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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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최근연재일 :
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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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9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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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 13막. 사냥.

DUMMY

그 허무한 말에 헛웃음이라도 터질 상황이었지만, 란은 그저 여자의 팔만 잡은 채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뭔가...


“저를 보려고 상단에 그렇게 들락날락거리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실까? 아, 혹시 여기서 절이라도 해야 하나요?”


능청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이야기하는 여자의 모습에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는 애써 미소 지으며 말한다.


“우리 이야기 좀 하죠, 샤를리즈 양. 물론, 절은 생략하고요.”


“길게는 안돼요. 시간이 없어서요. 그리고 전 오늘 용건이 있어서 온 거예요. 그런데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죠?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그... 호칭은 좀 그렇잖아요. 보아하니 숨기려고 안달이 나신 모양인데. 어머? 이런 말투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아시다시피 제가 궁정과는 먼 생활을 한 사람인지라...”


굉장히 간드러지게, 그리고 예의 있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샤를리즈도 란도 알고 있었다. 란은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에 힘을 준 뒤 억지로 웃어 보인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오른쪽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일부로 화 돋우려고 그러는 거 다 알겠으니까 일단 어디든 들어갑시다. 여기서는 이야기하기 좀 그런 주제니까요.”


란이 여전히 샤를리즈의 팔을 잡은 채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이끌려고 하는데, 샤를리즈가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뿌리쳤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시간이 없어서요. 제 용건만 말하고 갈 거예요. 당신의 용건은 그 다음에 듣도록 하죠.”


그 말에 란은 그제야 폭발이라도 했는지 얼굴을 붉힌 뒤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짓는 것조차 잊은 채 정색을 하고 말한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여태까지 제가 얼마나 가슴 졸이면서 상단을 방문했는데...”


“글쎄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아마 제 용건을 들으신다면, 당신의 생각도 많이 바뀔 거예요. 장담 하죠.”


샤를리즈가 호언장담하자 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본래도 ‘나는 잘났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여자였지만, 오늘은 유달리 더 심한 것 같아서.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무언가 준비를 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란은 언제 정색을 했느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입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좋습니다. 들어나 보죠. 그 용건이란?”


“시릴 슈드레거. 당신은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죠? 그를 만나게 해줘요. 샤를리즈 빈트뮐러가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신다면, 그는 기꺼이 그가 만나려고 할 거예요.”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란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마치 거리 주변을 살피는 것처럼. 빈트뮐러와 슈드레거는 현재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상단에 관한 일은 잘 모르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그러했다. 게다가 시릴 슈드레거는 호불호가 명확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한창 적대시하고 있는 빈트뮐러 상단의 사람을 만나줄지 란으로써는 의문이었다.


또한, 가장 걸리는 것은 샤를리즈가 왜 시릴 슈드레거를 찾는 일에 자신을 찾아왔냐는 것이다. 마치 자신에 대해 뒷조사를 하고, 그래서 시릴 슈드레거가 자신의 친구임을 알아냈다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는가? 빈트뮐러 상단이 정보력으로 유명하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포섭하려고 애를 썼었고. 하지만 막상 뒷조사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영 기분이 묘하다.


“시릴 씨는 제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뭐, 그걸 알고 찾아오신 것 같으니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말했듯, 나는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즈음 슈드레거를 살리느라 바빠요. 그가 과연 응할지도 모르겠고... 바쁜 친구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군요.”


“걱정하지 마요. 저도 당신의 입장 정도는 고려했으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에요.”


꽤 '상인답게' 말하는 샤를리즈에 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뒤 물었다.


“그래, 내가 바쁜 친구를 방해하면서까지 당신과 그를 만나게 해줌으로써 얻는 대가는 뭡니까?”


란의 물음에 샤를리즈는 피식 웃은 뒤,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이 묘한 빛을 발했고, 붉은 속눈썹이 그를 덮었다. 꽤 도발적인 표정으로, 샤를리즈가 말했다.


“상단의 총수를 뵙게 해드리죠.”








* * *








“그 날, 뭐 때문에 그렇게 뛰쳐나가신 겁니까?”


말에서 막 내린 프랜시스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란은 움찔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은 채 말에서 내린 다. 그리고는 언제부터 붙어 있었던 것인지 자신의 어깨에 붙은 풀들을 털어냈다. 그러나 검은 늑대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인 터라 털에 붙은 풀이 잘 떨어지지 않았고, 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래서 내가 사냥을 싫어한다니까. 한 번 갔다 오면, 이렇게 더러워지니. 그래도 오늘은 수확이 좋군. 저녁상이 휘어지겠어.”


“말 돌리지 마시고요. 그 후, 일주일동안은 저마저도 피하셨잖습니까? 거기다가 몰래 시릴 슈드레거를 만나기까지 하고.”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한가? 이제 나는 빈트뮐러 상단에 더 이상 가지 않고, 회의나 모임에서 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집중하지.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자네가 원한 게 그거였잖아. 아, 자네가 원하던 것이 또 있군. 이런 사냥에 프리실라를 데리고 가는 것 말이야. 오늘 밤에는 내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피워가지곤...”


“프리실라 양에게 요즈음 너무 소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하께서 프리실라 양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라니언의 눈에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왕위에 오르고, 그녀를 왕비로 삼을 때까지는 비위를 좀 맞추란 말입니다.”


“그라니언도 나에게 그런 간섭은 전혀 하지 않아.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 있는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를 잡아도 상관없다고 조언을 하지.”


“대신, 그 대가로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은 저하께서도 잘 알지 않으십니까? 만일 저하께서 프리실라 양을 선택하지 않으신다면, 저하께서는 그라니언에게 왕비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을 그라니언에게 내어 주어야 할 겁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만하게. 프리실라가 저기 오는군.”


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프랜시스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사냥을 가는 것이라고 알렸고, 그를 알았을 프리실라이다. 그럼에도 프리실라의 복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사냥 복장이었지만. 그리고 아래로 여자 형제가 많은 프랜시스는, 저것이 귀족 여성들이 사냥을 나갈 때 입는 옷들의 일종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란이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프랜시스는 머뭇거리다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보통 귀족 여성들의 사냥 복장은 저렇습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


“완전 못마땅한 표정으로 프리실라 양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십니까?”


“복장 때문이 아니라 프리실라의 표정 때문이야.”


‘프리실라의 표정 때문’이라는 말에 프랜시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프리실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프리실라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다. 그녀는 기사들과 하녀들의 부축을 받고,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린 뒤 걷는 본새가 발목을 접질렸거나 혹은 다리를 다친 듯했다. 그 때, 프리실라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란은 프랜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오늘밤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네. 장담하는데, 우리의 일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거야. 그러니 오늘 밤에는 아무도 내 집에 들락날락거리지 않게 하게. 나는 이만 가보지. 마지막으로 시릴 슈드레거를 만나 확답을 받아야 하니까. 그리고 오늘 잡은 사냥감들 중에 아까 잡은 멧돼지는 공작에게 선물하도록 하지. 그의 기사들과 함께 사냥을 한 것이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뒷정리는 자네에게 맡기지.”


“저, 저하!”


프랜시스가 그를 불렀지만, 란은 바쁘다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말에 올라타 속도를 내며, 자리를 떴다. 그에 프랜시스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뒤, 휘하 기사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했다. 그리고는 프리실라에게도 다가간다. 그녀는 프랜시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란은요? 방금까지 여기에 있었잖아요.”


“선약이 있으셔서 먼저 가셨습니다.”


“선약? 선약이라고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거추장스러운 사냥에 나온 건데! 게다가 이렇게 다치기까지 하고...”


프리실라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가득 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쌓인 것들이 폭발한 모양이다. 그러나 프리실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녀들이나 기사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은 하는구나, 싶어 프랜시스는 말했다.


“아시다시피 그 분께서는 이뤄야 할 대업 때문에 주변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본래 한 가지에 집중하시면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는 분이니까요. 특히 타인과의 약속에 대해서는 칼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도 몇 마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거잖아요. 보니까 내가 다친 걸 보고 간 것 같았는데. 어렸을 때야 그에게 많은 걸 요구했지만, 지금의 난 그런 게 아니잖아요.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가요? 내 위치에서 란에게 그 정도도 요구하지 못하냐고요.”


그녀의 투정 아닌 투정에 프랜시스는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검을 매만지며 말했다.


“프리실라 양이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 분은 원래 그런 분이니. 타인과의 신뢰를 가장 중요시하는 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요. 저도 그 때는 많이 서운했었죠. 제가 고열로 시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그 분과 제가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조금 기대를 했었죠. 하지만 그 분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은 아스피트 공과의 약속이 미리 잡혀 있었을 때니까요. 아시겠습니까? 그 분은 절친한 친구나 약혼녀보다 앞으로 이뤄야 할 일이 더 중요한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죠. 우리가 바라보는 이는 훗날 왕이 될 사람이니.”


어린 시절부터 란과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어쩌면 프리실라보다 더 란에게 서운한 점이 많을 프랜시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란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보다, 그냥 란을 이해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프랜시스는 처음으로 프리실라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에는 대충 말을 해준 뒤 자신도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떴을 테지만, 이번 만큼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프리실라에게 했다.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란 님은 그럴 겁니다. 우리의 안위보다 공적인 일, 예를 들면 약속같은 것에 더 신경을 쓸 분이에요. 그러니 앞으로 왕비가 되려거든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겁니다. 부디 성숙해지세요, 프리실라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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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31 808 23 11쪽
175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3 13.10.25 804 25 10쪽
174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21 939 23 10쪽
173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18 703 20 13쪽
172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6 802 25 10쪽
171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3 904 24 8쪽
170 제 13막. 사냥. +9 13.10.11 1,063 27 9쪽
169 제 13막. 사냥. +5 13.10.08 974 37 10쪽
168 제 13막. 사냥. +9 13.10.02 953 26 14쪽
167 제 13막. 사냥. +7 13.09.28 1,615 35 9쪽
166 제 13막. 사냥. +8 13.09.24 952 28 11쪽
» 제 13막. 사냥. +6 13.09.19 999 29 12쪽
164 제 13막. 사냥. +9 13.09.14 1,444 30 10쪽
163 제 13막. 사냥. +4 13.09.12 2,916 45 10쪽
162 제 13막. 사냥. +4 13.09.10 2,859 38 11쪽
161 제 13막. 사냥. +5 13.09.06 2,045 40 9쪽
160 제 13막. 사냥. +5 13.09.01 1,115 26 10쪽
159 제 13막. 사냥. +8 13.08.29 4,179 36 9쪽
158 제 13막. 사냥. +7 13.08.26 1,524 28 12쪽
157 제 13막. 사냥. +3 13.08.17 2,162 37 11쪽
156 제 13막. 사냥. +2 13.08.10 2,700 21 9쪽
155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8.03 1,148 18 9쪽
154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7.27 1,014 25 11쪽
153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20 952 18 23쪽
152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7.13 1,021 21 13쪽
151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06 925 15 15쪽
150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29 2,752 28 15쪽
149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6.22 981 19 16쪽
148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15 1,010 1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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