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_제주도 푸른 숲 사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25화>
제주도 푸른 숲 사이
* * * * *
“정민 씨 연락 왔어?”
“아직요. 민수 오빠가 내일은 경찰에 신고할 건가 봐요.”
“응, 연락이 안 닿으면 신고해야 맞지.”
“벼리 씨, 우리 여행 갈까?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우린 정식결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 만들어 신혼여행을 안 간 건데, 신혼여행요? 우리 둘이?”
“하하, 둘이 가고 싶어?”
“아니에요. 조금 놀라서.”
“벼리 씨에게 미안한 것 같아. 여러 가지가. 잠시 제주도에 바람 쐬러 다녀오자.”
“갑자기 제주도요?”
“아버지가 제주도에 호텔을 새로 오픈하시잖아. 미리 가봤어야 하는데 오픈하는 날이라도 가봐야지.”
“아, 제주도 호텔 오픈, 그렇잖아도 회장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래, 이왕 가는 거 민수 형님도 같이 가자고 하자.”
“오빠 네랑 같이요?”
“둘만 갈까?”
“아니요, 좋아서 물었어요. 정말 오빠 네랑 같이 가도 돼요?”
“당연하지. 내가 비행기 티켓이랑 미리 준비해 놓을게. 형님에게 연락해.”
“오빠 네랑 같이 가다니 넘 좋아요. 당장 전화할래요.”
“벼리 씨 좋아하는 거 보니 미리 말 안한 것이 미안하다. 우리 제주도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자.”
벼리는 재인이 자신을 위해 가족여행을 준비한 것이 고마웠다.
겸재 아저씨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정민 언니가 갑작스럽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둘 다 그린섬과 관련이 없지 않았다.
재인은 그린섬 대표였다.
벼리가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벼리는 정민 언니의 일에서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정민 언니와 특별히 연결 지을 일은 없었다.
그걸로 재인을 잠시마나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 미안했다.
실제 겸재 아저씨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후에야 재인 씨가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벼리는 제주도에 가서 행복하고 싶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여행의 순간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벼리는 연이에게 전화했다.
“언니.”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하셨을까? 우리 아가씨.”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기분이 살짝 별로인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 역시 우리 아가씨는 나의 절친 맞아.”
“무슨 일이야, 얼른 말해.”
“민수 오빠, 어젯밤 또 말도 없이 안 들어 왔어. 이래도 되는 거니?”
“설마, 연락도 없이?”
“말도 마. 소식 있었으면 내가 덜 열 받지. 요즘 현대인들 중에서 핸드폰 안 받는 인간 부류 딱 두 가지가 뭔 줄 알아? 첫째, 개념 없는 인간, 둘째 역시 개념 없는 인간, 일단 말이 필요 없어.”
“맞아, 핸드폰은 왜 갖고 다니는 거냐고. 핸드폰이 이름도 좋잖아. 핸드. 손이란 말야. 핸드. 손에 꼭 들고 다녀야 하는 게 핸드폰이지. 핸드폰이 주머니폰이나 서랍폰은 아니잖아. 연락 안 하는 족속들은 즉시 사형시켜야 해.”
“호호, 아무리 그래도 오빠를 사형시키는 건 그렇다.”
“좀 과했나?”
“무슨 일이야? 너 목소리 좋다.”
“언니, 우리 제주도 가자.”
“밑도 끝도 없이 웬 제주도?”
“재인 씨가 제주도 같이 가자고 했어. 오빠 네랑 넷이서 같이 가는 거야.”
“정말? 와, 좋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제주도야?”
“재인 씨 아버지가 제주도에 새로운 호텔을 오픈한대. 그래서 오픈행사 겸 가는 거야.”
“근사하겠다. 좋아.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가 줘야지. 오빠가 휴가를 낼 수 있는지 알아볼게. 난 괜찮아.”
“그렇지? 정말 좋다. 오빠랑 같이 놀러 가는 거. 민수 오빠에게 휴가 꼭 내라고 해.”
“아참! 그런데 정민이 소식이 아직 없는데 갑자기 휴가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뭐 별일이야 있겠어? 정민 언니는 연락 곧 올 거야.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급하게 다른 일이 생긴 건지도 몰라.”
“맞아. 그럴 지도 몰라.”
정민의 소식이 없는 가운데 제주도 가는 일이 걸리긴 했다.
그렇지만 재인의 아버지 김 회장이 제주도에 새로운 호텔을 오픈하는 시점에서 가족이 가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토요일, 네 명은 제주도로 향했다.
벼리는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인과 처음 떠나는 여행이었다.
밤새 설렜다.
벼리에게 필요한 짐들은 박 여사가 준비했다.
벼리의 여행 가방에는 제주도에서 입을 다양한 콘셉트의 옷들, 신혼부부에게 어울릴 나이트가운 등등이 차곡차곡 준비되어 있었다.
재인은 제주도를 가는 동안 벼리를 세심히 챙겼다.
더 없이 다정한 남자였다.
그리고 더 없이 멋진 남자였다.
편한 슈트를 입어도 스타일이 살아 있었다.
벼리는 재인의 멋진 모습을 몇 번이고 몰래 바라봤다.
이 남자가 실제로 자신의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호텔에서 김 회장과 고 여사 일행을 만났다.
벼리는 그 가족들과 불편할 일이 없어서 여전히 편하게 활발했다.
물론 고 여사, 성일의 아내 미라나 성윤은 벼리를 불편해 했다.
벼리는 제주도에서 마음껏 행복할 참이었다.
재인과의 여행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형님, 제주도에 오셨으니 두 분 마음껏 편히 잘 쉬세요.”
“응, 재인 덕분에 예정에 없던 휴가를 다 오고 좋아. 고마워.”
“저희들은 따로 돌아보려고 해요. 두 분도 따로가 좋으시죠?”
“당연하지, 따로가 좋아. 덕분에 데이트 잘 할게.”
“오빠, 그럼 있다 저녁에 봐.”
벼리의 목소리는 경쾌한 종달새 같았다.
“벼리 아가씨, 너무 좋아 보이는데? 데이트가 그렇게 좋아?”
“내가 뭐 좋다고 했나?”
“벼리 아가씨,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얼굴에 써있는 걸.”
“하하, 숨길 수 없는?”
여행이 주는 여유일 것이었다.
벼리는 마음껏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저것 봐. 부끄럼도 없어. 신부가.”
“우리 벼리 씨의 매력이죠. 그럼 저희는 이만 먼저 나가겠습니다.”
맑은 날이었는데 살짝 비가 내렸다.
벼리는 재인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벼리는 비자림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둘은 함께 비자림에 들어섰다.
비 오는 비자림 숲이었다.
제주도의 비자림은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숲을 둘은 우산을 받고 걸었다.
하나의 우산을 받고 걷는 그들은 아직 서툰 연애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랬다.
재인이 받쳐 든 우산 속 벼리는 재인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쭈뼛거리며 살짝 떨어져 걸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다.
가랑비였지만 젖을 만큼은 비가 내렸다.
재인이 들고 있는 우산이 자꾸만 벼리 쪽으로 기울었다.
벼리 쪽으로 우산이 기울어지고 재인의 한쪽 어깨가 다 젖었다.
“어깨가 다 젖어요.”
벼리가 우산을 재인 쪽으로 밀었다.
순간 재인이 벼리를 한쪽 팔로 감싸더니 훅, 끌어당겼다.
“봐, 너무 떨어지니까 내 어깨가 젖잖아. 이렇게 가까이 와.”
“저.....”
“내 어깨가 젖어.”
둘은 말없이 우산을 받고 걸었다.
재인의 팔이 벼리를 감싸고 있었다.
재인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벼리를 감싼 두 팔의 힘은 부드러웠으나 벼리 전체를 안은 것처럼 더없이 강인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따뜻함이 있었다.
벼리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재인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너무도 두근거렸다.
<쿵쿵쿵쿵>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가 재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쿵쿵쿵쿵>
벼리의 것이 아닌 심장소리가 함께 들렸다.
재인의 심장 소리였다.
우산 속의 둘은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숨소리를 숨길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벼리는 재인과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걸었다.
말하지 않았으나 무수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말없이 말이 오간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말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벼리는 재인과 함께 걷는 이 순간이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래된 비자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어서 거니는 것만으로도 벼리는 온몸으로 푸른 물이 스미는 것 같았다.
랜디의 목소리인지, 랜디가 가끔 선물했던 숲의 향기가 가까이 있었다.
벼리는 우거진 숲 사이로 랜디가 있는 것은 아닌지 둘러 봤다.
“왜? 뭘 찾아?”
“아니요, 숲이 너무 고요하고 아름다워요. 나무들도 모두 잘 생겼고.”
벼리는 나무들을 쓰다듬었다.
나무들이 벼리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랜디가 말했어. 벼리가 온다면 숲의 정기를 나눠 줘야 한다고.”
“보여? 우리들이 뿌리는 것들?”
“아주 오래된 숲에서 만들어진 향기를 줄게.”
“벼리야, 벼리야, 벼리야........”
수많은 나무들이 벼리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벼리란 이름이 꽃잎처럼 날아다녔다.
살짝 내리는 숲의 비 사이로 향기들이 몰려들었다.
맑은 습기와 나무의 향취와 착한 바람이 한데 어우러져 벼리를 감싸 안았다.
벼리를 감싸던 숲의 기운들이 재인 역시 감싸 안았다.
숲의 푸른 물이 벼리에게 스미는 것처럼 재인을 스쳤다.
재인은 어느 순간 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산을 받고 함께 숲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곁에 있는 벼리에게로 나무들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기운들이 벼리를 휩싸고 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도 어떤 기운들이 훅, 몰려왔다.
그것은 숲의 향기였다.
자신에게서 사라진 향기가 어느 순간 훅, 들어온 것이었다.
재인은 순간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헉!”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만 중심을 잃었다.
순간 벼리가 재인을 붙잡았다.
순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재인은 벼리가 붙잡기에는 키가 큰 성인 남자였다.
재인이 넘어지고 그 위로 벼리가 넘어졌다.
그린섬 앞에서 비 오는 밤, 벼리가 재인을 처음 봤을 때 넘어지려는 벼리를 재인이 붙잡았었다.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었다.
벼리는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순간 주변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것 같았다.
재인은 빛을 뿜었다.
벼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재인은 자신에게서 사라진 향기가 갑자기 몰려온 충격으로 잠시 다리에 힘이 풀렸었다.
의도하지 않은 충격에 넘어지는 재인을 벼리가 붙잡았다.
재인의 위로 벼리가 함께 넘어졌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빗방울이 벼리를 지나 재인에게 떨어졌다.
그런데 그 빗방울은 향기를 뿜었다.
재인의 얼굴 가까이 벼리가 있었다.
벼리의 얼굴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것 같았다.
재인은 그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랐다.
비자림에는 벼락 맞은 연리지 나무가 있었다.
전생에 깊은 사랑을 하던 사람이 나무로 태어나면 헤어지지 못하는 마음이 서로를 끌어당겨서 결국은 한 몸이 되고 연리지 나무가 된다고 하였다.
이 숲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못한 연리지 나무가 있었다.
연리지가 된 두 나무는 서로 깊은 사랑으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100년 전, 갑자기 벼락이 쳐서 수나무는 거의 죽음에 이르렀는데 암나무가 다행히 살아남아 죽음에 이른 수나무를 살렸다.
사랑으로 죽어가는 상대를 살린 연리지 나무였다.
벼락 맞은 연리지 비자나무가 옆에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자나무는 재인과 벼리에게로 쏟아지는 빗물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재인과 벼리에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재인은 벼리가 쏟아내는 꽃들을 보고 있었다.
벼리는 재인이 뿜어내는 빛들을 보고 있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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