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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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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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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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2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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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DUMMY

꽤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던 이야기여서 지쳤기 때문일까? 혹은 젊은 시절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웠던 것일까? 공작은 눈가를 누르며 말했다.


“궁금한 것은 해결 되었나?”


회상을 한 것과는 달리, 공작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배제하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므로 샤를리즈가 아는 것은 현왕에 대한 사실적인 이야기들 뿐. 그는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으로 이야기를 했고, 그것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아주 오래 지난 일이다. 그리고 그 때는 그도, 현왕도 미숙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고, 후회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서로를 마주하고 용서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일들에 관해서 저 계집애는 관심도 없을 테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감정의 동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과 저 아이는. 그리고 그 때문에 현왕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세월이 지나버렸으니까. 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샤를리즈는 빙긋 웃은 뒤 고개를 까딱이고는 말했다.


“물론이죠.”


그에 공작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뭐가요?”


“이 이야기를 듣고 뭔가 행동을 취할 생각이 아니었나?”


“아아.”


샤를리즈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 샤를리즈의 버릇이었다. 못 알아먹은 척하면서 능청스럽게 구는 것은. 그리고 그것은 공작도 알고 있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생각을 해봐야죠. 많이. 각하도 아시다시피 저와 란 크로프츠는 선을 긋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그러니 저도 그를 이용해야할지 혹은 그를 내치고 몸을 사려야할지 고민해봐야겠죠. 뭐, 각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할지 예상하고 있으실 테지만.”


빙긋 웃으며 말하는 샤를리즈에 공작은 한숨을 내쉰다. 개입한다는 이야기겠지. 하긴, 공작이 란을 지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나 다름없으니, 어느 줄이 동아줄인지 모를 계집애는 아니다. 결국 이렇게 되었나? 선대에서부터 시작된 굴레는 그와 현왕을 집어삼켰고, 마침내 그 다음 세대인 샤를리즈와 란, 그리고 ‘그 아이’마저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와 현왕조차 끊지 못한 굴레이다. 과연 너희는 이 지독한 굴레를 끊어낼 수 있을까? 혹은 그 다음세대까지 이것이 지속되어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내고 말 것인가? 공작은 급격히 피로해짐을 느끼고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만 가봐라. 피곤하군.”


그에 샤를리즈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렇게 오랫동안 공작을 붙잡아두고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니까. 게다가 공작은, 평소에 말수가 없기로 유명하니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 한 것만으로도 피곤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 샤를리즈의, 어쩌면 얕은 생각이었다. 샤를리즈는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러시겠죠. 뭐, 어찌되었든 감사해요.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간단히 말했어도 네가 캐물을 거 아니냐? 그건 번거로워.”


“그렇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각하. 조만간 다시 뵙죠.”


샤를리즈는 궁정식 절을 한 뒤 공작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턱을 매만지며 걷기 시작했다. 신관 데스마타. 그 자는 어떻게 되었지? 죽었을까? 아니면 망명이라도 하였나? 그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공작의 피곤한 표정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뭐, 그 정도는 샤를리즈의 수준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고.


데스마타, 그의 능력은 칭송할 만 했다. 왕실을 상대로 일을 꾸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러니 만약 그를 찾으면 그녀의 사람으로 만들어야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이 되기 전에 싹을 잘라야겠지. 현왕 또한 객관적으로 보면 불쌍한 사람이었다. 결국 신분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저 모양 저 꼴이 된 것이니.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란의 편에 서서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이 그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단 하나뿐이었던 친구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으니까. 란의 대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샤를리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에 결국 자신의 감정만 내세우고 있었다. 한심하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그토록 다짐했건만.


“아가씨?”


낯익은 목소리에 샤를리즈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레베카였다. 샤를리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에드리안은 아직 안 들어왔나 보군요.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나 했는데.”


“오늘은 아마 늦게 들어오실 겁니다. 곧 손님이 오셔서요.”


‘손님이 오신다.’는 말에 샤를리즈는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의 손님이라면 에드리안이 자리를 피할 이유는 없을 터. 그렇다면 꽤 긴밀한 손님이거나, 에드리안이 마주하기는 격이 떨어진다는 얘기인데, 그런 손님을 들이다니. 샤를리즈는 흥미롭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 이 저택에도 손님이 드나드나요? 드문 일일 텐데. 누가 오나요?”


“각하께서 후원하시는 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크로프츠 씨라고 했는데, 그 분은 자주 드나드시지요.”


샤를리즈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가 온단 말인가? 곧?


“아, 저기 벌써 오셨군요.”


레베카의 말에 샤를리즈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아래층에서 앨런에게 외투를 건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2층 난간에 서 있던 샤를리즈를 용케도 알아봤는지 란이 아는 체를 한다. 샤를리즈는 애써 웃는다.


어쩌지? 이런 상황은 조금 불편하다. 또 무슨 핑계를 댄단 말인가? 일개 평민 작가인 주제에 그라니언 가문의 저택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샤를리즈는 공작이나 에드리안과 닮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런 의심을 하는 정황이 있었던 남자가 아닌가?


심지어 란은 눈치마저도 빠르지! 어쩌면 거짓말이 탄로가 날지도 모른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에드리안에게는 큰 약점이 될 지도 모르는 사실이 탄로 날 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것도 어쩌면 미래의 왕이 될 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샤를리즈의 눈이 불현 듯 반짝였다. 아니지. 오히려 이건 기회일 수도 있다. 그리고는 갑자기 레베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프리실라 아가씨도 지금 저택에 계신가요?”


“예. 아마 곧 내려오실 겁니다. 저 분께 관심이 많으세요. 항상 저 분이 오실 때마다 한껏 치장을 하시니. 의외죠? 그 콧대 높은 아가씨께서 관심을 가지는 게 한낱 저런 평민 학생이라니.”


그 말에 샤를리즈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레베카의 입장에서 란은 고작 그 정도이겠지. 레베카가 왜 웃느냐는 듯 바라보자 샤를리즈는 빙긋 웃은 뒤 말했다.


“이만 가보세요. 전 저 사람과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보아하니 프리실라 아가씨께서 있으시니 오래 말할 수는 없겠군요. 괜한 오해를 사는 건 피곤한 일이니.”


집착이 강한 프리실라의 성격을 염두해 둔 말이었고, 레베카 또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상단에서 뵙겠습니다.”


“네.”


샤를리즈는 그렇게 말한 뒤, 란이 걸어올라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자신이 쥔 패는 매우 많았다. 그의 배경, 그의 비밀, 그가 노리는 것, 그가 원하는 것 모두. 하지만 저 자는 하나도 없지. 그리고 어쩌면 오늘, 자신이 변명을 그럴듯하게 둘러대지 못한다면, 그 또한 패를 쥐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 모험수를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쯤에서 저 자를 흔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일 테니, 제대로 분석은 하지 못할 것이고. 거기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변명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적당히 자신의 ‘정체’를 밝힐 시기를 당길 수도 있다.


이제 그녀는 어느 선에 서야할지 결정을 했으니까. 더 이상 그녀의 정체를 감출 이유도 없어졌다. 그가 올라와 마침내 그녀의 앞에 섰다. 샤를리즈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그 때는... 어, 잘 들어갔습니까? 참. 모양새가 우습게 제가 먼저 뻗어버려서. 보통은...”


“에스코트도 해주셨어야죠. 그런 시각에는 말이에요.”


샤를리즈가 단박에 이야기하자 란은 머리칼을 만졌다. 저건 당황할 때 나오는 버릇. 그에 샤를리즈는 미소를 지었다. 고작 이런 일로 당황해서 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은 더 큰 일인데.


“면목 없네요. 제가 불러낸 주제에 얻어먹기까지 하고.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었네요, 그러고 보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경황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죠.”


보기 드문, 상냥한 미소를 띠며 샤를리즈가 말하자 란은 눈을 깜빡이다가 의심을 가득 품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상하리만치 상냥하군요.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이번 일로 거하게 뜯어냈을 텐데.”


“제가요? 어떻게 제가 감히...”


샤를리즈가 한 발자국,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란은 움찔 놀라 몸을 뒤로 젖히려 했다. 그에 샤를리즈가 그의 팔을 붙잡은 뒤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직시하며 샤를리즈가 말했다. 약간의 미소를 유지한 채.


“그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저하.”


푸른 눈동자가, 어지러이 색을 발했다. 샤를리즈는 그의 눈동자가 고스란히 그의 감정을 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샤를리즈는 란의 눈동자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멀리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에도 집중하고 있었다. 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에 샤를리즈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는 궁정식 절을 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가 가장 잘 알겠지.


“당신이 어떻게...”


“직접 가르쳐주셔 놓고서 그런 말씀을 하면 섭섭하지요. 안 그런가요?”


이건 거짓말. 하지만 어차피 그가 진실을 알아차릴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샤를리즈가 빙긋 웃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구두 굽 소리가 더욱 다가왔다. 이제는 퇴장할 때가 되었다.


“이 댁의 아가씨께서 달려오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군요. 아마도 약혼녀 분이시겠지요? 어머,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오해라도 사겠군요. 아시다시피 저 같은 평민은 그런 스캔들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어서. 그럼 이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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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31 808 23 11쪽
175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3 13.10.25 804 25 10쪽
174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21 939 23 10쪽
173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18 703 20 13쪽
172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6 802 25 10쪽
171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3 905 24 8쪽
170 제 13막. 사냥. +9 13.10.11 1,063 27 9쪽
169 제 13막. 사냥. +5 13.10.08 974 37 10쪽
168 제 13막. 사냥. +9 13.10.02 953 26 14쪽
167 제 13막. 사냥. +7 13.09.28 1,615 35 9쪽
166 제 13막. 사냥. +8 13.09.24 952 28 11쪽
165 제 13막. 사냥. +6 13.09.19 999 29 12쪽
164 제 13막. 사냥. +9 13.09.14 1,445 30 10쪽
163 제 13막. 사냥. +4 13.09.12 2,916 45 10쪽
162 제 13막. 사냥. +4 13.09.10 2,859 38 11쪽
161 제 13막. 사냥. +5 13.09.06 2,045 40 9쪽
160 제 13막. 사냥. +5 13.09.01 1,115 26 10쪽
159 제 13막. 사냥. +8 13.08.29 4,179 36 9쪽
158 제 13막. 사냥. +7 13.08.26 1,524 28 12쪽
157 제 13막. 사냥. +3 13.08.17 2,162 37 11쪽
156 제 13막. 사냥. +2 13.08.10 2,700 21 9쪽
155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8.03 1,148 18 9쪽
»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7.27 1,015 25 11쪽
153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20 952 18 23쪽
152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7.13 1,021 21 13쪽
151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06 925 15 15쪽
150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29 2,752 28 15쪽
149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6.22 981 19 16쪽
148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15 1,010 1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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