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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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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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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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막. 사냥.

DUMMY

폴른 거리는 주로 수도에 잠깐 들른 대학생들이 머무는 임시 주택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수도의 다른 거리에 있는 집들보다 그 크기는 작았고,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또한, 귀족들이 웬만해서 이 거리에 나타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가장 마차를 보기 힘든 거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폴른 거리에, 그것도 야심한 밤에 한 마차가 들어섰다. 마차에는 검은 꽃 인장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차는 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덕분에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던 이들은 어쩐 일로 ‘빈트뮐러 상단의 마차’가 이 거리에 나타났는지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내일이면, 저 마차가 어느 집에 멈춰 섰고, 그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까지 소문이 나리라. 그리고 그것을 노린 샤를리즈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마주 앉은 에단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역시 제가 같이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당신을 죽이려고 안달이 난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에단의 말에 샤를리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머리가 있는 자라면 그 자리에서 날 죽이려들지는 못할 거야. 란도 함께 있는 자리이니까. 거기다 그 쪽도 혼자 오겠다고 했는데, 내가 사람을 대동해서 오면 내 꼴이 우스워지니 그럴 순 없지.”


며칠 전 상단으로 짧은 서신이 도착했었다. 란에게서 온 것으로, 폴른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시릴 슈드레거를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추신으로 시릴 슈드레거 또한 만남을 꽤 기대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뭐, 기대를 하는 건지, 혹은 벼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조금 놀랐던 것은 란에게 ‘진짜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살고 있다고는 하나, 블라레트 가문이나 혹은 그를 따르고 있는 귀족 가문의 저택에서 신세 지고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폴른 거리의 집들은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한 임시 주택들이 많아 크기가 작았고, 불편한 점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샤를리즈는 의외로 란에게 소박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긴, 그녀와 만날 때만 하더라도 그리 좋은 재질의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정말로 대학생 신분에 충실하기 위해 꾸미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들 가운데도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사치를 부리는 이들은 꽤 많았으니까. 게다가 그는 표면상으로는 그라니언의 후원을 받고 있지 않는가? 사치를 부려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이였다, 그는.


“그래도 좀 찝찝하군요.”


에단의 말에 샤를리즈는 움찔 놀라고는 에단을 살짝 노려본다. 그리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밖에서 기다리든가. 꽤 오래 걸릴 텐데. 괜찮겠어?”


“그렇게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편이 마음이 놓이네요. 몸은 고생해도.”


“참. 의외로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라니까.”


샤를리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힘들다고 궁싯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걱정이 된다고 나서다니. 샤를리즈는 뭐라 쏘아붙이려고 입을 열었는데, 마차가 정지한 탓에 입을 다물었다. 벌써 다 왔는가, 싶어 눈을 깜빡이는데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부가 채 내리기도 전에 말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에단이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아들었다. 순식간에 마차의 문을 연 이의 목에 에단이 검을 겨누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누구인지 확인을 하지 못했고, 그랬기에 샤를리즈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에단!”


문을 연 이는 다름 아닌 란이었다. 그리고 샤를리즈의 외침을 듣고서야 에단은 그를 알아차리고는 애써 당황한 티를 내지 않은 채 검을 거두었다. 란은 아직도 놀란 것인지 푸른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다. 그가 말했다.


“검이 제 목을 겨누는 상황은 처음 겪네요.”


어이없는 그 말에 샤를리즈는 피식 웃었다. 하긴, 그의 주변에는 그를 떠받들어 모시는 사람들밖에 없을 테니. 그러나 에단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한다.


“그러니까 왜 마차의 문을 갑자기 엽니까? 안 그래도 요즈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예민해져 있는데.”


에단의 짜증스러운 어투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누가 누구를 향해 짜증을 내고 있는 건가? 그러나 그런 상황은 개의치 않는 듯 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반가워서요. 그리고 나는 에단 씨가 올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뭐, 일단 제 잘못이 먼저이긴 하네요. 죄송합니다.”


란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에단은 ‘뭐, 그럴 것까지야...’라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를리즈는 둘 사이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특히 에단의 반응에서. 에단은 웬만해서 남들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샤를리즈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어, 마치 실험 대상을 보는 연금술사처럼 말했다.


“친해졌네요, 둘이.”


“누구 때문인데요? 이게 다 샤를리즈 양이 저를 바람맞히고, 에단 씨가 그에 대해 핑계를 대느라 그런 것 아닙니까?”


“뭐 어때요? 친해지면 좋은 거지. 안 그래요? 그것보다 감동이네요. 이렇게 친히 마중 나오셨을 줄이야.”


샤를리즈가 방긋 웃으며 얘기했고, 그 속의 가시를 눈치 못 챌 리 없는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에단이 마차에서 내린 뒤, 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저야 마음 편하게 밖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아, 기다리시려면 안에서 기다리셔도 되는데...”


“아뇨. 에단은 밖에서 기다려야 해요. 이유가 있어서요.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슈드레거 씨는 오셨나요?”


샤를리즈가 두리번거리며 묻자 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샤를리즈는 그 손을 잡은 뒤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다시 둘러본다. 이미 어둑해졌음에도 폴른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노린 것은 맞지만 정작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쾌했는지 샤를리즈가 에단에게 눈을 돌렸다.


“힘들겠다 싶으면 상단으로 돌아가도 되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보세요. 어떤 낯짝을 가지고 있을지 저도 궁금하니까.”


‘어떤 낯짝’이라는 대목에서 란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에단을 바라보았지만, 에단은 정정할 의사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샤를리즈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영업용 미소를 띠며 란에게 말했다.


“나중에 다 얘기할 테니까. 일단, 지금은 그냥 넘어가주시겠어요?”


“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그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럼 다리를 놓아준 이쪽 입장이...”


“걱정 마세요.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일단은 믿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란은 에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현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잡은 채 섰고, 샤를리즈는 고맙다는 듯 빙긋 웃은 뒤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는 빠르게 주변을 슥 살펴본다. 진한 고동색으로 옻칠되어 있는 목재 벽, 그리고 비슷한 톤으로 이루어진 목재 장식들. 분명 그것들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나, 집 주인의 신분에는 맞지 않는 조잡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손에 든 서류들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전부터 계속 생각해왔는데, 란 씨는 굉장히 소박하게 사시는 것 같네요.”


“예?”


“옷차림이나, 가구들이나. 보통 란 씨보다 못한 신분인 사람들도 그런 것들로 스스로를 화려하게 꾸미느라 빚을 지곤 하잖아요.”


“아아. 그런데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여기에 있는 가구들 같은 건 모두 그라니언 공이 골라준 것들인데. 별로인가요? 물론, 대학생들이 살 수 있는 수준에서.”


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샤를리즈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공작이 가구들을 고르느라 고심했다는 것을 상상하니, 너무나도 우스워서. 그도 그럴 게 공작 또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대개 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인 데다가 그 외의 것들도 모두 앨런이나 혹은 공작부인이 고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둘은 심미안을 가졌으니까.


샤를리즈는 란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손수 그런 것들을 골라줬다는 것은, 대의든 무엇이든 간에 한 사람으로써 그를 아낀다는 뜻이기도 했다. 샤를리즈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 분은 정말로 뛰어난 학식을 가졌고 존경할만한 분이지만, 이런 쪽으로는 젬병이죠. 차라리 다음에 기거할 곳을 찾으실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 조금씩 고위 귀족들도 당신의 집에 방문하려 들 테니까요. 아닌가요?”


란의 신분을 염두에 둔 말이었고, 란은 ‘끄응’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제 주변에 그런 걸 조언해줄 사람이 있을는지.”


“프랜시스 씨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신가보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저와는 취향이 다르니까요.”


하긴, 블라레트 가문의 후계자는 가문의 세가 기울었음에도 조금 화려한 것들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란의 뒷조사를 하면서 들었다. 그래서 그 쪽에도 안면을 트고, 긴밀한 관계를 한 번 맺어보려고 바켄바우어제 도자기를 선물한 적 있었고. 덕분에 온갖 미사여구가 곁들어진 감사가 담긴 편지도 받았지만.


샤를리즈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란의 취향은 프랜시스보다는 그라니언 공작과 비슷했다. 이런 사람에게 연줄을 댈 때는 바켄바우어의 것은 어울리지 않지. 오히려 개인으로 활동하는 도공들의 작품이 더 어울린다.


“보아하니 샤를리즈 양은 그런데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그럼 다음에 집을 옮길 때 샤를리즈 양이 제게 조언을 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뜻밖의 말에 샤를리즈는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는 분명 구설수에 오르는 건 싫다고 했던 주제에 지금은 외간 여자에게 제 집을 꾸며달라고 말하다니. 샤를리즈가 빤히 바라보자 란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제가 실수했네요. 특별한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뭐랬나요?”


샤를리즈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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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3 13.10.25 804 25 10쪽
174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21 939 23 10쪽
173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18 703 20 13쪽
172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6 802 25 10쪽
171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3 905 24 8쪽
170 제 13막. 사냥. +9 13.10.11 1,063 27 9쪽
169 제 13막. 사냥. +5 13.10.08 975 37 10쪽
168 제 13막. 사냥. +9 13.10.02 954 26 14쪽
167 제 13막. 사냥. +7 13.09.28 1,615 35 9쪽
» 제 13막. 사냥. +8 13.09.24 953 28 11쪽
165 제 13막. 사냥. +6 13.09.19 999 29 12쪽
164 제 13막. 사냥. +9 13.09.14 1,445 30 10쪽
163 제 13막. 사냥. +4 13.09.12 2,916 45 10쪽
162 제 13막. 사냥. +4 13.09.10 2,859 38 11쪽
161 제 13막. 사냥. +5 13.09.06 2,045 40 9쪽
160 제 13막. 사냥. +5 13.09.01 1,115 26 10쪽
159 제 13막. 사냥. +8 13.08.29 4,180 36 9쪽
158 제 13막. 사냥. +7 13.08.26 1,525 28 12쪽
157 제 13막. 사냥. +3 13.08.17 2,162 37 11쪽
156 제 13막. 사냥. +2 13.08.10 2,700 21 9쪽
155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8.03 1,148 18 9쪽
154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7.27 1,015 25 11쪽
153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20 953 18 23쪽
152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7.13 1,022 21 13쪽
151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06 926 15 15쪽
150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29 2,752 28 15쪽
149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6.22 982 19 16쪽
148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15 1,010 1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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