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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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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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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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1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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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DUMMY

오후 3시쯤 되면, 기사단의 훈련이 얼추 마무리되었다. 그 무렵이면, 기사들은 각자 휴식을 취하러 삼삼오오 궁정을 떠돌아다니는 시간이었고, 그랬기에 기사단의 훈련장은 텅 비게 된다.


간혹 이 사실을 악용하여 몇몇은 이 시간의 훈련장을 밀회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고, 몇몇은 마치 혁명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쑥덕거리곤 했었다.


마치 아무도 없으니 무슨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줄로만 아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훈련장이 잘 보이는 건물의 2층에서, 햇볕아래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처럼 늘어져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클랜디스.”


낯익은 목소리에 클랜디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청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는 훈련장에 걸터앉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 고민이라도 하는 것인지, 생각에 담기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입술을 꾹 누르는 버릇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옆에 있을 때면, 항상 상냥한 미소를 짓느라 정신없는 녀석이 무표정인 채로 있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사실 예상되었지만.


“무얼 보고... 저 자가 작은 그라니언이냐?”


그의 곁에 선 늙은 남자의 물음에 클랜디스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저 녀석을 본 적이 없으시군요. 어때요? 저 애의 아버지와 많이 닮은 것 같아요?”


클랜디스의 물음에 그는 창가에 조금 더 가가가 에드리안을 유심히 바라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깃들어있었다.


“생김새는 빼다 박았군. 놀라울 정도야. 2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마저 드는군.”


“하지만 성격은 완전 다를걸요? 저 녀석, 순진한데다가 착해 빠져가지곤. 거절도 제대로 못한다고요. 그래서 엘루이즈가 항상 도와줘야 하죠. 가끔씩은 제가 도와주기도 하고.”


약간 귀찮다는 듯, 클랜디스가 말했다. 마치 그나 엘루이즈가 에드리안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힘들다는 것처럼.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에드리안이 항상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뭐, 가끔씩은 자신의 기행에 대해 변호를 하느라 바쁘다는 소리도 들렸다. 엘루이즈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에는 고위 귀족 자제들이 자신을 깎아내는 소리를 했다고 주먹다짐까지 할 뻔했다고 한다. 검이라고는 잡아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이 사실을 기특하게 여겨야 할지, 한심하게 여겨야 할지.


“엘루이즈라면 스웨어 가문의 장자를 말하는 게로군. 그래, 예전에는 그라니언도 스웨어와 친구였지.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사이가 틀어졌지만.”


“아아, 그 얘기라면 엘루이즈에게도 들었죠.”


클랜디스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는 듯 손을 흔든 뒤, 그대로 제 황금빛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여전히 에드리안을 바라보는 클랜디스에게 그가 물었다.


“저 녀석.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갑자기 무슨 말이죠?”


“앞으로 태어날 네 아이가 아들이라면, 저 녀석만큼 거치적거리는 게 없다.”


그 말에 클랜디스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제대로 앉은 뒤,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할아버지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외가 쪽이지만. 클랜디스는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와 전혀 다르게 생겼다. 바로 갈색 눈동자 같지만, 빛 아래에서는 묘하게 붉은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가끔씩은 할아버지의 외모가 자신과 좀 닮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얼굴도 본 적 없는 제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도 쉬웠을 테니까. 제 어머니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하지만, 그 흔한 초상화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죽었던지라 자신의 얼굴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클랜디스는 이처럼 제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듯, 제 할아버지의 눈을 직시했다. 같은 채도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럼에도 그의 할아버지는 눈치 채지 못한 듯했고, 클랜디스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미리 움직일 필요는 없어요. 딸일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아들이라면? 그리고 그라니언이 그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일 것 같아요?”


“할 말이 있거든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해라. 답답해서 원.”


그가 속 터진다는 듯 말하자 클랜디스는 키득거린 뒤 말했다.


“이래서야 예전에는 나라를 뒤흔들었다는 대신관의 이름이 무색해지는군요. 겨우 스무 살이 넘은 외손자의 마음도 못 읽어서야. 어디 가서 스스로 데스마타라고 하지 마세요.”


농담을 하는 듯했지만, 그 속의 빈정거림을 눈치 못 챌 데스마타가 아니었다. 그 모습은 그가 아는, 그의 인생 속 최고의 적과 닮아 있었다. 그는 몸서리가 끼친다는 듯 짜증스럽게 말했다.


“넌 모르겠지만, 가끔씩 너는 소름끼칠 정도로 네 애비와 비슷한 행동을 해. 그래서 읽기가 꺼려져. 속으로 어떤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안 오니 말이다.”


‘네 애비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는 말에 클랜디스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를 애써 감추려는 듯 클랜디스의 금빛 속눈썹이 붉은 눈동자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면서 클랜디스가 말했다. 꽤 담담하게 말이다.


“나는 내 아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에드리안은 살려둘 생각이에요.”


“뭐라? 어째서? 설마하니 그새 정이라도 든 게냐? 친구 놀이에 빠진 게야?”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클랜디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데스마타는 마치 자신이 광대라도 된 기분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광대라니. 대 신관이었던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시답잖은 농담뿐인 무식한 광대라니! 데스마타는 속으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방금도 말했지만, 그의 외손자인 클랜디스는 괴상하게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진 녀석이었다. 소름끼치리만치 아름다웠지만, 멍청해서 제 말을 잘 따랐던 클랜디스의 모친과는 달랐다.


외모는 빼다 박아 어떤 계집애이든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들었지만, 저 아름다운 외모 속에는 선왕이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권력에 대한 광기에 사로잡혀 가끔씩은 무슨 짓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던 선왕이 말이다. 그래서 가끔씩은 저 어린 녀석이...


“에드리안은 좋은 녀석이에요. 정말로요. 보기 드물게 말이죠. 그래서 참 신기해요. 저 녀석은 나랑 똑같아야 하는데 왜 다른지.”


“...그게 무슨 말이냐?”


클랜디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도무지 못 알아먹겠다는 듯,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스마타를 향해 클랜디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르시겠어요? 나도 사생아이고, 저 애도 사생아에요. 저 애의 아버지도 에드리안의 친모를 사랑했고, 내 아버지도 우리 어머니를 사랑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탄생한 거죠. 아마도 저 애도 스스로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겠죠? 내 어머니가 그랬듯.”


클랜디스는 숨을 삼킨 뒤,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녀석은 나처럼 정식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살아왔죠. 이 얼마나 비슷한 삶이에요? 그런데 왜 나는 이런데, 저 녀석은 저럴까?”


클랜디스의 물음은 스스로를 향해 묻는 것이었기에 데스마타는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클랜디스는 여전히 상념에 사로잡힌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녀석을 저렇게 반짝이도록 보호한 건 무엇일까? 그래서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 녀석을 보호하던 걸 부숴버리면, 저 녀석도 나처럼 될까?”


“‘너처럼’이라니?”


“그냥 나처럼. 단어 그대로. 아무튼 만약에 저 녀석이 나처럼 괴상하게 비틀어지게 된다면...”


클랜디스는 적절한 단어를 찾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는 누구나 반할 것 같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녀석을 보호하던 걸 부수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들을 해요. 가끔씩.”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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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1.05 760 22 14쪽
176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31 808 23 11쪽
175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3 13.10.25 804 25 10쪽
174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21 939 23 10쪽
173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18 703 20 13쪽
172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6 802 25 10쪽
»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3 905 24 8쪽
170 제 13막. 사냥. +9 13.10.11 1,063 27 9쪽
169 제 13막. 사냥. +5 13.10.08 974 37 10쪽
168 제 13막. 사냥. +9 13.10.02 953 26 14쪽
167 제 13막. 사냥. +7 13.09.28 1,615 35 9쪽
166 제 13막. 사냥. +8 13.09.24 952 28 11쪽
165 제 13막. 사냥. +6 13.09.19 999 29 12쪽
164 제 13막. 사냥. +9 13.09.14 1,445 30 10쪽
163 제 13막. 사냥. +4 13.09.12 2,916 45 10쪽
162 제 13막. 사냥. +4 13.09.10 2,859 38 11쪽
161 제 13막. 사냥. +5 13.09.06 2,045 40 9쪽
160 제 13막. 사냥. +5 13.09.01 1,115 26 10쪽
159 제 13막. 사냥. +8 13.08.29 4,179 36 9쪽
158 제 13막. 사냥. +7 13.08.26 1,524 28 12쪽
157 제 13막. 사냥. +3 13.08.17 2,162 37 11쪽
156 제 13막. 사냥. +2 13.08.10 2,700 21 9쪽
155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8.03 1,148 18 9쪽
154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7.27 1,014 25 11쪽
153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20 952 18 23쪽
152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7.13 1,021 21 13쪽
151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06 925 15 15쪽
150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29 2,752 28 15쪽
149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6.22 981 19 16쪽
148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15 1,010 1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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