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_그냥 사랑이라고 하자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9화>
그냥 사랑이라고 하자
* * * * *
재인은 갑자기 품으로 달려든 주영을 밀어내며 엄한 오빠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파리에 있는 거 아니었어? 한 학기 더 남았을 텐데.”
주영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별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답했다.
“공부 그만 하려고.”
“아깝잖아. 한 학기 남았는데.”
“귀찮아. 학위가 필요해서 파리에 간 건 아니었어.”
“뭐가 귀찮아. 그동안 잘 했으면서.”
재인의 말이 반가운 듯, 주영은 벌떡 일어나 다시 재인의 곁으로 가까이 움직였다.
“오빠, 알고 있었어? 내가 열심히 한 거? 역시 오빠는 나한테 관심이 많았어.”
“말 돌리지 말고. 왜 갑자기 한국이야?”
“재인 오빠가 한국에 왔으니까 나도 한국에 왔지.”
“말이 되니? 더군다나 도현이 아닌 내가 왜? 왜?”
재인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왜,를 반복했다.
“나, 오빠랑 결혼하려고.”
“이런 날강도 같은 녀석,”
“헉, 오빠. 말은 제대로 해. 날강도는 오빠지. 나처럼 예쁘고 나이도 어린 처자를 만나는 것이 쉬운 줄 알아?”
“아, 그러셔요? 제발 부탁인데요. 그렇게 귀하신 주영 씨. 백마 탄 왕자님 찾아서 꼭 멋진 결혼하세요.”
“싫어. 난 오빠랑 결혼할 거야.”
“넌 올 때마다 놀랍다. 어떻게 만나자마자 품으로 뛰어들지를 않나, 결혼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오빠니까 품으로 뛰어드는 거야. 오빠니까!”
“오빠 두 번 했다가는 큰일 나겠다.”
주영은 재인이 뭐라고 해도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전이야. 도현이랑 똑같아.”
“도현 오빠랑? 내가 훨씬 나은데.”
“뭐가 나아? 도현이 백 배 낫지.”
“오빠가 오래 살고 싶지 않구나.”
주영이 재인의 곁으로 다시 다가갔다.
재인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 아니. 농담이야. 주영이 낫지.”
“난 자체 발광 주영이야.”
“자체 발광은 또 뭐니?”
“그냥 가만있어도 자체로 빛을 발한다. 이런 뜻이야.”
주영이 자체 발광이란 말을 하자 재인은 지난 밤, 품에 잠시 안겼던 그녀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체로 빛이 났었다.
재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멍을 때렸다.
‘자체로 빛이 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주영이 재인을 환기시켰다.
주영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렸다.
“어때? 자체 발광이야?”
주영은 아예 한 바퀴 휘, 돌았다.
“자체 발광이란 말을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계속 그렇게 타박할 거야? 나중에 나의 복수혈전이 무섭지 않아?”
“나중에? 왜?”
“오빠는 나랑 결혼할 거잖아. 늙으면 내가 구박할 거야.”
“아서라, 내가 왜?”
“좋으면서 튕기긴. 오빠는 어쩔 수 없어. 나랑 결혼해야 해.”
* * * * *
주영은 도현의 동생이다.
도현은 동생인 주영을 아주 많이 아꼈다.
동생이 하는 일은 뭐든 다 응해주는 동생 바보였다.
“주영이 버릇없는 거 다 네 탓이야. 온갖 응석을 다 받아주니까 저렇게 맘대로잖아.”
“엄마는 왜 도현 오빠 탓을 해? 오빠가 편들만 하니까 편드는 거야.”
“어머니, 주영이가 뭔가를 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어머니가 이해하세요. 우리 귀여운 주영이를 혼낼 게 뭐가 있다고요.”
“봐, 오빠가 이유가 있대잖아.”
“어머니, 주영이 말이 맞아요. 주영이가 의외로 생각이 깊어요.”
“재인이 넌 항상 주영이 편만 들더라. 그러니까 주영이가 네 곁에만 있잖아. 아예 집에 올 생각을 안 해.”
장 여사는 주영이 문제가 있는 것은 순전히 도현이 탓이라고 했다.
주영은 어려서부터 오빠인 도현만 따랐다.
주영은 막내였다.
도현과 주영 사이에 주현이 있었다.
주영은 주현과는 매일 싸우기만 했다.
주영은 주현과 싸우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도현에게 달려갔다
조금만 무서운 것을 만나도 도현에게 달려갔다.
주영은 오빠바보였다.
도현 역시 동생바보였다.
주영이 태어났을 때, 도현은 동생 곁을 지키느라 학교에 안 간다고 떼쓰곤 했다.
우유를 먹일 때도 자신이 먹인다고 하더니 밥을 먹을 때는 동생 밥을 먹이느라 자기 밥이 다 식을 때가 많았다.
베이비시터가 있어도 소용없었다.
다들 동생을 이렇게 유난히 챙기는 오빠는 처음 봤다고 놀라워했다.
자연스럽게 주영은 모든 일에서 엄마보다 도현을 먼저 찾았다.
도현은 주영에게 각인효과를 심어둔 것이었다.
각인효과는 조류에게 많이 나타난다.
병아리는 알에서 깬 다음에 처음 보는 동물을 제 어미로 여긴다.
무리생할을 하는 개과 동물은 처음에 우두머리로 각인되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를 지킨다.
각인은 고집이다.
각인은 자신이 이미 정해놓은 틀 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각인효과는 생명체가 자신과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 학습되는 생활유전이다.
주영이 도현을 따르는 것은 거의 각인효과와 다름없었다.
주영은 도현을 졸졸 따라다녔다.
결국 도현을 따라 파리 유학까지 갔었다.
그리고 도현과 거의 함께 지내는 재인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도현은 주영을 많이 아꼈다.
주영을 분신처럼 사랑했다.
주영에 대한 사랑은 과하다 싶을 만큼 깊었다.
그런 주영이 어느 날부터 재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도현은 주영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는 것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오빠, 난 재인이 오빠 좋아.”
“응, 좋은 녀석이야.”
“아니, 그냥 좋은 사람 아니고, 좀 특별히 좋아하는 것 같아.”
도현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특별히?”
“응, 특별히. 아주 특별히. 특별히 좋아.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해? 맞아?”
도현은 일부러 가볍게 주영의 등짝을 탁, 쳤다.
가볍게 쳤지만 제법 강도가 셌다.
“뭐야, 아프잖아.”
“앗, 그랬어? 미안. 아무튼 정신 차리세요. 이 순딩이.”
주영은 뭔가 몽환적인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오빠, 이건 사랑이야. 운명인가 봐.”
“아무 데나 붙인다고 사랑이고 운명이니? 이 사랑의 애송이.”
“오빠, 애송이라고 사랑이 없어? 애송이에게도 풋사랑이 있는 법이야.”
“그래, 풋사랑. 풋사랑은 운명이라고 하지 않는 거야”
“싫어. 난 운명이야. 운명이 멋있잖아. 운명 할래.”
“고집쟁이, 아무 데서나 고집을.”
“오빠가 키워준 내 고집이잖아?”
“아가야, 안 된단다.”
“에잉, 오빠... 아....”
주영은 도현의 팔에 매달렸다.
도현은 주영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주영이가 말하면 왜 이렇게 꼼짝 못하지?”
“주영이의 매력인 걸.”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도현은 그만 웃고 말았다.
주영은 오빠의 팔에 매달려 한없이 또 웃었다.
그 뒤로 주영은 도현 뒤만 따라다니다 재인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도현이 있는 곳에 재인이 있었으니 그리 눈에 띌 일은 아니었다.
* * * * *
“오빠, 커피 마실 거야?”
주영은 자기 집에 온 듯 자연스럽게 주방 쪽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너희 집이니? 너무 자연스러워.”
“오빠 집이 내 집이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하다니. 역시 도현이 과야.”
“이건 내가 좋아하는 커피네. 나 마시라고 준비해놓은 거야? 오우, 주영이 취향 커피도 준비해놓는 센스쟁이. 고마워.”
“나는 커피 안 마시니?”
“오빠는 이 커피 안 마시잖아. 이건 내가 좋아하는 커피인데?”
“네가 좋아하는 게 뭔데?”
주영이 두 잔의 커피를 들고 소파로 왔다.
“이건 오빠 커피. 이건 내 것.”
“커피가 거기서 거기지.”
“커피 원두라는 게 6가지 요소가 있잖아. 신맛, 단맛, 쓴맛, 아로마, 플레이버, 바디감...”
“언제 커피까지 공부했어?”
“이 정도야 상식이지. 나처럼 커피를 챙기는 사람이라면. 오빠의 커피 취향 맞춰볼까?”
“난 취향 없어.”
“아니야. 오빠도 늘 커피를 골라 마시잖아. 나의 관심을 뭘로 보고 그래. 자, 들어봐. 오빠는 일단 신미를 좋아해. 난 단맛을 좀 좋아하지. 그리고 아로마는 입에 넣기 전에 코로 맡는 향, 플레이버는 입 안에서 느껴지는 향, 바디감은 입 안에서 느껴지는 향이잖아? 난 바디감을 좋아하는데 오빠는 아로마를 좀 따지는 편이야.”
“내가?”
“자신이 뭘 좋아하는 것도 모르다니. 바보.”
“하여튼 네가 좋아하는 커피라는 거. 도현이 갖다 놨을 걸. 넌 도현이랑 취향이 같잖아.”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라서 갖다 놨다고 하면 안 돼? 마음 들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워?”
<딩동>
누군가 왔다.
재인은 다행인 듯 인터폰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도현 오빠일 거야.”
“왜?”
“내가 여기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왔겠지?”
“너희 오누이를 누가 말리겠니?
재인이 문을 열자 도현이 들어왔다.
도현은 들어오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두 팔을 뻗었다.
“주영아!”
“오빠!”
둘은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다.
“정말 못 말려. 오누이가 이렇게 사이가 좋아도 되는 거야? 몇 십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 같아.”
“주영아, 어떻게 갑자기 왔어? 아직 졸업이 아니잖아.”
“공부하기 귀찮아서.”
“그래?”
“그런데 내가 한국에 왔다고 하면 우리 장 여사 기절하시겠지?”
“당연하겠지?”
재인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조로 부탁했다.
“제발 부탁인데, 두 분은 집에 가서 상봉하시죠. 지금 여기는 나의 집이라고.”
“싫어. 집에 가면 장 여사에게 쫓겨날지도 몰라.”
“그럼 파리로 가. 한 학기만 다니면 되잖아.”
도현은 으쓱하면서 소파에 앉았다.
“하하, 주영아, 어떻게 하니? 재인이 널 귀찮아하는 거 같은데?”
“설마..... 재인이 오빠가 왜 나를 귀찮아 해? 재인이 오빠는 날 사랑해. 오빠는 눈치가 없어.”
주영은 부탁한다는 눈빛으로 재인을 바라봤다.
“안돼. 주영아, 난 너의 운명이 아니라니까.”
주영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도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현 오빠...”
도현은 당장 주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주영이가 원하는데, 주영의 운명이라는데 누가 말리겠어.”
“뭐라는 거야? 날 두고 지금.”
“하하, 재인아. 내 귀여운 동생 주영이 널 사랑한대잖아. 그냥 사랑이라고 하자.”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라니? 우리 주영을 두고 그 누구도 거부할 수는 없어. 재인 너도 안 돼.”
“에잇, 동생바보.”
“하하하, 네가 포기해. 그냥 주영이 운명. 해라.”
“역시, 도현 오빠 최고.”
“아이쿠, 이런 날강도들. 날 그냥 넘겨버리는 구나. 바로 사망일세.”“하하, 죽지는 마. 주영의 운명이니까. 그냥 사랑이라고 하자.”
도현은 주영에게 무조건적인 모성애적 사랑을 퍼부었다.
주영은 도현에게 무조건적인 각인애적 사랑으로 기댔다.
둘의 조합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다른 관계에 있어 특이점이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진 않았다.
주영은 파리에서 유학할 때부터 재인을 따랐다.
운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결혼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말들이 미래가 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어린 여자아이는 한번쯤 아빠와 결혼을 꿈꾸었고 오빠와 결혼을 꿈꾸었다.
더 나아가 오빠 친구와 결혼을 꿈꾸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라는 동안의 귀여운 성장의 과정이었다.
재인은 양지를 동경했다.
그늘이 많은 재인과 다르게 주영은 양지쪽 사람이었다.
양지 쪽 사람의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있었다.
재인은 주영의 양지를 예뻐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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