찔거리자 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걱정 말게.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내, 모두 죽였으니. 감히 나를 독살하려 드는 이는 이제 이 나라에 없어.”


그럼에도 경비병은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걸어와 야식으로 들어 온 과자를 집어 먹었고, 왕이 따라준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30분을 말이다. 그제야 왕은 나가도 좋다는 명을 내렸고, 경비병은 한숨을 내쉰 채 걸어 나갔다. 아무런 증상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에도 왕은 야찬에 눈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많은 세월이 지났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부터 왕위에 오르고, 마침내 왕자를 얻기까지. 드디어 자신의 대를 이을 왕자를 얻었으나 이제는 그 왕자의 받침이 되어줄 권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를 왕비는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자신의 왕국과 이웃한 나라에 석녀라고 소문이 나 결국 이혼을 하게 된 나이 든 공주가 있다고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아이들을 지독히도 좋아한다고 하니 자신의 왕자에게 좋은 어미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와 결혼하면 권력도 자연히 따라올 터. 젊은 시절에는 왕좌를 가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고, 그래서 자신의 혈육을 모조리 죽이다시피 했다.


왕위에 올라서는 더욱 강력한 왕권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신관들의 권력을 거의 빼앗아왔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왕자, 란의 안위뿐.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왕은 레지스가 가지고 온 물을, 마셨다.






* * *






“폐하께서 돌아가셨다니?”


대신관, 데스마타는 의복을 차려입던 손을 멈추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신관을 꾸짖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식을 전하러 온 신관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만 끔뻑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시종장에게서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대 신관님을 얼른 불러 오시라고...”


“그럼 정말로 폐하께서 돌아가셨단 말이냐?”


“예. 칼라일 시모어 경이 마법사들을 데리고 급히 가셨고, 연금술사들이나 의술을 꽤 한다는 신관들도 모두 불려갔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돌아가신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말 그대로 주무시다가...”


“이상한 일이 아니냐! 어찌 폐하께서 그리 갑자기 돌아가신단 말이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건강했던 분이! 독살. 독살 가능성은 없느냐?”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항상 음식을 먹기 전에는 음식을 가져 온 시종들에게 먹인다는 것을요. 시종들 중에 아무도 죽은 이가 없습니다. 아마도 독살은 아닐...”


“그럴 리가...! 아니지. 내가 가봐야겠다. 이 일을 누가 알고 있느냐?”


“아직까지는 궁 안에 있는 자들만이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그라니언 공과 블라레트 공에게 전갈이 가겠지요. 다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우왕좌왕하고 있고, 시종장이 모두들의 입을 단속시키고는 있습니다마는...”


“나는 지금 당장 시종장을 만나러 가야겠으니 자네는 나를 따르게!”


“예, 대신관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제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던 왕이 아닌가? 건강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상이 있었다면 그가 심어둔 신관이 분명 말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매 주마다 왕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고 있었건만!


데스마타는 이를 으득 갈고는 왕의 사저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제 손안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너무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탓에 수 십 년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돌아가던 머리조차 그 작동을 멈추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들리지 않았을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경비병들의 잡담들이 그의 귀에 들어온 것은.


“에드가 죽었어.”


“에드라면 폐하 사저를 지키는 그 겁 많은 경비병을 말하는 건가?”


“그래. 잠을 자다가 그대로 죽었다더군. 어제까지만 해도 폐하의 사저를 끝까지 지켰다던데.”


데스마타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잡음이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대개 이런 느낌이 들 때는...


“이보게!”


데스마타가 말을 걸며 그들에게 걸어가자, 그들은 데스마타를 바라보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오던 신관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고, 데스마타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든 뒤 그들에게 물었다.


“경비병이 죽었다고 하였나?”


“예. 갑자기...”


“폐하의 사저를 지키던 자였다고?”


“예.”


“그와 함께 경비를 섰던 자는 어디 있나?”


“제, 제가 함께 있었습니다마는... 대 신관님께서 어찌...”


“자네들은 물러가게. 이 자와 나는 할 말이 있으니.”


경비병과 잡담을 나누고 있던 시종들이 데스마타의 말에 절을 하고는 총총 물러났다. 괜히 입을 놀린 게 아닌가 싶어 눈치를 살살 보는 경비병을 향해 데스마타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러네. 내 어제 아주 꺼림칙한 예언이 떠올라서 말이지. 혹시나 이 일이 그 예언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러는 것이니 부담스러워하지 말게.”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 경비를 서는데 특이한 점은 없었는가? 혹여 폐하께서 자네들, 특히 ‘에드’라는 자를 불렀다던가...”


경비병의 행동을 보니 아직까지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궁에 파다하게 알려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 잘 된 일이었다. 시종장으로써는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일단 이 일을 아는 모든 이들의 입을 닫게 하고, 지혜를 구하기 위해 칼라일 시모어 등을 불러 모은 것이겠지만. 아무튼 왕의 죽음을 모르는 경비병이니 이런 일을 물어도 거리낌 없이 얘기할 것이다. 제게 불똥이 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것이... 아, 아아. 어제 야참을 드실 때 한 번 부르셨습니다. 저는 그 때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야참을 한 번 먹어보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을...”


잡았다. 데스마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왕도, 경비병도 잠을 자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둘의 공통점은 야참. 그러나 데스마타는 쉽게 확신하지는 않았다. 이런 일일수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데스마타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하며 물었다.


“그렇지. 폐하께서는 보통 음식을 가져 온 시종들에게 그것을 먹이지 않나. 그런데 어찌 폐하께서 경비병에게 그를 먹으라 하셨지? 시종은 어쩌고?”


“그러게 말입니다요. 그런데 그 것도 이상했던 것이 시종이 왕비 마마 처소의 시종이었습니다. 분명 그 표식이었지요. 아마도 폐하께서 진노하신 것을 알고 폐하 직속 시종들이 일을 미룬 것 같았습니다만...”


“왕비 마마 처소의 시종이었다?”


데스마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약 왕이 독살당한 것이라면, 그 배후가 왕비라는 것인가? 데스마타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 없다. 그 멍청하고 겁 많은 여자가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아주 중요한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데스마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는 물었다.


“그 시종의 인상착의를 기억하는가?”


“뭐,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습니다요. 게다가 아시다시피 시종들의 생김새를 어찌 다 기억하겠습니까? 그냥... 그래, 검은 머리칼에...”


데스마타의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되었네. 그 정도면.”


“제가 도움이 되었습니까요?”


“그래, 정말 큰 도움이 되었네. 그러니 내 자네에게 예언을 하나 해줌세. 자네의 앞길에는 죽음이 드리워있네. 그러니 지금 당장 채비를 하고 왕궁을 떠나게.”


“예?”


“왕성을 떠나지 않으면, 자네는 일주일. 아니, 사흘 내에 죽게 될 것이야. 지금이 자네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지. 자, 이걸 받게.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도망쳐야 할 것이야.”


대신관의 예언들은 궁정의 아랫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왕의 기분이 좌지우지되었고, 귀족들의 목숨이 날아가곤 했으니까. 경비병은 하얗게 질린 채 그가 건네는 금화를 받아들었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데스마타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왕의 사저가 아닌, 왕비 궁이었다.


“대 신관님. 어찌 이리로 가십니까?”


“군말하지 말고 자네는 왕자를 왕비궁으로 모셔오게. 누가 막거들랑 내가 아주 큰 예언을 준비하고 있다고, 내 이름을 팔아. 그렇게 해서라도 모셔와야 할 것이네. 아마도 폐하께서... 그리 되셨다는 것은 왕자의 궁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들었을 테니. 알겠는가?”


“예.”


데스마타가 딱딱거리며 말하자 신관은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는 다급하게 달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데스마타는 복도의 벽을 주먹으로 내리 찍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천출 놈이.... 자비를 베풀어주었건만 감히 일을 벌여!”


왕은 분명 죽어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2개월은 지났어야 했다. 그래야 되었는데. 이제 데스마타가 꾸며왔던 ‘일’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그가 꿈꿨던 일들이 모두! 데스마타는 이를 으득 갈고는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 네 놈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 * *







“대 신관님!”


왕비가 가운을 걸치고 빠르게 걸어왔다. 안 그래도 그를 만나기 위해 차비를 하던 와중이었는지 그녀의 눈동자에는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데스마타는 그런 그녀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아, 안 그래도 이제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리 오시지요. 왕비 마마를 위해 기도를 드릴 겁니다. 불쌍하신 마마. 겨우 7년 만에 홀로 되시다니. 시녀들을 물리시지요.”


“예. 모두들 물러가라.”


왕비의 말에 시녀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절한 뒤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왕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습지요? 폐하께서 그리 되셨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제게 깍듯하게 구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시군요. 폐하의 소식을 들으셨으면서도.”


“폐하조차도 제가 울길 기대하시진 않으셨을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감옥에서 막 나온 기분인걸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누명으로 저를 얼마나 몰아세웠는데...”


왕비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하자 데스마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머리에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더한 시련이 닥칠 것입니다.”


“예?”


“폐하께서는 독살당하셨습니다.”


그 말에 왕비가 눈을 크게 뜨고 데스마타를 올려다보았다. 무한히 그를 신뢰한다는 눈빛으로, 왕비는 그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여자. 왕이 그녀를 홀대할수록 그녀는 자신에게 기댔고, 자신에게 기댈수록 왕은 더욱 왕비를 홀대하였지.


“그리고 그 일을 저지른 것은 레지스 님이십니다.”


“뭐, 뭐... 그, 그럴 리가... 무슨 말씀을...”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만 아는 사실이지요. 하지만 경비병에게 이미 들은 사실입니다. 어젯밤 야찬을 들고 간 시종은 왕비 마마 처소 출신의 검은 머리칼을 가진 시종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누군지는 마마도 아시겠지요? 그 야찬을 드신 폐하도 죽었고, 경비병도 죽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안 사실이지요.”


왕비는 다리가 풀린 모양인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데스마타는 굳이 그녀를 일으켜주지 않았고, 그대로 말했다.


“잘 들으세요, 마마. 저는 마마를 아주 아낍니다. 그러니 이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곧 왕자께서 이 궁으로 오실 겁니다. 제가 조치를 취해두었으니까요. 마마께서는 왕가의 사람들만 아는 비밀 통로들을 알고 계시지요. 그러니 왕자님을 데리고 왕성을 떠나셔야할 것입니다.”


“뭐, 뭐라고요?”


“폐하의 측근들은 마마께서 간통을 저질렀다고 알고 있지요. 마마의 처소에 있는 검은 머리칼을 한 시종과 말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폐하께서 사인이 독살인 줄 모르지만 아는 것은 시간문제이겠지요. 곧 시종의 정체가 밝혀질 것입니다. 자, 마마. 폐하의 측근들이 폐하를 죽인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 배후는 또 누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나, 난 아니에요!”


경기를 일으키며 왕비가 소리치자 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말했다.


“당연히 알지요. 하지만 폐하의 측근들이 그리 생각할까요? 게다가 마마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곧 아스피트 공작이 올라옵니다. 그는 그라니언보다도 더 잔인하고, 교활한 자이지요. 폐하조차도 그를 두려워해 멀리 보낸 그 자가 돌아온단 말입니다. 그 자는 저조차도 상대하기 힘들지요. 그런 그 자가 과연 마마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아니, 의심만 할까요? 마마께서 이제 어린 왕자를 대신해 국정을 보게 될 것인데, 그를 그가 두고만 보고 있을까요?”


보나마나 그는 왕비를 죽이고 왕자를 왕위에 올릴 것이다. 그리고 명목상으로는 그라니언과 아스피트가 동시에 국정을 돌보는 체제로 가자할 것이나, 여태껏 그라니언의 행보를 보면, 그가 국정에 관심을 가질 리는 만무했고, 결국 이 나라는 아스피트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아스피트는, 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데스마타조차도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한 때는 왕과 손을 잡고 그를 몰아냈었지.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아스피트도 그라니언도 감히 왕좌에 욕심을 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왕비가 왕성을 제 발로 떠나야 한다. 왕자를 데리고 말이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줘야겠지.


그는 마치 악마가 속삭이듯 달콤하게 말했다.


“마마의 안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항상 원하셨던 것처럼 편안하게, 평범한 어머니로써 왕자님을 돌보도록 말입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마마.”


그리고 왕비가 왕자를 데리고 이 성을 떠나는 순간, 그가 왕자를 죽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 * *






왕이 죽었고, 왕비와 왕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레지스는 왕좌의 주인이 되었다. 이것이 근 일주일간 일어난 일이었다. 이 말도 안 되고, 믿을 수 없는 모든 일들이 말이다.


클라우스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왕궁으로 간 레이첼과 룬을 기억했다. 레이첼. 그 여자는 저 악마의 소굴과도 같은 왕성에서 못 버틸 것이다. 불쌍한 여자가 아닌가?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고 따르던 이가 죽었고, 그녀의 연적이 살던 곳에 이제는 그녀가 살게 되었다.


클라우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아내와 딸이 생기고, 그로 인해 얻은 달콤했던 삶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않은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이 모든 것은. 그럼에도 그는 이 모든 것을 모른 척하고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스피트 공작이 수도로 돌아왔으니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을 테고. 그는 교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대단한 자였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레지스의 곁에는 자신보다 그가 있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그는 도망칠 것이다. 오늘 밤에 말이다.


“각하.”


앨런의 목소리에 클라우스는 힘겹게 일어나 자세를 추스르며 말했다.


“뭔가?”


“그것이...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폐하가 오셨다.’는 말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이미 전대가 되어버린 왕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 ‘폐하’가 레지스임을 깨닫고 일어섰다.


“어디 모셨나?”


“응접실에 계십니다.”


“알겠네.”


클라우스는 천천히 그의 사저에서 나와 응접실로 걸어갔다. 누가 왕이 아니랄까봐 기사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그의 작은 성에 말이다. 괜히 숨이 막혀오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딱 질색인데. 클라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왕이 된, 그의 친구이자 형제였던 자가 서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를 바라보며, 보란 듯이 궁정식 절을 하며 말했다.


“어찌 이런 곳에 행차하셨습니까, 폐하? 부르셨다면 금세 달려갔을 텐데.”


“예는 갖추지 않아도...”


“그럴 수는 없지요.”


이제는 예전의 둘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고, 클라우스는 선을 긋고 말한 셈이었다. 그에 레지스는 씁쓸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군. 나도 이런 결말을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폐하.”


“아스피트 공이 궁을 휘젓고 다니네. 게다가 대 신관... 그 작자도 돌아다니지. 나는 왕자를 찾기 전까지만 왕좌에 앉아있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들들 볶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그러십니까? 유감이로군요.”


“도와주게.”


“...무슨 말씀을...”


“그들을 몰아내기만 하면 되네. 부탁이네. 옛정을 생각해서...”


“하!”


클라우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그 놈의 옛정은 언제까지 팔아먹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제가 모든 것을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독단적으로 일을 벌여 선대마저도 그리....”


더 말하려다가 밖에 기사들이 빼곡했던 것을 기억하고 클라우스는 말을 삼켰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왕비는 아마도 죽었고, 왕자는 행방불명입니다. 아마도 죽었겠지요. 저는 사실 이 모든 일도 폐하께서 하신 일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아뇨! 모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여태껏 알고 있었던 사람이 폐하가 맞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뭐하는 건지도 전혀 모르겠다고요. 일은 이렇게 다 벌려놓고, 이제는 절더러 도와달라고요? 제가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요? 내가 어떤 삶을 바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폐하 아닙니까!”


클라우스의 말에 레지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것은 원망일까? 아니면 자책감일까? 알 수 없는 표정은 곧 그의 표정에서 사라졌고, 죽은 이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듯.


“잘 알지. 자네를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아. 자네가 어떤 삶을 바라는지도... 그리고 자네의 약점이 무엇인지도.”


‘약점’이라는 말에 클라우스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멍한 눈동자에서 갑자기 불이 튀었다. 클라우스는 감히 레지스의 멱살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내 가족을 건드렸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다, 레지스!”


“건드리지 않아. 내 부탁만 들어준다면.”


“너...!”


“1년만, 아스피트와 대 신관에 맞서줘.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비로소 왕으로써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만이다. 그 때까지만 버텨줘. 부탁이네.”


협박이나 다름없는 부탁에 클라우스는 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지? 고작 2년이었다. 레지스에게서 눈을 돌리고 산 것은. 그런데 그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이건 너무나도 잔혹하게 느껴져 클라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1년 만이다. 레지스.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내 책임도 분명 있는 것이니.”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거대한 성에서 살았던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 레지스가 아닌가? 1년이다. 고작 1년. 어린 시절에서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그의 형 노릇을 한 이를 위해 고작 1년만 희생하는 것이다. 클라우스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중얼거렸다.


“1년만이야.”





* * *





“그랬군요.”


샤를리즈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작가의말

과거 시점에서 1년 후 샤를리즈의 어머니가 에드리안을 갖게 됩니다.

오랜만이네요, 주인공. 빨리 끝낸다고 오늘은 폭풍 분량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칠흑의 꽃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7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1.05 761 22 14쪽
176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31 808 23 11쪽
175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3 13.10.25 804 25 10쪽
174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21 940 23 10쪽
173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18 703 20 13쪽
172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6 802 25 10쪽
171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3 905 24 8쪽
170 제 13막. 사냥. +9 13.10.11 1,063 27 9쪽
169 제 13막. 사냥. +5 13.10.08 975 37 10쪽
168 제 13막. 사냥. +9 13.10.02 954 26 14쪽
167 제 13막. 사냥. +7 13.09.28 1,615 35 9쪽
166 제 13막. 사냥. +8 13.09.24 953 28 11쪽
165 제 13막. 사냥. +6 13.09.19 999 29 12쪽
164 제 13막. 사냥. +9 13.09.14 1,445 30 10쪽
163 제 13막. 사냥. +4 13.09.12 2,917 45 10쪽
162 제 13막. 사냥. +4 13.09.10 2,859 38 11쪽
161 제 13막. 사냥. +5 13.09.06 2,045 40 9쪽
160 제 13막. 사냥. +5 13.09.01 1,117 26 10쪽
159 제 13막. 사냥. +8 13.08.29 4,180 36 9쪽
158 제 13막. 사냥. +7 13.08.26 1,525 28 12쪽
157 제 13막. 사냥. +3 13.08.17 2,162 37 11쪽
156 제 13막. 사냥. +2 13.08.10 2,700 21 9쪽
155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8.03 1,149 18 9쪽
154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7.27 1,015 25 11쪽
»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20 954 18 23쪽
152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7.13 1,023 21 13쪽
151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06 926 15 15쪽
150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29 2,752 28 15쪽
149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6.22 983 19 16쪽
148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15 1,010 15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