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_제 마음은 털리지 않을 거예요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4화>
제 마음은 털리지 않을 거예요
* * * * *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어떤 사람이 튀어 나왔다.
바로 오늘의 경우를 말할 것이다.
아침에 재인을 학교 횡단보도에서 맞닥뜨렸다.
강의실에서 다시 재인을 맞닥뜨렸다.
그리고 이 남자를 맞닥뜨렸다.
벼리에게 정말 당황스런 상황이었다.
“안녕? 멋진 꿈을 갖고 있는 아가씨.”
그 남자는 벼리에게 훅, 들어왔다.
벼리가 반응을 바로 못하자 재인은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재인이 앞으로 나섰다.
“꿈은 또 뭐야, 도현?”
“재인, 지금은 이 아가씨와 인사를 좀 해야해.”
“날 만나러 온 거 아니었어?”
“물론 널 만나러 왔어.”
“그런데 지금 그 말은 뭐야? 그리고 왜 그쪽에서 나와? 아직 그린섬에 올 시간이 아닌데? 저녁에 보기로 한 것이 아니었어?”
“지금 그 표정은 데이트를 방해해서 무척 화가 난 얼굴인데?”
“데이트는 무슨.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재인, 너는 이 아가씨를 어떻게 알아?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며칠 안 된 거 아냐?”
“도현, 너야 말로 어떻게 된 일이야?”
벼리는 자기를 두고 두 사람이 말을 이어가자 뭔가를 해결해야 했다.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아는 사이세요?”
벼리의 목소리는 조금 올라가 있었다.
“하하, 재인, 이 아가씨가 무척 당황한 얼굴인데. 설명이 필요하겠어.”
“도현, 너무 짓궂어.”
“미안. 난 아무런 일도 안 했는데 갑자기 화살이 내게로 오는 건 뭐야?”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자, 내가 설명할게. 귀여운 아가씨.”
도현이 먼저 말을 이어갔다.
“이쪽은 이 미술관의 관장님이신, 어제 말한 내 친구 재인. 아, 미술관에 같이 왔으니 이미 알고 있는 사인가?”
“한국대학교 미술사학 김재인 교수님.”
“오, 정확히 알고 있군. 그럼 내가 궁금하겠지?”
벼리는 재인에게 다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교수님 친구 분은 언제나 본질을 빼고 말씀하시는 게 취미인가요?”
“아악. 정곡! 역시 맘에 들어.”
이번에는 재인이 앞으로 나서서 설명을 하려는 찰나, 다시 도현이 그 앞으로 나서며 벼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정식으로 인사할게. 난 진도현이라고 해. 이 건물 미술관 관장님의 절친 1번이야. 반가워.”
도현이 손을 내밀자 벼리는 얼결에 손을 내밀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손을 내밀게 한 것 같았다.
도현은 벼리의 손을 얼른 잡았다.
“정말 반가워. 어제 그렇게 보고 다시 보고 싶었어.”
“네, 네에.”
“우리, 운명 아닐까? 이렇게 우연히 두 번이나 보다니. 아, 운명이야. 분명.”
“도현! 제발 장난 그만 해. 내 학생이야. 정신없겠어.”
“그런데 어떻게 하지? 정말 내 스타일인데.”
“그만 해. 우리 커피나 마시러 가자.”
“좋지.. 그럼 우리 아가씨가 좋아하는 그린섬꽃집은 어때?”
재인과 도현, 벼리는 꽃집으로 향했다.
셋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꽃집은 로비가 있는 1층에 있었다.
그린섬 꽃집의 이름은 ‘꽃달’이었다.
꽃달은 다른 꽃집과 다르게 꽃집 안에 카페가 있었다.
꽃달은 꽃과 달이 함께 어우러진 사인 간판이 있었다.
그린섬 빌딩은 달 모양의 사인이 어디에나 박혀 있었다.
꽃달도 마찬가지로 푸른 달 모양 사인을 썼다.
꽃집 꽃달은 꽃을 열심히 파는 꽃집이 아니었다.
다만 그 자리에 꽃집이 필요해서 필요충분조건으로 구색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
꽃집 안에 있는 카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페의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꽃은 카페를 꾸민 꽃으로 보기에는 과분하게 화려했다.
카페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꽃은 하나하나가 팔기 위해 만들어놓은 꽃처럼 아름답고 정성스러웠고 우아했다.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곤 했다.
“와, 예뻐요."
"생화 맞아요?"
“이렇게 예쁜 꽃은 처음 봐요.”
사람들은 꽃집에 와서 꽃을 사기도 하지만 꽃을 구경하러 카페에 들르기도 했다.
여느 꽃집이나 찻집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여전히 꽃달은 맘에 들어.”
도현은 꽃달에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꽃달로 벼리를 안내하는 도현은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건물의 주인은 재인이라고 들었는데 도현이 주인인 것 같았다.
도현은 모든 곳에서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도현은 아마도 귀한 집의 자식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니면 개념이 완전 없는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선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개념이 없다라기 보다는 귀한 집의 자식일 거라고 벼리는 결론짓기로 했다.
도현에 비해 재인은 낯선 곳에 들어선 것처럼 쭈뼛거렸다.
자신의 건물에 있는 꽃집인데도 그러했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꽃집이었다.
재인은 아마도 모든 곳에서 낯선 나그네의 표정일 것 같았다.
도현이 재인의 손을 이끌고 커피를 주문하는 프런트로 향했다.
주인이 뒤바뀐 모습이었다.
아마도 둘의 성격 탓인 것 같았다.
프런트에 다가서자 민 실장이 걸어 나왔다.
“대표님, 도현 씨,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여길 다 들르셨어요.”
“반가워요. 민 실장님, 여전히 고우십니다.”
“호홋, 도현 씨는 여전히 매너가 좋으시고요.”
“저야, 늘 매너남이지요.”
민 실장은 벼리를 늦게 발견하고 그제사 인사를 건넸다.
“벼리 씨, 어쩐 일이에요?”
재인과 도현은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벼리 씨를 알아요?”
“그럼요, 아주 잘 아는 사이죠.”
벼리는 말없이 웃었다.
둘이 놀라는 상황을 만나자 벼리는 약간 통쾌한 기분이 되었다.
“제가 분명 말씀 드렸죠? 여기 건물의 경비하시는 분이 아버지라고.”
“아, 맞다. 그럼 이 건물에 자주 들렀겠군요.”
민 실장은 벼리의 귀에 살짝 이야기했다.
“벼리 씨, 저기 봐. 랜디가 기다리고 있어.”
벼리가 고개를 돌리자 랜디가 손을 흔들었다.
직원인 자연이 벼리의 곁으로 걸어왔다.
자연은 꽃달의 알바생이었다.
“안녕, 벼리 씨.”
“자연 언니, 잘 있었어요?”
“응, 랜디가 기다리고 있었어. 왜 요즘 꽃집에 안 들렀어?”
“일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겨우 3일 안 들렀을 뿐인 걸요.”
“저거 봐. 랜디가 눈이 빠졌다는 표정이잖아.”
랜디는 훌쩍이는 표정을 지었다.
벼리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터라 고개로 인사를 보냈다.
재인과 도현이 벼리를 꽃집에 소개하려고 했던 것인데 벼리가 자신들보다 꽃집 사람들과 이미 더 친한 사이여서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하하하”
재인과 도현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나이 지긋한 남자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벼리도 가끔 본 사람이었다.
아빠 말씀에 의하면 이 건물 관리의 총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성 부장이 먼저 재인에게 인사를 깍듯하게 했다.
도현에게도 인사를 했다.
민 실장에게도 인사를 했다.
예의가 몸에 밴 인사였다.
벼리는 성 부장의 등장에 재인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진 것을 본 것 같았다.
이 건물의 꽃집 겸 카페는 민 실장이 운영하고 있었다.
대표는 재인이지만 재인은 이 꽃집을 관여해본 적이 없었다.
건물 관리나 기타 등등의 관리는 모두 성 부장이 맡아 하고 있었다.
성 부장은 재인이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던 사람이라고 했다.
벼리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재인의 아버지인 대유그룹 김 회장의 친구이기도 한 성 부장은 재인의 모든 일을 아버지보다 더 세심하게 돌봐주는 사람이다.
특히 그룹 차원의 일을 정리해주는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재인은 자연스럽게 부장을 아버지보다 더 믿고 의지하며 지냈다고 한다.
“대표님, 김 회장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요?”
“네, 지금 잠시 좀 보자고 하십니다.”
재인은 도현과 벼리를 바라봤다.
“재인, 괜찮아. 어서 가봐. 회장님께서 부르시는데 가봐야지.”
“미안해. 여기 벼리 씨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재인 대신에 벼리 씨랑 이야기를 잘 할게.”
벼리는 자신 때문에 재인이 곤란해 하는 것 같아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기 꽃집 민 실장님이랑 잘 알아요. 괜찮아요.”
“무슨 말씀을. 제가 안 괜찮아요. 그렇잖아도 벼리 씨를 또 볼 수 없나 해서 이렇게 온 것인데.”
“그럼, 도현. 벼리 씨 잘 부탁해. 너무 귀찮게 하지는 말고.”
“당연하지. 내가 한 신사하잖아. 매너 도현. 잊지 마.”
재인은 성 부장을 따라서 나갔다.
벼리는 갑자기 도현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됐다.
민 실장은 이 상황이 우스운지 조용히 웃었다.
“민 실장님, 너무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닌가요?”
“호홋, 무슨 말씀을요. 전 충분히 잘.. ”
“그렇죠? 민 실장님은 저랑도 잘 아는 사이거든요. 맞죠?”
“잘 안다고 말해도 돼요? 도현 씨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고 말해도 되나요?”
“앗, 그럼 말이 달라지죠. 그건 살짝 모른 척 해주세요.”
도현은 과장되게 웃었다.
“벼리 씨, 날도 좋은데 우리 살짝 한국대를 가보면 어때요? 한국대 정원이 산책하기 좋다고 들었어요.”
“한국대 정원이 아름답긴 최고죠. 그런데 왜 갑자기 한국대를?”
“하핫, 재인이 한국대로 갔잖아요. 저한테 여러 번 자랑을 하는 거예요. 정원이 산책하기 좋다니 어쩌니 하면서. 그리고선 절 한 번도 안 데려가서 가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안내를 해드려야죠. 캠퍼스의 숨어있는 명소를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거야말로 멋진 코스인데요. 고맙습니다.”
민 실장은 가만히 웃더니 도현을 나가라고 살짝 밀었다.
“도현 씨, 오늘은 뜻밖의 행운을 가지셨네요. 데이트 잘 하세요. 벼리 씨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가씨이기도 해요. 잘 부탁해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잖아요. 벼리 씨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그런 말을 자꾸 하면 벼리 씨가 상대 안할 텐데.”
“앗, 조심할게요. 그건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요.”
벼리는 도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카페에 있는 랜디를 바라봤다.
랜디가 다시 손을 흔들고 웃어 보였다.
벼리는 랜디에게 가서 할미꽃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랜디와는 꽃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벼리는 도현을 따라 나섰다.
건물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민 상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민 상무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벼리도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벼리 씨,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야.”
“네.”
“민 상무님, 운전은 제가 할게요. 오늘은 잠시 데이트를 해야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
민 상무가 차 문을 열어줬다.
“괜찮아. 내가 할게. 민 상무님은 이만 돌아가세요.”
“네, 도련님.”
민 상무는 뒤로 물러섰다.
도현이 차 가까이 가서 차 문을 잡고 벼리를 안내했다.
벼리는 누군가 문을 열어주는 차에 타본 적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망설이자 도현이 가볍게 벼리를 차로 밀었다.
아주 살짝 가볍게 도와준 것이었다.
벼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현과 벼리는 한국대에 도착했다.
벚꽃은 아직이었지만 벼리에게는 길이 화사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소년처럼 맑았다.
벼리가 무슨 말인가 하면 소년처럼 좋아했다.
도현은 사람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도현이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것은 무조건 옳을 것 같았다.
주문을 걸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도현의 말은 순수하고 맑았다.
벼리는 도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을까 생각했다.
처음 보는 남자인데 이렇게 거리감이 없을 수 있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현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거리를 없애는 능력을 가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꽃달의 민 실장이 말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사람이 도현이었을 것 같았다.
* * * * *
“어떤 사람이 있는데, 아주 잘 생겼어.”
“잘 생겼으면 최고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사람이 말을 하면 모든 말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져.”
“잘 생긴 사람의 능력인가요? 히잉, 나도 그런 사람 만나고 싶어요.”
“아니야. 잘 생긴 외모가 아니야.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냥 모든 말을 믿게 돼.”
“에이, 마법도 아니고, 그런 사람은 위험하죠. 가까이 하지 마세요. 무조건 믿게 되는 사람이 있다니 위험해요.”
“하핫, 하지만 벼리도 보면 마음의 빗장이 저절로 풀리고 말 걸. 천사라서 그런가?”
“전. 절대. 제 마음을 털리지 않을 거예요.”
“직접 보면 장담할 수 없을 걸.”
* * * * *
민 실장이 말했던 사람이 도현 씨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모든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위험한 남자였다.
아니면 완전하게 선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민 실장의 말대로 도현과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편하고 좋았다.
벼리는 편한 마음을 그냥 두기로 했다.
‘뭐 어때? 편한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잖아? 좋은 것은 좋은 거지.’
벼리는 편한 도현과 가볍게 웃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